내가 풀려고 하는 일련의 미스터리극은 곧바로 해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우리는 보통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실제로 그렇다) 것일까? 


두 번째 수수께끼는 미국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에 어째서 미국 국민의 살인율과 자살률이 어떤 때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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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런 낌새도 못 채고 몇 년을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모두 대통령 선거 주기와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살률과 살인율은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힌 후에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동안에도 줄곧 전염병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증가세는 취임 첫 해나 임기 초반 몇 해 안에 시작되어서 마지막 해나 임기 종반 몇 해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 추세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야 비로소 반전되어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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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폭력 치사 발생률의 평균값과 중간값을 모두 계산했는데 각각 19.4명과 20명이었다. 


나는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유난히 높은 사망률, 
다시 말해서 이 평균값이나 중간값을 웃도는 사망률을 가리키는 데 쓴다. 


그래서 내가 전염병이라고 말할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4명이나 20명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최고치였던 26.5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비전염병 수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1명에서 19.4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을 한암 웃돌았고 내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은 19.4명을 한참 밑돌았다. 
그래서 '능선'과 '골짜기'를 대충 가르는 기준선을 19.4명으로 보든 20명으로 보든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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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카터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은 공화당 정부에서만 일어나고 
전염병 수준에서 비전염병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일어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에서 두 사람 다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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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정부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과 민주당 정부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비교했을 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공화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가 높았고 민주당 정부 때는 순증가세가 낮았다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감소세가 컸고 공화당 정부 때는 순감소세가 작았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의 변화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공화당 정부 때 폭력 치사의 순변화는 증가 일변도였고 민주당 정부 때의 순변화는 감소 일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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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를 통틀어서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자살률과 살인율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사실은 아마 이제 그다지 놀랍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 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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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을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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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또 민주당에 비해 평균 임금, 최저 임금, 종합 번영도(1인당 국내총생산), ‘상품화 지수’(실업보험을 비롯하여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수당의 측정치)를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다양한 측정치들은 서로를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가령 불황은 실업률을 높이는데, 제임스 갤브레이스(James Galbraith)가 지적하듯이 “실업자가 늘어나면 불평등도 확대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줄어들면 불평등도 감소한다.” 
갤브레이스는 이 점을 수학으로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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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썼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수법으로 애용해 온 전략을 갈고 다듬은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이것을 ‘분할 정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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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에 결부된 개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 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생자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주역은 개인이므로,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건, <일리아스>를 읽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건, 일간지를 읽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 폭력 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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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심장부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정으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여기지만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의 위력을 간과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객관적으로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정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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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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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지 체계는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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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한 성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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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살인율, 수감률, 상대적 빈곤율은 지난 40년에 걸쳐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의 10~20퍼센트 수준이었다. 


공화당이 휘그당의 전철을 밟아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고 민주당의 ‘충성스런 반대 세력'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서 온다면 미국은 어떻게 보일까? 


미국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언젠가는 인간적이고 문명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렇게 되려면 사회적 계층화와 위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에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민주당 의원들이 좀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만드는 수치심의 윤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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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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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란 주인, 영웅, 짐승, 그리고 포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또한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비겁하게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포주와 여성 역할 남창이라는 봉건적 관계 속에서 보호받기 위해서는 노예 상태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형적 포주는 결코 노예를 보호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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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은 섹슈얼리티를 권력에, 자신만의 쾌락에, 그리고 상대의 고통과 굴욕감에 자동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아르망의 파트너는 글자 그대로 그에게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교는 지배력을 확인하는 작업이며, 자신의 계급을 알려 주는 것이자, 항복하고 봉사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생자를 통해 자신의 계급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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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진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행위가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 깊이 관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는 문화가 승인하는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보여 주는 응축된 척도로 기능한다. 


그래서 섹스는 인간의 여타 행위들 가운데 성 정치학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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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양성 간의 관계의 체제를 사심 없이 검토해 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양성 간의 관계가 보여 주는 상황은 막스 베버Marx Weber가 지배와 종속 관계라 불렀던 ‘지배herrschaft'의 현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질서 안에서 거의 검토되지 않을 뿐더러 인식되고 있지도 않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되어 있는 것은 바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생득적 우월성이다. 


이러한 양성 간의 체제를 통하여 가장 교묘한 형태의 '내면의 식민화'가 이루어져 왔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보다 강고하고, 그 어떤 형태의 계급 차별보다 완강하며, 더욱 획일적이고 분명 더 영속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성 차별이 아무리 완화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의 지배는 우리 문화에 가장 널리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가장 근본적인 권력 개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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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치학은 양성이 기질temperament이나 역할role, 지위status에 관하여 가부장제적 형태로 “사회화"되는 과정을 통해 합의를 얻는다. 


‘지위'에 대해 말하자면, 남성이 우월하다는 편견을 승인하는 것은 남성에게 우월한 지위를, 여성에게 열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첫 번째 항목인 '기질'은 고정관념이 된 성 범주("남성적masculine”, “여성적feminine” 등)를 따라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는 것과 관계된다. 


이는 지배 집단의 필요와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며, 지배 집단의 구성원들이 종속 집단이 그럴 것이라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측면들에 따라 규정된다. 


즉 남성은 공격성, 지성, 힘, 효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은 수동성, 무지, 온순함, “미덕”, 비효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를 보충해 주는 것은 두 번째 요인으로 지적된 '성 역할'이다. 


성 역할은 각 성에 적절한 행위와 몸짓, 태도에 대한 조화롭고도 정교한 코드를 할당해 준다. 


행위에 대해서 살펴보면, 성 역할은 여성에게 가사와 육아를, 

남성에게는 이를 제외한 인간적 성취, 이해관계, 야망 등을 할당한다. 


여성은 생물학적 경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동물의 활동(동물도 나름의 방식으로 출산을 하고 새끼를 양육한다)에 비교해 볼 때 확실히 인간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은 대부분 남성에게 귀속된다. 


물론 '지위'는 다시 그러한 성 역할의 할당에서 비롯된다. 


이 세가지 범주를 분석해 보면, 

'지위'는 정치적 요소, 

'성 역할'은 사회적 요소, 

'기질'은 심리적 요소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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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주요한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사회의 거울이자 사회와 긴밀히 연관된 곳이다. 


즉 전체 가부장제 내부에 있는 단위인 것이다. 


가족은 개인과 사회구조를 매개하면서, 정치적인 권위나 여타의 권위가 불충분한 곳에서 지배와 순응을 행사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도구이자 기초 단위인 가족이 하는 역할은 원형적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사회의 작인(作人,agent)으로 기능하면서 구성원에게 사회에 적응하고 순응할 것을 권장하는 동시에, 가장家長을 통해 국민을 지배하는 가부장제 국가 정부의 단위로 작동한다. 


여성에게 법적 시민권을 허용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조차 여성은 가족을 통해서만 지배를 받으며, 국가와는 그 어떤 형식적 관계도 맺지 못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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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서구 가부장제는 궁정풍 연애courtly love와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 때문에 많이 약화되었다고 생각되곤 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영향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 


동양의 풍습이나 “남자다움machismo"에 대한 노골적인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기사도 행동이 얼마나 여성에게 많이 양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종속된 여성에게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 주는 일종의 유희적 보상인 것이다. 


또한 기사도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부당함을 일시적으로 완화해 주는 동시에, 그 부당함을 위장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기사도 태도는 지배 집단이 종속 집단을 어느 정도 높여주는 척하는 일종의 게임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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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들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처'라는 용어로 설명하며, 새나 뱀의 공격을 받아 절단되어 현재 상태가 된 것이라고 추론했다. 


한 번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계속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여성 생식기에 대한 오늘날의 속어는 “깊이 베인 상처gash"다. 


프로이트는 여성 생식기를 "거세되었다"는 용어로 설명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생식기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혐오는 종교적·문화적·문학적 금기로 입증된다. 


문자 이전 사회에서 여성 생식기를 남근을 거세하는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이라고 믿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생식기에 대한 공포가 그러한 금기의 주된 요인이었다. 


문자 이전 사회의 가부장제에서나 문명화된 가부장제에서나,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보여주는 훈장인 남근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남성의 끝없는 자랑인 동시에 끝없는 불안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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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 혁명은 일차적으로 가부장제라는 제도를 종식시켜야 한다. 


또한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동시에 지위와 역할, 기질에 대한 전통적 사회화를 폐기해야 한다. 


성 혁명은 분리된 성적 하위문화를 통합할 것이며, 이전에는 차별화되어 있었던 양성의 인간적 경험을 융합할 것이다. 


여기에 관계된 것은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범주화되었던 특질들을 재검토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양성의 바람직한 인간형을 재평가하는 것 또한 수반된다. 


즉 남자답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조장하는 것, 
지나친 수동성을 "여성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는 양성 모두에 쓸모없는 일이다) 등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남성적"기질이 지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되는 것, 
부드러움과 사려 깊음이 "여성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특징들은 양성 모두에 적절한 것들이다)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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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성 혁명의 쟁점을 무시하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여성을 위한 투표권"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 혁명을 사소하게 각주 처리하면서 무시하거나, 그것을 노출증 환자들이 성적인 방식으로 일으킨 시시한 잔물결 정도로 오해했다. 


그러나 성 혁명의 시작이 보여 준 거대한 문화적 변화는, 적어도 역사가들이 열정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의 네다섯 번의 사회적 격변만큼이나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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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혁명이 지향했던 것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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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누군가의 아량으로 얻어지는 도금된 쾌락 정도로 생각될 때는,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해방을 위해 투쟁하려는 동기가 생겨나기 힘들다. 


계속해서 말하자면, 성 혁명과 이를 이끌어 온 여성운동은 기사도 정신의 가면을 벗기고, 그 정중한 예의라는 것이 교묘한 조작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해야만 한다. 


또한 공동의 대의를 위해 계급의 전선을 뛰어넘어야 하고, 숙녀와 공장 노동자가, 방탕한 여성과 지체 높은 여성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 혁명의 성공 여부는 이를 얼마만큼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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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다른 “불평등한 권력 형태"를 비교한 자신의 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인 계급은 자신의 특권을 항상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고 응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가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농장주 계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연[본성]'이라는 근거 위에서 자신의 부당한 행위를 정당화했으며, 종속 집단의 위치는 생득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주정치 또한 오래된 가부장제적 권위에서 나온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근거로 스스로를 옹호했다. 


“따라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일반적으로 '관습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하며, 일상적인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 또한 보편적인 관습이며, 그것에 일탈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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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오펜의 『모권론Das Mutterrecht』은 가모장제 기원 이론을 최초로 정식화한 것이다. 


엥겔스는 여가장제(女家長制,matriarchate)를 개인 사유재산도 없고 가족 사유재산도 없는 원시적 공산주의로 보았다. 


사회주의는 부분적으로는 부에 근거한 불공평한 정치 질서가 없는 세계의 사례를 제시해야 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를 제시해야 했다. 


따라서 여가장제는 사회주의가 과거로부터 찾아내고자 했던 ‘단순한 사회’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가모장제"의 성격이 어떠하든(여기에서 엥겔스가 근거하고 있는 인류학적 논의는 오늘날 더욱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개탄해마지 않았던 그 모든 병폐(여성에서 시작하여 다른 형태의 노예제로 나아간, 개인의 소유라는 병폐, 계급, 신분, 계층 제도라는 병폐, 지배계급과 재산가 계급이라는 병폐, 부의 불공평한 분배로의 발전이라는 병폐, 마지막으로 국가라는 병폐)를 수반했다고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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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최초의 사유재산이었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혼해서 남성의 배타적인 성적 소유권의 확립(여성에게는 상호적 소유가 아니었다)을 통해 사유재산이 되었다는 엥겔스의 믿음은 이미 가부장제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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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비용 없이 우연한 만남으로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들조차도 여전히 매춘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때로 경제적 압박감이 없는 여성들로 성욕을 채우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러한 매춘 행위를 통해 여성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남성의 우월성을 “공언"하거나 최소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매춘을 지속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동기가 없는 매춘은 심리적 중독의 일종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창녀를 정의하는) ‘성매매’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기혐오를 쌓는 중독 행위인 것이다. 


그러한 자기혐오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여성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는 설명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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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이 단지 해부학적 특성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유일하고 일차적인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면, 여성은 결코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인지 능력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시작되는 아이의 양육은, (아무리 아이가 어리고 사랑스럽다 해도) 교육할 시간도 없고 그럴 취미도 없어서 괴로워하는 불행한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보다, 최고로 훈련된 직업 양육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엥겔스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급진적 결론은, 현재 이해되는 수준에서의 가족이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性_정치학 #케이트_밀렛


권위주의적 정부政府는 특히 가부장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 국가나 독재국가는 주로 가부장제적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는 성 혁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규모로 발흥했고, 이후 곧 폐기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 가족의 응집력은 일차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의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경제적 평등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위는 정서적 유대 관계보다는 경제적·법적인 실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현대의 핵가족조차도 여타의 인간적 노력을 남성에게 부여하고 여성의 일을 비천한 가사일과 강박적 양육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성 역할에 있어서 전통적인 분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남성 우월주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성性_정치학 #케이트_밀렛


문명의 가장 불행한 측면 중 하나는, 학문이나 과학적 관심사가 문화에 너무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나치 독일은 자신만의 사회조사 방법을 고안했고, 


인종차별 국가는 자신의 광적 증오를 합리화 해 주는 인종차별 과학을 꾸며 냈다. 


미국의 사회과학은 수십 년간 상당한 자유를 성취하면서 인종차별적 편견을 이제 막 몰아내고 있는데 반해, 
수십 년간의 반동의 산물인 강력한 “성 차별적” 편견은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에 만연해 있다.

#성性_정치학 #케이트_밀렛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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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란 완벽한 자유의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허가를 구하거나 남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고 마음대로 자신의 재산과 신체를 처리할 수 있는 상태다. 


자연 상태란 또한 평등 상태다. 


모든 권력과 사법권이 호혜적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큰 권력을 갖지 못 한다. 


인간은 모든 종種과 신분이 같은 채로 평등하게 태어나 자연의 같은 이점과 같은 기능을 이용하면서 살아가므로 누구도 남에게 예속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동등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자연 상태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으며, 

자연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자연법의 근간을 이루는 이성은, 이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인류에게 동등하고 독립적이므로 누구도 남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상의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모든 사람은 “전 인류를 보호하는 권리에 의해” 죄를 징벌하고 범죄의 재발을 예방할 권력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모든 합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연 상태에서 살인자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 목적은 두 가지다. 


한편으로는 그 행위에 대한 본보기로 징벌을 가함으로써 누구도 아무런 배상 없이 그와 비슷한 위해를 가하지 못 하도록 억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이나 일반적 규칙과 기준을 거부하면서 부정한 폭력과 살육을 저지르고 전 인류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범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범죄자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처리해도 된다. 


그런 사나운 야수와 함께한다면 인간은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안전을 도모할 수도 없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자연법의 토대를 이룬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만약 누가 나의 동의없이 나를 자신의 권력 밑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는 나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 하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구든 내 자유의 권리를 짓밟고 힘으로 나를 누르지 않고서는 나를 자신의 절대 권력 밑에 둘 수 없고 나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런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나를 보호하는 길이다. 


이성은 나를 보호해주는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라고 내게 명한다. 


따라서 나를 노예화하려는 사람은 나와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남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도 빼앗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유는 다른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상태에서 사회나 국가 구성원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을 간주되어야 하며, 그런 상태는 전쟁 상태로 보아야 한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여기서 우리는 ‘자연 상태와 전쟁 상태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을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화, 우호, 상호 원조, 보호의 상태는 증오, 악의, 폭력, 상호 파괴의 상태와 크게 다르다. 


세속의 공통적 지배자가 없고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권력을 가지고 이성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자연 상태다. 

그러나 타인에게 무력을 행사하거나 무력의 의도를 내보이는데도 구제를 호소할 세속의 공통적 지배자가 없는 경우는 전쟁 상태다. 


그런 호소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 인간은 공격자가 같은 사회에 사는 동료 국민이라 해도 전쟁을 벌일 권리를 지닌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법의 목적은 법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고 구제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본래의 목적이 충실히 관철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들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하늘에 호소하는 것뿐이다. 


호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고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판결을 내릴 권위가 없으면 사소한 불화라도 파멸로 향할 수 있다. 


이런 전쟁 상태야말로 인간이 자연 상태를 버리고 사회를 형성하게 된 주요한 이유다. 


세속의 권위와 권력이 있으면, 호소로 구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전쟁 상태가 중단되고 다툼이 그 권력의 판결로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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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연적 자유는 세속의 어떤 상위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인간의 의지나 입법 권력 아래 놓이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법의 지배만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자유는 동의에 의해 국가 내에 확립된 입법권 이외의 어떤 권력에도 예속되지 않고, 
그 입법권이 위탁받은 임무에 따라 법제화한 것 이외에 어떤 의지의 지배나 어떤 법의 제약에서도 벗어난 생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로버트 필머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어떤 법에도 구애되지 않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다. 


정부 아래 인간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정한 입법권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자연의 사물들이 공유로 주어졌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 

“자기 신체, 행동 혹은 노동의 소유자라는 것 자체가 재산의 중요한 근간이다”. 


발명과 기술로 생활의 편의가 향상된 이후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부양하고 편리를 추구하는 데 이용하는 대부분의 물자들은 완전히 자신만의 것이며, 

남들과 공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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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성원이 사회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법이 정한 형벌을 가한다. 


그에 따라 정치사회에 알맞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서로 결집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자기들 간의 다툼을 판결하고 죄인을 징벌하는 권위가 부여된 공통의 법과 재판소를 가진 사람들은 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그런 공통의 기구(물론 세속적인 기구를 가리킨다)가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는 법과 재판소가 없고 각자가 스스로 판결하고 집행한다. 


그것이 앞에서 제시한 완벽한 자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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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국가는 사회 구성원이 저지르는 범죄에 어떤 징벌이 합당한지 결정하는 권력(입법권)과 그 사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 사회 구성원에게 가한 위해를 징벌할 권력(전쟁과 평화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 목적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재산을 최대한 보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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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들어와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모든 사람은, 

자연법을 거스르는 범죄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징벌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개인이 위정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모든 사안에 관해 범죄의 판결권을 입법기구에 위임하는 것은 곧 국가에 개인의 힘을 이용할 권리를 양도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언제든 그것을 이용해 판결권을 집행할 수 있다. 


그 판결은 개인이 직접 할 수도 있고 대표가 맡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개인 자신의 판결인 것은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 시민사회가 행사하는 입법권과 집행권의 기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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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안을 판결할 때 필연적을 따르는 자연 상태의 불편을 피하거나 치유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위해를 당하거나 다툼이 일어날 때 호소할 수 있는 권위 기구를 설립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은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판결을 의뢰할 수 있는 권위 기구가 없다면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문다고 보아야 한다. 


절대군주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모두가 타인의 위반 행위를 징벌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게 행사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이 많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인간은 확립된 정부의 법 아래로 들어가 안전을 도모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징벌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그 대신 별도로 임명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 혹은 공동체가 위임한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그 징벌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지금까지 보았듯이 인간이 처음 사회를 이루었을 때는 다수가 공동체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게 되므로 그것을 이용해 수시로 공동체를 위한 법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리들을 통해 그 법을 집행할 수 있다. 


그런 정부 형태는 완벽한 민주정이다. 


입법권을 소수의 선출된 사람들, 그들의 상속자나 후계자에게 위임하면, 그것은 과두정이다. 


또 입법권을 한 사람의 수중에 맡기면 군주정이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의 상속자들에게까지 권력이 넘어가면 세습 군주정이 되며, 


당사자에게만 권력이 주어지고 그가 죽을 때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만 가지는 경우에는 선거 군주정이 된다. 


공동체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혼합해 나름의 정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해 전횡적인 권력을 갖지 못 하며, 


단지 자연법이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하는 한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국가와 입법기구에 위임할 수 있는 권력도 그 정도에 그치며, 
입법기구는 그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 권력은 최대한으로 확장되어도 사회의 공익을 넘어서지는 못 한다. 


이 권력은 단지 국민을 보호하는 목적만 가지고 있으므로 국민을 파괴하고 예속하고 빈곤하게 만들 권리는 결코 가지지 못 한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또한 인간은 권력을 쥐고 싶은 유혹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입법권을 가진 사람이 집행권마저 장악하다면 자신이 만든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할 때 자신의 개인적 이득에 맞추려 하거나, 


공동체의 나머지와 구별되고 사회와 정부의 목적에 어긋나는 이해관계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정부의 목적은 공동체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 목적을 위해 어떤 변형이 가해진다 해도 어느 누구를 침해하는 것일 수는 없다. 


정부의 누구도 다른 목적을 도모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침해란 공익을 손상시키거나 저해하는 행위를 가리킬 따름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군주가 애초부터 공동체의 이익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왕정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악과 혼란의 뿌리이자 근원이다. 


군주가 그런 존재라면, 왕정의 국민들은 상호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결성하는 합리적인 집단이 되지 못 한다. 


또한 지배자를 섬기게 된 이유도 공익을 수호하고 촉진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국민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며, 지배자의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 지배자의 뜻대로 조종되는 열등한 무리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런 조건으로 사회를 형성할 만큼 이성을 결여하여 짐승이나 다름없다면, 

왕권은 이따금 현실에서도 보듯이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전횡적인 권력이 되고 말 것이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무력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부정한 정복자는 칼로 위협해 소유권을 획득하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왕의 옷을 입은 자든 하찮은 악한이든 위해와 범죄를 저지른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추종자가 많다 해도 범죄자는 어디까지나 범죄자이며, 

오히려 그럴수록 더 큰 범죄자다. 


차이가 있다면 큰 강도는 작은 강도를 핍박해 복속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큰 강도는 이 세계의 허약한 정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며, 권력을 틀어쥐고 범죄자들을 응징할 수 있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정복을 외국의 찬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찬탈은 일종의 국내 정복이다. 


차이가 있다면 찬탈자는 타인의 권리를 빼앗으므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찬탈이라고 하면 정부의 형태와 규칙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인물의 교체에 불과하다. 


찬탈자가 자신의 권력을 국가의 적법한 군주나 통치자의 권리 이상으로 확대하면 그것은 찬탈을 넘어 전제가 된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찬탈이 타인의 권리를 빼앗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전제는 어느 누구의 권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아예 권리 자체를 넘어선 권력 행사를 가리킨다. 


이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해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자격을 갖춘 통치자라 해도 법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를 잣대로 삼게 마련이다.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 복수심, 탐욕 혹은 기타 비정상적인 열정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여기서 한 가지 평범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군주나 입법기구가 위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지를 누가 판단하는가?” 


물론 군주가 정당한 왕권을 행사하고 있다면, 그런 의문은 불만과 파벌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퍼뜨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군주의 측근이나 부하가 처신을 잘 하고 있는지, 


주어진 위탁에 따라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판단할 사람이라면, 


그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가 위탁에 어긋나면 그를 해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 이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개인의 특별한 경우에 적용된다면, 


수백만 명의 복지가 걸린 중대한 사안, 


혹은 막지 않고 놔두면 대단히 곤란하고 값비싸고 위험한 대가를 치를 만한 중대한 해악이 연관된 사안에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입법기구에 영속적인 권력을 내준 것은 정치권력을 영구히 양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이 입법권의 지속 기간에 제약을 두었거나 그 최고 권력을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시적으로만 부여했을 경우, 


혹은 그 권력을 가진 측의 잘못으로 인해 권력이 상실되었을 경우, 
상실되거나 기한이 종료된 권력은 사회로 반환되고 국민이 다시 최고 권력자의 권리를 되찾게 된다. 


그럴 경우 국민은 스스로 판단해 자체적으로 입법권을 보유하거나, 


새 입법기구를 설치하거나, 
종전 체제를 그대로 두고 인물만 교체할 수 있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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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을 펼쳐 놓고
조부님 성함이랑
증조부님 성함이랑
백부님들 성함도
숙부님들 성함도
억지로 기억해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봤다.

휴! 다행이다. ㅋㅋ
#친일인명사전 #성남중앙도서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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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생의 한가운데 도달하게 되면 

스스로가 악마보다 더 위대할 것도 

예언자보다 더 미천할 것도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정신의 넉넉함은 우리의 얼굴을 아름답게 하고 

연민의 정과 존경심을 낳습니다. 


모든 존재 안의 정신은 그의 눈을 통해 나타나며 

얼굴의 표정과 몸짓에서 현상합니다. 


우리의 용모와 말과 행동은 

내면의 넉넉함보다 위대하지 못 합니다. 


눈이 영혼의 창이면 말은 그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그 때 강물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들어와, 들어오라고, 

우리는 바다로 가고 있어.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들어와! 


이젠 나와 함께 있어야지. 


우리는 바다로 가고 있어. 


어서 들어와. 


나에게로 오면 모든 슬픔과 기쁨을 잊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인 근원적인 바다에 다다르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곧 잊게 될 거야!”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영혼의 일치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시는 마음을 사로잡는 지혜.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둘 수 있다면 


그의 정신 속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진실로 그 사람은 


신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그대의 친구는 그대 요구가 응답된 존재입니다. 


친구는 그대가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써 수확을 거두는 밭입니다. 


친구는 그대의 식탁이며 화로입니다. 


그대는 허기가 질 때면 그에게로 와서 평화를 찾습니다. 


그대 친구가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대는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또 '그래'라고 말하기를 억누르지 마십시오. 


친구가 말이 없다면, 그대 가슴은 친구의 가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말 없는 우정 속에서도 모든 생각, 모든 갈망, 모든 기대가 요구하지 않아도 기쁨으로 유지되고 또 나눠지는 것입니다. 


친구와 헤어질 때에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대가 친구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은 친구가 없을 때 더욱 뚜렷해지기에. 


마치 산을 오르는 등산가가 평야에 내려와서 볼 때 산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우정을 맺는 데는 결코 영혼을 깊이 하는 것 이외에 어떤 목적도 두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 자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다만 그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그 그물에는 무익한 것만 걸릴 것입니다. 


그대 친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십시오. 


친구가 그대 사랑의 조수의 썰물 때를 알고 있으면 그로 하여금 그 밀물 때도 알게 하십시오. 


다만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찾는 친구라면 그런 친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하여 빛을 찾으십시오. 


그대의 요구를 채워 주는 것은 친구의 우정이지 그대의 공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정의 아름다움 속에 웃음이 깃들게 하고 또한 기쁨을 나누게 하십시오. 


사소한 이슬 방울 속에서도 마음은 아침을 찾아내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무엇인가를 건네 주는 그대의 오른손과 


받고 있는 왼손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잘 없어지지 않으며 


두 손이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서도 그 거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대가 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며 


받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실로 가장 먼 거리는 


그대의 꿈과 현실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오직 실천하는 것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은 


기다리는 우울과 


당신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영원한 결혼을 주었습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괴로움을 주는 분이여, 


당신을 따르기에 지치고 


약해진 내 육신을 바라보아 주십시오.

내 마음은 군주였으나 


이제 당신의 노예가 되었고 


나의 인내는 안락했으나 


지금은 나에 대한 형벌입니다.

나의 젊음은 친구였으나 


오늘날 나의 비난자가 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을 신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더 무엇을 바라시렵니까?

어서와요, 감미로운 죽음이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나와 같은 인간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가득찬 


당신의 가슴으로 안아 주십시오. 


나에게 키스해 주십시오.

나의 입술은 어머니의 입술에도, 


님의 볼에도 키스하지 않았고, 


달콤한 애정의 입맞춤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빨리 와 안아 주십시오. 


죽음이여, 나의 애인이여.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마음이 행하는 바를 따르십시오. 


모든 중요한 일에 있어 


당신의 마음만이 올바른 길잡이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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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이 되기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다. 


그 이하도 아니고, 그저 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씨앗이다. 


인간의 의식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의 의식은 계속 성장해야 하고, 우주적이 되는 어느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원칙이나 신조, 교리나 종교도 필요 없다. 


본성이면 충분하다! 


그대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고요하고 평온한 삶은 그대에게 종교적인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삶의 신비를 꿰뚫고 들어가야 한다. 


고요하고 평온한 삶은 그대를 명상적인 순간을 이끈다. 


그대는 이제 쓸모없고 더러운 잡동사니들을 던져버리게 된다. 


그러고 나면 이전의 삶 전체는 쓰레기가 되고, 오직 한 가지가 영원한 가치로 남게 된다. 


그대의 ‘깨어있는 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섹스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으며, 사랑이 되고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대에게 달린 문제이다. 


섹스 자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대가 좋아하는 대로 섹스를 변형할 수 있다. 


섹스는 사마디, 즉 삼매三昧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탄트라가 주는 메시지이다. 


섹스는 사마디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탄트라의 비전이다. 


섹스를 통해서 궁극의 황홀경이 그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섹스는 그대와 궁극의 것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될 수 있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 역시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섹스에 불과하다. 


그대가 성적인 접촉을 만들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그 억압된 에너지가 바로 로맨스가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억압된 에너지는 사색적이 되고, 머리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섹스가 성기로부터 머리로 이동할 때, 그것이 로맨스가 된다. 


로맨틱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사랑이며, 가짜 동전과 같다. 


그것 역시 똑같은 섹스이지만, 진정한 사랑이 될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사람들은 로맨틱한 사랑에 흠뻑 빠져 살았다. 


섹스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너무나 많은 장벽을 만들어놔서 섹스가 매우 어려웠다. 


섹스가 너무 어려워진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억압해야 했다. 


그 억압된 에너지가 그들의 머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와 그림과 로맨스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로맨틱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육체와 마음이 만날 때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은 건강하다. 


성욕에는 육체만 존재하며, 로맨틱한 사랑에는 오직 머리만 존재한다. 


두 가지는 모두 부분적이다. 


진정한 사랑에서 육체와 마음이 만난다. 


그대는 통합되고, 통합 이상의 것이 된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섹스는 그 사랑의 그림자로 따라올 뿐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대의 에너지는 그 사람과 깊은 곳에서 만난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섹스는 그대가 갖고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는 다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성욕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섹스는 사랑과 연민으로 변형된다. 


그 궁극적인 꽃 피어남을 우리는 신성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초, 그 바탕은 역시 섹스이다. 


따라서 섹스는 그 에너지가 첫 번째 바닥 층이다. 


신은 가장 높은 상위층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동일한 에너지가 움직인 것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보통 사람들은 섹스와 사랑이라는 말이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섹스가 사라졌을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그전에 나오는 사랑은 욕정이며 전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섹스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다. 


섹스를 위한 서문이자 사전 단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더 많을수록, 사랑은 더 적어진다. 


그때 서문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없다면, 로맨틱한 사랑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섹스가 개입되는 순간,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섹스는 너무 갑자기 돌변한다. 


섹스는 원래 그토록 난폭하다. 


섹스에는 전주곡이 필요하고 전희가 필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섹스라는 벌거벗은 실체에 단지 옷을 입혀놓은 것에 불과하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가 섹스를 하고 나서도 상대방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면,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성장한다. 


그때 그대가 명상한다면, 그대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대가 섹스 중에 명상한다면, 상대방은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도구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해 감사를 느낄 것이다. 


두 사람은 깊은 명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하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눔을써 사랑하라. 


사랑하되,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나눠주어라. 


사랑하되, 그대의 사랑이 상대방에게 구속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하되 주의를 깊게 기울여라. 


그대는 신성한 땅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대는 가장 높고 순수하고 신성한 사원을 들어가고 있다. 


경계하라! 


사원 밖에 있는 불순한 것들을 모두 떨쳐버려라.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신神인 것처럼, 신보다 전혀 낮지 않은 존재인 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라. 


그대가 남자를 남자로 사랑하면, 그대의 사랑은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를 신으로 사랑하라. 


그대의 사랑은 욕망을 뛰어넘지 못 할 것이다. 


그대가 여성을 여성으로 사랑하면, 그대의 사랑은 높이 뛰어오르지 못 할 것이다. 


그녀를 여신으로 사랑하라. 


그러면 사랑은 진정한 존중이 된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우리는 너무나 교활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고 난 뒤가 아니라 그 전에 거짓된 사랑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인공을 배양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섹스가 끝나면 사랑이 사라진 것으로 느낀다. 


사랑은 서문에 불과하고, 이제 그 서문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섹스 이후에 존재한다. 


그것은 섹스 뒤에 숨어 있다. 


그 안으로 깊게 들어가고, 그 안에서 종교적으로 명상하라. 


그러면 그대는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섹스는 위대한 명상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탄트라가 세상에 기여한 바이다. 


탄트라가 기여한 바는 가장 위대하다. 


탄트라는 가장 낮은 것을 가장 높은 것으로 변형시키는 열쇠를 그대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게 만드는 변형의 열쇠를 그대에게 부여한다. 


탄트라는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위대한 과학 가운데 하나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행복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억지로 만들거나 명령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대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때가 되면 행복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행복에 대해 생각하거나 행복을 발견하려고 절대로 노력하지 않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만들 뿐이다. 


사실 그대가 홀로 행복하다면, 그대는 이미 행복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 홀로 행복하다면, 그 사람 역시 행복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런 두 상황이 가까워졌을 때, 더 큰 행복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편안하게 이완하면 된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본래 남성은 섹스에 있어서 약자弱者이다. 


여성은 여러 번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고, 하룻밤에 여러 번 사랑을 나눌 수 있지만, 남성은 단 한 번의 오르가슴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현상에서 남성은 에너지를 잃지만, 여성은 그 반대로 섹스를 통해서 자양분을 얻는다. 


여성은 섹스 안에서 에너지를 잃지 않으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러 여성을 알고 지내는 남성이라면, 이 여성들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조만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남성은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초월이 저절로 찾아온다면, 많은 것들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그대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즐길 뿐이다. 


예를 들어, 초월의 상태에 놓이면, 그대는 음식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가끔이라도 중국 식당에 가서 음식을 즐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초월은 그대를 자유롭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대가 떠나가야 한다는 집착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대가 떠나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집착이 생기는 그런 새로운 구속을 주지 않는다. 


초월은 이 모든 집착이 이제는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대는 떠나갈 수도 있고 떠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게 된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 


섹스를 초월할 때 더 높은 섹스에 도달한다. 


평범한 섹스는 추악하지만, 더 높은 섹스는 전혀 추하지 않다. 


평범한 섹스는 바깥쪽으로 움직이지만, 더 높은 섹스는 안쪽을 움직인다. 


평범한 섹스의 차원에서는 두 육체가 만나고, 그 만남이 외부에서 일어난다. 


더 높은 섹스의 차원에서는 그대 자신이 지닌 내면의 에너지들이 만난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탄트라이다. 


탄트라는 초월이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Posted by 㗢동죽竹
,


아마도 이 책의 주인공들이 낯익은 이유는 전편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때문일 것이다.
또한 TV 드라마로 방송되었기에 더 사람들의 인식에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이 책은 전편과 같이 여성으로서 남성-가정형편 상 남동생의 삶을 산다-의 삶을 선택한 김윤희와 윤희가 사랑한 이선준 그리고 두 사형인 문재신과 구용하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성균관 생활을 마치고 규장각 각신의 공직을 맡으면서의 이야기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꿋꿋하고 때론 부드러운 김윤희의 하루하루가 궁금한 독자들은 한 장 한 장 넘기는 책 사이에서 윤희와 그의 동료들의 유쾌한 사건들로 미소만 가득한 자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정은궐 #규장각각신들의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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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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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의해 다시 태어난 사회는 아마도 가정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가사노동은 마지막 남은 노예 형태인데, 아마도 가장 끈질긴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내려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빵의_쟁취 #표트르_알렉세예비치_크로포트킨


여성을 해방시킨다는 것이 대학, 법정, 혹은 의회의 문을 그녀들에게 개방한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방된’ 여성은 항상 자기 집의 가사노동을 다른 여성에게 떠넘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 해방이란 부엌과 세탁실에서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가 정말로 원한다면, 스스로 자기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방식으로 가정을 꾸리면 된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자기 몫의 사회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가시간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그런 해방은 이루어질 것이다.

#빵의_쟁취 #표트르_알렉세예비치_크로포트킨


우리는 대대로 내려온 편견, 그리고 잘못된 교육과 훈련으로 인해 모든 곳에서 정부, 법률의 제정, 행정관들의 유익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식으로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감시가 없어지는 순간 사람들이 야수처럼 서로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만약 혁명 일어나는 동안 권력 조직이 붕괴되면 그런 절대적인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법의 어떤 개입이 없이도 스스로 자유롭게 단체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정보의 보호 아래서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고 지나쳐버린다.

#빵의_쟁취 #표트르_알렉세예비치_크로포트킨


즉, 자본이 존재하는한 더 큰 자본은 소자본을 억압할 것이다. 


하지만 억압이 오직 자본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억압은 또한 국가의 지원 때문에 생겨난다. 


국가가 만들어낸 독점권이라는 특혜를 입은 큰 회사들이 작은 회사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빵의_쟁취 #표트르_알렉세예비치_크로포트킨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나키스트 코뮌주의 사회이다. 


이 사회는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인정하고, 어떤 권위도 허용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일을 하게 만드는 어떤 강제도 사용하지 않는 사회이다.

#빵의_쟁취 #표트르_알렉세예비치_크로포트킨


행복, 다시 말해서 신체적, 예술적, 도덕적인 욕구들이 충족된 상태는 언제나 일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왔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필요량을 겨우겨우 생산하는 데 비해,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노력에 비례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휴식과 취미 생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분명 훨씬 더 많은 에너지와 지성을 일에 쏟아서 더 많은 생산물을 얻을 것이다. 


한 사람은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미래에 휴식과 풍요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모든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살아갈 가능성이 목표인 사회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노동은 분명히 노예제, 농노제, 임금제라고 하는 몰이꾼의 막대기 아래에서 행해지는 노동에 비해서 훨씬 뛰어나고, 훨씬 더 많은 생산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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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은 변변찮은 임금,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일의 부족, 빈번하게 빈곤이라는 운명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당신과 당신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즐겁게 살게 하고, 교육받게 하기 위해서 흔히 40년 동안 일한 다음 병원에서 죽어갈 운명에 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육체노동은 평생 동안 열등함이라는 낙인을 달고 사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육체노동자들은 항상 정신노동자들보다 열등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업장에서 10시간씩 힘들게 일해야 하는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이라는 고상한 즐거움을 스스로에게 제공해줄 만한 시간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수단도 거의 없다. 


심지어는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킬 만한 시간도 방법도 없다. 


그는 특권층 사람들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에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 아래서는 육체노동이 저주스런 운명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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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노동자가 단 하나의 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즉, 이런 열등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자기 아이들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꿈 말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독립된 지위를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오늘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시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육체노동자 계급과 정신노동자 계급이 있고 검은 손과 하얀 손이 있는 한 상황은 똑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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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임금제를 폐지하고 싶어 하고 사회 혁명을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분리를 분명히 끝장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은 더 이상 저주스러운 운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노동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인간의 모든 능력을 자유롭게 훈련하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는 임금제의 채찍 아래에서 얻어진다고 알려져 있는 우월한 노동에 관한 이 신화를 진지하게 분석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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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노동은 노예노동이다. 


임금 노동은 생산할 수 있는 만큼 생산하지 않으며, 생산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임금제가 생산적인 노동을 하는 데 가장 좋은 동기라는 신화에 의혹을 제기할 가장 좋은 때이다. 


오늘날의 산업이 우리네 할아버지 시대보다 백배나 많은 생산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18세기 말에 자연과학과 화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은 임금제라는 자본주의적 제도 때문에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런 제도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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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어떤 물건의 작은 부품을 만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노동자에게는 다른 기회를 주어라. 


구멍 뚫는 소형 기계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결국 자기 일을 몹시 싫어하게 된 노동자에게도 다른 기회를 주어라. 


그런 사람에게는 땅을 경작하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거나,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항해를 하게 하거나, 기관차를 타고 힘차게 바람을 가를 수 있는 기회를 주어라. 


하지만 그로 하여금 일생 동안 작은 기계에 얽매여 있게 하거나, 나사못의 끝을 갈고 있거나, 바늘귀를 뚫는 일에 종사하게 해서 그를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게으름의 원인을 없애라. 


그러면 일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는 개인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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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디에서나 말해온 것처럼 가난은 부의 첫째 가는 원인이었다. 


최초의 자본가를 만들어낸 것은 가난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있는 ‘잉여 가치'가 축적되기 이전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자기 노동력을 파는 데 동의할 정도로 빈곤한 사람들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을 만든 것은 가난이었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가난한 사람들 수가 매우 빠르게 늘어났던 것은, 국가의 설립에 따른 침략과 전쟁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양에 대한 착취로부터 얻은 부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원인은 농촌 공동체와 도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대 관계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전의 부족적인 삶 속에서 실천했던 연대감이 아니라 착취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임금제 원리를 선언하도록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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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못만 만들라는 운명을 선고받은 대장장이는 자기가 하는 일에 모든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제한된 기술을 가진 그는 완전히 고용주의 처분에 맡겨질 것이고, 때로 1년 중 넉 달간 일을 구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견습생이 그의 자리를 쉽게 대신할 수 있게 되면, 그의 임금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런 모든 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분업 만세,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진정한 황금광맥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외침에 합세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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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업은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낙인을 찍는 것을 뜻한다. 


즉, 어떤 사람은 평생 공장에서 밧줄만 꼬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장 감독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은 광산의 특정 부분에서 거대한 석탄차를 밀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기계, 산업, 광산업을 전체로서 알지 못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일에 대한 애정과 발명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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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다음 이론을 알고 있다. 


즉, 위대한 유럽 국민은 식민지를 필요로 한다는 이론 말이다. 


왜냐하면 식민지는 면화, 가공하지 않은 양모, 향신료 등의 원재료를 본국으로 보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국은 식민지에 산업 제품들을 보낸다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손상된 제품들과 고철이 된 낡은 기계 등 자기들이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들을 모두 식민지로 보내어 처분한다. 


이 일은 비용이 거의 혹은 전혀 들지 않는데도, 어떤 물품들은 때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리곤 한다. 


이런 것이 그 식민지 이론이고 오랫동안 실제로 실행되었던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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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결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것은 대담한 진취 정신이다. 


젊은 시절에 벌써 편협한 마음을 갖게 되고, 나이가 들어서는 예전 습관의 노예가 된 마음을 지닌 우리는 도무지 대담하게 생각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상이 들려오면, 용감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곰팡내 나는 책들을 뒤지면서, 옛 대가들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만약 대담한 생각과 진취적인 사고가 혁명에 부족하지만 않는다면, 식량 문제에서 실패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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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감에서 태어난 새롭고 대담한 정신에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지식과 예술적 창조라는 고상한 기쁨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함께 전진해나갈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고취된 사회는 내부의 불화나 외부의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는 과거의 연합세력에 대해 새로운 조화로움으로 맞설 것이다. 


즉, 각자의 진취정신과 민중의 재능에 대한 각성에서 생겨난 대담함으로 그들과 맞설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이런 힘 앞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왕들'도 무력하게 될 것이다. 


이 힘 앞에 무릎을 꿇는 일 말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인류라는 마차에 매달려서 사회 혁명으로 새롭게 열린 지평선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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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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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업에서처럼 제조업에서, 그리고 전체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선조들의 노동,발견,발명이 소수에게 주로 이득을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도 분명하다. 


즉, 인류 전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강철과 철제 발명품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모든 사람이 이미 부유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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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부유하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난한가? 


어째서 대다수 사람은 그토록 단조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해야 하는가? 


심지어 임금을 가장 많이 받는 노동자조차 왜 불확실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에 둘러싸여 있고, 하루에 몇 시간만 열심히 일하면 모두에게 안락함을 보장해줄 수 있는 강력한 생산 수단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지치지도 않고 계속 되풀이해서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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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또한 이 소수의 사람이 과거에 자기들이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권리들을 이용해서, 
오늘날 노동 생산물의 3분의 2를 횡령하고는 가장 어리석고 부끄러운 방식으로 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수의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한달, 심지어 한 주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몰락시켜놓고 대부분의 몫을 자기들이 가져간다는 조건에서만 다수에게 일을 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이 소수의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지 못 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며, 


모두의 삶에 필요한 생필품이 아니라 독점가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생산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에 모든 사회주의의 본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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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산업, 지식과 그 응용, 발견과 그것의 구체적인 현실화, 그 덕분에 이어진 새로운 발견들, 두뇌와 손의 정교한 솜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모두 협력해서 일한다. 


각각의 발견, 각각의 진보, 인간 부의 총합을 증가시킨 각각의 성장은 과거와 현재 사람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노고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이 거대한 전체의 가장 작은 부분이나마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권리를 가지고서 “이것은 당신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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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라도 인간 사회는 최초의 원칙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즉, 생산 수단들은 인류의 집단적인 노동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생산 역시 인류 공동의 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개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않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모두에게 속한다.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힘닿는 데까지 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를 생산하는 데 각 사람들이 기여한 몫을 측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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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동체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소수 백만장자의 재산을 수용해서 합법적으로 모두의 유산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예측이 사실로 입증되기는커녕, 정확히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기생충 무리들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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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살 권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반면 '일할 권리'는 언제나 임금노예가 되고, 고달프고 단조롭게 일하며, 미래의 중산층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할 권리를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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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것은 외투들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이런 식의 재분배에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각자 나눠 갖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필요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정하자는 것이다. 


가령, 쓸모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 그 기술에 숙달될 수 있는 기회 같은 것들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우두머리나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산한 것 중 제일 큰 몫을 주인이나 자본가에게 넘겨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반더빌트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우리의 자치적인 공동 생산 체제를 만드는 일에 쓰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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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자신이 생산한 것의 절반을 세금으로 빼앗기지 않으면서 땅을 경작하는 날, 


풍성한 수확을 위해 땅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기계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독점 자본가가 아닌 공동체를 위해서 생산하는 날, 


그날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잘 입는 모습을 보게 되는 날이고,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다른 착취자들이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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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에게 무료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있다면, 
생색을 내며 빌려주는 부스러기 땅 때문에 농부가 ‘비열한 공작 나리'에게 50파운드를 지불하려고 할까? 


농부가 자기 생산물의 절반을 땅 주인에게 내놓아야 하는 소작 제도에 동의할까? 


하지만 농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계속 부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떤 조건이든지 받아들일 것이고, 결국 땅을 경작해서 땅주인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역시 중세시대와 마찬가지로 농민의 빈곤이 땅을 선점한 자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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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혁명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빵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혁명의 맨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지역에서 빵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 한 사람의 여성도 자선으로 던져질지 모를 싸구려 빵 하나를 받기 위해 피로에 지친 군중과 함께 빵집 문 앞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비틀거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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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토피아주의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이 모든 사람에게 집, 음식, 옷을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사상은 어떤 당파를 지지하는가와는 상관없이 중산층 시민에게는 지극히 불쾌한 사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고픔이 채워진 민중을 손아귀에 두고 지배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장을 유지할 것이다. 


즉, 혁명에 참여하는 민중을 위해 빵을 구해야만 하고, 빵의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혁명이 민중의 관심사를 가장 먼저 고려한다면, 그 혁명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빵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우리는 평등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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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나라들의 경우에는 거대한 숲들이 있고 땅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 나라의 농부들은 각자가 한정된 범위에서 땅이나 목재를 할당받는다는 생각 없이 필요한 만큼 나무를 베어내고, 원하는 만큼의 땅을 경작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곧바로 목재는 각 가정의 필요에 따라 허가를 받아야 벨 수 있게 될 것이고, 땅은 분할될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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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산업의 결합, 한 개인이 농부이면서 기계공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나키스트 코뮌주의가 필연적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이다. 


재산 수용이 공정하게 시작될 경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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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대표하는 명예를 달라고 졸라대는 어느 경박한 후보자를 투표로 선출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다면, 그들은 어리석은 실수를 무심코 또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후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조직화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민중 스스로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자기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을 조직하는 일을 맡게 되면, ‘입씨름만 하는 의회'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잘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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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일해야만 자신과 가족을 위한 영양가 있는 음식, 안락한 집, 필요한 옷을 생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몰두하는 문제이다. 


대체로 그들은 하루 네다섯 시간이면 충분할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한다는 암묵적인 조건 아래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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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의 노동 외에 자신에 취미에 맞는 단 하나의 즐거움조차 얻을 수 없다면, 피할 수 없는 갖가지 고된 노동과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사회 혁명을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모두에게 빵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이런 저주스런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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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서, 하루 중 대여섯 시간 동안 필수품을 생산하는 일에 전념한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5-7시간 정도를 각자 바라던 사치스러운 취미에 대한 모든 열망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협회가 그런 일들을 지원할 것이다. 


지금은 하찮은 소수민의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치스러운 취미는 부르주아 계급의 어리석고 허영에 찬 과시가 아니라 예술적인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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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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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만 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성sex 에너지를 영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해 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러한 변형을 체험해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입증되었다. 


탄트라는 조만간 세상에 받아들여질 과학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온갖 성적인 왜곡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세상 모든 종교들의 억압으로 인해서, <플레이 보이>와 같은 포르노그래피 잡지가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읽혀 왔다.

#탄트라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삶은 관계이자 함께 하는 것, 주변과 소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홀로 있을 때 지복至福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도 지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누군가와 함께 지복을 느낀다면, 그 지복은 최고의 봉우리에 도달하게 된다. 


홀로 있을 때, 그대는 마치 혼자 피리를 연주하는 사람과 같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복을 느낄 때 그 음악은 멋진 협주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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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sex에너지'라는 것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오직 하나이며 모두 동일한 것이다. 


섹스는 에너지의 출구이며 에너지가 향한 한 방향이다. 


섹스는 에너지가 적용된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생명 에너지life energy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여러 방향으로 드러날 수 있다. 


섹스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생명 에너지가 생물학적이 되면 그것은 성 에너지가 된다. 


섹스는 생명 에너지가 적용된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 섹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에너지가 순화sublimation된 것인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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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생명 에너지의 생물학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생명 에너지가 가장 낮게 적용된 형태이다. 


섹스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섹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섹스는 기초이지 최고봉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낮은 단계의 에너지이다. 


섹스가 전부가 된다면, 삶 전체는 그저 낭비가 되고 만다. 


그것은 지어져야 할 집은 짓지 않고 계속 그 기초만 다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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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는 항상 중립적이다. 


그 자체로는 이름이 없지만, 그것이 흘러나가는 출구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진다. 


그 이름은 에너지 자체의 이름이 아니라, 에너지가 취하는 ‘형태'의 이름을 뜻한다. 


'성sex 에너지'라고 말하면, 그것은 성적인 출구, 생물학적인 출구를 통해 흐르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에너지 자체는 중립적이다. 


생물학적으로 표현된 에너지를 섹스라고 말한다. 


감정적으로 표현된 에너지는 사랑, 증오, 분노 등이 된다. 


지적으로 표현된 에너지는 과학이나 문학이 될 것이다. 


몸을 통해서 나오는 에너지는 육체적인 것이 된다. 


마음을 통해 나오는 에너지는 정신적인 게 된다. 


그 차이는 에너지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그 에너지가 표현된 형태에서 오는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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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슴은 위안慰安이 아니라 축복祝福이다. 


오르가슴은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전체全體와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오르가슴은 언제나 신성하다. 


상대방은 그 문이 되고 그대는 신성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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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대는 건강하고 정상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는 비밀이다. 


무의식적으로 섹스에 들어가면 생물학적 진화의 손아귀에 놓인 도구로 머물지만, 


깨어있는 의식으로 성적인 행위에 들어가면 깨어있는 그 의식이 바로 깊은 명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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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안에서 자각自覺할 수 있다면, 

죽음에서마저 깨어있을 수 있다. 


섹스의 깊이와 죽음의 깊이는 평행선처럼 동일하다. 


그대는 동일한 지점에 간 것이다. 


섹스 안에서 자각할 수 있다면, 

그대는 위대한 일을 성취한 것이다.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섹스를 명상의 행위로서 활용하라. 


그것과 싸우거나 그것에 반대하지 말라. 


자연과 싸워서는 안 된다. 


그대는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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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슴의 순간에 깊은 주의와 자각이 있다면,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짧은 순간,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도 없게 된다. 


그대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오르가슴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이 때문에 크나큰 기쁨과 지복이 그대에게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비밀을 명심해야 한다. 


그 한 순간 마음이 사라지고, 

그 짧은 순간 동안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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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들어갈 때, 


그대는 어느 날 그 진리-명상에 들면 마음도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진다는 것-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날은 위대한 깨우침의 날이 될 것이다. 


그날 그대는 자신이 왜 그토록 섹스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게 되고, 바로 그날 섹스에 대한 모든 관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노력을 기울여서 그런 관심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해가 뜨면 이슬방울이 사라지듯이 아무런 흔적이나 상처도 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명상을 통해서 그런 순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드는 것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대 혼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상대방은 필요 없고, 

상대방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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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가 명상이 될 때, 


섹스는 사랑으로 꽃 피어나고, 

이 꽃피움은 신성을 향한 움직임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신성한 것이다. 


섹스는 육체적이지만, 사랑은 영적이다. 


그리고 사랑의 꽃이 피어나면 기도가 따를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제 그대는 신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는 집에 가까이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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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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