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시적이어라.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써라.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쓰고 사람을 담뿍 담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
단 아주 간접적으로 하는 것.
삶이 그대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질 때 더욱더 용기를 가져라.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여라.
아니면 실패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공격적이라면 실패할 것이다.
사랑,행복,명상,진리 또한 그대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이나 오직 미묘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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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을 갖고 있어
깊은 이해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느낄 때, 다른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 설 때,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바라볼 때 그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항상 눈이 멀어있고 논쟁을 하려고 한다.
그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그르다고 한다.
그는 항상 논쟁한다.
그의 논쟁은 지긋지긋한 것이 된다.
그는 항상 교만하고 방어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는 부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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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는 모습은 마치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그는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깨어있는 것이다.
망설이는 모습은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아니다.
그는 망설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론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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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마치 탁한 물처럼 자유롭게 뒤섞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자유롭게 섞인다.
그에게는 깨끗함과 불결함, 선함과 악함 등, 모든 분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태양 같은 의식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이다.
창녀의 집에 머물거나 수녀의 집에 머물거나 예수에게는 똑같다.
그는 잠을 자러 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똑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창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며 수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깨끗하지 않고 아무도 불결하지 않다.
모든 이중성이 사라져버렸다.
초월되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 안에서 산다.
그가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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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죽음은 사념이 완전히 없어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절대적인 죽음은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고, 이제는 삶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 사라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두 번째 단계는 삶에 대해서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노자는 이것을 영원한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 영원한 법칙을 아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며, 이것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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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는다.
성인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어떠한 논리적인 구분도 하지 않고 하나를 품는다.
그는 하나, 즉 전체를 선택한다.
모든 대립되는 것을 포함하는 전체를 선택한다.
그는 삶을 죽음과 함께 선택한다.
증오에 반대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체를 선택하고 온 세상의 모범이 된다.
그가 세상의 모범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귀결이다.
스스로 생겨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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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부드러움은
지극히 단단한 것을 통과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외적인 세상에서는 물이며 내면의 세계에서는 사랑이다.
물과 사랑은 여러 면에서 서로 비슷하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은 빈 장소를 찾는다.
사랑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만일 그대가 이기주의자라면, 사랑은 그대에게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기주의자는 에고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도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대에게 오지 못 한다.
사랑은 그대가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텅 비어있기를 바란다.
물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그러므로 물은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 계속 흘러가 큰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텅 빈 공간이다.
그렇게 물은 바다에 도달한다.
강은 히말라야의 꼭대기를 향해서 흐를 수 없다.
그와 정반대이다.
강은 히밀라야의 최정상에 있는 빙상에서부터 나와 점점 낮은 곳으로 움직여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텅 빈 장소, 즉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곧 강물의 집이다.
사랑 또한 빈 곳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갈망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한다.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떻게 '얻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비어있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직접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도 없다.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대를 찾아오게 할 수 있다.
그대는 단지 비어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보라.
수많은 강줄기가 그대를 향해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별과 돌, 모래와 바다, 나무와 새들까지도, 그대가 움직이는 곳마다 갑자기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를 것이다.
사랑은 물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은 쉴 수 있는 빈 장소를 찾는다.
나무 옆을 지나가 보라.
만일 그대가 비어있다면, 갑자기 나무의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사랑은 물과 같다.
물을 부어 보라.
물은 자신이 쉴 수 있는 가장 빈 곳을 찾는다.
사랑은 내면의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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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완성은 불완전한 것 같다.
물론 그대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대가 완벽한 사람을 만나보면 그는 마치 불완전해 보일 것이다.
왜 그럴까?
매우 미묘하지만 잘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완벽한 사람은 절대로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주의자는 절대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완벽한 인간은 전체적이지만 완벽주의자는 부분적이다.
완벽주의자는 어떤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가꾸고 다듬는다.
그는 매우 완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머문다.
왜냐하면 함께 어우러져야 할 많은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완벽할 수 없다.
오직 전체적인 삶만이 완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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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인간은 절대로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성장하고 또 성장한다.
그의 완성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완성은 과정이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거기에 끝이 없다.
진정한 삶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처음이나 끝이란 말은 거짓된 말이다.
그 어느 것도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삶에서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대의 완벽은 죽은 것이다.
결국 끝에 도달한다.
끝에 도달한 사람은 마치 석상과 같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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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며
내면을 깊이 들어가면 그대가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란 그대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알게 된다면 인간 전체를 안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분노를 알게 된다면 모든 분노를 안 것이고, 자신의 폭력을 알게 된다면 모든 전쟁을 안 것이다.
전쟁터에 갈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의 폭력을 알면 모든 폭력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알면 모든 사랑, 이 세상 사랑의 모든 역사를 안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다 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대양으로부터 물 한 방울을 취하는 것과 같다.
물 한 방울을 분석하면 바다 전체를 안 것이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 바다 전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바다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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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잃으려 한다.
도를 추구하는 자는 정반대다.
지식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자, 되어감이 아닌 '있음being'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날마다 잃어버린다.
자신을 비우고 잊어버린다.
그가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잊어버리는 법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단 한 가지는 어떻게 완전히 짐을 덜어내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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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리는 사랑보다도 더 깊다.
세 가지 차원을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 차원은 머리의 차원이다.
가장 피상적인 차원이다.
언어와 개념과 이론의 세계이다.
그대는 머리를 매우 쉽게 조종할 수 있다.
그대는 거기에서 주인이다.
그 다음 머리보다 더 깊은 두 번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가슴의 차원이다.
거기서 그대는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노예이다.
그것은 조종될 수가 없다.
사랑이 주인이고 그대는 노예가 된다.
사랑이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슴은 머리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마음은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뒤를 볼 수도 있고 안을 볼 수도 있다.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시가 가능하고, 미술이 가능하고 음악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모두 머리가 가슴을 언뜻 본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 세 번째 차원이 있다.
존재의 차원이며 마지막 단계이다.
실체 그 자체이며 근본 그 자체이다.
그것이 그대의 존재이다.
머리는 생각하고, 가슴은 느끼며, 존재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신, 진리, 황홀경, 열반, 깨달음, 이들이 존재에 속한다.
머리는 이런 것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두 번째 차원인 가슴과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가슴보다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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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엉킴을 풀며
어떻게 그 엉킴을 풀 것인가?
그것을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의해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곤란에 처했을 때 그대는 항상 충고를 한다.
그런데 똑같은 어려움이 그대에게 일어났을 때, 그대는 그렇게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왜 그대의 지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렇게 잘 움직이는가?
거기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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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생각한다.
즉 위대한 사람은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가 커지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문제가 작을 때, 손 안에 있을 때 처리한다.
그러면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문제를 순간순간 다룰 때, 그대는 항상 짐으로부터 벗어나 신선할 수 있다.
그대의 존재 위에는 먼지가 앉지 않는다.
그대는 신선하고 젊고 처녀 같은 상태로 다음 순간으로 미끄러져간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미끄러져 나오듯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간다.
낡은 허물은 뒤에 놔두고 생생하고 더 젊은 피부가 나온다.
그때 삶은 신비가 된다.
그것은 결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축복이 내려온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라!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무위無爲를 행하고
완전히 내려놓아라.
이완해라.
진리를 추구하려는 긴장을 풀어라.
진리를 추구하려고 여기에 올 때, 그대는 세속적인 마음을 갖고 온다.
세상에서는 야망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쟁이 매우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애를 쓰면서 서로 싸우면서 경쟁하고 있다.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자비심은 서늘하고 무관심은 차갑다.
사랑과 증오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서늘하다.
그러나 무관심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따뜻하다.
자비심은 무관심의 차가움에 비해서는 따뜻하며 사랑과 증오의 뜨거움에 비해서는 서늘한 거서이다.
덕은 곧 자비심이다.
사랑도 증오도 아니다.
덕은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덕은 무관심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자비심이 마치 무관심처럼 보일 것이다.
그 차이점은 매우 미묘하다.
서늘함은 마치 차가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서늘함은 살아있고 신선하다.
차가움은 단지 죽어있는 것이다.
덕은 곧 자비심을 말한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모든 어려운 것은 쉬울 때가 있다.
조금만이라도 주의한다면 그것을 알 것이다.
씨앗을 부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큰 나무를 파괴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모든 것은 씨앗의 형태를 갖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은 마치 씨앗과 같다.
만일 그것을 그 순간 버리고 싶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분노가 그대 내면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리고 그대 존재 속에서 넓게 퍼져 결국에는 그대를 압도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때는 그 분노를 파괴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꼭 그대 자신을 파괴하는 것 같을 것이다.
분노는 이미 그대의 일부가 되어있을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것을 어렵게 여김으로써
결코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노자는 말한다.
"처음부터 다룬다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마라.
만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면 뒤로 미루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쉬운 일인데, 왜 지금 신경을 써야 하나? 내일 할 수 도 있다."
일은 쉽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그것을 어렵게 여기고, 그 즉시 문제를 처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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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나오며
구층 다락도 한 덩어리 흙 쌓기에서 시작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은 또한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
시작이 곧 끝이다.
이 순간이 전체다.
천마일이나 되는 여행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을 딛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면 두 번째 걸음은 첫 걸음에서부터 나오고 세 번째가 그 뒤를 따른다.
전혀 그런 일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내일이 걱정하도록 하라.
내일을 생각하지 마라.
즐겨라!
이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즐겨라.
그럼으로써 수단이 곧 목표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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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인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것을 복귀시킨다.
이리하여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도와서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욕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욕망은 아무런 욕망 없음을 욕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욕망은 슬픔만을 낳기 때문이다.
욕망은 그대가 내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여기에 있고 욕망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
삶은 이 순간에 있지만 욕망은 항상 미래의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은 곧 뒤로 미루는 것이다.
꿈이며 희망일 뿐 결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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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내어맡김을 지지한다.
그는 말한다.
"삶에 내어맡겨라.
삶이 그대를 이끌게 하라.
그대가 삶을 이끌려고 하지 마라.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삶이 그대를 조종하고 지배하게 하라.
삶이 그대를 소유하게 하라.
그대는 단지 내어맡기기만 하라!
그대는 단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만 말하라.
모든 힘을 삶에게 주고 삶과 함께 있어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다 내어맡겨 버리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사실 그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유한한 존재가 아닌 무한이 된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형상화된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형상이 없는, 광대한, 계속 팽창하는 존재가 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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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무한한 삶이 그대 안에서 흐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의 흐름에 장애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어마어마한 공空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안에서 구름이 떠다닐 수 있고 별들이 오갈 수 있다.
아무 것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잃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내어맡겼기 때문이다.
존재의 경지에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생생하다.
육체는 물론 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가장 내적인 중심은 생생한 채로, 신선한 채로 남는다.
그것은 결코 늙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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