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풀려고 하는 일련의 미스터리극은 곧바로 해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우리는 보통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실제로 그렇다) 것일까?
두 번째 수수께끼는 미국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에 어째서 미국 국민의 살인율과 자살률이 어떤 때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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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런 낌새도 못 채고 몇 년을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모두 대통령 선거 주기와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살률과 살인율은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힌 후에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동안에도 줄곧 전염병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증가세는 취임 첫 해나 임기 초반 몇 해 안에 시작되어서 마지막 해나 임기 종반 몇 해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 추세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야 비로소 반전되어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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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폭력 치사 발생률의 평균값과 중간값을 모두 계산했는데 각각 19.4명과 20명이었다.
나는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유난히 높은 사망률, 다시 말해서 이 평균값이나 중간값을 웃도는 사망률을 가리키는 데 쓴다.
그래서 내가 전염병이라고 말할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4명이나 20명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최고치였던 26.5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비전염병 수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1명에서 19.4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을 한암 웃돌았고 내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은 19.4명을 한참 밑돌았다.
그래서 '능선'과 '골짜기'를 대충 가르는 기준선을 19.4명으로 보든 20명으로 보든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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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카터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은 공화당 정부에서만 일어나고 전염병 수준에서 비전염병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일어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에서 두 사람 다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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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정부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과 민주당 정부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비교했을 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공화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가 높았고 민주당 정부 때는 순증가세가 낮았다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감소세가 컸고 공화당 정부 때는 순감소세가 작았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의 변화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공화당 정부 때 폭력 치사의 순변화는 증가 일변도였고 민주당 정부 때의 순변화는 감소 일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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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를 통틀어서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자살률과 살인율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사실은 아마 이제 그다지 놀랍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 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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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을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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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또 민주당에 비해 평균 임금, 최저 임금, 종합 번영도(1인당 국내총생산), ‘상품화 지수’(실업보험을 비롯하여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수당의 측정치)를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다양한 측정치들은 서로를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가령 불황은 실업률을 높이는데, 제임스 갤브레이스(James Galbraith)가 지적하듯이 “실업자가 늘어나면 불평등도 확대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줄어들면 불평등도 감소한다.”
갤브레이스는 이 점을 수학으로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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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썼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수법으로 애용해 온 전략을 갈고 다듬은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이것을 ‘분할 정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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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에 결부된 개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 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생자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주역은 개인이므로,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건, <일리아스>를 읽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건, 일간지를 읽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 폭력 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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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심장부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정으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여기지만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의 위력을 간과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객관적으로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정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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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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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지 체계는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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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한 성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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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살인율, 수감률, 상대적 빈곤율은 지난 40년에 걸쳐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의 10~20퍼센트 수준이었다.
공화당이 휘그당의 전철을 밟아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고 민주당의 ‘충성스런 반대 세력'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서 온다면 미국은 어떻게 보일까?
미국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언젠가는 인간적이고 문명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렇게 되려면 사회적 계층화와 위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에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민주당 의원들이 좀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만드는 수치심의 윤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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