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항상 그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완력에 호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설령 당국이 외부의 적에 대해서 전쟁을 걸지 않을지라도 그에 대한 준비는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
국가는 막대한 금액을 군비에 지불한다.
이것이 재력의 탕진이 되고 백성은 막중한 부담을 짊어진다.
국가 생활의 법은 다음과 같다.
곧,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늑대라는 것이다.
조직화된 문명국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세력을 집단살육에 대한 준비로 가장 먼저 소비한다.
사람들이 바치는 희생은 먼저 이 비인간적 목적을 위해서 제공된다.
전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으로 여겨질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전쟁의 악순환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탈출을 바라고 있다.
전쟁은 집단 최면이다.
전쟁이 가능한 것은 집단 최면의 소행이다.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 최면술의 힘의 노예가 된다.
그들도 이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전쟁 분위기는 전쟁 자체와 같은 성질을 띠고 또 그것에 대한 준비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서 집단적인 분위기이다.
또 인격, 개인의식, 개인적 양심이 마비된 분위기이다.
전쟁과 관련된 일체의 것은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며, 극단일 뿐만 아니라 반인격주의의 극단이며 극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격의 부정이다.
전쟁을 승인할 때 인간은 인격 아닌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군대는 각 사람이 그중의 한 부분으로서 스스로를 느끼는 일종의 계급적인 조직이다.
군대는 각 사람이 전체의 공통적 생명을 나누었고, 그 가운데 일정한 위치를 지킨다.
이것이 인격으로 하여금 전혀 특수한 분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그 속에서 노예성과 폭력이 조직적으로 경험되며 유쾌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것이 특수한 유혹이며, 전쟁에 대한 노예성이라는 특별한 매혹이고, 인간성의 무서운 자연력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성전'聖戰이란 관념은 옛날에도 하나의 모독적인 야유였다.
객체화된 역사에서 가짜로 이름을 그렇게 붙여본 것 이외에는 '거룩'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는데, 세계악의 극단적인 표현에 '신성'이란 특징을 적용했다면 그것은 악마의 유혹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결코 참으로 '거룩'하지 못 했다.
하물며 전쟁이 '거룩'할 수는 없다.
현대 생활이 문제가 되고, 세계의 파국을 예상하는 전쟁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즈음에이따위 폭언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에 관한 군대적인 관념은 반 기독교적이며 반 복음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명예의 관념에서는 그것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은 수준에 있다.
이런 관념은 결투의 유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뒷골목의 살인과 흡사한 일인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가 명예의 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전체적인 전쟁 또한 그렇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의 양성은 곧 귀족적인 유형의 양성이다.
그것은 곧, 비인격적인 세계 환경에 매몰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물, 내면적으로 독립하며, 자유로운 인물, 인생의 모든 고귀한 질적인 만족에까지 고양되고 곤궁하고 버린 바 된 낮은 세계로 내려갈 수 있는 인물의 양성인 것이다.
진정한 귀족의 주요한 상징은 고양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아량인데, 곧 내적 품성에서 나오는 것과 낮아지는 준비와 그리고 원한을 품지 않는 정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종족적 및 가족적 귀족은 과거의 조상·전통·관습의 노예성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며 편벽偏僻하다.
그것은 운동의 가치와 자유를 선택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인격적 귀족주의는 평가의 자유가 있고 운동의 자유가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개인이며, 종종 크게 고양된 개인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 정신을 극복함에 따라 인격이 된다.
부르주아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는 비인격적이다.
모든 사회 계급은 비인격적인 부르주아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귀족도, 프롤레타리아도, 지식인도 그들은 곧잘 부르주아가 된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성을 극복하지 못 한다.
부르주아는 항상 노예이다.
그들은 재산과 금전의 노예이며, 부유하게 되려는 욕망의 노예이며, 부르주아적 여론의 노예이며, 사회적 지위의 노예이며,그가 착취하는 노예의 노예이며, 그가 공포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예이다.
부르주아인 것은 정신과 혼이 해방되지 않은 상태이다.
곧, 외면적 결정에 생명의 전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재산에 대해서 특수한 태도를 갖고 있다.
부르주아의 문제는 '존재'와 '소유'와의 관계의 문제이다.
부르주아는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릴 수 없고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 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 표준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부르주아는 재산, 돈, 부, 생산수단,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부르주아를 그렇게까지 신장시킨 재산은 그의 인격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즉, 그로 하여금 본질이 되게 하지는 못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혁명에서 신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혁명에는 종말론적 순간이 있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서 시간의 끝이 다가옴이다.
그러나 혁명은 질병이고, 사회를 개혁할 창조적인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고, 무력증의 세력이 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
보복에 대한 갈망과 미움이 폭발한 것이고, 거기서 살인이 일어난다.
혁명에는 그동안 쌓인 원한이 작동하는 것이고 창조적인 감정들을 죽인다.
악마적인 요소가 없는 혁명을 꿈꿀 것이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는 항상 그것이 승리한다.
혁명은 아주 작은 정도로 자유의 깃발 아래 서 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는 운명의 깃발 아래 서 있다.
혁명은 인간 사회의 운명이다.
혁명에서 사람들은 국가와 귀족제와 부르주아와 거짓 신성과 우상들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곧바로 다른 우상들과 새로운 거짓 신성들을 만들고 새로운 참주의 노예로 빠진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일반적으로 권력이란 항상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혁명의 잔인성이 결정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공포에 의해서이고, 혁명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테러의 불가피성도 그러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학대를 시작한다.
학대 마니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학대가 항상 그에게서 예상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의 모든 주위에서 위험과 음모와 자신들을 덮치려는 시도만을 보는 사람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없다.
바로 광적인, 동물적이고 불가사의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고문을 자행하고, 교수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형에 처하고, 교수하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총살한다.
이단의 학대, 고문 그리고 처형도 역시 공포의 결과이다.
공포가 한 가지 악이나 많은 악 즉, 소위 어떤 신조나 인생관으로 악으로 규정된 것과 마주하는 것이 인간 삶과 역사에서 가장 큰 악 중의 하나이다.
이 공포는 인간 본성을 일그러뜨리고, 인간 양심을 어둡게 하며, 자주 한 인간을 야수로 변질시킨다.
이러한 일이 혁명이나 심리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반혁명에서 자주 일어나고, 전쟁 중에 발생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 문제의 해결은 파라다이스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극히 초보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일상의 빵은 모든 사람들에게 또 각 사람에게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하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비인간화가 되고 비인격화가 된 인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은 착취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이 상품화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의 의의와 존엄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추방되고 생존을 위한 모든 보장이 박탈된 사람들이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간 생존의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깊이 뿌리박힌 허위와 다른 것이 없다.
인류 대다수의 궁핍과 불행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경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법들은 부르주아 정치경제의 발명일 뿐이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인간의 활동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정리하려고 했을 때 마르크스는 아주 옳았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적 문제는 사회의 조직에 갱생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생활 내에서 분자적 과정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권위적 행동에서가 아니라 자유의 결과로서 결정된다.
권력에 의해서 절대적 성격을 띠는 정치적 방법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심히 허구적인 해결이다.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지 못한다.
공정과 정의를 실재화하는 것은 실로 강제적이며 사회적인 방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동포적 및 우애의 정신은 심원한 분자적 과정의 산물로서 자유에서 창조된다.
사회 문제는 전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격주의는 진리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항상 정신에 근거한 자유는 그 사회적 투사에서 패러독스를 환기시킨다.
사회생활에서 형식적 자유는 노예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자유는 그런 종류에 속한다.
자유에는 정도와 단계가 있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생활에서, 양심에서, 사상에서, 창조력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그 최대한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는 물질생활의 수준에까지 내려가는 정도로 제한되며 최소한도에 도달한다.
남자나 여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또 노동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제적 자유는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강자가 약자를 압박하고 그를 노예화하며 빵조각마저도 약자에게 거부할 것이다.
경제의 자율성은 오류이며 환상적 자유이다.
그러나 그릇된 일원론 혹은 전체주의는 경제생활에서 자유의 제한을 자유 전체의 제한으로 옮겨가고, 심지어 정신생활에서의 자유의 말살에까지 옮겨간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가 통과하고 있는 모든 전체주의적 조직의 커다란 해독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랑의 엑스타시의 절정에는 죽음의 엑스타시와의 접촉이 있다.
엑스타시는 그 진수에서 초월의 과정이며 일상 세계의 한계 밖으로의 탈출이다.
사랑과 죽음은 인간 생활의 가장 중대한 현상이다.
모든 사람은 설사 특별한 천부의 재질이나 창조적 충동의 능력을 갖지 못한 자도 사랑의 경험을 갖고 또 죽음의 경험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
삶 자체 속에 죽음의 경험이 있고 죽음의 신비와의 접촉이 있다.
인생에서 최대의 긴장은 사랑과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 실존의 긴박성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을 정복한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강하고 또 동시에 죽음으로 통한다.
그것은 인간을 죽음의 막다른 곳에 둔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패러독스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강대한 잠재의식적 매력에 의해서 성은 인간을 객체화된 세계에 얽매이게 한다.
이 객체화의 세계는 결정론과 필연성이며, 내부에서가 아니고 외부에서의 결정이며, 객체를 향한 인간성에서의 결정이 지배하는 곳이다.
여기에 성의 신비가 놓여 있다.
인간 해방은 동시에 강제하는 개체 세계의 일부인 성의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객체 세계만이 강제적일 수 있는데, 성은 강제적이다.
인간은 강제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성적 욕구의 충족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는 그런 종속적인 환상의 존재이다.
성은 인간에게 비인격적이며 '일반'의 힘이며 종속적이다.
사랑만이 인격적이다.
인격적인 것은 성욕이 아니라 사랑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노예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고 또 때로는 그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해방을 열망한다.
일반인이 자유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보다 더 큰 오류는 자유를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는 어려운 것이다.
노예 상태에 머무르는 편이 오히려 쉽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 해방에 대한 동경은 어떤 향상적 진보가 인간에 의해서 달성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내적으로 노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또 세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정신적 원리가 있다.
인간의 해방은 종종 상상하는 바와 같이 자연이나 이성이나 사회의 요구가 아니라 정신의 요구이다.
인간은 다만 정신뿐만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구조이며, 동물이며, 또 물질계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은 자유이며 자유는 정신의 승리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세계는 악이다.
그것은 세계에 물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는 물질이 악이라는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사악한 경향에서 발생한다.
근본적 대립은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자유와 노예성이다.
정신적인 승리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종속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장 알아내기 어려운 형태로 인간을 노예성으로 던져 넣는 거짓된 환상에 대한 승리이다.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악은 이것이라고 명백히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선의 거짓된 모습을 취하는 것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모습의 거짓된 모습을 하고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
이런 사례가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보편적 일반적 추상 관념은 고양된 행태의 악이다.
나는 이 일에 관하여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논하여 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만은 불충분하다.
죄는 원시적 외모를 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만이 아니다.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까지도 가능하며 인생의 모든 면에서 발견되는 죄와의 거짓된 싸움에 매혹되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은 참 죄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정신생활의 노예적인 왜곡의 하나이다.
인간에 의해서 외부에서 폭력으로 느끼도록 하는 노예성은 못된 짓이지만,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이 종당에는 그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노예성은 더욱 못된 짓이다.
악마적 성격은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인데, 무한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고, 거룩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야비한 것에 달라붙고, 신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이다.
인간의 국가에 대한 관계, 문명에 대한 교회의 관계까지도 악마적인 것이 된다.
공동체이면서 우의友誼 관계인 실존적 의미의 교회도 있고 또 객체화이면서 사회제도인 교회도 있다.
객체화로서의, 또 사회제도로서의 교회가 신성하고 오류가 없다고 인정할 때 우상의 창조와 인간의 노예성이 시작된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도착이며 종교생활 내부에 있는 악마적 요소다.
인간 생활은 상상적이며 과장되고, 고양된 열정, 종교적, 국민적, 사회적 정열에 의해서 불구가 되고 또 타락시키는 공포에 의해서 손상을 받는다.
이 토양 속에서 인간의 노예화가 발생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최고의 이념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서운 노예성으로 변경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에 대한 정신적 승리는 첫째로 공포 즉,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근본적인 종교적 현상과 내면적 삶의 심각성의 기호를 보았다.
성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공포는 노예성이다.
이 양자가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 세상에서 인간은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이 공포는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약화되고 둔화되어 있다.
보통 일상생활의 조직은 생사의 위험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으나 안전 확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영역 안에 몰입하고 그 이해관계에 흡수되어서 인간은 심연과 심연에 속한 불안을 저버린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창조성은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인간은 창조적 활동의 상태에 있을 때에 자유롭다.
창조성은 순간의 엑스타시로 인도한다.
창조의 산물은 시간 속에 있으나 창조적 활동 자체는 시간 밖에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영웅적 행위는 시간 밖으로 인도한다.
어떤 종말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간의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은 영웅적 행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순수한 영웅주의는 긍지와 자기 긍정에서 오는 하나의 매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정신적 해방 속에는 자유와 진리와 사랑을 목표하는 운동이 있다.
자유가 공허하여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롭지 않은 진리의 지식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는 또 진리와 의미와 신의 실재를 전제로 한다.
진리와 의미는 해방시키고, 그리고 다시 해방은 진리와 의미에 이른다.
자유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인격, 자유로우며 창조적인 인격을 실현하는 것은 자유와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원리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항상 왜곡된 것을 가져오게 되고 인간의 인격을 훼손한다.
이 원리의 각자는 그 속에서 또 그것에 의해서 유혹과 노예성의 근원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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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

이 책을 읽다보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해서 쓴 '아리랑'이다.

왜 생각이 나는냐구?

그건 아마도 일제강점기 떄 같은 노선과 같은 조직의 두 독립운동가의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학철 작가님이 쓰신 '최후의 분대장'을 님 웨이즈와 김산이 쓴 '아리랑'과 비교·대조해보는 것은 어떨까?

비교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고, 대조는 둘 사이의 차이점을 찾는 것이다.

먼저, 공통점을 찾는 비교를 해보자.

첫째, 의열단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김학철은 김산과는 다르게 의열단원은 아니다.

하지만 의열단의 전통이 이어진 조선민족혁명당-업무 수행 방법에서 의열단의 방식을 따라한다는 구절이 있다-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에 관한 여러 자료를 보면 여러 계파들과 더불어 '의열단계'로 분류해 놓은 경우가 많다.

 

둘째, 약산 김원봉이다.

김산은 의열단의 초기 단원이다.

그래서 김산이 본 약산 김원봉은 아리랑에 써있듯 무서운 사람으로 표현한다.

다만 동료에겐 지극히 친절하지만.

하지만 의열단 말기의 김학철이 본 약산 김원봉은 말주변이 없는 성격 급한 사람이다.

김학철과 그의 동기들이 약산의 말버릇인 "말이야"를 손 꼽아 세는 구절이 있다. 

 

셋째, 중국공산당이다.

김산은 1920년대 중반에 입당했고, 김학철은 1940년대 초반에 입당했다.

 

다음, 차이점을 찾는 대조를 해보자.

첫째, 활동 시기이다.

아리랑은 김산의 출생에서 시작해 1920년대를 거쳐 님 웨이즈를 만난 1930년대 후반까지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 최후의 분대장은 김학철의 출생에서 시작해 1930년대 중반과 해방 이후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를 거친 후 복권까지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김산의 기록-신흥무관학교-의열단-북벌-광주코뮌-연안에서의 생활-과  김학철의 기록-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나가사키 형무소-해방-6·25전쟁-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복권-을 이어본다면 사회주의를 선택한 항일독립투사의 여정을 볼 수 있다.

둘째, 작성 시기이다.

아리랑은 1930년대 중·후반, 중국 연안에서 님 웨일즈와 김산이 만나서 기록하게 되었다.

따라서 항일 혁명의 진행 중에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후의 분대장은 1990년대 즉 작가인 김학철의 말년에 쓰여진 것이다.

셋째, 모호함과 구체성이다.

어쩌면 이것은 차이점의 두번째 항목과 관련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랑은 항일독립투쟁의 진행형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므로, 등장인물들 이름의 모호함이 많다.

예를 들어, 또다른 주인공인 김충창의 본명은 김성숙이며, 김약산의 본명은 김원봉이다.

끊임없이 주인공 김산을 괴롭히던 한은 한위건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해방이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비밀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분대장에서는 작가의 말년에 쓰여진 이유로 구체적이다.

그래서 어느 한 인물에 이야기 하다가 옆길로 빠지듯 그 인물의 결과가 나온다.

숙청이면 숙청, 도망이면 도망, 자연사면 자연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어느 한 면만이 기록되고, 잘 알려진 현실에서 이 두 책은 다른 면이 기록되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의 사실을 알아가는 필수의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두 책을 비교·대조한 억지를 부린 거라 생각한다.

이 억지가 김학철 작가님이 쓰신 최후의 분대장과 더불어 아리랑도 읽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

스코틀랜드 야드 게임의 작가는 '노지마 신지'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과 베스트셀러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주저없이 읽어본 동기가 되었다.

노지마 신지.

그는 101번째 프로포즈, 미성년, 인간 실격, 고교교사, 한지붕 아래, 프라이드, 장미없는 꽃집 등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 작가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제의 다양성'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는 주제가 한정적이다.

모 작가는 불륜 드라마 그리고 가정 드라마, 이런 식으로 주제를 주기적으로 바꿔 글을 쓴다.

다른 작가들은 그냥 흔해빠진 사랑이야기 정도.

또한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는 주제만으로  글쓰는 작가도 많다.

하지만 노지마 신지는 사랑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가정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왕따를 이야기 하기도 하고, 장애인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런 틀에 박히지 않은 주제의 변화가 나를 그에게 매료시킨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책 스코틀랜드 야드 게임을 읽거나 장미없는 꽃집 이후의 그의 드라마를 보면 감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선, 이 책의 경우처럼 소제목으로 1 turn, 2 turn 등의 방식은 101번째 프로포즈의 악장으로 진행되는 방식이거나 프라이드의 Period로 진행되는 방식의 연장이다.

즉, 틀에 박힌 방식 그 자체.

그 다음, 작가의 이상형 불변의 법칙.

작가인 노지마 신지의 작품을 여러 번 보면 정숙한 여성을 선호한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드라마 '프라이드'에서는 유학간 남자를 변함없이 기다리는 여성상이거나 '한지붕 아래'나 '너무 귀여워'에서의 부엌 앞의 앞치마 입은 여성상-늘 가족들을 기다리는-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죽은 연인을 잊지 못 하는 여주인공을 사랑한다는 주제이다.

이 또한 틀에 박힌.

 

하지만 그 동안 노지마 신지를 잘 알던 사람들은 절망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 책, 스코틀랜드 야드 게임의 틀에 박힌 요소들과 뻔한 사랑이야기 속에 획기적인 주제는 숨어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에 충실하자는 것.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건 아마도 죽음과 변함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막연한 영원을 꿈꾸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충실하게 보내는 것이 낫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메시지만으로 읽어볼 가치가 있냐구 물어본다면?

아니, 그냥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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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격은 사회적 집단의 결정에 대한 승리이다.
인격은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행위이데 곧, 하나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창조적인 행위는 수동적인 것인데, 인격은 능동적인 것이며, 대립이며, 세계가 끌어가고 있는 짐의 극복이며, 세계의 노예성을 극복하려는 자유의 승리인 것이다.
노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격의 실현에 유해하다.
인격은 역행이고 항쟁이며, 자기와 세계의 정복이며, 예속에 대한 승리이며 해방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또 이성의 수단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이성 자체는 인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본성은 비인격적인 일반적 본성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희랍인의 이해는 인격주의의 철학과 합치하지 않는다.
인격은 합리적인 존재,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격은 자아의 전 사유, 전 의지, 전 감정, 전 창조적인 행위 그것이다.
희랍철학의 이성과 독일관념론의 이성은 비인격적 이성이며, 보편적인 이성이다.
그러나 인격적 이성과 특히 인격적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격주의는 플라톤적인 것 내지는 독일관념론 위에다 그 기초를 둘 수 없는 것이며, 또 자연주의 위에나 진화론 철학이나 또는 생철학 위에 기초를 내릴 수는 없다.
후자의 철학은 인격을 비인격적, 우주적, 생명적 과정 속으로 해소해버린다.
쉘러Scheler는 인격과 유기체 사이, 정신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의 차이점을 잘 말하였다.
인격은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이며, 정신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인격을 혼魂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인격은 하나의 근원적 무의식의 기반을 갖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종종 생에 있어서 연극을 꾸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역할이 아닌 노릇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인격의 이분성Dichotomy은 특히 원시인이나 심리학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건전한 자에게 현저히 나타난다.
준정상적인 문명인에게서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원성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적응이라는 규범적인 성격을 갖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서 허위의 필요성을 낳게 한다.
미개인의 사회적 훈련과 문명화는 유익한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격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은 아주 비인격적일 것이다.
그는 노예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와 자연은 인격 형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은 자연에 대한 의존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인격은 외부에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결정에 대립하며, 내부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부의 결정은 자기 결정인데, 신이라 할지라도 이 결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인격과 신과의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영역 밖에 있으며, 자유의 영역 안에서 신은 인격에 대한 실존적 중심이다.
인격은 전 객체 세계 밖에서 내면의 자기를 결정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유에서 출발한 결정만이 인격이다.
외부에서 규정되고 결정된 것과 객체적 세계의 힘에 기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인격적일 수 없다.
그런 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에고ego 속에서 결정된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고뇌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인격은 고뇌이다.
인격과 그 통합을 성취하려는 고뇌는 괴로움이 많은 과정이다.
인격의 자기실현은 저항을 일으키고, 노예화하려는 세상의 권력과의 투쟁을 요구하며, 세상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인격을 부정하고 주위의 세상에로의 동화에 안주하려는 것은 확실히 고뇌를 더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이런 길을 걸으려고 하기 쉽다.
굴종에 안주하면 고뇌가 감소하는데, 굴종을 거부하면 고뇌는 증가한다.
인간 세계의 고통은 인격의 탄생과 인간 자신의 본성을 위한 투쟁에 있다.
심지어 동물계의 개체도 고통이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고난을 야기한다.
만일 사람이 자유를 거부한다면 고난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곧, 인격성은 다시 말하면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일깨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페기Peguy는, 개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정복하도록 요청받은 자신 속의 부르주아라고 말하였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고독의 경험을 견디고, 자아 중심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함입되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기를 지키면서 살기 위한 괴로운 투쟁을 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는 순응주의에 의해서, 또한 적응에 의해서 곤란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모색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 곧, 같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폐쇄를 극복하고, 자기 속에 하나의 우주를 전개하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립과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내면적으로 인격은 신적 인간성을 통해서 힘을 얻고 해방을 얻는다.
외면적으로 전체세계와 모든 사회와 모든 역사는 인간성과 인격의 궁극성을 통해서 변화되고 해방된다.
공동성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객체화가 아니고, 그것은 인격을 객체화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인격성은 신-인간성God-humanity이어야 하고, 사회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사회와 역사과정에서의 신-인간성의 객체화는 오류와 노예성의 기원이다.
그리것은 인간인격성의 존엄과 자유와 모순되는 인격의 객체적 계층주의hierarchism를 만들어냈다.
거룩함sacredness의 그릇된 관념의 성립이 이것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예속의 여러 가지 형태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성격character과 결합한다.
강력한 인격은 표방된 성격이다.
성격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 원리의 승리이다.
그 승리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형태에서의 승리이며, 이 형태는 인간의 영혼-육체 구조soul-body constitution아 결합되어 있다.
성격은 자기를 지배하는 위력의 소유자이며, 그것은 자기에게 대한 예속에의 승리,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예속에의 승리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승리이다.
성격은 무엇보다도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기질temperament은 하나의 자연적인 재질이며, 성격은 정보와 일의 성취에서 얻은 것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불안Angst과 공포Furcht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언어 용법에 상대적인 구별이 있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구별했다.
공포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위험과 일반적인 체험의 일상적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반면에 불안은 경험적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신비에 직면하거나 초월적 심연에 직면하며 미지의 것에 직면했을 때에 불안을 일으킨다.
공포는 염려와 고난의 두려움과 운명의 타격과 연관된다.
공포는 보다 드높은 세계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다 낮은 지평에 관심을 갖고 경험적인 것에 결박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은 초월자에게 직면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사랑이 영원과 직면하고 운명에 대면할 때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불안과 공포뿜만 아니라 또 동경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동경은 공포보다 불안에 가까운 데, 그것 고유의 자기 특성을 갖는다.
동경은 위험을 통과할 때에 체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경은 확실히 염려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동경은 염려를 가볍게 한다.
동경은 위쪽을 향하는 것으로 인간의 보다 높은 본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유기遺棄와 고독과 세계에서의 소외에 내맡겨져야 한다.
이런 모든 것에서부터의 자기 소외를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통렬히 고뇌를 일으키는 것은 없다.
인격이란 그 발전의 도상에서 이 체험을 통과한다.
동경 속에는 무엇인가 초월자와 같은 것이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상전과 종은 상호관계적이다.
쌍방 모두 상대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인은 자신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
자유인은 자신과 반정립에 있는 어떤 것과도 상관관계 없이 자기 속에 자신의 특성을 갖는다.
상전은 자신에 대한 실재적 의식이지만, 그 의식이 어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노예를 통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다.
상전의 의식이 어떤 타자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노예의 의식은 자기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자유인의 의식은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인데, 그것은 자기에게서 타자의 모든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의미를 동반한다.
노예 상태의 경계성은 자유의식의 결핍 여부 바로 그 선인 것이다.
노예의 세계는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다.
외면화exteriorization는 노예의 근원이며, 자유는 내면화interiorization이다.
노예는 항상 소외, 인간성을 외면적인 것에 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의 근원은 항상 객체화에 있다.
즉, 외면화이며 소외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노예성이다.
즉 지식 획득, 도덕, 종교, 예술, 정치적 삶, 사회적 삶 등에서 노예성을 끝내는 것은 객체와에 대한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예성을 종결짓는 것은 주인의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 된 지위는 노예성의 반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전이 될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타락은 무엇보다도 그가 폭군이라는 사실 속에서 대부분 표현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큰 규모가 또는 작은 규모 속에서, 국가 혹은 세계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가족 속에서, 점포 속에서, 사무실 속에서, 대단히 미미한 지위를 차지하는 관료적 기구 속에서 인간은 폭군 노릇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 속에서 자기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주위의 사람들 위에서 폭군 역할을 하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증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사랑 속에서도 폭군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권력에의 의지 곧, 제국주의적 의지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립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옹호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적 의지는 인간에 대한 강제를 결행하는 일을 고조시키고, 그것을 인간이 달성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권력의 현실적 문제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히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다.
사람들이 강압에 저항할 때, 권력에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눈살을 거칠고 휘둥그렇게 뜨는 강압적인 태도를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을 폭행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인다.
그러나 인간 생활에는 잘 분별할 수 없는 더욱 세련된 강압 형태가 많이 있다.
심리적 강압은 신체적 강압보다 훨씬 더 혹독하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것은 신체적인 강압의 결과만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암시 곧, 어린애 때부터 받은 암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즉 양육 방법으로 자유를 빼앗고, 판단의 자유에 대한 능력을 빼앗아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돈은 독립을 준다.
그러나 돈의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끔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을 갖고 있는 사람도 예속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예속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자주 목격된다.
맘몬의 왕국the Kingdom of Mammon에서 인간은 노동 팔기를 강요당한다.
그래서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노동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은 적이 없었다.
비교론적으로 말해서 숙련공의 노동은 좀 더 자유롭고, 지적 노동도 그렇지만, 그것들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횡포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대중은 노예적인 노역 속에, 강제 속에,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노동 속에, 공산주의 사회의 형태에 준한 억압 사역bond-service 속에 복역해왔다.
노동의 형식만 변하였을 뿐 인간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은 수동성passivity이다.
노예성에 대한 승리는 창조적인 능동이다.
실존적 시간 안에서만이 창조적 능동은 계시된다.
역사적 능동은 객체화이며, 인격의 핵심에 성취된 것의 투영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 앞에서나, 민족 앞에서나, 혁명 앞에서나, 보편적 의의를 자부하는 어떠한 객체적 통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신은 해방자이다.
신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신학과 신학의 매혹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상숭배가 신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적인 사회적 관계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로 옮겨진 것이다.
객체적 세계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는 객체로서 이해된 신은 인간 예속의 근원이 되었다.
객체로서의 신은 절대가 된 최고의 자연적 세력 곧, 절대가 된 지배성 중 최고의 힘이다.
자연에서 결정성이라는 것은 사회에서의 지배성이다.
그러나 모든 객체화의 밖에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신은 사랑과 자유이며, 결정성이 아니고, 지배성이 아니다.
신 자신이 자유이며, 그는 자유만을 준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절대자가 아니다.
신은 창조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또 인간에 대해서 상관적이다.
신 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사상의 극한적 배후에 깊이 들어가서 정신적 경험의 영역 안에 철학이 불완전하게 합리적으로 절대자라고 이름붙인 파악하기 어려운 신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신 자체를 절대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자기를 감추지 않는 신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신을 군주적 존재로 받아들일 때 신학적 매혹과 예속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종교적 예속과 신에 대한 예속과 교회에 대한 예속 곧, 신의 노예적 관념과 교회의 노예적 관념에의 예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속의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태이다.
또 그것은 인간을 예속하는 근원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객체, 일반자와 외재성, 소외에 대한 예속이었다.
신비론자가 인간은 신에게서도 자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밟고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모든 형태에서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반인격주의이며, 인격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불가피하게 승인하고, 인격 속에 사회적 유기체의 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보편주의이며, 객체화의 결과이고, 외부적인 것에 투입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인격에서 추상되고, 인격은 이것에 굴종한다.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항상 계층적이다.
이것은 오류이며 인격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사회는 인간의 인격보다 고도의 계층적 단계의 인격인 양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노예화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의 유기적인 이상은 곧, 노예화하는 허위이다.
이것은 사회의 매혹이며 우주의 매혹에 버금하는 것이다.
사회는 실로 유기체가 아니고 사회는 협동적 행위이다.
사회의 유기적 관념은 노예화하는 의식의 환상이며, 외재화의 산물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는 우주를 본떠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본떠야 할 것인즉 곧, 계층주의의 모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인격주의의 모형을 따라야 하고, 결정적인 것을 본뜨지 말고 자유를 본떠야 하고, 힘과 강자의 지배 모형에 의하지 않고 심정의 연대성과 자비의 모형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만이 노예적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자유의 근원은 사회 속에는 있을 수 없다.
인간적 자유의 근원은 정신 속에 있다.
사회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정신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그 개인적인 행위에 의해서 객체화의 세계를 파괴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다만 세계로부터 내면적인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객관화의 세계의 파괴는 사회적인 행위이며 역사적인 행위이다.
이 의미는 인간 사이에서 정신적 공동체의 최고도의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세계는 별천지가 되고 지식도 다른 지식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완전한 정신에 의해서만 규명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객체화된 세계의 여러 조직에 봉사할 수는 없다.
종말론적 전망은 그 자신이 '지식론적'인 사회학적 해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객체화의 최후의 극복과, 객체 세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객체 세계의 형태 중 하나인 사회 세력에서의 해방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종말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아마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종말로 향하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문명화된 야만주의'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시적인 야만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이 야만주의 속에는 '자연'이 아니고 기계와 기계주의의 냄새가 난다.
산업적 기술적 문명은 더욱 증대해가는 야만주의의 질적 몰락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명화된 야만주의 속에는 어떤 종류의 '자연'에로의 복귀도 없다.
문명인 속에는 야수와 야만인이 때때로 눈을 뜨는데, 그것은 문명에 의해서 변화된 형태 곧,  타락된 형태에서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노예성에 관한 마지막 진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 세계의 노예에 빠지는데, 자기의 외재화에 대한 노예성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우상의 종'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이다.
인간은 항상 말하자면 자기의 밖에 있는 요인과 자기에게서 소외되면서도 노예성의 내면적 근거에 의해 노예가 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투쟁은 외부적인 객체화된 외재화의 세계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적인 정신적 투쟁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에서 직접 기인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싸움은 인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 속에서 행해지고, 이 투쟁은 객체적 세계 속에 투영된다.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이 노예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며, 자신을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굽실굽실 잘 받아들인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노예성은 객체적 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로서 특색지어진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노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노예현상학의 최후적 진리는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예성은 의식의 한 구조이며, 의식의 객체적 구조의 일종이다.
'의식'은 '존재'를 결정하고, 다만 2차적 과정에서 '의식'이 존재에의 예속에 빠져버린다.
노예적 사회는 인간의 내면적 노예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환상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데, 이 환상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의식처럼 보인다.
이 환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탐색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실존에는 관념의 노예화라는 변증법이 있다.
그것은 실존적인 변증법이며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그런 관념의 기초 위에 서서 자기를 긍정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폭군이 된다.
이 관념의 폭군제는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체제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종교적 국가적 사회적 제반 관념은 노예 제조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이 반동적 내지는 혁명적 관념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사정은 같다.
기묘한 방법에 의해서 관념은 자아 중심적 본능의 봉사에 들어가고, 자아 중심적 본능은 인간을 모멸로 다루는 관념의 봉사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내적 외적 노예성이 항상 승리를 거둔다.
자아 중심적 본능은 항상 객체화의 힘이 된다.
세계를 자기 봉사의 도구로 보는 것 때문에 이기주의자는 항상 자기를 외부적 세계에 투입하고 거기에 종속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이 개인주의의 매혹의 형태를 취하는 일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간단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이것은 적극성 및 소극성의 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격주의가 종종 개인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처럼 말의 용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성격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경우와, 그의 판단이 독립적이며 독창적이며 자유이든가, 그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에 뛰어나 있든가, 자기 속에 고립해 있으면서 교제를 좋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모멸자 또는 자아중심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인격의 가장 드높은 가치의 긍정과 생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정신적 원리만이 정신적 생활의 통일을 유지하고 인격을 건설한다.
인간이 노예화의 힘에 대해서 다만 분열된 요소만을 대치시키고 완전한 인격을 갖지 않을 때 그는 노예성의 가장 다양한 형태에 빠지고 만다.
인간에 대한 노예성의 내적 근원은 인간의 분열된 제반 부분의 자율성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은 내적인 중심의 상실과 더불어 나아간다.
부분으로 분해된 인간은 용이하게도 공포의 일시적 발광 상태에 굴복하지만, 공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성의 상태에 잘 가두는 것이다.
공포는 통합되고 중심이 잡힌 인격과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강한 경험에 의해서 극복된다.
인간의 지성적, 감성적, 감각적 요소는 공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인격은 전체이지만 여기에 대치되어 있는 객체화된 세계는 부분적이다.
그러나 통합된 인격과 최고의 실존의 상만이 객체화된 세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을 보일 완전한 전체로서의 자기를 자각할 수 있다.
자신을 노예로 삼는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은 항상 분열과 분해를 의미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고독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곧, 내면적 보편주의가 객체화된 보편주의와의 투쟁을 경험하는 '창조적인 인격의 고독'과 개인주의자가 사실 속해 있는 객체체화된 보편주의에 대립하여 설정한 '자기황폐와 무능의 고독'이다.
즉, '내적 풍요의 고독'과 '내적 공허의 고독'이다.
영웅주의의 고독과 패배주의의 고독이다.
힘 있는 고독과 약한 것의 고독이다.
자기을 위해서 수동적인 미적 위안 이외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고독은 원칙적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자연주의적 철학이자만 인격주의는 정신의 철학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한 노예성에서와 외적 세력에 의한 노예화에서의 해방은 자아로부터, 자기를 노예화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이기성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향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내재화해야 하며, 또한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 세계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인 존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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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에서 최대의 유혹은 통치권sovereignty을 행사하려는 유혹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매우 강력하게 노예화하는 힘이 숨어 있다.
통치권의 유혹에는 역사상 심히 많은 종류의 형태가 있다.
이 유혹들은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 유혹은 역사상 사람에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적 양심이 직면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는 극히 단순한 초보적인 양식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곧, 국가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복음서에서는 이 문제는 가야바Caiaphas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한 국민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도 한 사람이 국민을 위해서 죽는 것이 낫다.' 이 말에 의해서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가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는 항상 이 가야바의 말을 반복한다.
그것이 국가의 신앙고백이다.
정치가는 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또 그 세력의 증대를 위해서 죄 없는 인간이 죽는 것이 좋다거나 또 죽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찬성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난다.
국가 위에 새겨진 이 악마적인 낙인은 국가가 늘 그리스도의 사형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진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운명이다.
동일한 문제가 드레퓌스 사건Dreyfus case에도 있었다.
그때 나온 문제는 '죄 없는 인간이 프랑스의 국가 및 군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처벌되어도 좋다'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제를 명예의 문제 곧, 국가의 도덕적 양심의 문제로 삼은 것은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명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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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권력과 공포에 의해서  그 모습이 꾸겨져 있었다.
국가는 공포심을 고무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고통을 당한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비참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
특히 공포심에 사로잡힌 정치적 권력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최대의 폭력과 잔인성을 휘두르는 것은 실로 이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폭군은 항상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의 악마적인 원리는 원력의지에 의할 뿐만 아니라 공포심에 의한 것이다.
자유란 공포를 이기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이 공포를 느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포를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 사상의 위대한 점은 공포심에서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해방하려는 소망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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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와 인민은 상호 의존과 노예성의 상태에 있다.
'지도자 정신'leadership의 이념은 인격 원리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서 역시 상호적 노예성의 한 형태이다.
'지도자'라는 자는 지도자에게 끌려가는 인민과 같은 정도로 노예이다.
그러나 국가가 가장 염기할 특징과 또 국가 권위의 원리에서 나오는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관료주의이다.
어떤 국가도 피할 수 없는 관료주의는 그 세력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고 스스로를 인민의 공복으로 생각하지 않고,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실로 치명적인 경향을 가진 것이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중앙집권 과정의 산물이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당파에 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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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의열단이나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영화-'암살' 그리고 '밀정'-를 통해 그동안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관심을 얻는 듯 하다.

이러한 공감과 관심으로 의열단과 약산 김원봉을 찾게 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이다.

즉, 쉽게는 의열단으로 시작하여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하여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으며,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일부는 한국광복군으로 성장하였다.

이렇듯이 조선의용군이나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짐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전선으로 시작한 민족혁명당도 과정을 유심히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첫째, 백범 김구 쪽-한국국민당-의 불참여와

둘째, 이청천 쪽-조선혁명당-와 조소앙 쪽-한국독립당의 탈당이다.

셋째, 최창익과 한빈으로 대표하는 조선청년전위동맹 측과의 다소의 갈등 상황이다.

이런 통일전선을 향한 과정을 작가인 강만길 선생은 많은 자료-흔히 각주로 표시되는 -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첨부와 인용된 자료로 인해 현미밥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거칠지만 몸에 좋은 이유에서이다.

덕지덕지 붙은 각주로 인해 글의 신뢰는 물론이요 배움 또한 넓어진다.

다만 첨부된 1930년대에서 40년대의 글이 많이 어렵고 많이 낯설을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겪는 독립운동가들의 실명과 가명의 중복이 혼동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만든 조선민족혁명당을 바로 알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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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중 어떤 것은 정확성 때문에, 또는 더 좋고 훌륭한 대상들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영혼에 관한 탐구를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영혼)에 관한 지식은 모든 진리, 특히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들의 제일원리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사랑과 미움, 분노, 온순함, 공포감, 동정심, 용기, 그리고 즐거움 등과 같은 영혼의 모든 영향받음은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과 동시에 신체도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강하고 분명한 영향받음이 발생할 때, 아무런 노여움이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때로는 화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신체가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사소하고도 불분명한 원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움직여지기도 한다.
(그런 사실을 입증할) 훨씬 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때로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이 전혀 없이도 공포감을 느낄 때와 같은 영향받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영혼의 영향받음들은 질료 안에서 실현된 형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향받음)들은 그런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영혼이 우연하게 신체(의 옷을) 입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신체는) 그 자신의 형상과 형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수의 기술이 피리 안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술은 (그 자신의) 도구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영혼은 (그 자신의) 신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일종의 조화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조화는 상반자(相反者)들의 혼화 또는 합성이며, 신체는 상반자들로부터 합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는 혼합된 (요소)들의 비율 또는 합성인 반면에, 영혼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다.
운동을 유발하는 것은 조화가 아니며,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조화라는 단어를 영혼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보다 건강 또는 전반적인 신체의 '훌륭한 기능 수행들'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러한 부적절함은) '영혼의 영향받음'과 기능들을 일종의 조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영혼이 원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인식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움직여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도 참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영혼은 한편 으로는 인식, 감각, 의견 형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망과 희망을 (포함한) 욕구 일반이다.
또한 생물의 장소운동은 영혼에 의해 (생성되며), 성장, 성숙, 그리고 쇠퇴도 영혼에 의해 야기된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것은 영혼 전체에 속하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감각하고,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등의 (기능을 하는) 것은 (영혼) 전체가 하는 것인가, 또는 (각각) 다른 부분들이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인가?
생명은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 안에 있는가 또는 다수의 (부분)들이나 모든 (부분)들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의) 이유인가?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 부분들을 가지며, 어떤 하나의 부분으로는 생각하고 다른 부분으로는 갈망한다고 말한다.
만약 영혼이 부분들을 갖는다면, 그 영혼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 그것이 신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대로, 영혼이 신체를 단일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혼이 신체를) 떠나면, (신체는) 해체되고 부패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그것(영혼)을 단일하게 만드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일 것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스스로에 의한 영양섭취', 성장, 그리고 쇠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공유하는 모든 자연적 실체는 합성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는) 생명을 가지는 신체이므로, 신체 (그 자체가) 영혼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는 어떤 (다른) 주체를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가) 주체 또는 질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혼은 반드시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실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여야 한다.
그리고 실체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영혼은) 그런 신체의 현실태일 것이다.
(현실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지식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숙고이다.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잠을 잠'과 '잠에서 깸'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깸'은 숙고와 유사한 반면에, '잠을 잠'은 '(지식)의 소유'와 유사하며, '그것의이용'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숙고보다) 지식이 먼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제일 현실태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은 '기관들을 가지는' (신체)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눈동자와 시력이 눈을 (구성)하듯이, 영혼과 신체는 생물을 (구성)한다.
따라서 영혼은, 그리고 만약 (영혼의) 부분들이 있다면, 그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의) 부분들의 현실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리를 막는 어떤 (부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부분들이 어떤 신체의 현실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이 신체의 현실태라는 것이 선원과 배의 (관계와) 같은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이것이 영혼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자 개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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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말해진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가 구분했던 바와 같이 세 가지 의미에서 (신체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운동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능동인 또는 작용인)', '무엇을 위해(목적인)', 그리고 '영혼을 가진 신체의 실체로서(형상인)' (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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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리랑을 처음 읽게 된 시기는 200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용은 잊어만 갔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건 내용을 읽으면서 솟구치는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이란 이런 것이었다.

첫째, 우당 이회영 선생은 누구일까?

둘째, 우당 선생님이 따른 '아니키즘'은 무엇일까?

셋째, 약산 김원봉은 누구일까?

넷째, 약산이 이끈 '의열단'은 무엇일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입장에서 이 호기심의 대상들은 한번도 본적도 없고, 들었던 적도 없었다.

이 작은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하나하나 찾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이, 이 호기심이, 이 궁금증이  철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역사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그래서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은 어쩌면 스승 같은 존재이다.

소설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보다 더 수준 높은 독서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도, 아니키즘도, 약산 김원봉도, 의열단도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

적어도 과거 이들의 정보조차 전혀 없었던 나에게는 반가울 뿐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들이 schema-배경지식-가 되어 읽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노선과 인물들의 성격을 과거의 나보다는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 아리랑의 배경무대인 김제에는 '아리랑문학관'과 '아리랑문학마을'이 있다.

이 두 곳을 가본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아리랑'을 다시 펴보고 싶을 것이다.

18년이 지나 다시 읽은 나처럼 말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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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를 처음 접하게 되는 가장 큰 구절은 아마도 공지영 작가님이 쓰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소설의 제목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SNS나 인터넷 혹은 몇 분들의 개인 블로그나 감성이 충만한 분들이 올리거나 읊는 하나의 시 때문이 아닐까?

그 시는 이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아름다운 시 아니 불경이 숫타니파타 속에 있다.

나는 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 덕분에 숫타니파타를 읽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숫타니파타를 읽게 되면서 놀라움을 갖게 되는 요인은

첫째, 불교 경전이 아니라 하나의 시집이다.

詩(시 시)는 言(말씀 언)과 寺(절 사)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숫타니파타와 같은 이러한 불교 경전으로 인해 '시'라는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둘째, 초기 경전의 단순함과 순수함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군더더기 없이 녹아들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사견들이 덕지덕지 붙기 마련이지만, 이 숫타니파타는 주제가 단순하다.

그래서 순수하다.

셋째, 경전의 한글화이다.

보통 경전이라 함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따라서 의미나 뜻을 모르는 체 주구장창 목탁 치며 읊어댄다.

물론 의미 전달을 쉽게 하기 위해 노력하신 법정 스님이나 몇몇의 다른 분들-전재성 님-의 덕분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순수한 경전을 우리 독자들은 한글로 쉽게 더 많은 불교 경전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 하는 불경 따위 읊어대는 불교의 방식을 많이 비판한다.

물론 경전의 불교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심히 읽어보면 아직도 어려운 단어, 알 수 없는 단어가 많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등.

 

이러한 접근이 쉽지 않은 아쉬움이 많기에 이 '숫타니파타'라는 책은 각별하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배울 점 많은 불교의 핵심교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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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의의는 지은이가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에게 직접 들은 후 썼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박태원으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과 '천변풍경' 등을 쓴 소설가이다.

이 소설가 박태원이 해방 후 귀국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와 유자명이 쓴 '의열단간사' 그리고 의열단원들의 편지와 신문기사를 참고해서 썼다고 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인터뷰가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의열단 자체가 워낙 비밀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부족한 점이다.

따라서 김산이 말하고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이나 단원들이 이야기 한 의열단의 이야기는 어쩌면 파편적인 정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단체의 지도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정보의 고급성 아닐까?

의열단을 직접 만들고, 직접 계획하고, 직접 행동한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 점, 이 하나만으로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약산과 의열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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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그의 부인인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에 의해서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즉, 중국의 지도자보다는 항일 혁명가들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투쟁 속에서 그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들을 맨 처음 찾아가고, 맨 처음 인터뷰했으며, 맨 처음 관찰한 것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 많은 부분이 알려졌지만, 작가인 에드거 스노가 쓰기 전에는 그들의 기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 그리고 지도부에 대한 맨 처음, 시초, 시작 등으로 보면 된다.

 

내용에 대해서 특히 흥미를 갖게 하는 건, 모택동이나 주은래 등 지도부들의 주민에 대한 자세이다.

마치 탈권위의 실증 그 자체인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옆집 아저씨나 동네 형과 같은 모습으로 주민들 혹은 나이 어린 병사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모습이 적어도 나에겐 강력한 흥미를 주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에 의해서 중국민들의 지지와 호감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중국 공산당의 파편적 지식은 모택동의 독재적인 모습이었다면,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탈권위적 평등 사회 그리고 초기 조직의 순수함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평등과 순수함만으로 이 책을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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