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인격은 사회적 집단의 결정에 대한 승리이다.
인격은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행위이데 곧, 하나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창조적인 행위는 수동적인 것인데, 인격은 능동적인 것이며, 대립이며, 세계가 끌어가고 있는 짐의 극복이며, 세계의 노예성을 극복하려는 자유의 승리인 것이다.
노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격의 실현에 유해하다.
인격은 역행이고 항쟁이며, 자기와 세계의 정복이며, 예속에 대한 승리이며 해방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또 이성의 수단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이성 자체는 인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본성은 비인격적인 일반적 본성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희랍인의 이해는 인격주의의 철학과 합치하지 않는다.
인격은 합리적인 존재,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격은 자아의 전 사유, 전 의지, 전 감정, 전 창조적인 행위 그것이다.
희랍철학의 이성과 독일관념론의 이성은 비인격적 이성이며, 보편적인 이성이다.
그러나 인격적 이성과 특히 인격적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격주의는 플라톤적인 것 내지는 독일관념론 위에다 그 기초를 둘 수 없는 것이며, 또 자연주의 위에나 진화론 철학이나 또는 생철학 위에 기초를 내릴 수는 없다.
후자의 철학은 인격을 비인격적, 우주적, 생명적 과정 속으로 해소해버린다.
쉘러Scheler는 인격과 유기체 사이, 정신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의 차이점을 잘 말하였다.
인격은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이며, 정신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인격을 혼魂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인격은 하나의 근원적 무의식의 기반을 갖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종종 생에 있어서 연극을 꾸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역할이 아닌 노릇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인격의 이분성Dichotomy은 특히 원시인이나 심리학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건전한 자에게 현저히 나타난다.
준정상적인 문명인에게서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원성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적응이라는 규범적인 성격을 갖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서 허위의 필요성을 낳게 한다.
미개인의 사회적 훈련과 문명화는 유익한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격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은 아주 비인격적일 것이다.
그는 노예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와 자연은 인격 형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은 자연에 대한 의존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인격은 외부에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결정에 대립하며, 내부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부의 결정은 자기 결정인데, 신이라 할지라도 이 결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인격과 신과의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영역 밖에 있으며, 자유의 영역 안에서 신은 인격에 대한 실존적 중심이다.
인격은 전 객체 세계 밖에서 내면의 자기를 결정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유에서 출발한 결정만이 인격이다.
외부에서 규정되고 결정된 것과 객체적 세계의 힘에 기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인격적일 수 없다.
그런 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에고ego 속에서 결정된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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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고뇌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인격은 고뇌이다.
인격과 그 통합을 성취하려는 고뇌는 괴로움이 많은 과정이다.
인격의 자기실현은 저항을 일으키고, 노예화하려는 세상의 권력과의 투쟁을 요구하며, 세상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인격을 부정하고 주위의 세상에로의 동화에 안주하려는 것은 확실히 고뇌를 더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이런 길을 걸으려고 하기 쉽다.
굴종에 안주하면 고뇌가 감소하는데, 굴종을 거부하면 고뇌는 증가한다.
인간 세계의 고통은 인격의 탄생과 인간 자신의 본성을 위한 투쟁에 있다.
심지어 동물계의 개체도 고통이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고난을 야기한다.
만일 사람이 자유를 거부한다면 고난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곧, 인격성은 다시 말하면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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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Peguy는, 개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정복하도록 요청받은 자신 속의 부르주아라고 말하였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고독의 경험을 견디고, 자아 중심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함입되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기를 지키면서 살기 위한 괴로운 투쟁을 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는 순응주의에 의해서, 또한 적응에 의해서 곤란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모색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 곧, 같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폐쇄를 극복하고, 자기 속에 하나의 우주를 전개하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립과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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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으로 인격은 신적 인간성을 통해서 힘을 얻고 해방을 얻는다.
외면적으로 전체세계와 모든 사회와 모든 역사는 인간성과 인격의 궁극성을 통해서 변화되고 해방된다.
공동성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객체화가 아니고, 그것은 인격을 객체화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인격성은 신-인간성God-humanity이어야 하고, 사회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사회와 역사과정에서의 신-인간성의 객체화는 오류와 노예성의 기원이다.
그리것은 인간인격성의 존엄과 자유와 모순되는 인격의 객체적 계층주의hierarchism를 만들어냈다.
거룩함sacredness의 그릇된 관념의 성립이 이것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예속의 여러 가지 형태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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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성격character과 결합한다.
강력한 인격은 표방된 성격이다.
성격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 원리의 승리이다.
그 승리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형태에서의 승리이며, 이 형태는 인간의 영혼-육체 구조soul-body constitution아 결합되어 있다.
성격은 자기를 지배하는 위력의 소유자이며, 그것은 자기에게 대한 예속에의 승리,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예속에의 승리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승리이다.
성격은 무엇보다도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기질temperament은 하나의 자연적인 재질이며, 성격은 정보와 일의 성취에서 얻은 것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불안Angst과 공포Furcht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언어 용법에 상대적인 구별이 있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구별했다.
공포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위험과 일반적인 체험의 일상적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반면에 불안은 경험적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신비에 직면하거나 초월적 심연에 직면하며 미지의 것에 직면했을 때에 불안을 일으킨다.
공포는 염려와 고난의 두려움과 운명의 타격과 연관된다.
공포는 보다 드높은 세계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다 낮은 지평에 관심을 갖고 경험적인 것에 결박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은 초월자에게 직면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사랑이 영원과 직면하고 운명에 대면할 때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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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안과 공포뿜만 아니라 또 동경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동경은 공포보다 불안에 가까운 데, 그것 고유의 자기 특성을 갖는다.
동경은 위험을 통과할 때에 체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경은 확실히 염려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동경은 염려를 가볍게 한다.
동경은 위쪽을 향하는 것으로 인간의 보다 높은 본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유기遺棄와 고독과 세계에서의 소외에 내맡겨져야 한다.
이런 모든 것에서부터의 자기 소외를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통렬히 고뇌를 일으키는 것은 없다.
인격이란 그 발전의 도상에서 이 체험을 통과한다.
동경 속에는 무엇인가 초월자와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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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과 종은 상호관계적이다.
쌍방 모두 상대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인은 자신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
자유인은 자신과 반정립에 있는 어떤 것과도 상관관계 없이 자기 속에 자신의 특성을 갖는다.
상전은 자신에 대한 실재적 의식이지만, 그 의식이 어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노예를 통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다.
상전의 의식이 어떤 타자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노예의 의식은 자기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자유인의 의식은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인데, 그것은 자기에게서 타자의 모든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의미를 동반한다.
노예 상태의 경계성은 자유의식의 결핍 여부 바로 그 선인 것이다.
노예의 세계는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다.
외면화exteriorization는 노예의 근원이며, 자유는 내면화interiorization이다.
노예는 항상 소외, 인간성을 외면적인 것에 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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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성의 근원은 항상 객체화에 있다.
즉, 외면화이며 소외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노예성이다.
즉 지식 획득, 도덕, 종교, 예술, 정치적 삶, 사회적 삶 등에서 노예성을 끝내는 것은 객체와에 대한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예성을 종결짓는 것은 주인의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 된 지위는 노예성의 반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전이 될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타락은 무엇보다도 그가 폭군이라는 사실 속에서 대부분 표현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큰 규모가 또는 작은 규모 속에서, 국가 혹은 세계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가족 속에서, 점포 속에서, 사무실 속에서, 대단히 미미한 지위를 차지하는 관료적 기구 속에서 인간은 폭군 노릇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 속에서 자기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주위의 사람들 위에서 폭군 역할을 하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증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사랑 속에서도 폭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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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의 의지 곧, 제국주의적 의지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립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옹호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적 의지는 인간에 대한 강제를 결행하는 일을 고조시키고, 그것을 인간이 달성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권력의 현실적 문제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히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다.
사람들이 강압에 저항할 때, 권력에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눈살을 거칠고 휘둥그렇게 뜨는 강압적인 태도를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을 폭행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인다.
그러나 인간 생활에는 잘 분별할 수 없는 더욱 세련된 강압 형태가 많이 있다.
심리적 강압은 신체적 강압보다 훨씬 더 혹독하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것은 신체적인 강압의 결과만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암시 곧, 어린애 때부터 받은 암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즉 양육 방법으로 자유를 빼앗고, 판단의 자유에 대한 능력을 빼앗아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돈은 독립을 준다.
그러나 돈의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끔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을 갖고 있는 사람도 예속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예속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자주 목격된다.
맘몬의 왕국the Kingdom of Mammon에서 인간은 노동 팔기를 강요당한다.
그래서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노동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은 적이 없었다.
비교론적으로 말해서 숙련공의 노동은 좀 더 자유롭고, 지적 노동도 그렇지만, 그것들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횡포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대중은 노예적인 노역 속에, 강제 속에,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노동 속에, 공산주의 사회의 형태에 준한 억압 사역bond-service 속에 복역해왔다.
노동의 형식만 변하였을 뿐 인간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은 수동성passivity이다.
노예성에 대한 승리는 창조적인 능동이다.
실존적 시간 안에서만이 창조적 능동은 계시된다.
역사적 능동은 객체화이며, 인격의 핵심에 성취된 것의 투영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 앞에서나, 민족 앞에서나, 혁명 앞에서나, 보편적 의의를 자부하는 어떠한 객체적 통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신은 해방자이다.
신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신학과 신학의 매혹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상숭배가 신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적인 사회적 관계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로 옮겨진 것이다.
객체적 세계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는 객체로서 이해된 신은 인간 예속의 근원이 되었다.
객체로서의 신은 절대가 된 최고의 자연적 세력 곧, 절대가 된 지배성 중 최고의 힘이다.
자연에서 결정성이라는 것은 사회에서의 지배성이다.
그러나 모든 객체화의 밖에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신은 사랑과 자유이며, 결정성이 아니고, 지배성이 아니다.
신 자신이 자유이며, 그는 자유만을 준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절대자가 아니다.
신은 창조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또 인간에 대해서 상관적이다.
신 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사상의 극한적 배후에 깊이 들어가서 정신적 경험의 영역 안에 철학이 불완전하게 합리적으로 절대자라고 이름붙인 파악하기 어려운 신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신 자체를 절대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자기를 감추지 않는 신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신을 군주적 존재로 받아들일 때 신학적 매혹과 예속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종교적 예속과 신에 대한 예속과 교회에 대한 예속 곧, 신의 노예적 관념과 교회의 노예적 관념에의 예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속의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태이다.
또 그것은 인간을 예속하는 근원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객체, 일반자와 외재성, 소외에 대한 예속이었다.
신비론자가 인간은 신에게서도 자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밟고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모든 형태에서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반인격주의이며, 인격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불가피하게 승인하고, 인격 속에 사회적 유기체의 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보편주의이며, 객체화의 결과이고, 외부적인 것에 투입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인격에서 추상되고, 인격은 이것에 굴종한다.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항상 계층적이다.
이것은 오류이며 인격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사회는 인간의 인격보다 고도의 계층적 단계의 인격인 양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노예화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의 유기적인 이상은 곧, 노예화하는 허위이다.
이것은 사회의 매혹이며 우주의 매혹에 버금하는 것이다.
사회는 실로 유기체가 아니고 사회는 협동적 행위이다.
사회의 유기적 관념은 노예화하는 의식의 환상이며, 외재화의 산물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는 우주를 본떠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본떠야 할 것인즉 곧, 계층주의의 모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인격주의의 모형을 따라야 하고, 결정적인 것을 본뜨지 말고 자유를 본떠야 하고, 힘과 강자의 지배 모형에 의하지 않고 심정의 연대성과 자비의 모형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만이 노예적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자유의 근원은 사회 속에는 있을 수 없다.
인간적 자유의 근원은 정신 속에 있다.
사회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정신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그 개인적인 행위에 의해서 객체화의 세계를 파괴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다만 세계로부터 내면적인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객관화의 세계의 파괴는 사회적인 행위이며 역사적인 행위이다.
이 의미는 인간 사이에서 정신적 공동체의 최고도의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세계는 별천지가 되고 지식도 다른 지식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완전한 정신에 의해서만 규명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객체화된 세계의 여러 조직에 봉사할 수는 없다.
종말론적 전망은 그 자신이 '지식론적'인 사회학적 해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객체화의 최후의 극복과, 객체 세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객체 세계의 형태 중 하나인 사회 세력에서의 해방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종말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아마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종말로 향하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문명화된 야만주의'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시적인 야만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이 야만주의 속에는 '자연'이 아니고 기계와 기계주의의 냄새가 난다.
산업적 기술적 문명은 더욱 증대해가는 야만주의의 질적 몰락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명화된 야만주의 속에는 어떤 종류의 '자연'에로의 복귀도 없다.
문명인 속에는 야수와 야만인이 때때로 눈을 뜨는데, 그것은 문명에 의해서 변화된 형태 곧,  타락된 형태에서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노예성에 관한 마지막 진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 세계의 노예에 빠지는데, 자기의 외재화에 대한 노예성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우상의 종'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이다.
인간은 항상 말하자면 자기의 밖에 있는 요인과 자기에게서 소외되면서도 노예성의 내면적 근거에 의해 노예가 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투쟁은 외부적인 객체화된 외재화의 세계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적인 정신적 투쟁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에서 직접 기인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싸움은 인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 속에서 행해지고, 이 투쟁은 객체적 세계 속에 투영된다.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이 노예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며, 자신을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굽실굽실 잘 받아들인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노예성은 객체적 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로서 특색지어진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노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노예현상학의 최후적 진리는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예성은 의식의 한 구조이며, 의식의 객체적 구조의 일종이다.
'의식'은 '존재'를 결정하고, 다만 2차적 과정에서 '의식'이 존재에의 예속에 빠져버린다.
노예적 사회는 인간의 내면적 노예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환상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데, 이 환상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의식처럼 보인다.
이 환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탐색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실존에는 관념의 노예화라는 변증법이 있다.
그것은 실존적인 변증법이며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그런 관념의 기초 위에 서서 자기를 긍정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폭군이 된다.
이 관념의 폭군제는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체제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종교적 국가적 사회적 제반 관념은 노예 제조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이 반동적 내지는 혁명적 관념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사정은 같다.
기묘한 방법에 의해서 관념은 자아 중심적 본능의 봉사에 들어가고, 자아 중심적 본능은 인간을 모멸로 다루는 관념의 봉사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내적 외적 노예성이 항상 승리를 거둔다.
자아 중심적 본능은 항상 객체화의 힘이 된다.
세계를 자기 봉사의 도구로 보는 것 때문에 이기주의자는 항상 자기를 외부적 세계에 투입하고 거기에 종속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이 개인주의의 매혹의 형태를 취하는 일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간단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이것은 적극성 및 소극성의 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격주의가 종종 개인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처럼 말의 용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성격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경우와, 그의 판단이 독립적이며 독창적이며 자유이든가, 그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에 뛰어나 있든가, 자기 속에 고립해 있으면서 교제를 좋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모멸자 또는 자아중심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인격의 가장 드높은 가치의 긍정과 생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정신적 원리만이 정신적 생활의 통일을 유지하고 인격을 건설한다.
인간이 노예화의 힘에 대해서 다만 분열된 요소만을 대치시키고 완전한 인격을 갖지 않을 때 그는 노예성의 가장 다양한 형태에 빠지고 만다.
인간에 대한 노예성의 내적 근원은 인간의 분열된 제반 부분의 자율성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은 내적인 중심의 상실과 더불어 나아간다.
부분으로 분해된 인간은 용이하게도 공포의 일시적 발광 상태에 굴복하지만, 공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성의 상태에 잘 가두는 것이다.
공포는 통합되고 중심이 잡힌 인격과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강한 경험에 의해서 극복된다.
인간의 지성적, 감성적, 감각적 요소는 공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인격은 전체이지만 여기에 대치되어 있는 객체화된 세계는 부분적이다.
그러나 통합된 인격과 최고의 실존의 상만이 객체화된 세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을 보일 완전한 전체로서의 자기를 자각할 수 있다.
자신을 노예로 삼는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은 항상 분열과 분해를 의미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고독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곧, 내면적 보편주의가 객체화된 보편주의와의 투쟁을 경험하는 '창조적인 인격의 고독'과 개인주의자가 사실 속해 있는 객체체화된 보편주의에 대립하여 설정한 '자기황폐와 무능의 고독'이다.
즉, '내적 풍요의 고독'과 '내적 공허의 고독'이다.
영웅주의의 고독과 패배주의의 고독이다.
힘 있는 고독과 약한 것의 고독이다.
자기을 위해서 수동적인 미적 위안 이외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고독은 원칙적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자연주의적 철학이자만 인격주의는 정신의 철학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한 노예성에서와 외적 세력에 의한 노예화에서의 해방은 자아로부터, 자기를 노예화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이기성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향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내재화해야 하며, 또한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 세계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인 존재여야 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 역사에서 최대의 유혹은 통치권sovereignty을 행사하려는 유혹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매우 강력하게 노예화하는 힘이 숨어 있다.
통치권의 유혹에는 역사상 심히 많은 종류의 형태가 있다.
이 유혹들은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 유혹은 역사상 사람에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적 양심이 직면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는 극히 단순한 초보적인 양식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곧, 국가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복음서에서는 이 문제는 가야바Caiaphas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한 국민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도 한 사람이 국민을 위해서 죽는 것이 낫다.' 이 말에 의해서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가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는 항상 이 가야바의 말을 반복한다.
그것이 국가의 신앙고백이다.
정치가는 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또 그 세력의 증대를 위해서 죄 없는 인간이 죽는 것이 좋다거나 또 죽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찬성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난다.
국가 위에 새겨진 이 악마적인 낙인은 국가가 늘 그리스도의 사형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진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운명이다.
동일한 문제가 드레퓌스 사건Dreyfus case에도 있었다.
그때 나온 문제는 '죄 없는 인간이 프랑스의 국가 및 군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처벌되어도 좋다'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제를 명예의 문제 곧, 국가의 도덕적 양심의 문제로 삼은 것은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명예가 되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국가는 권력과 공포에 의해서  그 모습이 꾸겨져 있었다.
국가는 공포심을 고무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고통을 당한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비참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
특히 공포심에 사로잡힌 정치적 권력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최대의 폭력과 잔인성을 휘두르는 것은 실로 이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폭군은 항상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의 악마적인 원리는 원력의지에 의할 뿐만 아니라 공포심에 의한 것이다.
자유란 공포를 이기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이 공포를 느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포를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 사상의 위대한 점은 공포심에서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해방하려는 소망에서도 볼 수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당국자와 인민은 상호 의존과 노예성의 상태에 있다.
'지도자 정신'leadership의 이념은 인격 원리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서 역시 상호적 노예성의 한 형태이다.
'지도자'라는 자는 지도자에게 끌려가는 인민과 같은 정도로 노예이다.
그러나 국가가 가장 염기할 특징과 또 국가 권위의 원리에서 나오는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관료주의이다.
어떤 국가도 피할 수 없는 관료주의는 그 세력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고 스스로를 인민의 공복으로 생각하지 않고,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실로 치명적인 경향을 가진 것이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중앙집권 과정의 산물이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당파에 까지 파고들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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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의열단이나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영화-'암살' 그리고 '밀정'-를 통해 그동안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관심을 얻는 듯 하다.

이러한 공감과 관심으로 의열단과 약산 김원봉을 찾게 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이다.

즉, 쉽게는 의열단으로 시작하여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하여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으며,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일부는 한국광복군으로 성장하였다.

이렇듯이 조선의용군이나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짐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전선으로 시작한 민족혁명당도 과정을 유심히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첫째, 백범 김구 쪽-한국국민당-의 불참여와

둘째, 이청천 쪽-조선혁명당-와 조소앙 쪽-한국독립당의 탈당이다.

셋째, 최창익과 한빈으로 대표하는 조선청년전위동맹 측과의 다소의 갈등 상황이다.

이런 통일전선을 향한 과정을 작가인 강만길 선생은 많은 자료-흔히 각주로 표시되는 -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첨부와 인용된 자료로 인해 현미밥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거칠지만 몸에 좋은 이유에서이다.

덕지덕지 붙은 각주로 인해 글의 신뢰는 물론이요 배움 또한 넓어진다.

다만 첨부된 1930년대에서 40년대의 글이 많이 어렵고 많이 낯설을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겪는 독립운동가들의 실명과 가명의 중복이 혼동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만든 조선민족혁명당을 바로 알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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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중 어떤 것은 정확성 때문에, 또는 더 좋고 훌륭한 대상들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영혼에 관한 탐구를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영혼)에 관한 지식은 모든 진리, 특히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들의 제일원리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사랑과 미움, 분노, 온순함, 공포감, 동정심, 용기, 그리고 즐거움 등과 같은 영혼의 모든 영향받음은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과 동시에 신체도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강하고 분명한 영향받음이 발생할 때, 아무런 노여움이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때로는 화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신체가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사소하고도 불분명한 원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움직여지기도 한다.
(그런 사실을 입증할) 훨씬 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때로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이 전혀 없이도 공포감을 느낄 때와 같은 영향받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영혼의 영향받음들은 질료 안에서 실현된 형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향받음)들은 그런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영혼이 우연하게 신체(의 옷을) 입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신체는) 그 자신의 형상과 형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수의 기술이 피리 안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술은 (그 자신의) 도구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영혼은 (그 자신의) 신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일종의 조화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조화는 상반자(相反者)들의 혼화 또는 합성이며, 신체는 상반자들로부터 합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는 혼합된 (요소)들의 비율 또는 합성인 반면에, 영혼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다.
운동을 유발하는 것은 조화가 아니며,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조화라는 단어를 영혼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보다 건강 또는 전반적인 신체의 '훌륭한 기능 수행들'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러한 부적절함은) '영혼의 영향받음'과 기능들을 일종의 조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영혼이 원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인식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움직여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도 참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영혼은 한편 으로는 인식, 감각, 의견 형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망과 희망을 (포함한) 욕구 일반이다.
또한 생물의 장소운동은 영혼에 의해 (생성되며), 성장, 성숙, 그리고 쇠퇴도 영혼에 의해 야기된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것은 영혼 전체에 속하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감각하고,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등의 (기능을 하는) 것은 (영혼) 전체가 하는 것인가, 또는 (각각) 다른 부분들이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인가?
생명은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 안에 있는가 또는 다수의 (부분)들이나 모든 (부분)들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의) 이유인가?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 부분들을 가지며, 어떤 하나의 부분으로는 생각하고 다른 부분으로는 갈망한다고 말한다.
만약 영혼이 부분들을 갖는다면, 그 영혼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 그것이 신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대로, 영혼이 신체를 단일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혼이 신체를) 떠나면, (신체는) 해체되고 부패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그것(영혼)을 단일하게 만드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일 것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스스로에 의한 영양섭취', 성장, 그리고 쇠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공유하는 모든 자연적 실체는 합성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는) 생명을 가지는 신체이므로, 신체 (그 자체가) 영혼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는 어떤 (다른) 주체를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가) 주체 또는 질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혼은 반드시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실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여야 한다.
그리고 실체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영혼은) 그런 신체의 현실태일 것이다.
(현실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지식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숙고이다.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잠을 잠'과 '잠에서 깸'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깸'은 숙고와 유사한 반면에, '잠을 잠'은 '(지식)의 소유'와 유사하며, '그것의이용'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숙고보다) 지식이 먼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제일 현실태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은 '기관들을 가지는' (신체)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눈동자와 시력이 눈을 (구성)하듯이, 영혼과 신체는 생물을 (구성)한다.
따라서 영혼은, 그리고 만약 (영혼의) 부분들이 있다면, 그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의) 부분들의 현실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리를 막는 어떤 (부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부분들이 어떤 신체의 현실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이 신체의 현실태라는 것이 선원과 배의 (관계와) 같은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이것이 영혼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자 개요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말해진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가 구분했던 바와 같이 세 가지 의미에서 (신체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운동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능동인 또는 작용인)', '무엇을 위해(목적인)', 그리고 '영혼을 가진 신체의 실체로서(형상인)' (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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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리랑을 처음 읽게 된 시기는 200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용은 잊어만 갔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건 내용을 읽으면서 솟구치는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이란 이런 것이었다.

첫째, 우당 이회영 선생은 누구일까?

둘째, 우당 선생님이 따른 '아니키즘'은 무엇일까?

셋째, 약산 김원봉은 누구일까?

넷째, 약산이 이끈 '의열단'은 무엇일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입장에서 이 호기심의 대상들은 한번도 본적도 없고, 들었던 적도 없었다.

이 작은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하나하나 찾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이, 이 호기심이, 이 궁금증이  철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역사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그래서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은 어쩌면 스승 같은 존재이다.

소설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보다 더 수준 높은 독서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도, 아니키즘도, 약산 김원봉도, 의열단도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

적어도 과거 이들의 정보조차 전혀 없었던 나에게는 반가울 뿐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들이 schema-배경지식-가 되어 읽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노선과 인물들의 성격을 과거의 나보다는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 아리랑의 배경무대인 김제에는 '아리랑문학관'과 '아리랑문학마을'이 있다.

이 두 곳을 가본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아리랑'을 다시 펴보고 싶을 것이다.

18년이 지나 다시 읽은 나처럼 말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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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를 처음 접하게 되는 가장 큰 구절은 아마도 공지영 작가님이 쓰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소설의 제목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SNS나 인터넷 혹은 몇 분들의 개인 블로그나 감성이 충만한 분들이 올리거나 읊는 하나의 시 때문이 아닐까?

그 시는 이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아름다운 시 아니 불경이 숫타니파타 속에 있다.

나는 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 덕분에 숫타니파타를 읽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숫타니파타를 읽게 되면서 놀라움을 갖게 되는 요인은

첫째, 불교 경전이 아니라 하나의 시집이다.

詩(시 시)는 言(말씀 언)과 寺(절 사)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숫타니파타와 같은 이러한 불교 경전으로 인해 '시'라는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둘째, 초기 경전의 단순함과 순수함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군더더기 없이 녹아들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사견들이 덕지덕지 붙기 마련이지만, 이 숫타니파타는 주제가 단순하다.

그래서 순수하다.

셋째, 경전의 한글화이다.

보통 경전이라 함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따라서 의미나 뜻을 모르는 체 주구장창 목탁 치며 읊어댄다.

물론 의미 전달을 쉽게 하기 위해 노력하신 법정 스님이나 몇몇의 다른 분들-전재성 님-의 덕분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순수한 경전을 우리 독자들은 한글로 쉽게 더 많은 불교 경전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 하는 불경 따위 읊어대는 불교의 방식을 많이 비판한다.

물론 경전의 불교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심히 읽어보면 아직도 어려운 단어, 알 수 없는 단어가 많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등.

 

이러한 접근이 쉽지 않은 아쉬움이 많기에 이 '숫타니파타'라는 책은 각별하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배울 점 많은 불교의 핵심교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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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의의는 지은이가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에게 직접 들은 후 썼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박태원으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과 '천변풍경' 등을 쓴 소설가이다.

이 소설가 박태원이 해방 후 귀국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와 유자명이 쓴 '의열단간사' 그리고 의열단원들의 편지와 신문기사를 참고해서 썼다고 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인터뷰가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의열단 자체가 워낙 비밀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부족한 점이다.

따라서 김산이 말하고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이나 단원들이 이야기 한 의열단의 이야기는 어쩌면 파편적인 정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단체의 지도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정보의 고급성 아닐까?

의열단을 직접 만들고, 직접 계획하고, 직접 행동한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 점, 이 하나만으로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약산과 의열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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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그의 부인인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에 의해서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즉, 중국의 지도자보다는 항일 혁명가들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투쟁 속에서 그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들을 맨 처음 찾아가고, 맨 처음 인터뷰했으며, 맨 처음 관찰한 것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 많은 부분이 알려졌지만, 작가인 에드거 스노가 쓰기 전에는 그들의 기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 그리고 지도부에 대한 맨 처음, 시초, 시작 등으로 보면 된다.

 

내용에 대해서 특히 흥미를 갖게 하는 건, 모택동이나 주은래 등 지도부들의 주민에 대한 자세이다.

마치 탈권위의 실증 그 자체인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옆집 아저씨나 동네 형과 같은 모습으로 주민들 혹은 나이 어린 병사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모습이 적어도 나에겐 강력한 흥미를 주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에 의해서 중국민들의 지지와 호감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중국 공산당의 파편적 지식은 모택동의 독재적인 모습이었다면,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탈권위적 평등 사회 그리고 초기 조직의 순수함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평등과 순수함만으로 이 책을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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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가 말했다.
"옛날 성인들은 음陰과 양陽을 근거로 해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
모든 형체를 지닌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기 때문이다.
'태역'이란 것은 기운(氣)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란 것은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시'란 것은 형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소'란 것은 성질(質)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기운과 형체와 성질이 갖추어졌으되 서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을 혼동 상태(渾淪)라 말한다.
혼돈 상태란 만물이 서로 혼돈을 이루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역易이라 말하는 것이다.
'역'에는 형체와 한계가 없다.
'역'이 변하여 일一이 되고, '일'이 변하여 칠七이 되며, '칠'이 변하여 구九가 된다.
'구'로 변화한 것은 끝머리에 이른 것이어서, 곧 다시 변하여 '일'이 된다.
'일'은 형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서 땅이 되고, 중간의 조화를 이룬 기운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정기를 품고 있고, 만물은 변화하고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정신精神이란 하늘의 몫이요, 육체란 땅의 몫인 것이다.
하늘에 속하는 것은 맑고 흩어지는 것이며 땅에 속하는 것은 탁하고 모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은 형체를 떠나서 각각 그의 참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귀신(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귀신이란 돌아간다(歸, 鬼와 같은 음)는 뜻으로서 그의 참된 위치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자공이 배움에 싫증이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쉴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에는 쉴 곳이란 없는 법이야."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면 불룩하고 우뚝하고 봉곳하고 불쑥한데 그 곳이 쉴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위대하다, 죽음이여! 군자는 쉬게 되고 소인은 굴복을 하게 되는 것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사賜여, 그대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은 알지만 삶의 괴로움은 알지 못 한다.
늙음의 고단함은 알지만 늙음의 편안함은 알지 못 한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이 쉬는 것임은 알지 못 하고 있다."
#열자 #열어구 


안자晏子가 말했다.
"훌륭하다. 옛날부터 있어 온 죽음이여!
어진 사람은 휴식을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굴복을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람의 덕德이 귀착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 말했다.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된다.
길을 가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자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온 천하 사람들이 집을 잃으면 비난할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형체입니다.
생명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기운이 조화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따라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자손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변화의 껍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다니면서도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지탱하는 강한 양陽의 기운인데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가 물었다.
"타고난 바탕대로 시작한 것이 습성으로 발전하고 천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육지에서 나서 육지에서 안심하고 지냈는데 이것이 바탕입니다.
다시 물에서 자라나 물에서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습성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는 까닭도 모르면서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그것이 천성입니다."
#열자 #열어구 


그러므로 옛날 말에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부드러움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했다.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곧 위태로워질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를 지키면 어떤 사람을 이기는 일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이러한 도를 지키면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기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고 맡아 다스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맡아 다스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열자 #열어구 


깨어 있는 것에는 여덟 가지 징험이 있고 꿈을 꾸는 것에는 여섯 가지 징후가 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징험이라 말하는가?
첫째는 일하는 것,
둘째는 행동하는 것,
셋째는 무엇인가 얻는 것,
넷째는 무엇인가 잃는 것,
다섯째는 슬픈 일을 당하는 것,
여섯째는 즐거운 일이 있는 것,
일곱째는 살고 있는 것,
여덟째는 죽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징험은 형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무엇을 여섯 가지 징후라 말하는가?
첫째는 올바로 꾸는 꿈,
둘째는 놀라 깨는 꿈,
셋째는 무엇을 그리워하는 꿈,
넷째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꾸는 꿈,
다섯째는 기쁜 꿈,
여섯째는 두려운 꿈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징험은 정신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한 물체가 차고 비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변화로 통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일을 통해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음기陰氣가 강하면 곧 큰 강물을 건너면서 두려워하는 꿈을 꾼다.
양기陽氣가 강하면 곧 큰 불 속을 지나면서 데는 꿈을 꾼다.
음과 양의 기가 모두 강하면 곧 남을 살려 주거나  죽이는 꿈을 꾼다.
매우 배부를 적에는 남에게 주는 꿈을 꾸고 매우 배고플 적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뜨고 허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마음이 가라앉고 실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물에 빠지는꿈을 꾼다.
허리띠를 깔고 자면 곧 뱀을 꿈에 보게 된다.
날아가던 새가 와서 머리털을 물면 곧 날아 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날씨가 음산해질 때에는 불을 꿈꾸게 되고 병이 나려 할 때에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 술 마시는 사람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고, 꿈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통곡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하 굽이의 지혜가 많다는 영감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렸다.
"당신의 똑똑하지 못한 짓은 너무 하오!
늙은 나이에 가진 힘으로는 산의 터럭 하나 정도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인데 산의 저 많은 흙과 돌을 모두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북산의 우공은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신 마음이 굳어 있어 굳은 생각은 본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과부된 부인의 어린 아들만도 못 하구려.
비록 나는 죽게 된다 하더라도 자식은 남아 있소.
내 자식은 또 손자를 낳을 것이고 손자는 또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손자를 낳아서 자자손손이 영원히 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은 더 불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평평해지지 않으리라 걱정을 하십니까?"
#열자 #열어구 #우공이산 #愚公移山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복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지 못하는 것도 하늘이 내린 벌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데, 사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게 된다.
그렇지만 사는 사람을 살게 하고 죽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모두가 운명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열자 #열어구 


운명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없고, 이치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차이가 없으며, 마음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거스르거나 순종하는 차이가 없고, 본성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편안함과 위태로운 차이가 없다.
곧 이것을 일컬어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일도 없지만 완전히 자기를 맡기지 않은 일도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도 성실한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제黃帝의 책에 씌여 있다.
"지극한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과 같고 움직이는 것은 기계와 같다.
또한 가만히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움직이는 까닭도 알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여러 사람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 일도 없다.
홀로 갔다 홀로 오며 홀로 나갔다가 홀로 들어오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태곳적 사람들은 사람의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면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예로도 권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본성을 따라 노닐며 만물이 좋아하는 일을 거스르지 않고, 죽은 뒤의 명예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은 형벌로써도 어찌 하는 수도 없었다.
명예에 앞세우고 뒤로 미루는 것과 오래 살고 짧게 사는 일에 대해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열자 #열어구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다.
어진 사람과 성인도 역시 죽게 되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게 된다.
살아서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같은 훌륭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만 남는다.
살아서는 걸桀왕이나 주紂왕 같은 포악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가 된다.
썩은 뼈만 남게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지냈고, 자공子貢은 위衛나라에서 재물을 모았다.
원헌의 가난함은 삶을 손상시켰고, 자공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몸에 해를 끼쳤다.
그러니 가난한 것도 안 되지만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만 괜찮은가?
삶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몸을 편안히 하는 사람은 재물을 모을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일 때문이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명예, 셋째는 지위, 넷째는 재물이다.
이 네 가지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며 위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두고서 '자연의 이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목숨을 다루는 이는 밖에 있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거늘 어찌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귀함을 뽐내지 않거늘 어찌 명예를 부러워하겠는가?
권세를 추구하지 않거늘 어찌 지위를 부러워하겠는가?
부를 탐하지 않거늘 어찌 재물을 부러워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그와 대적할 것이 없고 목숨을 다루는 힘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는 말에 '사람이 결혼과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정욕이 반은 없어지고 사람이 입고 먹는 일에 쫓기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어진다' 했다.
#열자 #열어구 


열자가 호구자림壺丘子林에게 배웠다.
호구자림이 말했다.
"그대가 남보다 뒤지도록 처신할 줄만 안다면 곧 처신을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자가 말했다.
"남보다 뒤지게 처신한다는 데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대의 그림자를 뒤돌아보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열자가 자기 그림자를 뒤돌아보니 자기 몸을 굽히면 곧 그림자도 굽고 몸을 곧게 세우면 곧 그림자도 반듯해졌다.
그러니 굽고 곧은 것은 몸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림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히고 곧게 세우는 것을 남에게 맡겨 두고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남보다 뒤지게 처신하면서도 남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시씨가 말했다.
"무릇 때를 얻은 사람은 잘 되고 때를 잃은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쓴 방법은 우리와 같은데도 결과가 우리와 다른 것은 때를 잃었기 때문이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천하의 이치는 언제나 옳은 게 없고 일은 언제나 그른 게 없습니다.
전날에는 잘 쓰이다가도 지금은 버려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버려지다가도 뒤에는 잘 쓰이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쓰이고 쓰이지 않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일정하게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틈을 타고 때를 만나서 일에 원만히 대응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지혜가 진실로 부족하다면 당신이 공자처럼 학문을 지녔고 여상呂尙과 같은 술법을 지녔다 하더라도, 어느 곳을 가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의 힘은 나라의 성문 빗장 기둥을 뽑을 수 있었지만, 힘으로는 유명해지려 들지 않았다.
묵자는 공수반公輸般의 공격을 막아 그를 굴복시켰으나, 병법으로 이름을 날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리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한 거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심도자가 말했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게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많음으로써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것이오.
학문이란 근본이 다른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근본이 여러 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학문을 하는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오.
오직 결과가 같아서 동일한 곳으로 돌아가야지만 얻고 잃은 게 없게 되는 것이오.
당신은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익혔으면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군요.
슬픈 일이오!"
#열자 #열어구 #다기망양 #多歧亡羊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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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수라는 사람은 손재주가 정교한 장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수의 손가락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아끼는 것은 자신에게는 이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의 소유이면서 또한 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도 크다.
귀한 바와 천한 바로 논한다면, 천자가 될 만큼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삶의 존귀함과 견주기에는 부족하다.
가볍고 무거운 바로 논한다면, 천하를 소유할 만큼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내 삶의 소중함과는 바꿀 수 없다.
편안한 바와 위태로운 바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라도 내 삶을 잃으면 결코 다시 돌이켜 얻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도 있는 사람들은 늘 신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신중히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과 생명의 실질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전체가 함께 함을 반드시 맨 앞으로 내세웠으니, 전체가 함께 하면 천하가 화합된다.
화합은 전체가 함께 함으로부터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옛날의 기록을 한번 보면, 천하를 얻은 자와 천하를 잃은 자가 많은데, 그들이 천하를 얻은 것은 오로지 전체가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천하를 잃은 것은 오로지 사사로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천하는 임금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천하이다.
음양의 조화는 어느 한 부류의 사물만을 편애하여 자라게 해주지 않고, 단 이슬과 때에 맞는 비는 어느 한 사물에만 편애하여 내려주지 않으며, 천하 만민의 임금은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는다.
#여씨춘추 #여불위 


요리사는 음식의 맛을 내지만 감히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요리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요리사가 음식의 맛을 내면서 이를 먹는다면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왕자(王者)나 패자(覇者)와 같은 우두머리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닦달거리고 포악하더라도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봉지로 나누어 주므로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왕자나 패자와 같은 우두머리들이 닦달거리고 포악하면서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한다면,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어떠한 것도 나은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모자라는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은 점을 빌림으로써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보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빌리는 사람은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또한 투쟁이 비롯되어 내려온 바도 매우 오래 되었으니, 일찍이 이 투쟁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 나이 많은 자와 나이 어린 자,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더불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단지 큰 투쟁과 작은 투쟁이 있을 따름이었다.
투쟁의 기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 속에 있으면서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투쟁이고, 흘려보는 것도 투쟁이고,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는 것도 투쟁이고, 건방진 말도 투쟁이고, 밀고 당기는 것도 투쟁이고, 끌어당기고 뒤집는 것도 투쟁이고, 패지어 싸우는 것도 투쟁이고, 삼군(三軍)의 대부대로 치고 싸우는 것도 투쟁이다.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투쟁으로서 크고 작은 싸움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군대가 진실로 의롭다면, 포악한 군주들을 주살함으로써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 의로운 군대를 좋아함이 마치 효자가 인자한 어버이를 보듯 하고, 주린 자가 맛있는 음식을 보듯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환호하며 그리고 달려감이 마치 강한 쇠뇌로 깊은 골짜기에 화살을 쏜 것과 같고, 큰물이 쌓여서 막아놓은 둑을 무너뜨림과 같다.
#여씨춘추 #여불위 


이제 천금과 기장쌀을 뭉친 주먹밥을 어린아이에게 보인다면 어린아이는 반드시 주먹밥을 취할 것이다.
화씨(和氏)의 구슬과 천금을 세속의 사람에게 보인다면 세속의 사람은 반드시 천금을 취할 것이다.
또 화씨의 구슬과 도덕의 지극히 오묘한 말을 현자에게 보인다면 현자는 반드시 지극히 오묘한 말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지혜가 오묘하면 오묘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오묘하고, 어떤 사람의 지혜가 거칠면 거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거칠다고 말할 수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선비들의 신조 중에서 (선비는) 능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므로 부귀보다 더 존중되는 것이니, 어떠한 이익이나 권력도 이러한 선비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그의 뜻을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정말로 능욕을 당한다면 이들은 즐거운 삶을 영위할 것이 없다.
이 같은 사람들은 권세를 잡아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관직에 처해서도 절대로 관직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으며,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휘할 때에도 절대로 용기가 꺾이어 패주하는 일이 없다.
충신도 역시 이와 같다.
진실로 군주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롭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삶을 내팽개치는 일도 감히 마다하거나 어기지 않고서 군주와 나라를 보위한다.
나라에 이 같은 선비가 있다면 가히 인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재는 본디 얻기가 어렵지만, 사실 걱정은 얻기 어려운 선비가 있어도 이를 몰라보는 데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말은 잘하나 논리에 맞지 않고, 미덥기는 하나 이치에 맞지 않고, 용감하기는 하나 의리에 맞지 않고, 법을 잘 지키기는 하나 실정에 맞지 않으니, 이는 어리둥절한 채로 빨리 달리는 말을 타는 것과 같고, 미친 채로 오나라 간장(干將)의 명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은 반드시 이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
#여씨춘추 #여불위 


지혜의 우열은 멀리 내다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늘날이 옛날과 갖는 관계는 옛날이 그 후세와 갖는 관계와 같고, 오늘날이 후세와 갖는 관계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현재를 잘 살피고 알면 지나간 과거를 알 수 있고, 과거를 알면 앞으로 올 미래를 알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 앞과 뒤는 같은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무릇 도리에 어긋난 사람의 병은 진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세상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부질없이 얽매이는 바가 많은데, 얽매이는 바가 있으면 듣는 일이 반드시 어그러지게 된다.
얽매이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요체는 반드시 사람이 좋아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에 바탕을 둔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서쪽 벽을 보지 않고, 남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북쪽에 눈을 두지 않으니, 마음에 이미 존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가까이 하면 멀어지고 멀리하면 가까워지는 것이 있다.
때도 역시 이러하다.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없으면 천자가 되지 못 하고,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있다 하더라도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없으면 역시 천자가 되지 못 한다.
성인이 보는 때와 인사의 관계는 마치 걸음이 그림자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도 있는 선비가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은둔하여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기도 하고, 또 힘들여 일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벼슬 한번 하지 않은 위치에서 천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제후의 지위로부터 천하를 얻게 되는 사람도 있고, 낮고 천한 위치로부터 삼왕(三王)과 같은 위대한 천자들을 보필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사내의 위치에서 천자의 세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시기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명철한 군주란 만물을 빠짐없이 두루 보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군주의 도리를 소유하고 있는 군주란 모든 것을 몸소 시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이다.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는 일은 줄어들면서도 나라는 다스려지는 것이고,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임금에게로 집중되면서도 간사함은 막히게 되는 것이다.
간사함이 막히면 (유가·묵가·종횡가 등) 이단의 논설을 펴는 자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됨으로써 참 모습이 깨우쳐지고, 허위가 꾸며지지 않음으로써 일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극히 잘 다스려짐"이라고 부른다.
#여씨춘추 #여불위


남이 옮기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를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 번 이리저리 전해지다 보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는 원숭이와 같고, 원숭이는 고릴라와 같으며, 고릴라는 사람과 같지만, 사람이 개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잘못을 크게 저지르는 이유이다.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면 복이 되지만,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옮기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깊이 따져봐야 하며, 그것이 사람에 관한 것일 때에는 반드시 이치로써 사실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
#여씨춘추 #여불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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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시작하면 얼마나 열중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는 언젠가 델포이에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감히 신탁(神託)을 받아온 것이오 - 내가 말했듯이, 여러분! 떠들지 말아 주기 바라오 - 즉, 나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 그는 물은 것이오.
그러자 그곳 무녀(巫女)는 나보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준 것이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의 형제가 여러분에게 증언해 줄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은 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크든 작든 간에 나 자신이 결코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지혜 있는 자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체 신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혜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이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구나 하고 말이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은 지혜 있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리려고 애를 썼소.
그런데 그 결과 나는 그의 미움을 샀고, 그 자리에 동석해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에게 적의를 갖게 되었소.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소.

나는 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사실상 아름다움이나 선(善)을 모르고 있지만 이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모르니까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달은,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모양이다.
하고 말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럽소.
그러나 역시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말하자면 마침 그곳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인 그들보다 그 뜻을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오.
더욱이 시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이런 것을 알았소.
즉, 그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타고난 것에 의한 것이며, 신의 예언자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처럼 신의 계시로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훌륭한 말을 많이 늘어 놓지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뜻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보건대 시인들도 무언가 정치가와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시를 쓴다는 것을 믿고 다른 일에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건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인간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정치가들에서 느낀 것처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한테서 떠나온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래서 나는 신탁을 대신하여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소.
어느 쪽을 나는 택해야 할 것인가,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지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이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편이 나를 위해서 좋다고 결론지었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지혜는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지혜가 있는 자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탁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는 신을 도와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나랏일이건 집안일이건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할 여가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는 있소만, 이것도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나 자기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고 학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흔히 말하듯이, '천상의 일과 지하의 일을 가르친다' 든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든가, '비리(非理)를 강변한다' 든가 하는 말을 지껄여 대는 것이오.
그것은 즉, 생각건대 그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가 보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무엇을 아는 체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오.
그 사람들은 명예심만은 강하니까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이고 설득적으로 나에 관한 말을 하고,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중상으로 여러분의 귀를 가득 채워 버리고 만 것이오.
멜레토스가 나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도, 아니토스나 리콘이 나를 공격한 것도 다 이것이 원인이었으며, 멜레토스는 작가들을 대신해서, 아니토스는 장인들과 정치가를 대신해서, 리콘은 변론가의 입장에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처음에 한 말이오만, 지금 이렇게 거대해진 이 중상을 이런 짧은 시간에 내가 여러분한테서 제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상과 같은 것이 진실인 것이오.
나는 여러분에게 크든 작든 간에 조금도 숨김없이 얼버무리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소.
물론 나는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들의 증오는 바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이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또는 장차의 조사에서 발견하게 되겠거니와, 이것이 비방의 이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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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나를 제외한 아테네 시민 모두가 훌륭하고 착한 인간을 만들고 있지만, 나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불행을 당신에게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해 다오.
당신은 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만이 그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뿐이거나 혹은 극히 소수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다루거나 하며 그것을 나쁘게 만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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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귀신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만일 귀신이 신의 방계(傍系)의 자식들로서 님프나 그밖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여성들한테 태어난 사생아라면, 신의 자식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노새가 말과 나귀의 새끼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말과 나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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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군들이 나를 배치했던 장소를 고수했던 내가,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했을 때-나는 그렇게 믿고, 또 풀이했소만-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야말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나를 법정에 끌어내야 마땅할 것이오.
그것은 신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며, 지혜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
바로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소.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경애하고 있소.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신에게 복종하겠소.
그리고 나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충고하고 내 소신을 밝히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때의 내말은 평소의 내 말과 변함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여!
당신은 지혜에 있어서나 무력에 있어서나 가장 명성이 높고 위대한 나라 아테네 사람이면서 오직 막대한 돈을 손에 넣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소?
명성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 것을 왜 부끄러워하지 않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설득했을 그런 말이 부족해서 내가 진 줄 알고 있을 것이오.
천만에, 나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말의 부족 때문은 아니오.
오히려 후안무치(厚顔無恥)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한탄하는 등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듣고 있는 많은 일들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러분이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징벌이 내릴 거라는 것이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 것보다 제우스 신에 맹세코 훨씬 쓰라린 형벌이 될 것이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로부터 벗어나고 여러분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여러분을 심판하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오.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고 있어서 여러분은 깨닫지 못 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젊으니까 그만큼 거셀 것이며, 여러분은 또 그만큼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여러분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책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은 잘못이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명예롭지도 못한 도피법이오.
남을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편이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한 방법이오.
이상이 내게 사형의 투표를 한 여러분에 대한 내 예언이며, 이것으로 이제 작별하기로 하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른 면으로 고찰해 보더라도 죽음이 선이라는 희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소.
죽는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오.
말하자면, 전혀 무(無)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거나,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듯이, 그것은 영혼의 이동으로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주거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만일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는 일이고, 사람이 자면서 꿈 하나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이란 아주 놀랄 만한 소득일 것이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평생에 꿈도 안 꿀 만큼 숙면을 취한 밤을 골라내어 그 밖의 낮과 밤을 나란히 놓고 비교·대조하는 형식으로 관찰해서, 그런 밤보다 더 좋고 더 즐겁게 산 낮과 밤이 자기 생애에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말해야 한다면, 생각건대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대왕일지라도 그런 밤이 그렇지 않은 낮과 밤에 비해서 극히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죽음이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크게 덕을 보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모든 시간이 만일 이와 같은 것이라면, 단 하룻밤보다도 길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오.
한편, 죽음이란 여기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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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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