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가 말했다.
"옛날 성인들은 음陰과 양陽을 근거로 해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
모든 형체를 지닌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기 때문이다.
'태역'이란 것은 기운(氣)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란 것은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시'란 것은 형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소'란 것은 성질(質)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기운과 형체와 성질이 갖추어졌으되 서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을 혼동 상태(渾淪)라 말한다.
혼돈 상태란 만물이 서로 혼돈을 이루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역易이라 말하는 것이다.
'역'에는 형체와 한계가 없다.
'역'이 변하여 일一이 되고, '일'이 변하여 칠七이 되며, '칠'이 변하여 구九가 된다.
'구'로 변화한 것은 끝머리에 이른 것이어서, 곧 다시 변하여 '일'이 된다.
'일'은 형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서 땅이 되고, 중간의 조화를 이룬 기운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정기를 품고 있고, 만물은 변화하고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정신精神이란 하늘의 몫이요, 육체란 땅의 몫인 것이다.
하늘에 속하는 것은 맑고 흩어지는 것이며 땅에 속하는 것은 탁하고 모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은 형체를 떠나서 각각 그의 참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귀신(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귀신이란 돌아간다(歸, 鬼와 같은 음)는 뜻으로서 그의 참된 위치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자공이 배움에 싫증이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쉴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에는 쉴 곳이란 없는 법이야."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면 불룩하고 우뚝하고 봉곳하고 불쑥한데 그 곳이 쉴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위대하다, 죽음이여! 군자는 쉬게 되고 소인은 굴복을 하게 되는 것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사賜여, 그대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은 알지만 삶의 괴로움은 알지 못 한다.
늙음의 고단함은 알지만 늙음의 편안함은 알지 못 한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이 쉬는 것임은 알지 못 하고 있다."
#열자 #열어구 


안자晏子가 말했다.
"훌륭하다. 옛날부터 있어 온 죽음이여!
어진 사람은 휴식을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굴복을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람의 덕德이 귀착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 말했다.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된다.
길을 가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자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온 천하 사람들이 집을 잃으면 비난할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형체입니다.
생명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기운이 조화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따라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자손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변화의 껍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다니면서도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지탱하는 강한 양陽의 기운인데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가 물었다.
"타고난 바탕대로 시작한 것이 습성으로 발전하고 천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육지에서 나서 육지에서 안심하고 지냈는데 이것이 바탕입니다.
다시 물에서 자라나 물에서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습성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는 까닭도 모르면서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그것이 천성입니다."
#열자 #열어구 


그러므로 옛날 말에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부드러움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했다.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곧 위태로워질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를 지키면 어떤 사람을 이기는 일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이러한 도를 지키면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기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고 맡아 다스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맡아 다스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열자 #열어구 


깨어 있는 것에는 여덟 가지 징험이 있고 꿈을 꾸는 것에는 여섯 가지 징후가 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징험이라 말하는가?
첫째는 일하는 것,
둘째는 행동하는 것,
셋째는 무엇인가 얻는 것,
넷째는 무엇인가 잃는 것,
다섯째는 슬픈 일을 당하는 것,
여섯째는 즐거운 일이 있는 것,
일곱째는 살고 있는 것,
여덟째는 죽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징험은 형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무엇을 여섯 가지 징후라 말하는가?
첫째는 올바로 꾸는 꿈,
둘째는 놀라 깨는 꿈,
셋째는 무엇을 그리워하는 꿈,
넷째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꾸는 꿈,
다섯째는 기쁜 꿈,
여섯째는 두려운 꿈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징험은 정신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한 물체가 차고 비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변화로 통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일을 통해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음기陰氣가 강하면 곧 큰 강물을 건너면서 두려워하는 꿈을 꾼다.
양기陽氣가 강하면 곧 큰 불 속을 지나면서 데는 꿈을 꾼다.
음과 양의 기가 모두 강하면 곧 남을 살려 주거나  죽이는 꿈을 꾼다.
매우 배부를 적에는 남에게 주는 꿈을 꾸고 매우 배고플 적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뜨고 허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마음이 가라앉고 실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물에 빠지는꿈을 꾼다.
허리띠를 깔고 자면 곧 뱀을 꿈에 보게 된다.
날아가던 새가 와서 머리털을 물면 곧 날아 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날씨가 음산해질 때에는 불을 꿈꾸게 되고 병이 나려 할 때에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 술 마시는 사람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고, 꿈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통곡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하 굽이의 지혜가 많다는 영감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렸다.
"당신의 똑똑하지 못한 짓은 너무 하오!
늙은 나이에 가진 힘으로는 산의 터럭 하나 정도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인데 산의 저 많은 흙과 돌을 모두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북산의 우공은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신 마음이 굳어 있어 굳은 생각은 본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과부된 부인의 어린 아들만도 못 하구려.
비록 나는 죽게 된다 하더라도 자식은 남아 있소.
내 자식은 또 손자를 낳을 것이고 손자는 또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손자를 낳아서 자자손손이 영원히 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은 더 불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평평해지지 않으리라 걱정을 하십니까?"
#열자 #열어구 #우공이산 #愚公移山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복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지 못하는 것도 하늘이 내린 벌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데, 사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게 된다.
그렇지만 사는 사람을 살게 하고 죽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모두가 운명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열자 #열어구 


운명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없고, 이치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차이가 없으며, 마음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거스르거나 순종하는 차이가 없고, 본성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편안함과 위태로운 차이가 없다.
곧 이것을 일컬어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일도 없지만 완전히 자기를 맡기지 않은 일도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도 성실한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제黃帝의 책에 씌여 있다.
"지극한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과 같고 움직이는 것은 기계와 같다.
또한 가만히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움직이는 까닭도 알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여러 사람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 일도 없다.
홀로 갔다 홀로 오며 홀로 나갔다가 홀로 들어오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태곳적 사람들은 사람의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면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예로도 권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본성을 따라 노닐며 만물이 좋아하는 일을 거스르지 않고, 죽은 뒤의 명예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은 형벌로써도 어찌 하는 수도 없었다.
명예에 앞세우고 뒤로 미루는 것과 오래 살고 짧게 사는 일에 대해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열자 #열어구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다.
어진 사람과 성인도 역시 죽게 되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게 된다.
살아서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같은 훌륭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만 남는다.
살아서는 걸桀왕이나 주紂왕 같은 포악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가 된다.
썩은 뼈만 남게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지냈고, 자공子貢은 위衛나라에서 재물을 모았다.
원헌의 가난함은 삶을 손상시켰고, 자공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몸에 해를 끼쳤다.
그러니 가난한 것도 안 되지만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만 괜찮은가?
삶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몸을 편안히 하는 사람은 재물을 모을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일 때문이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명예, 셋째는 지위, 넷째는 재물이다.
이 네 가지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며 위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두고서 '자연의 이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목숨을 다루는 이는 밖에 있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거늘 어찌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귀함을 뽐내지 않거늘 어찌 명예를 부러워하겠는가?
권세를 추구하지 않거늘 어찌 지위를 부러워하겠는가?
부를 탐하지 않거늘 어찌 재물을 부러워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그와 대적할 것이 없고 목숨을 다루는 힘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는 말에 '사람이 결혼과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정욕이 반은 없어지고 사람이 입고 먹는 일에 쫓기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어진다' 했다.
#열자 #열어구 


열자가 호구자림壺丘子林에게 배웠다.
호구자림이 말했다.
"그대가 남보다 뒤지도록 처신할 줄만 안다면 곧 처신을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자가 말했다.
"남보다 뒤지게 처신한다는 데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대의 그림자를 뒤돌아보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열자가 자기 그림자를 뒤돌아보니 자기 몸을 굽히면 곧 그림자도 굽고 몸을 곧게 세우면 곧 그림자도 반듯해졌다.
그러니 굽고 곧은 것은 몸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림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히고 곧게 세우는 것을 남에게 맡겨 두고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남보다 뒤지게 처신하면서도 남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시씨가 말했다.
"무릇 때를 얻은 사람은 잘 되고 때를 잃은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쓴 방법은 우리와 같은데도 결과가 우리와 다른 것은 때를 잃었기 때문이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천하의 이치는 언제나 옳은 게 없고 일은 언제나 그른 게 없습니다.
전날에는 잘 쓰이다가도 지금은 버려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버려지다가도 뒤에는 잘 쓰이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쓰이고 쓰이지 않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일정하게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틈을 타고 때를 만나서 일에 원만히 대응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지혜가 진실로 부족하다면 당신이 공자처럼 학문을 지녔고 여상呂尙과 같은 술법을 지녔다 하더라도, 어느 곳을 가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의 힘은 나라의 성문 빗장 기둥을 뽑을 수 있었지만, 힘으로는 유명해지려 들지 않았다.
묵자는 공수반公輸般의 공격을 막아 그를 굴복시켰으나, 병법으로 이름을 날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리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한 거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심도자가 말했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게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많음으로써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것이오.
학문이란 근본이 다른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근본이 여러 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학문을 하는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오.
오직 결과가 같아서 동일한 곳으로 돌아가야지만 얻고 잃은 게 없게 되는 것이오.
당신은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익혔으면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군요.
슬픈 일이오!"
#열자 #열어구 #다기망양 #多歧亡羊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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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수라는 사람은 손재주가 정교한 장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수의 손가락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아끼는 것은 자신에게는 이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의 소유이면서 또한 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도 크다.
귀한 바와 천한 바로 논한다면, 천자가 될 만큼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삶의 존귀함과 견주기에는 부족하다.
가볍고 무거운 바로 논한다면, 천하를 소유할 만큼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내 삶의 소중함과는 바꿀 수 없다.
편안한 바와 위태로운 바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라도 내 삶을 잃으면 결코 다시 돌이켜 얻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도 있는 사람들은 늘 신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신중히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과 생명의 실질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전체가 함께 함을 반드시 맨 앞으로 내세웠으니, 전체가 함께 하면 천하가 화합된다.
화합은 전체가 함께 함으로부터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옛날의 기록을 한번 보면, 천하를 얻은 자와 천하를 잃은 자가 많은데, 그들이 천하를 얻은 것은 오로지 전체가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천하를 잃은 것은 오로지 사사로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천하는 임금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천하이다.
음양의 조화는 어느 한 부류의 사물만을 편애하여 자라게 해주지 않고, 단 이슬과 때에 맞는 비는 어느 한 사물에만 편애하여 내려주지 않으며, 천하 만민의 임금은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는다.
#여씨춘추 #여불위 


요리사는 음식의 맛을 내지만 감히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요리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요리사가 음식의 맛을 내면서 이를 먹는다면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왕자(王者)나 패자(覇者)와 같은 우두머리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닦달거리고 포악하더라도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봉지로 나누어 주므로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왕자나 패자와 같은 우두머리들이 닦달거리고 포악하면서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한다면,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어떠한 것도 나은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모자라는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은 점을 빌림으로써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보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빌리는 사람은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또한 투쟁이 비롯되어 내려온 바도 매우 오래 되었으니, 일찍이 이 투쟁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 나이 많은 자와 나이 어린 자,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더불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단지 큰 투쟁과 작은 투쟁이 있을 따름이었다.
투쟁의 기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 속에 있으면서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투쟁이고, 흘려보는 것도 투쟁이고,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는 것도 투쟁이고, 건방진 말도 투쟁이고, 밀고 당기는 것도 투쟁이고, 끌어당기고 뒤집는 것도 투쟁이고, 패지어 싸우는 것도 투쟁이고, 삼군(三軍)의 대부대로 치고 싸우는 것도 투쟁이다.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투쟁으로서 크고 작은 싸움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군대가 진실로 의롭다면, 포악한 군주들을 주살함으로써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 의로운 군대를 좋아함이 마치 효자가 인자한 어버이를 보듯 하고, 주린 자가 맛있는 음식을 보듯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환호하며 그리고 달려감이 마치 강한 쇠뇌로 깊은 골짜기에 화살을 쏜 것과 같고, 큰물이 쌓여서 막아놓은 둑을 무너뜨림과 같다.
#여씨춘추 #여불위 


이제 천금과 기장쌀을 뭉친 주먹밥을 어린아이에게 보인다면 어린아이는 반드시 주먹밥을 취할 것이다.
화씨(和氏)의 구슬과 천금을 세속의 사람에게 보인다면 세속의 사람은 반드시 천금을 취할 것이다.
또 화씨의 구슬과 도덕의 지극히 오묘한 말을 현자에게 보인다면 현자는 반드시 지극히 오묘한 말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지혜가 오묘하면 오묘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오묘하고, 어떤 사람의 지혜가 거칠면 거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거칠다고 말할 수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선비들의 신조 중에서 (선비는) 능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므로 부귀보다 더 존중되는 것이니, 어떠한 이익이나 권력도 이러한 선비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그의 뜻을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정말로 능욕을 당한다면 이들은 즐거운 삶을 영위할 것이 없다.
이 같은 사람들은 권세를 잡아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관직에 처해서도 절대로 관직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으며,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휘할 때에도 절대로 용기가 꺾이어 패주하는 일이 없다.
충신도 역시 이와 같다.
진실로 군주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롭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삶을 내팽개치는 일도 감히 마다하거나 어기지 않고서 군주와 나라를 보위한다.
나라에 이 같은 선비가 있다면 가히 인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재는 본디 얻기가 어렵지만, 사실 걱정은 얻기 어려운 선비가 있어도 이를 몰라보는 데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말은 잘하나 논리에 맞지 않고, 미덥기는 하나 이치에 맞지 않고, 용감하기는 하나 의리에 맞지 않고, 법을 잘 지키기는 하나 실정에 맞지 않으니, 이는 어리둥절한 채로 빨리 달리는 말을 타는 것과 같고, 미친 채로 오나라 간장(干將)의 명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은 반드시 이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
#여씨춘추 #여불위 


지혜의 우열은 멀리 내다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늘날이 옛날과 갖는 관계는 옛날이 그 후세와 갖는 관계와 같고, 오늘날이 후세와 갖는 관계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현재를 잘 살피고 알면 지나간 과거를 알 수 있고, 과거를 알면 앞으로 올 미래를 알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 앞과 뒤는 같은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무릇 도리에 어긋난 사람의 병은 진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세상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부질없이 얽매이는 바가 많은데, 얽매이는 바가 있으면 듣는 일이 반드시 어그러지게 된다.
얽매이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요체는 반드시 사람이 좋아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에 바탕을 둔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서쪽 벽을 보지 않고, 남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북쪽에 눈을 두지 않으니, 마음에 이미 존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가까이 하면 멀어지고 멀리하면 가까워지는 것이 있다.
때도 역시 이러하다.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없으면 천자가 되지 못 하고,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있다 하더라도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없으면 역시 천자가 되지 못 한다.
성인이 보는 때와 인사의 관계는 마치 걸음이 그림자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도 있는 선비가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은둔하여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기도 하고, 또 힘들여 일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벼슬 한번 하지 않은 위치에서 천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제후의 지위로부터 천하를 얻게 되는 사람도 있고, 낮고 천한 위치로부터 삼왕(三王)과 같은 위대한 천자들을 보필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사내의 위치에서 천자의 세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시기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명철한 군주란 만물을 빠짐없이 두루 보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군주의 도리를 소유하고 있는 군주란 모든 것을 몸소 시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이다.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는 일은 줄어들면서도 나라는 다스려지는 것이고,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임금에게로 집중되면서도 간사함은 막히게 되는 것이다.
간사함이 막히면 (유가·묵가·종횡가 등) 이단의 논설을 펴는 자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됨으로써 참 모습이 깨우쳐지고, 허위가 꾸며지지 않음으로써 일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극히 잘 다스려짐"이라고 부른다.
#여씨춘추 #여불위


남이 옮기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를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 번 이리저리 전해지다 보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는 원숭이와 같고, 원숭이는 고릴라와 같으며, 고릴라는 사람과 같지만, 사람이 개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잘못을 크게 저지르는 이유이다.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면 복이 되지만,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옮기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깊이 따져봐야 하며, 그것이 사람에 관한 것일 때에는 반드시 이치로써 사실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
#여씨춘추 #여불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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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시작하면 얼마나 열중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는 언젠가 델포이에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감히 신탁(神託)을 받아온 것이오 - 내가 말했듯이, 여러분! 떠들지 말아 주기 바라오 - 즉, 나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 그는 물은 것이오.
그러자 그곳 무녀(巫女)는 나보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준 것이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의 형제가 여러분에게 증언해 줄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은 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크든 작든 간에 나 자신이 결코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지혜 있는 자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체 신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혜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이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구나 하고 말이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은 지혜 있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리려고 애를 썼소.
그런데 그 결과 나는 그의 미움을 샀고, 그 자리에 동석해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에게 적의를 갖게 되었소.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소.

나는 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사실상 아름다움이나 선(善)을 모르고 있지만 이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모르니까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달은,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모양이다.
하고 말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럽소.
그러나 역시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말하자면 마침 그곳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인 그들보다 그 뜻을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오.
더욱이 시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이런 것을 알았소.
즉, 그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타고난 것에 의한 것이며, 신의 예언자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처럼 신의 계시로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훌륭한 말을 많이 늘어 놓지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뜻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보건대 시인들도 무언가 정치가와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시를 쓴다는 것을 믿고 다른 일에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건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인간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정치가들에서 느낀 것처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한테서 떠나온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래서 나는 신탁을 대신하여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소.
어느 쪽을 나는 택해야 할 것인가,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지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이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편이 나를 위해서 좋다고 결론지었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지혜는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지혜가 있는 자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탁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는 신을 도와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나랏일이건 집안일이건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할 여가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는 있소만, 이것도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나 자기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고 학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흔히 말하듯이, '천상의 일과 지하의 일을 가르친다' 든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든가, '비리(非理)를 강변한다' 든가 하는 말을 지껄여 대는 것이오.
그것은 즉, 생각건대 그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가 보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무엇을 아는 체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오.
그 사람들은 명예심만은 강하니까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이고 설득적으로 나에 관한 말을 하고,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중상으로 여러분의 귀를 가득 채워 버리고 만 것이오.
멜레토스가 나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도, 아니토스나 리콘이 나를 공격한 것도 다 이것이 원인이었으며, 멜레토스는 작가들을 대신해서, 아니토스는 장인들과 정치가를 대신해서, 리콘은 변론가의 입장에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처음에 한 말이오만, 지금 이렇게 거대해진 이 중상을 이런 짧은 시간에 내가 여러분한테서 제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상과 같은 것이 진실인 것이오.
나는 여러분에게 크든 작든 간에 조금도 숨김없이 얼버무리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소.
물론 나는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들의 증오는 바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이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또는 장차의 조사에서 발견하게 되겠거니와, 이것이 비방의 이유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고 보면, 나를 제외한 아테네 시민 모두가 훌륭하고 착한 인간을 만들고 있지만, 나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불행을 당신에게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해 다오.
당신은 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만이 그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뿐이거나 혹은 극히 소수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다루거나 하며 그것을 나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귀신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만일 귀신이 신의 방계(傍系)의 자식들로서 님프나 그밖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여성들한테 태어난 사생아라면, 신의 자식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노새가 말과 나귀의 새끼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말과 나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죽음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군들이 나를 배치했던 장소를 고수했던 내가,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했을 때-나는 그렇게 믿고, 또 풀이했소만-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야말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나를 법정에 끌어내야 마땅할 것이오.
그것은 신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며, 지혜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
바로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소.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경애하고 있소.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신에게 복종하겠소.
그리고 나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충고하고 내 소신을 밝히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때의 내말은 평소의 내 말과 변함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여!
당신은 지혜에 있어서나 무력에 있어서나 가장 명성이 높고 위대한 나라 아테네 사람이면서 오직 막대한 돈을 손에 넣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소?
명성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 것을 왜 부끄러워하지 않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설득했을 그런 말이 부족해서 내가 진 줄 알고 있을 것이오.
천만에, 나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말의 부족 때문은 아니오.
오히려 후안무치(厚顔無恥)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한탄하는 등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듣고 있는 많은 일들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러분이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징벌이 내릴 거라는 것이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 것보다 제우스 신에 맹세코 훨씬 쓰라린 형벌이 될 것이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로부터 벗어나고 여러분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여러분을 심판하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오.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고 있어서 여러분은 깨닫지 못 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젊으니까 그만큼 거셀 것이며, 여러분은 또 그만큼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여러분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책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은 잘못이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명예롭지도 못한 도피법이오.
남을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편이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한 방법이오.
이상이 내게 사형의 투표를 한 여러분에 대한 내 예언이며, 이것으로 이제 작별하기로 하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른 면으로 고찰해 보더라도 죽음이 선이라는 희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소.
죽는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오.
말하자면, 전혀 무(無)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거나,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듯이, 그것은 영혼의 이동으로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주거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만일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는 일이고, 사람이 자면서 꿈 하나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이란 아주 놀랄 만한 소득일 것이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평생에 꿈도 안 꿀 만큼 숙면을 취한 밤을 골라내어 그 밖의 낮과 밤을 나란히 놓고 비교·대조하는 형식으로 관찰해서, 그런 밤보다 더 좋고 더 즐겁게 산 낮과 밤이 자기 생애에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말해야 한다면, 생각건대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대왕일지라도 그런 밤이 그렇지 않은 낮과 밤에 비해서 극히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죽음이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크게 덕을 보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모든 시간이 만일 이와 같은 것이라면, 단 하룻밤보다도 길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오.
한편, 죽음이란 여기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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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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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자의 서>>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들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둘째는 사후세계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는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셋째는 사자가 환생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자궁 입구를 막아 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살아 있을 때 여러 영적인 안내서들을 통해 실제 수행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계의 가르침을 통해 존재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도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사후세계도 거치지 않고, 공중에 일직선으로 난 큰 길을 따라 태어남이 없는 근원의 세계로 곧바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시기

호흡이 멎었을 때 사자의 생명력은 지혜가 머무는 생명 에너지 센터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자의 의식체는 자연 상태에서 최초의 투명한 빛을 체험할 것이다.
그 뒤 생명력은 신체의 뒤쪽으로 가서 척추 오른쪽과 왼쪽의 생명 에너지 통로를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이때 사후세계가 순간적으로 밝아 오게 된다.
따라서 생명력이 배꼽에 있는 생명 에너지 센터를 통과한 뒤 왼쪽 에너지 통로 속으로 달려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여기에 적힌 지시대로 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생명력이 이렇게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내부에 아직 들숨이 남아 있는 기간으로, 밥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때 임종자가 잠에 빠져들려고 하거나 수면 상태가 계속되려고 하면 이를 막아야 하며, 목의 동맥은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눌러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직 머리 정수리의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 확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자를 인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 다르마카야의 완전한 마음을 처음으로 얼핏 목격하게 된다.
마지막 날숨이 멎고 아직 몸 안에 숨이 남아 있는 기간이 바로 생명력이 중앙 에너지 통로에 머무는 기간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의식체가 기절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도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을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투명한 빛을 알아보지 못 했을지라도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을 알아볼 수 있으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 하면 세 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가 밝아 온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 세 번째 빛의 단계에서는 살아 있을 때 쌓은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환영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초에니 바르도의 가르침을 읽어 주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많은 힘을 갖고 있고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때쯤 사자는 자기 곁에 음식물이 따로 차려져 있고, 옷은 수의로 갈아입혀졌으며, 잠자리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애통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이 자기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실망한 채로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사자는 소리와 색과 빛 세 가지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고 두렵게 하며 마침내 몹시 지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존재의 근원 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가르침이 행해져야만 한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그대는 내가 읽어 주는 이 구절들을 잘 따라 외우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두려운 어떤 환영이 눈 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요한 비밀을 잊지 말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육체와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이때, 그대는 순수한 진리의 세계를 잠깐 경험하게 되리라.
그것은 밝고 눈부시고 미묘하며 무서울 정도로 빛이 난다.
마치 봄날의 풍경 속을 가로질러가는 신기루처럼 끝없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고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참 자아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천상계의 존재들에게서 나오는 어두운 흰색 빛에 이끌리지 말라.
그대여, 그것에 애착을 갖지 말라.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그 어둔 빛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천상계의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여섯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대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그 빛을 쳐다보지 말라.
깊은 신뢰를 갖고 눈부신 푸른색 빛을 바라보라.
그대의 오 마음을 바이로차나에게 향하고, 내가 읽어 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또한 모든 붓다들의 조상이며 모든 선(善)의 아버지인 사만타바드라(보현)와 모든 선의 어머니인 사만타바드리가  한몸으로 결합된 모습으로 그대를 비추러 나타날 것이다.
이들 마흔두 명의 완전한 신들이 그대 앞에 나타나 그대를 비출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며, 그대 자신의 순수한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들 여러 세계들은 그대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 가슴의 네 부분에서 나오며, 가슴의 중심부를 합하면 모두 다섯 개의 방향이 된다.
그것들 모두는 그대 안에서 나와 그대를 비춘다.
신들 역시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세월 이전부터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비쳐 나오는 빛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 이끌리지 말라.
그러므로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약하게 갖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무념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형상들과 빛들은 그대 자신 속으로 녹아들 것이고, 그대는 붓다 경지를 얻게 되리라.
아모가싯디(불공성취불)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의 초록색 빛의 길은 그대를 향해 열려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지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지혜의 빛들과 함께 윤회계의 여섯 세계로부터 순수하지 못한 환영의 빛들이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대는 "저것들이 무슨 빛일까?"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천상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흰색 빛, 아수라의 거인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초록색 빛, 인간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노란색 빛, 동물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푸른색 빛, 굶주린 귀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붉은색 빛, 지옥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회색 빛이다.
순수한 지혜의 빛과 함께 이들 여섯 색채의 빛이 그대를 비출 것이다.
이때 두려워하거나 어떤 것에도 끌리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하여금 무념 상태에서 쉬게 하라.
만일 그대가 지혜의 순수한 빛들을 두려워하고, 여섯 세계의 순수하지 못한 빛들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여섯 세계의 어느 한곳에서 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러한 생각의 형상들이 나타나면 그대는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말라.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신의 신체들 역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텅 빈 것이 텅 빈 것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을 떠나면 평화의 신이나 분노의 신이나 피를 마시는 신이나, 여러 형태의 머리를 한 신들이나 무지개 빛이나 죽음의 대왕의 끔찍한 모습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대의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명상하라.
나아가 그대는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하거나, 그대 소유의 물건을 다른 이들이 갖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미련 때문에 그것들에 애착을 갖거나 상속자들에게 분노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감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쳐 설령 그대가 높고 행복한 차원에 태어날 운명이었다 해도 그대는 지옥계나 불행한 귀신들이 사는 아귀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세상에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려라.
그대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들을 단념하라.
누가 그대의 재산을 갖든 불행한 생각을 갖지 말라.
그것들을 기꺼이 단념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마음에서 나온 텅 빈 몸이 나에게 내려올 때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이 사후세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악한 행위들의 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수호신들이여, 그 고통을 내쫓아 주소서.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위대한 진언(眞言)이 되어 울리게 하소서.
아무런 보호자도 없는 나를 내 생전에 쌓은 업(業)이 추적해 올 때
자비의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일 때문에 슬픔이 내게로 밀려올 때
깊은 명상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행복한 빛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가르침이 담고 있는 특별한 기술은 이 순간에서 특히 중요하다.
지금 어떤 빛이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것을 자비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어느 곳으로부터 빛이 뻗어 나와서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곳이 자비의 신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기술이다.
이것은 그대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막아 준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그대의 수호신이 누구이든 그 수호신을 마음 속에 떠올려 명상하라.
마치 마술사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그 수호신을 눈 앞에 떠올리고 그에 대해 명상하라.
만일 그대에게 특별한 수호신이 없다면 자비의 신을 명상하거나 아니면 나에 대해 명상하라.
명상의 대상이 정해졌으면 그를 마음 속에 그리면서 고요히 명상하라.
이제 그 수호신의 영상을 겉에서부터 녹여 서서히 사라지게 하라.
그 영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사념도 일으키지 말고 명상하라.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세계에서 비쳐 나오는 투명한 빛을 명상하라.
그대여, 이것은 더없이 심오한 기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그대는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 환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보게 될 때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대 자신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 남녀를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 스승의 여성 원리로 여기고 그들에 대해 명상하라.
그들에게 절하라.
겸허한 믿음을 갖고 마음 속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를 올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인 안내를 부탁할 결심을 하라.
이 결심만으로도 자궁문은 닫힐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해도 자궁문이 닫히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충동이 생긴다면 수호신에게 명상하듯이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의 여성 원리, 또는 자비의 수호신과 그의 여성 원리에 대해 명상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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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이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것들 모두 맑고 투명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하지만 시간의 의미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그리고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순수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고 편하게 의식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슬픔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이라 부르는 그 심상치 않은 것에 대해서, 이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또 슬픔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다루려 한다면 단편적으로밖에는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랑이 지닌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슬픔의 본질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이해해야 하는데,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둘은 하나다.
시간에 대해 이해하다 보면 생각과 마주치게 되고, 생각을 이해하면 시간이 끝나고 따라서 슬픔이 끝난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다면 우리는 슬픔을 바라볼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슬픔을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숭배하거나 아니면 파괴해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나 사원 안에 또는 마음 속 어두운 구석에 넣어 두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붙잡고 있다.
아니면 발로 차버리거나 집어던져버리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슬픔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거기에 고상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찾겠다는(이건 말 그대로 난센스다) 말 따위는 하지 않고도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만이 슬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니 슬픔은 조금도 받아들여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모든 감상적인 생각과 자기연민에서 샘솟는 모든 감정표출인 슬픔을 이미 버렸다.
그러면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죽음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놀라운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는 것이 사라져야 그 안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그때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 다음에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다.
현명한 사람은 시간과 생각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매순간 죽어가고, 결코 경험을 쌓아두거나 모아 놓지 않는 마음은 순결하면 따라서 변함없는 사랑의 상태에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 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말· 상징·이미지들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말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이 곧 이미지요 상징이며, 우리의 사고는 곧 말로 표현하기· 상징화하기 · 상상하기 · 라벨을 붙여 분류하기이다.
이미지나 상징 또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기억도 없겠지.
따라서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죽음이라는 실재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말이다.
맞나?
또한 확실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아는 것 즉 과거의 결과인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그리고 모르는 것 즉 미래에 직면할 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그 감각은 우리가 그것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도 거기 있을까?
감각은 단어가 없어도 존재할까?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 어떤 비판이나 평가나 억제도 없이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고 다만 관찰만 하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기억이 아니다.
사랑은 쾌락도 아니다.
사랑이 섹스와 관계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이건 찬성하고 다른 건 비난하며 세속적인 사랑과 신성한 사랑을 구분하는 행위로 후퇴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거에 대한 죽음, 모든 고통·갈등·슬픔에 대한 죽음이 없으면 사랑을 전체로 완전하게 만날 수 없다.
그때 사랑이 있다.
바로 그때 하고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은 자기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과거에서 끌어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곧 죽음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사랑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애착이 없을 때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과거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은 이용될 수 있으며 지식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그때 나의 살아있음은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며, 배움과 감동이 있는 모르는 것의 영역에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궁극적인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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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저는 광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치고 나니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습니다.
고독이라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 거지요.
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면
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저는 땅에 내린 당신의 뿌리이고
당신은 거기서 하늘로 피어난 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햇볕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게로 몸을 기울여
내 귀에다 달콤하게 속삭이시며
마치 바다가 시냇물을 받아들이듯
나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그리고 친구여, 내 안의 '나'는
언제나 침묵의 집에 머무르고 있어서
끝끝내 알아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답니다.

굳이 내 말이나 행동을 그대가 믿어 주길 바라진 않는답니다.
내 말은 바로 그대의 생각이 소리로 나온 것이고
내 행동은 그대의 바람이 실행에 옮겨진 것뿐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무덤 파는 사람

한번은 나의 죽은 자아 하나를 묻고 있는데
무덤 파는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온 사람 중에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그런데 제가 왜 마음에 드십니까?"

"여기에 오는 사람은 하나같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데 당신만은
웃으며 왔다 웃으며 가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아, 밤이여! 그렇답니다. 우린 쌍둥이랍니다.
그대는 우주를 드러내고
나는 내 영혼을 드러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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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시적이어라.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써라.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쓰고 사람을 담뿍 담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
단 아주 간접적으로 하는 것.
삶이 그대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질 때 더욱더 용기를 가져라.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여라.
아니면 실패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공격적이라면 실패할 것이다.
사랑,행복,명상,진리 또한 그대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이나 오직 미묘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을 갖고 있어

깊은 이해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느낄 때, 다른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 설 때,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바라볼 때 그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항상 눈이 멀어있고 논쟁을 하려고 한다.
그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그르다고 한다.
그는 항상 논쟁한다.
그의 논쟁은 지긋지긋한 것이 된다.
그는 항상 교만하고 방어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는 부정할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조심하는 모습은 마치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그는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깨어있는 것이다.

망설이는 모습은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아니다.
그는 망설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론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마치 탁한 물처럼 자유롭게 뒤섞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자유롭게 섞인다.
그에게는 깨끗함과 불결함, 선함과 악함 등, 모든 분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태양 같은 의식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이다.
창녀의 집에 머물거나 수녀의 집에 머물거나 예수에게는 똑같다.
그는 잠을 자러 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똑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창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며 수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깨끗하지 않고 아무도 불결하지 않다.
모든 이중성이 사라져버렸다.
초월되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 안에서 산다.
그가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절대적인 죽음은 사념이 완전히 없어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절대적인 죽음은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고, 이제는 삶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 사라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두 번째 단계는 삶에 대해서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노자는 이것을 영원한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 영원한 법칙을 아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며, 이것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는다.
성인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어떠한 논리적인 구분도 하지 않고 하나를 품는다.
그는 하나, 즉 전체를 선택한다.
모든 대립되는 것을 포함하는 전체를 선택한다.
그는 삶을 죽음과 함께 선택한다.
증오에 반대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체를 선택하고 온 세상의 모범이 된다.
그가 세상의 모범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귀결이다.
스스로 생겨나는 현상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지극한 부드러움은
지극히 단단한 것을 통과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외적인 세상에서는 물이며 내면의 세계에서는 사랑이다.
물과 사랑은 여러 면에서 서로 비슷하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은 빈 장소를 찾는다.
사랑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만일 그대가 이기주의자라면, 사랑은 그대에게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기주의자는 에고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도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대에게 오지 못 한다.
사랑은 그대가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텅 비어있기를 바란다.
물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그러므로 물은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 계속 흘러가 큰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텅 빈 공간이다.
그렇게 물은 바다에 도달한다.
강은 히말라야의 꼭대기를 향해서 흐를 수 없다.
그와 정반대이다.
강은 히밀라야의 최정상에 있는 빙상에서부터 나와 점점 낮은 곳으로 움직여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텅 빈 장소, 즉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곧 강물의 집이다.
사랑 또한 빈 곳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갈망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한다.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떻게 '얻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비어있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직접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도 없다.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대를 찾아오게 할 수 있다.
그대는 단지 비어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보라.
수많은 강줄기가 그대를 향해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별과 돌, 모래와 바다, 나무와 새들까지도, 그대가 움직이는 곳마다 갑자기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를 것이다.
사랑은 물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은 쉴 수 있는 빈 장소를 찾는다.
나무 옆을 지나가 보라.
만일 그대가 비어있다면, 갑자기 나무의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사랑은 물과 같다.
물을 부어 보라.
물은 자신이 쉴 수 있는 가장 빈 곳을 찾는다.
사랑은 내면의 물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가장 위대한 완성은 불완전한 것 같다.

물론 그대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대가 완벽한 사람을 만나보면 그는 마치 불완전해 보일 것이다.
왜 그럴까?
매우 미묘하지만 잘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완벽한 사람은 절대로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주의자는 절대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완벽한 인간은 전체적이지만 완벽주의자는 부분적이다.
완벽주의자는 어떤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가꾸고 다듬는다.
그는 매우 완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머문다.
왜냐하면 함께 어우러져야 할 많은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완벽할 수 없다.
오직 전체적인 삶만이 완벽할 수 있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인간은 절대로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성장하고 또 성장한다.
그의 완성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완성은 과정이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거기에 끝이 없다.
진정한 삶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처음이나 끝이란 말은 거짓된 말이다.
그 어느 것도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삶에서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대의 완벽은 죽은 것이다.
결국 끝에 도달한다.
끝에 도달한 사람은 마치 석상과 같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며

내면을 깊이 들어가면 그대가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란 그대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알게 된다면 인간 전체를 안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분노를 알게 된다면 모든 분노를 안 것이고, 자신의 폭력을 알게 된다면 모든 전쟁을 안 것이다.
전쟁터에 갈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의 폭력을 알면 모든 폭력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알면 모든 사랑, 이 세상 사랑의 모든 역사를 안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다 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대양으로부터 물 한 방울을 취하는 것과 같다.
물 한 방울을 분석하면 바다 전체를 안 것이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 바다 전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바다의 축소판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도를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잃으려 한다.

도를 추구하는 자는 정반대다.
지식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자, 되어감이 아닌 '있음being'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날마다 잃어버린다.
자신을 비우고 잊어버린다.
그가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잊어버리는 법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단 한 가지는 어떻게 완전히 짐을 덜어내느냐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리고 진리는 사랑보다도 더 깊다.
세 가지 차원을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 차원은 머리의 차원이다.
가장 피상적인 차원이다.
언어와 개념과 이론의 세계이다.
그대는 머리를 매우 쉽게 조종할 수 있다.
그대는 거기에서 주인이다.
그 다음 머리보다 더 깊은 두 번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가슴의 차원이다.
거기서 그대는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노예이다.
그것은 조종될 수가 없다.
사랑이 주인이고 그대는 노예가 된다.
사랑이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슴은 머리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마음은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뒤를 볼 수도 있고 안을 볼 수도 있다.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시가 가능하고, 미술이 가능하고 음악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모두 머리가 가슴을 언뜻 본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 세 번째 차원이 있다.
존재의 차원이며 마지막 단계이다.
실체 그 자체이며 근본 그 자체이다.
그것이 그대의 존재이다.
머리는 생각하고, 가슴은 느끼며, 존재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신, 진리, 황홀경, 열반, 깨달음, 이들이 존재에 속한다.
머리는 이런 것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두 번째 차원인 가슴과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가슴보다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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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엉킴을 풀며

어떻게 그 엉킴을 풀 것인가?
그것을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의해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곤란에 처했을 때 그대는 항상 충고를 한다.
그런데 똑같은 어려움이 그대에게 일어났을 때, 그대는 그렇게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왜 그대의 지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렇게 잘 움직이는가?
거기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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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생각한다.
즉 위대한 사람은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가 커지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문제가 작을 때, 손 안에 있을 때 처리한다.
그러면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문제를 순간순간 다룰 때, 그대는 항상 짐으로부터 벗어나 신선할 수 있다.
그대의 존재 위에는 먼지가 앉지 않는다.
그대는 신선하고 젊고 처녀 같은 상태로 다음 순간으로 미끄러져간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미끄러져 나오듯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간다.
낡은 허물은 뒤에 놔두고 생생하고 더 젊은 피부가 나온다.
그때 삶은 신비가 된다.
그것은 결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축복이 내려온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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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를 행하고

완전히 내려놓아라.
이완해라.
진리를 추구하려는 긴장을 풀어라.
진리를 추구하려고 여기에 올 때, 그대는 세속적인 마음을 갖고 온다.
세상에서는 야망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쟁이 매우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애를 쓰면서 서로 싸우면서 경쟁하고 있다.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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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은 서늘하고 무관심은 차갑다.
사랑과 증오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서늘하다.
그러나 무관심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따뜻하다.
자비심은 무관심의 차가움에 비해서는 따뜻하며 사랑과 증오의 뜨거움에 비해서는 서늘한 거서이다.
덕은 곧 자비심이다.
사랑도 증오도 아니다.
덕은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덕은 무관심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자비심이 마치 무관심처럼 보일 것이다.
그 차이점은 매우 미묘하다.
서늘함은 마치 차가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서늘함은 살아있고 신선하다.
차가움은 단지 죽어있는 것이다.
덕은 곧 자비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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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려운 것은 쉬울 때가 있다.
조금만이라도 주의한다면 그것을 알 것이다.
씨앗을 부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큰 나무를 파괴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모든 것은 씨앗의 형태를 갖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은 마치 씨앗과 같다.
만일 그것을 그 순간 버리고 싶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분노가 그대 내면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리고 그대 존재 속에서 넓게 퍼져 결국에는 그대를 압도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때는 그 분노를 파괴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꼭 그대 자신을 파괴하는 것 같을 것이다.
분노는 이미 그대의 일부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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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것을 어렵게 여김으로써
결코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노자는 말한다.
"처음부터 다룬다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마라.
만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면 뒤로 미루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쉬운 일인데, 왜 지금 신경을 써야 하나? 내일 할 수 도 있다."
일은 쉽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그것을 어렵게 여기고, 그 즉시 문제를 처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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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나오며
구층 다락도 한 덩어리 흙 쌓기에서 시작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은 또한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
시작이 곧 끝이다.
이 순간이 전체다.
천마일이나 되는 여행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을 딛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면 두 번째 걸음은 첫 걸음에서부터 나오고 세 번째가 그 뒤를 따른다.
전혀 그런 일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내일이 걱정하도록 하라.
내일을 생각하지 마라.
즐겨라!
이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즐겨라.
그럼으로써 수단이 곧 목표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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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인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것을 복귀시킨다.
이리하여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도와서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욕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욕망은 아무런 욕망 없음을 욕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욕망은 슬픔만을 낳기 때문이다.
욕망은 그대가 내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여기에 있고 욕망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
삶은 이 순간에 있지만 욕망은 항상 미래의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은 곧 뒤로 미루는 것이다.
꿈이며 희망일 뿐 결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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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내어맡김을 지지한다.
그는 말한다.
"삶에 내어맡겨라.
삶이 그대를 이끌게 하라.
그대가 삶을 이끌려고 하지 마라.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삶이 그대를 조종하고 지배하게 하라.
삶이 그대를 소유하게 하라.
그대는 단지 내어맡기기만 하라!
그대는 단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만 말하라.
모든 힘을 삶에게 주고 삶과 함께 있어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다 내어맡겨 버리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사실 그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유한한 존재가 아닌 무한이 된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형상화된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형상이 없는, 광대한, 계속 팽창하는 존재가 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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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무한한 삶이 그대 안에서 흐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의 흐름에 장애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어마어마한 공空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안에서 구름이 떠다닐 수 있고 별들이 오갈 수 있다.
아무 것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잃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내어맡겼기 때문이다.
존재의 경지에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생생하다.
육체는 물론 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가장 내적인 중심은 생생한 채로, 신선한 채로 남는다.
그것은 결코 늙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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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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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대가 노자를 이해하려고 할 때, 노자는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어떤 배가 동쪽을 향해서 움직이고 어떤 배는 서쪽을 향해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는 동쪽이 서쪽이며 서쪽이 동쪽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둘이 하나라고 말한다.
노자는 정반대가 통합되고 일치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단지 삶의 대변인일 뿐이다.
만일 삶이 불합리하다면 노자도 불합리하다.
만일 삶이 불합리한 논리를 갖고 있다면 노자도 삶에 대해서 불합리한 논리를 갖는다.
노자는 단지 삶을 반사할 뿐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든 단지 받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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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은 간단하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너무도 비범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와 같이 너무도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노자를 이해하려면 정신적으로 더 성장해야 할 것이다.
만일 붓다가 그대 곁을 지나간다면, 그대는 즉시 그를 알아 볼 것이다.
어떤 초인이 그대 곁을 지나쳤다.
붓다는 초인의 매력을 간직하고 다닌다.
그러므로 그를 놓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그대의 이웃일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나도 평범하기 때문에, 너무도 비범하게 평범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자의 아름다움이다.
비범해지는 것은 쉽다.
단지 노력과 수련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깊은 내적인 수련이다.
그대는 훌륭히 수련을 쌓을 수 있으며 완전히 비세속적으로 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해진다는 것은 정말로 가장 비범한 일이다.
어떤 노력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노력이 없는 상태가 필요하다.
어떤 훈련도, 어떤 방법도, 어떤 수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오로지 이해만이 도움이 된다.
명상까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이해만이 도움이 된다.
단지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용기를 갖고 삶을 사는 것뿐이다.
삶이 좋든 싫든, 성스럽든 악하든, 천당이든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숨으려 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마주치는 것이다.
노자가 되거나, 노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실, 그대가 노자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노자이다.
붓다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꼭 붓다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자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 노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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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비도덕적일 때, 오직 그때만이 도덕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대가 제대로 된 인격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오직 그때만이 인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산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굴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계발하려고도 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게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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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되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말해질 수 있는 진리는 그 순간 바로 거짓이 된다."
그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와 함께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그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사트상(내적인 세계로 완전히 진입된 상태)'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와 함께 살았고, 그와 함께 움직였으며, 그의 존재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에게 그들 자신을 열어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더욱더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 속에서 노자는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렸다.
90년 동안 그는 어느 것에 대해서 말하거나 쓰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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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에 노자는 그의 제자들을 떠났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언덕으로, 히말라야로 옮겨간다.
나는 그곳에서 죽을 준비를 할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은 좋다.
살아있을 동안에 세상에 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는 완전히 혼자 있을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완전한 순수성과 고독 속에서 본래의 근원으로 갈 수 있다."
제자들은 매우 슬펐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몇 백리나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노자는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홀로 국경선을 넘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경비병이 그를 붙잡았다.
그 경비병 또한 노자의 제자였다.
그가 말했다.
"만일 스승님께서 책을 쓰지 않는다면 국경선을 넘는 것을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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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리는 말해질 수 없는가?
무엇이 어려운가?
진리가 말해질 수 없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진리는 항상 침묵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서 말이 그칠 때, 진리는 실현된다.
침묵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어떻게 소리를 통해서 말해 질 수 있겠는가?
진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만일 진리가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생각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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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리는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침묵과 무심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심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한다.
마음은 떨어져 나가야 한다.
진리에 도달하지 전의 필요조건으로써 떨어져 나가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은 깨달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진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마음이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어떤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언어는 무익하다.
진리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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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질 수는 있으나, 신은 말해질 수 없다.
사랑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질 수 있으나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그 '무엇'이 상대적으로 남는다.
그 무엇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의 지적인 이해력, 교육 정도, 그리고 이해하려는 욕망에 따라 상대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또한 스승과 연관되어있어 스승에 의존한다.
스승의 표현방식, 전달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적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경험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표현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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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표현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제쳐두고라도, 어떤 경험일지라도 경험은 전달될 수 없다.
그대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는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단어는 사전에 있다.
그 뜻을 이해하진 못할지라도 사전을 통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는 그대 안에 있다.
의미는 경험을 통해서 온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사전에 있고, 언어에 있으며, 문법에 있다.
그러나 경험적인 의미, 실존적인 의미는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경험해보았다면, 즉시 그 '사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다.
그 말은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말할지라도, 그대가 그대의 체험을 끌어오지 않는 한, 그말은 공허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경험이 그말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의미 있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공허하게 남을 뿐이다.
말,말,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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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이고 진정한 의미는 실존적인 경험을 통해서 온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진리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진리를 훔칠 수도, 빌릴 수도, 살 수도, 도둑질할 수도, 구걸할 수도 없다.
아무런 방법도 없다.
그대가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의 길, 나는 이것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의 길은 그 경험에 도달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다.
단지 그 경험에 도달한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써 어떤 신비스런 것이 그대에게 전달될 것이다.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의 뛰어오름이다.
그것은 불이 타오르는 등잔에서 타고 있지 않은 등잔으로 불꽃이 튀는 것과 같다.
타고 있지 않은 등잔을 타고 있는 등잔 가까이 가져가 보라.
불꽃은 튀게 된다.
그와 똑같은 일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거기에 경전을 넘어선 전달이 있다.
메시지가 아니라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삶이 전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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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自意識이 병이다.
사실 자의식이 없게 되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법 속에서, 둘 사이에서, 딜레마 사이에서 어떻게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항상 선택한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그러면 추함은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그대는 종교적이기를 선택한다.
그러면 종교적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그대는 성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러면 죄는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선택하라.
그러면 그대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 바로 그것이 삶을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하지 마라.
선택 없음이 되라.
삶이 흘러가도록 놔둬라.
때로는 그것이 신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것이 악마처럼 보인다.
그 둘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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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삶이 상호의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의존적이어서도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
양자는 모두 극단이다.
바로 그 중간, 삶이 균형을 이루는 곳에 상호의존이 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꽃을 다치게 하면 곧 벌을 다치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어느 것도 섬처럼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섬처럼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현상일 것이다.
거의 신화나 꿈이 될 것이다.
노자는 상호의존을 믿는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취하라, 선택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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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항상 선택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선택을 통해서 살아간다.
만일 그대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떨어져 나간다.
이것이 노자의 길이다.
어떻게 마음을 버릴 것인가?
방법은, "선택하지 마라!"
그가 어떤 명상도 권하지 않은 이유도 어떤 명상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선택 없이 삶이 오는 대로 살아라.
떠다녀라.
어느 곳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마라.
어떤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지 마라.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미래나 과거에 구애받지 마라.
그러면 심포니가 그대 영혼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이 그대 안에서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대는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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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자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한다.
세 가지가 가능하다.
첫 번째, 행위 속에 있으면서 비행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행위를 버리고 히말라야로 가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비세속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시장 안에 살면서 시장이 그대 안에 사는 것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겉으로는 움직이면서도 내면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침묵이 있다.
나는 말하는 동시에 말하지 않고 있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마라.
행동하면서 행동하지 마라.
만일 비행위와 행위가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조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아름다운 현상이 된다.
추함에 반대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도 포함하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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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현자는 히말라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남는다.
그는 일을 처리하지만 행위 없이 처리한다.
그는 내면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행위는 바깥에 있을 뿐이다.
중심에서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이다.
폭풍의 중심을 찾는 것이다.
폭풍은 바깥에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는 아무 것도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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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정말로 어떤 바람도 없고, 어떤 명예나 명성, 성공, 야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귀결로써 성공과 승리가 생겨난다.
그대의 빈 마음 안으로 전 존재가 쏟아진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결이다.
결과가 아니다.
결과는 그것을 바랄 때 성립되는 것이며, 귀결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때, 아무런 욕망 없고, 그것에 대한 생각도 없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귀결은 존재의 내면 법칙의 한 부분으로써 생겨난다.
그 법칙이 곧 도道라고 불리는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대가 곧 브라마Brahma,(창조의 신)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그대 바깥의 어느 곳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신은 전체의 텅 빈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의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크리슈나를 찾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찾아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마하비라를 찾아다닌다.
모든 사람이 다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텅 빈 상태를 찾지 않는다.
그러지 않다면 그대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
공간은 그대 주위 어느 곳에서나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이 신이다.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그대가 그 안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분해될 그 공간이 바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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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어 없어진다.
그 물고기는 다름 아닌 바닷물일 뿐이다.
그대의 경우도 똑같다.
텅 빈 상태는 그대 주위에 어느 곳에도 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텅 빈 상태가 그대 안에도 있다.
텅 빈 상태가 어떻게 두 종류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텅 빈 상태는 언제나 똑같다.
죄인에게나 성자에게나 텅 빈 공간은 똑같은 것이다.
죄인은 바깥에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성자는 바깥에 성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벽에 너무도 집착하고 있어 벽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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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나를 칼로 자른다면 나의 육체를 자르는 것이지 나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내면의 비어있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한다면 나는 벽으로써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면의 비어있는 상태는 행위자가 아니다.
이 비유를 기억하라!
이것이 노자의 핵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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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텅 빈 그릇이라
그것을 내어 쓰되 다함이 없으며
가히 그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다.

만약 도道나 신神이 비어있지 않다면 그들의 쓰임은 무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 소모될 것이다.
만일 신이 소모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그는 죽을 것이고 다 소모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개념은 하늘 어딘가에 앉아서 만물에 관여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결코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는 '그'도 아니며 '그녀'도 아니다.
도를 설명할 때 쓰는 말들은 다 부적당하다.
도는 무한히 거대한 공간이며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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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空의 상태가 곧 그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텅 빈 상태가 아닌 비실재가 될 때 그대는 고통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상의 뜻이다.
명상이란 곧 텅 빈 상태가 되는 것, 안이 비어있는 것이다.
어떤 생각도 떠다니지 않으며, 내용물도 없고, 오로지 공간만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갑자기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고통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 역시 사라진다.
죽음 또한 생각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사라진다.
모든 과거의 짐은 생각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라진다.
생각이 없이는 욕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치지도 않는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미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미친 사람이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사실 사람은 너무도 생각이 많아서, 그 생각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친다.
생각이 너무도 복잡한 것이다.
미친 사람은 위대한 사색가이고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그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너무 여러 측면에서 한꺼번에 생각한다.
그의 마차에는 사방으로 말들이 매여 있다.
그의 생각들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데도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너무도 분열되어있고 너무도 갈라져 있다.
오직 텅 빈 상태만이 나누어지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그대가 텅 빈 공간을 나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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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힘껏 당긴다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알맞은 순간에 멈추었다면 하고,

활이 부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활을 힘껏 당길 때,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 활은 오래도록 쓸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활을 최대로 당기지 마라.
왜냐하면 최대라는 것은 항상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은 완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벽과 함께 진화는 멈추기 때문이다.
완벽은 곧 죽음이다.
그리고 결함은 곧 삶이다.
삶은 결함이 있는 것을 사랑한다.
완벽해보라.
그대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삶은 그대를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불완전하게 남으라.
그러면 생기가 넘칠 것이고 삶은 그대를 어디에서나 지지할 것이다.
노자나 나의 목표가 완벽이 아니라 전체성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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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물러나라.
그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어떤 일에 그대가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대가 행복을 얻었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기분이 좋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축복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물러서라.
그리고 즐겨라.
그 안에서 놀아라.
그것과 함께 춤을 춰라.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그런데 마음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마음은 말한다.
"지금 이 상태는 좋다.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더 얻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가능한 것, 이미 현실화된 것까지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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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채근했다.
"나에게 말해보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지.
그저 무슨 일인지만 말해보게."
그가 말했다.
"저는 99의 악순환에 걸려든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99를 갖게 되면 거기에 악순환이 생긴다.
그대는 그것이 100이 되기를 원하다.
이것이 바로 수평선이다.
그리고 100이 된다고 해서 거기서 그친다고 생각하지 마라.
마음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모른다.
마음은 중단을 모른다.
그래서 늘 실패한다.
마음은 어디에도 서지 않고 계속 달린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리고 Z에 이르러 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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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물러나라
그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그것이 도이다.
극단으로 가지 마라.
항상 한계 안에서 일을 하라.
한계 속에서 머물러라.
그것이 산야신의 규율이다.
항상 중간에 머물러라.
항상 한계 안에 있어라.
항상 만족한 채로 머물러라.
더,더,더를 갈망하지 마라.
수평선을 버리고 수직선으로 들어가라.
물러서라.
그러면 충족될 것이다.
그대는 삶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충족(fulfillment,성취,실현, 달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적 균형과 전체적인 고요함의 깊은 순간이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 자유,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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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대는 이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無이다.
그대는 무에서 나왔다.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無이다.
무에서 무로!
그리고 무와 무 사이에서 유가 생긴다.
존재의 강은 무의 두 강둑 사이를 흐른다.
존재는 아름답다.
그러나 비존재 또한 아름답다.
삶은 좋다.
그러나 죽음 또한 좋다.
삶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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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퀴의 배꼽, 바퀴의 축은 비어있다.
그러나 바퀴 전체가 그것에 의존한다."
노자는 그것을 왜 바퀴의 배꼽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배꼽과 똑같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배꼽 가까이에 단전丹田/hara이라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단전은 몸 안에 있는 블랙홀이다.
일본에서는 노자의 말을 따라서 몸 안 어느 곳에 죽음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음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죽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죽음은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그대 안에서 자라고 있다.
삶의 길 어디에선가 죽음을 갑자기 만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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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공emptiness,空에 대해서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혼자 있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혼자 있으면 제가 비어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친구를 찾고 연인을 찾는다.
이때의 모든 노력은 불운하게 되어있다.
자신의 비어있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워한다.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척할 때 그는 단지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비어있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다.
내면 어딘가에 공과 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빈 공간을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연애의 거의 99%는 거짓이다.
조만간에 그대는 그대의 연인이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연인들은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자기를 우롱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자신도 상대와 똑같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비애와 어리석음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해한다면,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모두에게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홀로 조용히 있지 못하는 것은 그대의 외로움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이 그 외로움을 채워주길 바란다는 걸 의미한다.
그대는 위장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대와 똑같이 한다.
그도 역시 홀로 있지 못한다.
홀로 있지 못하는 두 사람이 서로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은 비극적인 현상,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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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빈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을 억압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그것을 느끼고 즐겨라.
그러면 차츰차츰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단 그대가 외로움loneliness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면 그것은 홀로 있음aloneness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빈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가 아니다.
그때 그것은 순수가 된다.
너무도 순수하여 형상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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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과 외로움 사이의 차이를 항상 기억하라!
외로움은 상처와 같다.
외로움은 그대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갈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그대의 환상 속에, 마음 속에, 그리고 꿈속에 있다.
다른 사람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이다.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대가 홀로 있음을 느끼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은 그대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그대의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대의 순수함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행복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황홀해진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그대의 존재 그리고 비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대는 전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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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조심스럽다.
지혜는 망설인다.
지혜는 확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는 결코 이론으로 한정될 수 없다.
모든 이론은 삶보다도 작고 좁다.
그리고 삶은 이론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엔 삶은 너무도 거대하고 무한하다.
현명한 사람은 오직 한 가지만을 안다.
그가 모른다는 것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수천 가지를 알며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지식적인 사람의 바보스러움이 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실들을 계속해서 축적한다.
자신의 존재가 건드려 보지도 않은 이론과 언어, 철학을 계속해서 기억 속에 축적한다.
그는 거대한 지식의 창고가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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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을 갖고 있어

미묘한 지혜란 무엇인가?
그들은 직접 그리고 즉시 진리를 안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알았다.
그것은 빌려온 지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혜는 그것이 직접적일 때만이 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무지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의 무지를 지식으로 계속 감추고 있다.
그러면 왜 지혜를 미묘하다고 부르는가?
왜 그냥 지혜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것을 미묘하다고 부르는 이유 속에 핵심이 잇다.
지혜는 직접적이지만 미묘하다.
그것은 삶을 즉각적으로 직면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지만 삶 속에서는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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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움직여야 한다.
잘 이해하라.
우선, 지혜는 다른 데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알음알이로 빌려와서 마음 속에 쌓아놓는 것이 아니다.
그대 스스로가 그것을 대면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보다 더 직접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미묘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 스스로의 직접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간접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해서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화살과 같이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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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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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노자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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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꿍꿍이속 생각을 속속들이 아시는 그분이
나를 향하여, "우리를 첫 번째 성좌와  묶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곧게 하시오."라고
아름다운 모습만큼 즐거운 빛을 띤 채 말했다.
해가 빛살을 뿌려 주는 금강석인 양
눈부시고 진하며 단단하고 깔끔한
구름이 우리들을 감싸 주는 듯 보였다.
이 영원한 진주가 우리를 제 안에 받아들이는
모양이 마치 물이 빛줄기를 받아
언제까지 한 덩어리로 남아 있는 것과 같았다.
한 차원이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듯
한 몸체가 다른 몸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지상에선 모르는데, 내 몸체 그대로였음에도
인간적인 본성과 하느님이 어떻게 어울어졌는지
그 본질을 보고자 하는 욕망은
더 우리를 불타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세라피니, 천사들 중에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이와
모세, 사무엘 그리고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저 요한과 또 말하자면 마리아마저도
방금 그대에게 나타났던 이 영혼들과
다른 하늘에 그들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거기 있는 햇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오.
하지만 모두가 으뜸가는 둘레를 아름답게 하며
영원한 숨결을 더 혹은 덜 느낌에 따라
그들이 갖는 행복도 각각 다르다오.
그들이 여기 나타난 것은 이 천구가
그들에게 할당된 탓이 아니고 천계의
오르막길에서 가장 낮은 곳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찌르는 화살과도 같이 우리들은 바로
그렇게 둘째 왕국 안으로 달려갔다.
나는 여기서 나의 연인을 보았는데 그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그녀가 그 하늘의 빛 속에
드시자, 유성마저 더욱 밝게 빛나는 정도였다.
또 별도 변하여 웃음을 띠고 있었다면,
내 본성대로나마 갖가지 모양으로 변할 수
있는 이 몸이 어떠했겠는가!
잔잔하고 맑은 연못 안으로
무엇이 먹이인 양 들어가면
물고기들이 그리로 몰리는 것처럼
수천 개의 별들이 우릴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으며, 또 누구나 "보라, 우리네
사랑을 키워 주실 분을" 이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내가 이 노래의 시작으로 삼은 그 여인으로부터
사람들은 태양이 때로는 뒤꼭지로 때로는
눈썹으로 애무하는 그 별의 이름을 따왔다.
내 그 별에 올라온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더더욱 아리따워져 보이시는 내 여인이
내 그 안에 들어와 있음을 충분히 믿게 하였다.
그리고 불꽃 속의 불티가 따로 보이는 것처럼
또한 목소리 속의 목소리 하나가 멎고
다른 것은 왔다 갔다 해도 분간되듯,
그 빛 속에 다른 등불들이
빠르고 느린 속력으로 빙글빙글 움직였는데
모양으로 봐 그들의 영원한 직관을 좇는 듯했다.
저 거룩한 빛들이 드높은 세라피니들 속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있던 동그라미를 내버리고
우리를 향해서 오는 것을 본 사람에겐
싸늘한 구름으로부터 보이거나 말거나
바람이 그처럼 빨리 내려오지 않기에
느릿느릿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맨 앞에 나타났던 자들 속에서
'호산나'가 울렸는데, 그것은 그 이후에도
저절로 들려왔으면 하는 마음을 자아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보기에 찬란함보다 듣기에 더욱 달콤한
한결 싱싱하고 압도적인 광채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면류관을 이루는 것을 보았으니
대기에 습기가 짙을 때 실을
잡아당겨서 허리띠를 삼을 때 라토나의 딸이
이렇게 띠를 두른 것을 우리가 보는 것 같다.
내가 지나쳐 온 하늘의 궁정에는 그 왕국에서
가져올 수 없는 귀하고도 아름다운
보석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었으며
저 광채들의 노랫소리도 그러한 것이었는데
날개가 안 돋아 저 위로 날 수 없는 자
벙어리에게서나 저 위의 소식을 기대하라.
이 불붙는 해들이 노랫가락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는 양극에 가까이 도는 별들처럼
우리들의 주위를 두루 세 번 돌고 난 다음
마치 원을 그리며 춤추던 여인들이 새로운 노래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그 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묵묵히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듯 멈춰 있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오, 인간들의 무분별한 헛수고여.
그대로 하여금 날개를 파닥거려 떨어뜨리게 하는
저 삼단논법들이 얼마나 결함투성이인가!
법률들을 뒤따르는 자, 격언을 좇아가는자,
또 더러는 사제직을 따라가는 자,
그리고 더러는 폭력이나 궤변으로 다스리는 자,
도둑질하는 자, 또 더러는 나라 일에
더러는 육체적 쾌락 속에 휩쓸렸던 자가
피로에 지치고 또 누구는 안일에 몰두하는
무렵, 나는 이러한 모든 것에서 풀려나
이토록 영광스런 영접을 받으며
베아트리체와 함께 하늘 위에 있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마자, 성스러운
맷돌이 이내 곧 회전하기 시작했는데,
한 바퀴를 빙그르 채 돌기도 전에
또 하나의 면류관이 둥그렇게 그걸 감싸서
춤은 춤에, 가락은 또 가락에 포개졌으니,
본래의 광선이 반사광보다 더 세차듯이
노래야말로 저 감미로운 목구멍에서
우리네 뮤즈나 세이렌들을 무색케 하였다.
유노가 제 시녀에게 분부를 내릴 때,
두 개의 무지개가 같은 빛깔로 나란히
얇은 구름을 통하여 둥그렇게 나타나고
마치 햇볕에 사그라지는 증기인 듯
사랑 때문에 죽어 간 뜨내기 여인의 목소리처럼
그 안의 것으로부터 밖의 것이 생겨나며
그것들은 또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
때문에 다시는 물이 넘쳐흐르지 않을
세상의 예감으로 이곳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니
바로 그렇게 저 영원무궁한 장미들의
두 줄기 화환이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외륜이 내륜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즐거운 무도와 사랑스럽고도 축복받은
빛과 빛들이 그토록 노래하며 그토록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거대한 대잔치가
흡사 움직이는 이의 뜻에 따라 동시에
떳다 감았다 하는 눈들과 같이
한 순간에 한 맘으로 잠잠해졌는데
새로운 빛들 중 어느 하나의 가슴에서
소리가 나왔는데 별을 향하고 있는 바늘이
나를 제자리로 향하게 하는 것 같았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천국의 축제가 길어지면 길어지는 만큼
우리들의 사랑도 빙그르 주위에
빛을 발하고 그처럼 찬란한 옷이 될 것입니다.
그의 밝음은 열기를 뒤따르고
열기는 직관을 뒤따르니 이는 또한 각자의
공덕을 초월하는 성총만큼이나 큰 것이라오."
영광스럽고 거룩한 육체를 다시 입게
될 때면 우리의 몸은 완전하게 회복되는
그만큼 더욱더 복스럽게 될 것이니, 이로써
지고의 선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상의 빛은 더욱더 커질 것이며
그 빛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뵙도록 규정한다오.
그러기에 직관도 더욱더 커져야 하며
그로부터 좇아오는 빛도 커져야 한다오.
그러나 불꽃을 일게 하는 숯덩이가
일단 작열해서 불꽃보다 더 이글거리면서도
제 모습을 그냥 그대로 지키고 있듯이
벌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빛이
언제나 흙이 뒤덮고 있는 육체보다
겉모양에 있어서 더 못할 것이라오.
또 우리를 지치게 할 만한 빛도 아니리니
육체의 모든 기관이 우리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강하게 되기 때문이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뿔에서 뿔로 그리고 꼭대기와 밑 부분 사이로
빛들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면서
한데 어울려 움직이고 있는데,
마치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재능과 재주로 가끔가다 그늘을
마련하고 있을 때 길거나 짧은 물체의
미분자들이 그 모양을 새롭게 바꿔 가며
곧기도 하고 굽어지기도 하며 빠르기도 하고
더디기도 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여러 줄이 알맞게 조율된
양금과 하프가 알 수 없는 가락으로
감미롭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저기 나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빛들로부터 십자가를
통해서 한 가닥 멜로디가 울려 퍼졌기에 노랫말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것에 사로잡혔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자신이나 남의
수치로 인해 시꺼멓게 된 양심은
분명 너의 말을 듣기 싫어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온갖 거짓일랑 털어 버리고
네 눈에 비치는 모든 걸 드러내 보여라.
옴병이 옮은 곳은 실컷 긁게 놔둘 일이다.
너의 말이 첫 맛엔 듣기 싫을지 모르나
그것이 차츰 새겨지게 될 때면, 후에
생명을 주는 영양이 될 것이니라.
너의 이 외침은 드높은 꼭대기일수록
더욱더 후려치는 바람과 같이 되리니,
이것은 하찮은 명예에 대한 증명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이 하늘들에서나 산에서, 그리고
저 고통스러운 골짜기에서, 오로지
명성이 자자한 영혼들만이 네게 보여졌구나.
왜냐하면 듣는 이의 마음이란 감추어져
깨칠 수 없는 뿌리를 가진 예증으로나
나타나지 않는 다른 논증으로도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니라."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모든 사악이 그의 나라에선 죽어 뒹구는
저 고귀하신 영도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수정이 세계를 돌고 있는 가운데,
빛이 속으로 비치는 황금의 빛깔로 된
층계가 나의 눈이 따를 수 없을 만큼
드높게 위로 솟아 있음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또한 층계를 따라 수많은 빛들이
내려오는 걸 보았으니, 하늘에 보이는
온갖 빛들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듯 생각되었다.
그리고 자연적인 습관으로 날이 샐 어름에
까마귀들이 얼었던 날개를 녹이려고
한데 어울려 움츠리다가
어떤 놈들은 달아나서 돌아오지 않고
어떤 놈들은 떠나갔던 자리로 돌아오며
어떤 놈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남아 있듯이
떼 지어 왔던 저 불빛 속에서도
어느 정도 내려오다 부딪치게 되자
그와 비슷한 모양을 내게 보였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내가 끝마디 말에 이르기도 전에,
빛은 재빠른 맷돌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그 한복판을 중심 삼고 있더니만,
이어 그 안에 있던 사랑이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빛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 속으로
스며들면서 내 위에 모아지고 있는데,
그의 힘이 나의 시각과 어울려 나를
내 위로 훤칠히 올려놨기에, 지고의 본질을
보는 것인데 그로부터 빛이 나온다오.
이로부터 기쁨이 오고, 나 그로써 불빛을 내니
나의 직관이 밝은 만큼 불꽃도
그에 버금갈 만큼 밝았던 까닭이지요.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맑게 갠 보름달 밤에 하늘의
방방곡곡을 두루 색칠해 주는 영원한
요정들 사이에서 트라비아가 미소 짓듯이
수천 개의 등불 위로 태양 하나가
삼라만상을 모조리 비춰 주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의 태양이 하늘의 눈들을 비추는 듯하였다.
그리고 번쩍이는 실체가 살아 있는
그 빛을 통하여 나의 얼굴에 투영됐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나의 두 눈빛을 물들였을 무렵,
하늘 가운데로 왕관처럼 둥그런
모양을 한 조그마한 횃불이 내려와
그녀를 감싸면서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지상의 그 어떠한 선율이라도 아름답게
울리면 울릴수록 마음이 거기에 더 끌리는데
하늘이 더욱 맑은 청옥이 되는
저 아름다운 벽옥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는
칠현금 소리에 견준다면
구름을 뚫고 나오는 천둥소리와 같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천사, 우리네 소원의
모태였던 뱃속에서 영감을 주는
커다란 희열을 주위에 감돌게 합니다.
하늘의 여인이시여, 당신이 아드님을 따라
지고의 둘레로 드시어 그것을 가뜩이나
더 찬란하게 하시는 동안 저는 돌겠습니다."
빙빙 선회하던 선율이 이렇게 저 스스로
봉해지니, 다른 모든 빛들이
마리아의 이름을 노래하였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마음을 무한한 애정으로 펼쳐
이슬을 조금 내려 주십시오. 당신들은 언제나
샘에서 마시는데 그의 생각도 거기서 옵니다.
베아트리체가 이렇게 말하자, 저 즐거운
영혼들이 고정된 축대 위에 둘레를 이루며
혜성의 형태로 거센 불꽃을 이루었다.
시계의 부속품 속을 도는 바퀴들이
정신을 가다듬은 자에겐 먼저 것이 정지한 듯
보이고 나중 것은 나는 것같이 보이듯
저 불꽃들도 그와 같이 빠르거나 느린
각각 다른 보조로 춤을 추면서, 나로 하여금
제 기쁨의 풍요로움을 판단하게 하였다.
가장 아름답다고 내가 생각한 것에서
불꽃 하나가 나오는 것을 내 보았는데,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보다 밝은 빛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베아트리체 주위를 세 차례나
맴돌며 얼마나 숭고한 노래를 불렀던지
나의 환상이 되풀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나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야위게 할 정도로
하늘과 땅을 손잡게 하였던
거룩한 시가 싸움을 거는 이리들을
내 원수로 여기며, 어린 양으로 잠자던
저 아름다운 양의 우리 밖에서 나에게 빗장을
걸던 포학함을 이겨낼 수 있는 일이 생기거든,
나는 벌써 다른 목소리와 다른 머리털을
지닌 시인으로 돌아갈 것이며, 내 영세의
우물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는
믿음 속으로 나 여기 들어왔고, 이어
베드로도 그 때문에 위에 돌았던 것이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마주치는 빛살을 너무 강하게 받으면
막에서 막으로 가는 빛살에
눈의 힘이 거슬려 잠이 퍼뜩 깨고,
깨었다 해도 재빠르게 깬 영문을 모르는 체
감각 기능이 돌아오기까지는
보이는 것들이 묘연한 것처럼
베아트리체도 그처럼 천 마일 너머까지
환히 비치는 눈의 빛살을 가지고 모든
티끌을 나의 눈으로부터 거두어 가셨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나의 마음을 천국의 환희로 올려 주신 그녀,
측은한 인간들의 현재의 생활에 접근해
그 진리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누가 직접 보거나 생각하기도 전에
자기 뒤에 켜져 있는 초 심지의 불꽃을
거울 속에 비춰 보고,
유리가 진실을 밝히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몸을 돌려, 마치 가락이 악보에
어울리듯, 이것과 서로 맞는지를 보는 것처럼,
나의 기억도 이와 같아 사랑이 나를
묶어 두기 위해 줄을 만드는 아름다운 눈을
들여다보면서 회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몸을 돌려 그 회전을
잘 바라볼 수 있을 적마다, 그 둘레 안에
보이는 것과 나의 눈이 부딪쳐
아주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던 한 점을
나는 보았는데, 강렬한 빛 때문에
불붙을까봐 눈을 감아야만 했다.
또 여기서 아주 작게 보이는 어떤 별이라도,
별이 별과 함께 나란히 놓여질 때처럼
이 빛과 함께 자리하게 되면 달처럼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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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다시 시작했다. "가장 큰 물체에서
우리는 순후한 빛이신 하늘에 나왔으니,
그것은 사랑이 가득한 지성적인 빛이요,
기쁨이 가득 찬 진실하고 선한 사랑이며
일체의 감미로움을 초월하는 기쁨이라오.
그대 여기서 천국의 두 가지 군대를
보게 될 것이니 그 하나는 최후의 심판 때
그대가 보게 될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다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그 피조물은
그 분을 보는 데에서만 평화를 누린다오.
그것은 둥그런 형체로 펼쳐져 있기에
그의 테두리가 태양에게는
훨씬 더 느슨한 띠가 될 정도였다.
그의 모습은 온통 원동천의 꼭대기에
반사된 빛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거기에서 생명과 힘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언덕이 푸르름과 꽃들로 무성할 때
마치 꾸며진 제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서인 양
제 기슭의 물속에 비춰 보는 것같이,
하늘에 돌아온 선택된 자들이
그 빛 주위에서 내려다보며 천 개도 넘는
층층대에 제 모습들을 비추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맨 아래 층계가 그토록 큰 빛을
제 안에 모으고 있으니, 이 장미꽃의 넓이가
맨 가장자리 꽃잎들에선 얼마나 클 것인가!
나의 시력은 그 넓이와 그 높이에
얼떨떨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움의
양과 질을 송두리째 취하고 있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베아트리체가 나를 끌어당기고는 말했다.
"하얀 옷 입은 저 무리가 얼마나 큰지 보시오!
우리의 도성이 얼마나 광활한지 보시오.
보시오. 우리네 자리가 이토록 가득 차 있으니,
극소수의 사람들만 거기 영접될 수 있다오.
일찍이 저 위에 놓여졌던 면류관 때문에
그대 눈여겨 바라보는 저 거대한 옥좌엔
그대가 이 혼례 잔치에서 식사하지 이전에,
저 아래서 황제가 될 지체 높은 하인리히의
영혼이 앉을 것인데, 그는 이탈리아가 미처
숙성되기 전에 그를 바로잡으러 올 것이오.
그대들을 무디게 하는 눈먼 탐욕이
유모를 쫓아내고 굶어서 죽어 가는
어린애와 같이 그대들을 만들었다오.
그리고 그러한 시기엔 드러내든 숨어서든
그와 함께 똑같은 길을 가지 않을 자가
저 성스런 광장의 총독이 될 것이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저 거룩한 임무에
잠시만 참고 놓아두실 것이니, 마술사 시몬이
제 과실 때문에 지금 있는 곳에 떨어져
알라냐의 그놈을 더 밑에 처박히게 할 것이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분의 영광과 그리고
자기들을 만드셨던 그 지선(至善)을
보고 노래하면서 날고 있는 다른 한 무리는
처음에는 꽃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에는
꿀을 빚게 되는 일자리로 돌아오는
벌 떼와 똑같이
수많은 꽃잎으로 꾸며진 저 장려한 꽃 속에
내려왔다가 그 꽃으로부터 그들의 사랑이
언제나 깃들이는 곳으로 다시 올라갔다.
얼굴들은 한결같이 싱싱한 불꽃으로 되어 있고
날개들은 황금이며 다른 부분은 너무 희기에
눈이라 한들 그 하얀색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꽃 속으로 내려올 때 옆구리로
바람을 일으키며 얻었던 평화와 뜨거움을
이 층계에서 저 층계로 갖다 내밀었다.
그러나 저 위에 계신 점과 꽃 사이에
끼어서 날고 있는 많고도 많은 무리가
시야와 찬란한 빛을 가로막진 못하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빛이 온 우주를
그 공덕에 비례해서 스며들기에 아무것도
그 빛에 방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오, 여인이시여, 그대 안에 내 희망이 힘을 얻고
그대 나의 구원을 위해 저 지옥 속에
발자취를 남기시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내 보아 왔던 그 많고도 많은 것들을
그대의 힘이며 그대의 선에서 온
은혜와 덕으로 나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 모든 길과 그 모든 방법으로써
나를 속박에서 자유로 이끄신 그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해
그대가 건강히 치유해 준 나의 영혼이 그대의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이 광활한 왕국 안에서는 슬픔이나
목마름이나 혹은 굶주림이 없는 것처럼
우연한 점이라곤 자리 잡을 수 없는데,
네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지 손가락에
가락지가 딱 들어맞는 것처럼
영원한 법칙을 통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삶으로 서둘러서 온
이 무리가 제 자신들 속에 다소나마
뛰어난 점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소원도 더는 기대되지 않을 정도로
그토록 크신 사랑과 그토록 크신 기쁨 속에
이 왕국을 아늑하게 해 주시는 임금님이
당신의 즐거우신 모습으로 온갖 영혼들을
성총에 맞는 당신의 뜻에 따라 가지가지로
창조하셨으니, 여기 그 결과만 보면 족하다.
그것은 성서 안에 나오는 쌍둥이들에 관한
부분에 뚜렷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나 있은데,
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서로 다투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몸소 참되신
저 지존하신 빛의 빛줄기 속으로
자꾸만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때부터 계속 나의 직관은 그러한 직관에
꼼짝 못하는 언어가 나타내 주는 것을 초월했으며
기억도 또한 그 초월함에 압도당했다.
마치 꿈을 꾸면서 무언가를 보는 사람에게
꿈이 지나면 그로부터 받은 느낌만 남을 뿐
다른 것은 마음 속에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나 지금 그러한데, 비록 나의 환영이
거의 송두리째 끝나긴 했어도 이에서 생겼던
달콤함은 나의 가슴 속에 아직도 방울진다.
햇빛에 사르르 녹아 버리는 눈과도 같았고
바람결에 날리는 가벼운 나뭇잎들에 적힌
시발라의 점괘 선언이 흐트러지는 듯 하였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오로지 당신 안에 좌정하시며, 홀로
당신을 아시며 당신에 의해서 인지되시고
사랑하고 웃을 줄 아는, 오, 영원한 빛이여!
나의 눈들이 잠시 동안 빙 둘러 관조했던
저 원이 당신 안에 잉태되어 마치
반사될 빛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 자신 속에 제 스스로의 빛깔로
우리들의 모습을 찍어 내는 듯 보였기에
나의 눈은 그 안에 송두리째 들어 있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그러나 마음의 소망을 제 안에 끌어들였던
한 가닥 빛이 내 마음을 후려치지 않는 한
나 자신의 날개는 그에 미칠 수 없었다.
지존하신 환상 앞에 나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열망과 의지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었다.
#신곡 #천국편 #단테_알리기에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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