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항상 그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완력에 호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설령 당국이 외부의 적에 대해서 전쟁을 걸지 않을지라도 그에 대한 준비는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
국가는 막대한 금액을 군비에 지불한다.
이것이 재력의 탕진이 되고 백성은 막중한 부담을 짊어진다.
국가 생활의 법은 다음과 같다.
곧,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늑대라는 것이다.
조직화된 문명국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세력을 집단살육에 대한 준비로 가장 먼저 소비한다.
사람들이 바치는 희생은 먼저 이 비인간적 목적을 위해서 제공된다.
전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으로 여겨질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전쟁의 악순환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탈출을 바라고 있다.
전쟁은 집단 최면이다.
전쟁이 가능한 것은 집단 최면의 소행이다.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 최면술의 힘의 노예가 된다.
그들도 이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전쟁 분위기는 전쟁 자체와 같은 성질을 띠고 또 그것에 대한 준비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서 집단적인 분위기이다.
또 인격, 개인의식, 개인적 양심이 마비된 분위기이다.
전쟁과 관련된 일체의 것은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며, 극단일 뿐만 아니라 반인격주의의 극단이며 극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격의 부정이다.
전쟁을 승인할 때 인간은 인격 아닌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군대는 각 사람이 그중의 한 부분으로서 스스로를 느끼는 일종의 계급적인 조직이다.
군대는 각 사람이 전체의 공통적 생명을 나누었고, 그 가운데 일정한 위치를 지킨다.
이것이 인격으로 하여금 전혀 특수한 분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그 속에서 노예성과 폭력이 조직적으로 경험되며 유쾌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것이 특수한 유혹이며, 전쟁에 대한 노예성이라는 특별한 매혹이고, 인간성의 무서운 자연력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성전'聖戰이란 관념은 옛날에도 하나의 모독적인 야유였다.
객체화된 역사에서 가짜로 이름을 그렇게 붙여본 것 이외에는 '거룩'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는데, 세계악의 극단적인 표현에 '신성'이란 특징을 적용했다면 그것은 악마의 유혹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결코 참으로 '거룩'하지 못 했다.
하물며 전쟁이 '거룩'할 수는 없다.
현대 생활이 문제가 되고, 세계의 파국을 예상하는 전쟁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즈음에이따위 폭언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에 관한 군대적인 관념은 반 기독교적이며 반 복음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명예의 관념에서는 그것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은 수준에 있다.
이런 관념은 결투의 유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뒷골목의 살인과 흡사한 일인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가 명예의 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전체적인 전쟁 또한 그렇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의 양성은 곧 귀족적인 유형의 양성이다.
그것은 곧, 비인격적인 세계 환경에 매몰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물, 내면적으로 독립하며, 자유로운 인물, 인생의 모든 고귀한 질적인 만족에까지 고양되고 곤궁하고 버린 바 된 낮은 세계로 내려갈 수 있는 인물의 양성인 것이다.
진정한 귀족의 주요한 상징은 고양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아량인데, 곧 내적 품성에서 나오는 것과 낮아지는 준비와 그리고 원한을 품지 않는 정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종족적 및 가족적 귀족은 과거의 조상·전통·관습의 노예성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며 편벽偏僻하다.
그것은 운동의 가치와 자유를 선택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인격적 귀족주의는 평가의 자유가 있고 운동의 자유가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개인이며, 종종 크게 고양된 개인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 정신을 극복함에 따라 인격이 된다.
부르주아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는 비인격적이다.
모든 사회 계급은 비인격적인 부르주아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귀족도, 프롤레타리아도, 지식인도 그들은 곧잘 부르주아가 된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성을 극복하지 못 한다.
부르주아는 항상 노예이다.
그들은 재산과 금전의 노예이며, 부유하게 되려는 욕망의 노예이며, 부르주아적 여론의 노예이며, 사회적 지위의 노예이며,그가 착취하는 노예의 노예이며, 그가 공포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예이다.
부르주아인 것은 정신과 혼이 해방되지 않은 상태이다.
곧, 외면적 결정에 생명의 전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재산에 대해서 특수한 태도를 갖고 있다.
부르주아의 문제는 '존재'와 '소유'와의 관계의 문제이다.
부르주아는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릴 수 없고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 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 표준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부르주아는 재산, 돈, 부, 생산수단,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부르주아를 그렇게까지 신장시킨 재산은 그의 인격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즉, 그로 하여금 본질이 되게 하지는 못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혁명에서 신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혁명에는 종말론적 순간이 있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서 시간의 끝이 다가옴이다.
그러나 혁명은 질병이고, 사회를 개혁할 창조적인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고, 무력증의 세력이 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
보복에 대한 갈망과 미움이 폭발한 것이고, 거기서 살인이 일어난다.
혁명에는 그동안 쌓인 원한이 작동하는 것이고 창조적인 감정들을 죽인다.
악마적인 요소가 없는 혁명을 꿈꿀 것이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는 항상 그것이 승리한다.
혁명은 아주 작은 정도로 자유의 깃발 아래 서 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는 운명의 깃발 아래 서 있다.
혁명은 인간 사회의 운명이다.
혁명에서 사람들은 국가와 귀족제와 부르주아와 거짓 신성과 우상들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곧바로 다른 우상들과 새로운 거짓 신성들을 만들고 새로운 참주의 노예로 빠진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일반적으로 권력이란 항상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혁명의 잔인성이 결정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공포에 의해서이고, 혁명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테러의 불가피성도 그러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학대를 시작한다.
학대 마니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학대가 항상 그에게서 예상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의 모든 주위에서 위험과 음모와 자신들을 덮치려는 시도만을 보는 사람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없다.
바로 광적인, 동물적이고 불가사의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고문을 자행하고, 교수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형에 처하고, 교수하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총살한다.
이단의 학대, 고문 그리고 처형도 역시 공포의 결과이다.
공포가 한 가지 악이나 많은 악 즉, 소위 어떤 신조나 인생관으로 악으로 규정된 것과 마주하는 것이 인간 삶과 역사에서 가장 큰 악 중의 하나이다.
이 공포는 인간 본성을 일그러뜨리고, 인간 양심을 어둡게 하며, 자주 한 인간을 야수로 변질시킨다.
이러한 일이 혁명이나 심리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반혁명에서 자주 일어나고, 전쟁 중에 발생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 문제의 해결은 파라다이스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극히 초보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일상의 빵은 모든 사람들에게 또 각 사람에게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하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비인간화가 되고 비인격화가 된 인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은 착취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이 상품화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의 의의와 존엄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추방되고 생존을 위한 모든 보장이 박탈된 사람들이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간 생존의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깊이 뿌리박힌 허위와 다른 것이 없다.
인류 대다수의 궁핍과 불행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경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법들은 부르주아 정치경제의 발명일 뿐이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인간의 활동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정리하려고 했을 때 마르크스는 아주 옳았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적 문제는 사회의 조직에 갱생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생활 내에서 분자적 과정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권위적 행동에서가 아니라 자유의 결과로서 결정된다.
권력에 의해서 절대적 성격을 띠는 정치적 방법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심히 허구적인 해결이다.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지 못한다.
공정과 정의를 실재화하는 것은 실로 강제적이며 사회적인 방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동포적 및 우애의 정신은 심원한 분자적 과정의 산물로서 자유에서 창조된다.
사회 문제는 전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격주의는 진리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항상 정신에 근거한 자유는 그 사회적 투사에서 패러독스를 환기시킨다.
사회생활에서 형식적 자유는 노예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자유는 그런 종류에 속한다.
자유에는 정도와 단계가 있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생활에서, 양심에서, 사상에서, 창조력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그 최대한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는 물질생활의 수준에까지 내려가는 정도로 제한되며 최소한도에 도달한다.
남자나 여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또 노동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제적 자유는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강자가 약자를 압박하고 그를 노예화하며 빵조각마저도 약자에게 거부할 것이다.
경제의 자율성은 오류이며 환상적 자유이다.
그러나 그릇된 일원론 혹은 전체주의는 경제생활에서 자유의 제한을 자유 전체의 제한으로 옮겨가고, 심지어 정신생활에서의 자유의 말살에까지 옮겨간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가 통과하고 있는 모든 전체주의적 조직의 커다란 해독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랑의 엑스타시의 절정에는 죽음의 엑스타시와의 접촉이 있다.
엑스타시는 그 진수에서 초월의 과정이며 일상 세계의 한계 밖으로의 탈출이다.
사랑과 죽음은 인간 생활의 가장 중대한 현상이다.
모든 사람은 설사 특별한 천부의 재질이나 창조적 충동의 능력을 갖지 못한 자도 사랑의 경험을 갖고 또 죽음의 경험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
삶 자체 속에 죽음의 경험이 있고 죽음의 신비와의 접촉이 있다.
인생에서 최대의 긴장은 사랑과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 실존의 긴박성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을 정복한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강하고 또 동시에 죽음으로 통한다.
그것은 인간을 죽음의 막다른 곳에 둔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패러독스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강대한 잠재의식적 매력에 의해서 성은 인간을 객체화된 세계에 얽매이게 한다.
이 객체화의 세계는 결정론과 필연성이며, 내부에서가 아니고 외부에서의 결정이며, 객체를 향한 인간성에서의 결정이 지배하는 곳이다.
여기에 성의 신비가 놓여 있다.
인간 해방은 동시에 강제하는 개체 세계의 일부인 성의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객체 세계만이 강제적일 수 있는데, 성은 강제적이다.
인간은 강제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성적 욕구의 충족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는 그런 종속적인 환상의 존재이다.
성은 인간에게 비인격적이며 '일반'의 힘이며 종속적이다.
사랑만이 인격적이다.
인격적인 것은 성욕이 아니라 사랑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노예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고 또 때로는 그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해방을 열망한다.
일반인이 자유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보다 더 큰 오류는 자유를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는 어려운 것이다.
노예 상태에 머무르는 편이 오히려 쉽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 해방에 대한 동경은 어떤 향상적 진보가 인간에 의해서 달성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내적으로 노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또 세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정신적 원리가 있다.
인간의 해방은 종종 상상하는 바와 같이 자연이나 이성이나 사회의 요구가 아니라 정신의 요구이다.
인간은 다만 정신뿐만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구조이며, 동물이며, 또 물질계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은 자유이며 자유는 정신의 승리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세계는 악이다.
그것은 세계에 물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는 물질이 악이라는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사악한 경향에서 발생한다.
근본적 대립은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자유와 노예성이다.
정신적인 승리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종속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장 알아내기 어려운 형태로 인간을 노예성으로 던져 넣는 거짓된 환상에 대한 승리이다.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악은 이것이라고 명백히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선의 거짓된 모습을 취하는 것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모습의 거짓된 모습을 하고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
이런 사례가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보편적 일반적 추상 관념은 고양된 행태의 악이다.
나는 이 일에 관하여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논하여 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만은 불충분하다.
죄는 원시적 외모를 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만이 아니다.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까지도 가능하며 인생의 모든 면에서 발견되는 죄와의 거짓된 싸움에 매혹되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은 참 죄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정신생활의 노예적인 왜곡의 하나이다.
인간에 의해서 외부에서 폭력으로 느끼도록 하는 노예성은 못된 짓이지만,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이 종당에는 그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노예성은 더욱 못된 짓이다.
악마적 성격은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인데, 무한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고, 거룩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야비한 것에 달라붙고, 신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이다.
인간의 국가에 대한 관계, 문명에 대한 교회의 관계까지도 악마적인 것이 된다.
공동체이면서 우의友誼 관계인 실존적 의미의 교회도 있고 또 객체화이면서 사회제도인 교회도 있다.
객체화로서의, 또 사회제도로서의 교회가 신성하고 오류가 없다고 인정할 때 우상의 창조와 인간의 노예성이 시작된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도착이며 종교생활 내부에 있는 악마적 요소다.
인간 생활은 상상적이며 과장되고, 고양된 열정, 종교적, 국민적, 사회적 정열에 의해서 불구가 되고 또 타락시키는 공포에 의해서 손상을 받는다.
이 토양 속에서 인간의 노예화가 발생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최고의 이념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서운 노예성으로 변경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에 대한 정신적 승리는 첫째로 공포 즉,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근본적인 종교적 현상과 내면적 삶의 심각성의 기호를 보았다.
성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공포는 노예성이다.
이 양자가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 세상에서 인간은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이 공포는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약화되고 둔화되어 있다.
보통 일상생활의 조직은 생사의 위험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으나 안전 확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영역 안에 몰입하고 그 이해관계에 흡수되어서 인간은 심연과 심연에 속한 불안을 저버린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창조성은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인간은 창조적 활동의 상태에 있을 때에 자유롭다.
창조성은 순간의 엑스타시로 인도한다.
창조의 산물은 시간 속에 있으나 창조적 활동 자체는 시간 밖에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영웅적 행위는 시간 밖으로 인도한다.
어떤 종말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간의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은 영웅적 행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순수한 영웅주의는 긍지와 자기 긍정에서 오는 하나의 매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정신적 해방 속에는 자유와 진리와 사랑을 목표하는 운동이 있다.
자유가 공허하여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롭지 않은 진리의 지식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는 또 진리와 의미와 신의 실재를 전제로 한다.
진리와 의미는 해방시키고, 그리고 다시 해방은 진리와 의미에 이른다.
자유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인격, 자유로우며 창조적인 인격을 실현하는 것은 자유와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원리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항상 왜곡된 것을 가져오게 되고 인간의 인격을 훼손한다.
이 원리의 각자는 그 속에서 또 그것에 의해서 유혹과 노예성의 근원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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