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의 모든 남녀의 사랑은 아무리 별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남녀간의 사랑은 예외 없이 이 본능이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뿐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소설이나 희곡 작품에도 남녀간의 사랑은 자기 보존의 본능이 성욕 속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욕은 모든 행위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성욕은 젊은 시기에 가장 활발하며 정력과 생각의 대부분을 강제로 동원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 힘은 모든 노력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도 한다. 


성욕은 자기가 하는 일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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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욕은 왜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가? 


그 해답은 너무 간단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꽃을 찾기 때문이다. 


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사랑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장 엄숙한 것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 최대의 이슈이다. 


그 이유는 사랑을 통해 자신들의 후계 세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가 가진 종족 보존 본능의 행위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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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신의 연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찬미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 해도 그 최종 목적은 오직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사명감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정신적 사랑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육체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과, 아무리 둘이 사랑을 확신하고 있어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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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랑에서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이 없다면 어느 남녀가 그토록 서로 만나려고 애쓰겠는가? 


남녀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멋진 옷을 차려입고, 수없이 거울을 보는 그 처절한 노력이 성 충동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하겠는가? 


인간 개체가 이제 이 에로스적 환상의 묘약에 속아서 그것을 행복과 만족으로 여기고 열심히 이기적인 집착에 매달리는 동안, 신이 혹은 자연이 이루려는 인류 종족 유지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만 사실상 인간은 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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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에게 성욕이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과 만족에만 있다면 왜 인간은 상대방 이성을 구하는데 그렇게 까다롭겠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키가 커야 하고 성격은 어떻고 용모는 어떻고 건강과 가문과 재산을 따지는가? 


성적 욕구가 쾌락에 그친다면 상대가 아무 여자나 아무 남자라도 그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들은 어떤가? 


그들도 성적 만족을 위해 그렇게 까다롭게 짝을 고르는가? 


우리가 동물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내면에 이성 선택에 어떤 기준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만큼 짝을 고르는 데 그토록 진지한 선택과 노력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없이 닥치는 위험과 재난에서도 불구가 되지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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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인간을 만든 신의 뿌리 속에 있으므로 개인의 고통이란 이 지상에 인류의 존속을 원하는 신의 의지보다 중요하지 않다. 


옛 선인들도 이 같은 진리를 이미 알고 인간을 지배하는 신을 잔인하고 사나운 폭군처럼 그렸다. 


이제 인간은 신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상적인 여인 아리아드네를 손에 넣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욕정을 만족시킨 다음 곧 그녀를 버린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일 페트라르카가 사랑에 만족했던들 그는 마치 둥지에 알을 깐 새가 울지 않는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내 글을 읽고 현재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실망하거나 반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사랑을 하는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되면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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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또 다른 어떤 불행한 사람이 똑같은 꽃을 보고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은 꽃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무관심한 사람은 그 꽃을 그저 무미건조학 바라볼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라는 외적 조건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의 눈으로 꽃을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며 행복이나 불행 역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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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자기를 때리면 금세 적의를 품는다. 


사람도 똑같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멸시를 받으면 불쾌해지고 적의를 품는다. 


이렇게 인간의 명예욕은 항상 제3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칭찬이나 찬사를 받거나 모욕과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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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에서 떠나 현재의 물질적·정신적 가치의 10분의 1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예을 들면 자기 능력에 버거운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남의 눈 때문이며, 지나치게 큰 집에서 사는 것도 남들이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려고 힘들게 사는 것이다. 


자기 수입에 비해 너무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차를 타면서 매달 할부금에 시달리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 능력에 과분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처분한다면 훨씬 만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불행은 대부분 남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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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고뇌와 번민,불안과 초조의 80~90%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다. 


또한 우리들의 질투나 증오심도 대체로 같은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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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은 주로 안정된 기분과 흐뭇한 만족감을 뜻한다. 


지금의 기분이나 상태가 좀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가 행복이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순간 안정된 기분은 흐트러지고 불만감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 본위의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 허영심을 줄이면 현재의 불행은 50분의 1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 허영심을 없애는 것은 우리들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뽑아버리는 셈이지만 그것은 선천적인 고질병이어서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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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 가지 유전병은 명예욕과 허영심과 자부심이다. 


그 중 허영심과 자부심은 차이가 있다. 


자부심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에 대해 그런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부심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은 말이 적지만 허영심은 말이 많다. 


자부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남이 자기를 존중케 하기 위해 많은 설득과 위장이 필요하고 때로는 위압도 필요하게 된다. 


참된 자부심은 자신의 우수한 가치에 대한 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만 허영심은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과대 평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결국은 밑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입이 가벼운 사람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은 말이 적은 사람이 말이 많은 사람보다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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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잃은 재물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한 번 잃은 명예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명예란 개인이 지닌 뛰어난 특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성품, 즉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품을 통해서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명예는 소극적이고, 명성은 적극적이다. 


명예는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명성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특질이나 재질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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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생존을 포기하려면,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커다란 고뇌에 의해 절망적인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치며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절망의 절벽에 섰을 때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제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높은 영혼의 정신적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만이 우리가 말하는 해탈,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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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철학을 연구하고 신앙을 가지려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고 고통이 없다면 아무도 이 세상이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불멸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만일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입증된다면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곧 식어버릴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영원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도 신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유물론이나 회의적인 세계관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화를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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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국가 발전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정치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의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통치자가 전제 정치를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명하고 청렴한 통치자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려있다. 


더럽고 추한 정치 지도자가 다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인물을 골라 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탁월한 통치자를 배출하려면 성품이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의 결합보다 더 실질적인 해결책은 없다. 


이 제안이 나의 유토피아,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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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질병과 재난과 전쟁의 재앙이나 슬픔과 고통이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평화나 행복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불과하다. 


이제 곧 고통과의 투쟁과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날 때까지는 끝없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고통과의 끝없는 전쟁의 계속이며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극히 순식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통과 맞설 무기를 든 채 끝내는 죽어간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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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애의 초반이나 전반부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에 대한 큰 갈망과 희망과 포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사랑이나 행복이나 야망이 한낱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의 후반부에서도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 했다면 그는 여전히 생의 전반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살기는 바라지도 않아.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이미 생의 후반부에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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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육체의 생리적인 현상은 물리학적으로는 유예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들의 정신 활동은 밤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물리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육체나 정신이나 죽음에게 승리를 안겨줄 뿐이다. 


삶의 주인은 결국 죽음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우리를 삼켜버리기 전에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한 순간이다. 


우리는 늘 삶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의지와 욕구를 불어넣고 투지를 불태우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비누 방울을 갖고 노는 것과 같다. 


비누 방울이 끝내는 터질 줄 뻔히 알면서도 숨을 불어넣어 크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애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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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내일은 좀더 나아지겠지, 아니면 내년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겠지’ 하는 기대 속에 살다가 별 소득 없이 세월을 다 보낸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 후회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생존 자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인간은 늘 희망에 속아서 죽음과 씨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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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미궁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울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죽음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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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 때 성욕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충동과 격정, 무서운 광기 등 저 악마적 사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물론 청년기에는 그런 폭풍 같은 긴장의 시간들이며 우울함이나 비애가 깃들어 있어야 하고 노년기에는 평온하고 쾌활한 기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청년기에는 악마의 지배 밑에서 강제 노동을 감수해야 하므로 자유로운 시간이 쉽게 허락되지 않지만, 성욕이 소멸된 후에는 생명의 핵이 소진되고 인간은 껍질만 남은 인형처럼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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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의 우파니샤드 경전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수명이 100세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이전에 병으로 죽게 된다. 


따라서 나이 90이 되어 아무 질병도 없이 졸도나 경련도 없이 숨도 헐떡이지 않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잠자는 듯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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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를 느끼지만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위대성을 더 뚜렷이 느끼게 된다. 


따라서 뛰어난 사람들은 고독해지거나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자기를 깨닫게 된다. 


또한 정신적 고독과 함께 육체적인 고독을 동시에 갖추었을 때 비로소 행복도 충만해진다. 


정신적인 고독만 있고, 육체적인 고독이 없을 경우에는 늘 자기와는 동떨어진 어중이떠중이들과 만나 자유와 마음의 안정을 빼앗기고 그 대가는 전혀 얻지 못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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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 한 것을 보면 ‘저것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갖지 못 한 데서 오는 괴로움’, 즉 갖고 싶은 소유욕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라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물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해 보라는 뜻이다. 


남의 좋은 집을 보고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런 집도 없다면 어디서 살았을까.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상실을 가정해 보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까 본 멋진 집보다 내가 사는 초라한 집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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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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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주로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주로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공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최대한의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주로 여자들이 선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매를 가꾸고 맵시 있는 옷으로 치장하여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매력적을 만드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남녀가 모두 사용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예절이나 대화를 유쾌하게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계발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며,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의_기술 #에리히_프롬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배후에 있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가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할 만한-또는 사랑 받을 만한-적당한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할 대상'의 선택과 관련하여 20세기에 일어난 큰 변화를 들 수 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많은 전통적인 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자발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결혼은 쌍방의 가문에 의해서든 혹은 결혼 중매인을 통해서든, 또는 그런 중매자가 없어도 관습에 의해 성립되었다. 


결혼은 사회적 고려의 토대 위에서 결정되었으며, 사랑은 결혼을 한 후에야 발전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구세계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최근 몇 세대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에서도 이런 관습적인 사고방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자유라는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기능'의 중요성보다 '대상'의 중요성을 과장하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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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과 상호 유리한 교환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의 진열장을 바라보고 스릴을 느낀다든지 현금이나 할부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또는 그녀)는 사람까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여자-또는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남자-는 바로 그들이 구하고 있는 상품인 것이다. 


‘매력적'이라는 것은 보통 개성의 시장에서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멋진 상품을 의미한다.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 시대의 유행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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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상품처럼 대하는 것뿐이다. 


가령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갔다고 하자. 


대상은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이어야 하고, 또 동시에 대상자도 나의 공개된, 또는 숨겨진 자산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나를 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흔히 부동산을 구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는 숨겨져 있는 잠재력이 이러한 매매계약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이 만연되어서 물질적 성공이 높게 평가되는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교환방식과 동일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해도 그다지 놀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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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가정으로 이끄는 세 번째 잘못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최초의 경험을,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 

또는 보다 적절히 표현하면 사랑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혼돈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우리 모두가 흔히 그러하듯이, 지금까지 서로 모르고 지내던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가깝게 느낀다든지 서로 일체감을 느낀다면, 이 합일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흥분된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소외되고 고독하게 지내오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기적과 같은 경험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친밀의 기적은 흔히 성적인 매력과 성의 성취에 의해 시작될 때 더욱 촉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그것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두 사람이 점차 서로를 잘 알게 될수록 친밀감은 그 기적적이었던 감정을 점차 잃어가고 마침내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실망과 권태를 느끼게 되어 최초의 흥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알지 못 한다. 


실제로 그들은 이렇게 정신나간 상태-즉 서로에게 '미쳐버린’ 상태-를 그들의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는 얼마나 고독했던가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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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여 고독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 하고 끝내 실패할 때 정신이상이 생긴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심은 분리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철수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세계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나 모든 문화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이 분리 상태를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개체적인 생명을 초월하여 합일 상태를 발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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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감을 해결하지 못 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의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것은 분리감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결과적으로 전보다 더 강한 분리감을 자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 외에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전혀 좁혀주지 못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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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적인 결합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의 능동적인 힘이며, 


그 힘은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파괴시키는 힘이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그에게 고립과 고독감을 극복하게 하며, 


그를 그 자신이게 하며, 


그의 통합성을 보유하게 한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또 둘로 남는다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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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성격의 사람에게 준다는 것의 의미는 이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주는 행동 바로 그것에서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부와, 자신의 역량을 경험한다. 


이렇게 과시된 생명력과 잠재력의 경험은 스스로를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 


그는 그 자신이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며 살아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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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성적인 기능의 최고 절정은 준다는 행동에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성기를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그는 여성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그가 성적인 능력이 있는 한 그것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줄 수 없다면 그는 성불구자이다. 



여성의 경우도 약간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여성도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성은 자신의 여성의 중심의 문을 열며, 받는 행위 속에서 주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주는 행위를 못 하고 오직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 환자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준다는 행동은 애인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능으로 다시 발생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주며, 

또 유아에게 자신의 모유를 주며,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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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의 영역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는 자기 자신을 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신 안에 살아있는 것을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이다. 


그는 타인에게 그의 기쁨을, 그의 흥미를, 그의 이해를, 그의 지식을, 그의 유머를, 그의 슬픔을, 즉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풍족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생명감을 고양시킴으로써 타인의 생명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타인의 삶에 어떤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지 않을 수 없으며, 상대방의 삶에 준 이것은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다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두 사람이 생에 대하여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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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의 경우에만 준다는 것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배우는 점이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서 자극되며,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하여 자신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서로 관계되고 있다면,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은 주로 생산적인 오리엔테이션의 달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사람은 의존성과 나르시시즘적(자기도취적)인 전능(全能), 타인을 착취하고 싶은 욕구 혹은 저장하고 싶은 욕구 등을 극복한다. 


또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며, 자신의 목표 달성에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그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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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랑의 제3 구성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어쩌면 책임은 지배 또는 소유욕으로 쉽게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아니라 그 어원(語源)을 따른다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존경이란 타인이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은 착취의 부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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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이라는 것은 


오직 내가 독립을 성취했을 때만, 


또한 내가 똑바로 서서 부축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을 때만, 


또 어떤 사람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의 기본 위에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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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고 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합이라는 체험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에서의 지식은 그것이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는 완전한 지식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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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책임·존경, 그리고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것들은 성숙한 사람, 즉 그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노력한 것만큼만 기대하는, 또 전지전능한 자아도취적인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하게 생산적인 활동만이 줄 수 있는 내적인 힘에 근거한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태도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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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사랑은 ‘나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고, 


미성숙의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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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특정한 인간과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한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세계에 대한 한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이나 확대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동일한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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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활동이며 정신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이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 스스로 뒤따라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지만 그 기술을 배우는 대신 알맞은 대상을 기다리며, 

그 대상을 발견하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와 비교될 수 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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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의 태도는 여성은 물론 동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본능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본능적 요인이 아무리 크게 작용하더라도 이 모성애의 원인에는 각별히 인간적, 심리학적 요인들이 있다. 


이 요인들 중의 하나는 모성애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갓난아이를 아직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한 그녀의 사랑과 행복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일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어머니의 권력욕 혹은 소유욕에서 발견된다. 


완전히 어머니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어린아이는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어머니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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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사랑에 있어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분리를 허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심, 즉 모든 것을 주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된다.


많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모성애라는 과업에 실패하는 것도 역시 이 단계에서이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라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애정’ 깊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여성,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을 느끼는 여성, 

그녀 자신의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만이 

분리의 과정에서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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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망은 융합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긴장의 제거가 아니다. 


성적 욕망은 고독감의 불안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또한 정복욕이나 정복당하려는 욕구에 의해, 

공허함에 의해, 

해치거나 파괴하려는 욕구에 의해 자극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랑에 의해서도 자극될 수 있다. 


성적 욕망은, 사랑은 하나뿐이라는 열정적인 감정과도 쉽게 융합되며, 또 그것에 의해 자극받는 것으로 보인다. 


성적 욕망은 사랑의 관념과 결합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서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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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적 결합의 욕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는 탐욕을 동반하지 않으며,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나 정복당하려는 욕망 또한 없다. 


오직 부드러운 애정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육체적 결합의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신제적(酒神祭的)인 일시적인 의미 이상으로 결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는 결합의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사랑 없는 결합은 이방인들을 이전과 같이 남남으로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 그것은 그들을 서로 부끄럽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남남임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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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호,존경,책임,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뿌리박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향한 능동적인 갈망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힘을 실현하고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 포함된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질의 구현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지향되고 있다.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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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역시 그 자신을 사랑한다. 


그가 오직 타인들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명확히 배제하고 있는 이기심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기적인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원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 의해서만 기쁨을 느낀다. 


외부세계는 그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점에서만 관찰된다. 


즉 그는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들의 존엄과 통합성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오직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유용성에 따라 판단한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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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나 라디오 청취, 흡연, 혹은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능력은 바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만약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 혹은 그녀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홀로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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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객관적이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겸손의 태도를 몸에 지니고, 또 그가 어린아이로서 갖는 전지전능의 꿈속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적인 상대적 부재에 의존하며, 또 겸손과 객관성, 그리고 이성의 발전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몰두되어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낯선 사람에게 객관적일 수 없다면 내 가족에게도 진실하게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 역(逆)도 성립한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민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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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용기의 실천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언제 어디서 신념을 잃게 되는가에 주의하며, 


이 신념의 상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하게 행동하고 또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신념의 배반이 사람을 얼마나 약화시키며, 

또 약화될수록 새로운 배반이 더욱 많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의식적으로는 사랑받지 못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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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라는 희망을 갖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념의 행동이다. 


신념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없다. 


신념의 실천에 관해 더이상 말할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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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경영 관료들에 의해,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즉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그들 스스로의 목적으로서 더 많이 소비하는 데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표에 예속되며, 수단은 목적으로 되어버렸다. 


즉 인간은 자신의 특수한 인간적 자질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잘 먹고 잘 입는 기계적인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최고의 자리에 놓여져야 한다. 


경제적 기계는 인간을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인간이 기계를 돕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갖기 보다는 오히려 경험을 공유하고, 일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인, 사랑하는 본성이 인간의 사회적 실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것과 일체가 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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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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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왕조들은 정교政敎가 같지 않으니 어느 조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까? 


제왕은 과거의 것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예를 따라야 합니까? 


복희씨와 신농씨는 백성들을 교화하되 벌하여 죽이지 않았고, 

황제와 요순은 벌하여 죽이는 일은 했으되 과도하게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에 이르러 각기 시세에 맞춰 법을 만들고, 사리에 근거해 예를 정했습니다. 


예와 법은 시세에 맞춰 확정하고, 
제도와 명령은 각기 관련 사안에 부합하고, 
무기와 정비는 각기 쓰기에 편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데는 반드시 옛날을 본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왕업은 옛 법을 준수하지 않았기에 흥성할 수 있었고, 


하나라와 은나라의 패망은 예제를 바꾸지 않았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옛 법을 반대하는 자를 반드시 비난할 것도 없고, 


옛 예제를 준수하는 자를 크게 잘 한다고 칭찬할 것도 없습니다.

#상군서 #상앙


고관은 녹봉이 많은 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빈둥대며 놀고먹는 자가 많으면 농사를 해치게 된다. 


놀고먹는 자의 숫자에 따라 부세를 징수하고, 부역을 가중시킨다. 


그러면 고관세족은 식객을 많이 거둘 수 없고, 간사한 재주로 이리저리 유세하면서 게으름 피는 자는 먹고살 길이 없게 된다. 


백성이 먹고살 길이 없게 되면 반드시 농사를 짓는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면 황무지는 반드시 개간된다.

#상군서 #상앙


무릇 군주가 백성을 격려하는 수단은 관작官爵이고, 


나라가 흥성하는 길은 농사를 지으며 싸우는 농전農戰이다. 


지금 백성들이 관직과 작위를 얻는 것이 모두 농전의 실적에 근거하지 않고 간교한 언변인 교언巧言과 유가 학설처럼 공허한 도리인 허도虛道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백성에 교언허도를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백성에게 교언허도를 권하면 나라는 반드시 힘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지면 나라는 반드시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치국의 요체를 알고 있다.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농사짓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마음이 농사짓는 쪽으로 되돌아 오면 백성은 순박해져 바로잡을 수 있다. 


성실한 까닭에 부리기 쉽고, 유사시 그들을 앞세워 적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 


백성이 농전에 전적으로 매진하면 상벌을 이용해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와 싸울 때 활용할 수 있다. 


백성이 군주를 친근하게 여기고 법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사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쓰일 수 없는 것은 

간교한 언변으로 유세하는 자들이 군주를 모시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고, 


상인이 집안을 부유하게 할 수 있고, 


수공업자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이들 3가지 직업의 쉽고도 유익한 점을 보면 반드시 농사를 피한다.

#상군서 #상앙


나라가 1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0년 동안 강성하고, 


10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백 년 동안 강성하고, 


1백 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천 년 동안 강성한다. 


1천 년 동안 강성한 나라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국王國이 된다. 


군주는 상벌을 제정해 백성들이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도록 하는 가르침을 널리 펴야 한다. 


군주의 가르침에 일관성이 있고 정사 또한 커다란 성과를 거두는 배경이다.

#상군서 #상앙


나라가 부유한데도 국고를 계속 채우면서 부유한 백성의 부를 덜어내는 이른바 빈치貧治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이는 기존의 부에 새로운 부를 보태는 중부重富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부'를 실현하는 나라는 강해진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한데도 국고를 비우면서 부유한 백성을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부치富治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이는 빈궁에 빈궁을 보태는 중빈重貧을 자초하는 것이다. 


'중빈'을 자초하는 나라는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이들 3가지 직종이 만들어내는 일 가운데 나라를 좀먹는 6가지 일인 이른바 6슬六蝨이 있다. 


농업을 해치는 것은 연말에 여분의 양식을 마련한 후 손님을 초대하는 세찬歲饌과 

둘째 진탕 먹고 마시는 식탐食貪이다. 


상업을 해치는 것은 화려하게 치장하는 미장美裝과 

진기한 물건을 추구하는 호기好奇이다. 


관직을 해치는 것은 소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약지弱志와 

복지부동의 자세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관행慣行이 그것이다. 


나라를 좀먹는 이들 ‘6슬'이 3가지 직종에 달라붙어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벌을 무겁게 하고 상을 가볍게 하는 중벌경상重罰輕賞은 군주가 백성을 아끼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상을 남발하고 법을 가볍게 하는 다상경벌多賞輕罰은 군주가 백성을 아끼는게 아니다. 


그리하면 백성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흥성한 나라가 형벌을 시행하면 백성은 군주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군주를 경외하고, 포상을 시행하면 군주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군주를 경애한다. 


그러나 나라가 실력도 없으면서 교지巧智를 즐겨 사용하면 반드시 멸망한다. 


겁이 많은 백성을 형벌로 부리면 반드시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을 포상으로 부리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겁이 많은 백성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이 목숨을 바쳐 나라에 적수가 없게 되면 그 나라는 강해진다. 


강하면 반드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자가 된다. 


가난한 자를 형벌로 부리면 부유해지고, 부유한 자를 포상으로 부리면 부가 덜어진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고 부유한 자의 부를 덜어낼 수 있으면 나라는 국력이 쌓이고, 국력이 쌓인 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는 왕자가 된다. 



왕자가 다스리는 왕국王國은 형벌이 9할이고 포상이 1할이다. 


강자가 다스리는 강국彊國은 형벌이 7할이고 포상이 3할이다.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자가 다스리는 삭국削國은 형벌이 5할이고 포상이 5할이다.

#상군서 #상앙


형벌을 사용해 형벌을 없애는 이른바 이형거형以刑去刑을 행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형벌을 사용해 형벌을 자초하는 이형치형以刑致刑을 행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말하기를, 

“형벌을 시행할 때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면 형벌이 사라지고, 일이 이뤄지고, 나라는 강해진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면 형벌이 계속 사용되고, 사달이 나고, 나라는 쇠약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형벌은 국력은 낳고, 

국력은 강대함을 낳고, 

강대함은 위세를 낳고, 

위세는 은혜를 낳는다. 


은혜는 국력에서 나오는 셈이다. 


국력을 숭상해야 전쟁에서 용감하게 적과 싸울 수 있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지혜와 책략이 백출하게 된다.

#상군서 #상앙


강한 나라는 13가지 종류의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나라 안에 있는 식량창고의 수, 

총인구의 수, 

장년의 남자 수, 

장년의 여자 수, 

노인의 수, 

신체 허약한 사람의 수, 

관원의 수, 

선비의 수, 

언변으로 먹고사는 자의 수, 

본업인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의 수, 

말의 수, 

소의 수, 

꼴의 수가 그것이다. 


강국을 만들고자 하면서 자기 나라의 이들 13가지 숫자를 알지 못 하면 설령 국토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을지라도 나라는 갈수록 쇠약해지고, 영토 또한 깎인다.

#상군서 #상앙


백성이 용감하면 그들이 바라는 작록으로 그 용기를 포상하고, 


백성이 겁을 내면 그들이 꺼리는 형벌로 그것을 제거한다. 


겁 많은 백성은 형벌을 사용해 부리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은 상을 이용해 부리면 목숨을 바친다. 


겁 많은 백성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이 목숨을 바치면 국가는 적수가 없어지고 반드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국이 된다.

#상군서 #상앙


『시』와 『서』를 익히고 담론하는 선비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외지로 나가고, 군주를 가벼이 여긴다. 


숨어사는 선비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조정에서 멀어지고, 군주를 비방한다. 


용맹을 떨치는 무사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심지가 강해지고, 금령을 가벼이 여긴다. 


수공업자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경솔해지고, 이주하는 것을 쉽게 여긴다. 


상인이 손쉬운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지하며, 군주를 비난한다. 


이들 5부류의 사람들이 나라의 등용 대상이 되면 농지는 황폐해지고, 병력은 쇠약해진다. 


명리를 얻는 자들을 보면 


담론을 즐기는 선비는 입, 


숨어 사는 선비는 지조, 


용감한 무사는 용기, 


수공업자는 손, 


상인은 몸뚱이에 기본 자산이 있다. 


이들에게 천하는 바로 자신의 집과 같다. 


몸에 기본 자산을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몸 자체가 기본 자산인 까닭에 외지의 그 어떤 곳에 갈지라도 세력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 


이처럼 몸에 기본 자산을 달고 다니며 천하를 집으로 삼는 자는 요순도 다루기 힘들어 했다. 


탕왕과 무왕은 그런 행위를 금한 까닭에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성인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여기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는 것을 이긴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으로 쉽게 여기는 것을 이겼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옛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오늘의 것을 고수하지 않는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오늘의 것을 고수하면 면면히 흘러가는 시대의 추세와 단절된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모범으로 삼지 않았고, 


하나라는 순임금이 다스린 우虞나라를 좇지 않았다.

#상군서 #상앙


무릇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군주가 비열한 행위를 방임하기 때문이다. 


법령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군주가 혼란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명군은 비열한 행위를 방임하지 않고 혼란을 조장하지 않는다. 


권력과 위엄을 장악해 보위를 지키고 법령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는 까닭에 간사한 짓을 잘 알 수 있고, 
관원들 내에도 간사한 짓이 빚어지지 않는다. 


또한 상벌이 엄정히 시행되고, 
생산되는 기물과 용구 또한 정해진 법도에 맞는다. 


나라의 제도가 분명하고, 
민력이 충분히 사용되고, 
군주가 내리는 작위가 존귀하고, 
여러 부류의 인재가 두루 활용되는 배경이다. 


#상군서 #상앙


군사를 일으켜 재능있는 사람이 절로 용맹하게 만든다는 것은 논공論功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논공이 분명하면 백성들이 전력을 다하고, 백성이 전력을 다하면 재능 있는 사람이 절로 용맹해진다. 


행상行賞을 통해 군사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은 작록의 수여를 뜻한다. 


작록은 군사 운용에서 매우 실효적인 것이다. 


군주가 작록을 수여할 때는 공정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면 나라는 날로 강해지고, 그렇지 못 하면 나라는 날로 쇠약해진다. 


작록을 수여할 때 적용하는 이 원칙은 국가존망의 계기인 존망지기存亡之機에 해당한다. 


대개 영토가 깎이는 나라와 망국의 군주는 작록을 포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작록을 수여하는 원칙이 크게 잘못됐다. 


3왕과 춘추오패는 군가존망의 계기로 오직 작록만 사용했지만 다른 군주들보다 1만 배의 공적을 이뤘다. 


작록을 포상하는 원칙이 공정했기 때문이다. 


명군이 신하를 부릴 때는 반드시 그들의 노고에 따라 임용하고 전공戰功에 따라 포상한다. 


전공에 따라 포상하는 원칙이 명확하면 백성들은 다퉈 전공을 세우고자 한다.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이 전심전력으로 다퉈 전공을 세우고자 하면 그 군대는 반드시 강해진다.

#상군서 #상앙


당초 지위가 같던 사람이 상대를 노비로 부리게 되는 것은 빈부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당초 재력이 같던 나라가 상대국을 합병하는 것은 강약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똑같이 영토를 보유해 군주 노릇을 하지만 어떤 자는 강하고 어떤 자는 약하다. 


이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차이로 인한 것이다. 


만일 치국과 처세의 도를 터득하면 사방 1리의 좁은 땅일지라도 몸을 맡길 수 있고, 재능 있는 선비와 일반 백성을 불러올 수 있다. 


심지어 구차하게 저잣거리에서 몸을 맡길지라도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상군서 #상앙


명군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것이다.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 작위를 수여하면 그들을 영예롭게 만들고 높은 지위에 앉히는 셈이 된다. 


백성들은 작위가 영예롭지 않으면 백성들은 작위 수여를 간절히 바라지 않고, 작위가 높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게 된다. 


작위가 쉽게 얻어지면 백성들은 군주가 내리는 작위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작록의 포상이 정당한 경로를 거치지 않으면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작위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좋아하고 싫어하는 호오好惡가 있다. 


백성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이유다. 


군주는 백성들의 ‘호오'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들의 '호오'는 상벌의 기초가 된다. 


무릇 인정人情이란 작록을 좋아하고 형벌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군주는 작록과 형벌 두 가지를 설치한 뒤 민지民志를 통제하고 민원民願을 이루도록 격려해야 한다. 


백성들이 힘을 다하면 작위가 따르고, 전공을 세우면 포상이 따드도록 한다.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런 포상의 원칙을 마치 밝은 해와 달처럼 신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 군사는 곧 천하무적이 된다.

#상군서 #상앙


3군의 각 부대가 서로 왕래하지 못 하도록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 


장년의 남자가 장년의 여자 부대를 왕래하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이내 간사한 자가 함부로 음란한 짓을 꾀하게 된다. 


이러면 나라가 패망한다. 


남녀가 같이 있기를 좋아하면 그들은 이른 시일 내에 전투가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용감한 병사조차 싸우지 않게 된다. 


장년의 남자와 장년의 여자가 노약자 부대를 왕래하면 늙은 병사는 장년의 남녀를 슬프게 하고, 
허약한 병사는 건장한 병사를 연민에 빠지게 만든다. 


슬퍼하고 연민하는 비련지심悲憐之心이 있으면 용감한 병사조차 싸우려던 생각을 바꾸고, 
겁이 많은 병사는 아예 싸우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3군이 서로 다른 부대를 왕래하지 못 하도록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어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상군서 #상앙


무릇 포상은 격려를 위한 문치文治의 수단이고, 


형벌은 간사한 짓을 금하기 위한 무치武治의 수단이다. 


문치와 무치는 법치法治의 요체이다. 


명군은 법을 믿고 사용한다. 


명군이 남에게 가려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명明, 


기만을 당하지 않는 것을 찰察이라고 한다. 


그래서 상은 후하면서 신뢰성이 있어야 하고, 

형벌은 엄중하면서도 반드시 실시되어야 한다. 


포상할 때 관계가 소원한 사람들을 빠뜨리지 않는 부실소원不失疏遠을 행하고, 


형벌을 내릴 때 친근한 사람을 피하지 않는 불위친근不違親近을 행해야 한다. 


신하가 군주를 덮어 가리지 않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속이지 않는 이유다.

#상군서 #상앙


세상의 위정자는 대부분 법을 버리고 사사로운 의론을 신임한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이유다. 


옛 제왕이 무게를 재는 저울을 제정하고, 길이를 재는 자를 확립했다. 


오늘날에도 이를 본받는 것은 그 표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저울을 버려둔 채 무게를 가늠하고 자를 버려둔 채 길이을 추측하는 것은 설령 정확히 알아맞힐지라도 상인이 취하지 않는다. 


늘 정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나라의 저울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도를 어기고 사사로운 의론을 신임하는 것은 일의 유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을 판단기준으로 사용치 않고도 능히 지혜롭고, 유능하고, 현명하고, 불초한 자를 정확히 구분해 평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요임금뿐이다. 


세상의 군주가 모두 요임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상군서 #상앙


속담에 이르기를, “좀벌레가 많으면 나무가 꺾이고, 틈이 크면 담이 무너진다"고 했다. 


대신들이 사리를 다투고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백성은 군주로부터 떠나게 된다. 


백성이 군주를 떠나는 것이 나라의 ‘틈'이다. 


녹을 받아먹는 관원이 아랫사람들의 사정은 덮어두고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 백성들의 '좀벌레'이다. 


'틈'과 '좀벌레'가 생기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는 천하에 극히 드물다. 


명군은 법을 믿고 사용하며 사익을 제거하는 까닭에 그 나라에는 '틈'과 '좀벌레'가 없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나라를 다스릴 때 포상을 통일시키고, 형벌을 통일시키고, 교화를 통일시켰다. 


포상을 전공 한 가지에서만 나오도록 통일하면 군대는 천하무적이 된다. 


형벌을 통일하면 군주의 명령이 철저히 시행된다. 


교화를 통일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믿고 따른다. 


공명公明한 포상은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엄명嚴明한 형벌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간명簡明한 교화는 백성들의 풍속을 억지로 바꾸지 않는다. 


백성들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까닭에 나라에는 기이한 풍속이 없다. 


공명한 포상이 더욱 발전하면 포상이 아예 필요없게 된다. 


엄명한 형벌이 더욱 발전하면 형벌이 아예 필요없게 된다. 


간명한 교화가 더욱 발전하면 교화가 아예 필요없게 된다.

#상군서 #상앙


전쟁을 통해 전쟁을 제거하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이 가능하면 전쟁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살인으로 살인을 제거하는 이살거살以殺去殺이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형벌로 형벌을 제거하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가능하면 형벌을 가중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군서 #상앙


옛날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던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백성부터 제압했고, 
강적을 이길 수 있었던 자 역시 반드시 먼저 자신의 백성부터 이겼다. 


자신의 백성을 이기는 근본은 백성을 의도한 바대로 통제하는 데 있다. 


이는 마치 제련공이 쇠를 다루고 도공이 흙을 다루는 것과 같다. 


근본이 견고하지 못 하면 백성은 새나 짐승과 같게 된다. 


그 누가 이들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통제하는 근본은 법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법으로 백성을 단속한다. 


명성이 높아지고 영토가 넓어지는 이유다.

#상군서 #상앙


첫째,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현란한 언변을 구사하는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오랜 세월 권문세족을 위해 일한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군주가 이들 3부류의 인간을 존중해 전공이 없는데도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면 백성들은 농전을 버리고 이런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 


혹자는 공리공담으로 이익을 추구하고, 


혹자는 아첨을 무기로 군주의 총애를 받는 고관을 섬기면서 사리를 추구하고, 


혹자는 용맹을 내세워 사리를 다투게 된다. 


결국 농전에 종사하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고, 외지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먹고사는 자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상군서 #상앙


군주가 붕당의 무리 가운데 1명을 발탁하면 백성들은 군주를 외면한 채 권세가와 사적인 교제를 맺으려든다. 


백성들이 군주를 외면하고 권세가와 사적인 교체를 맺으면 이내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상황이 빚어진다. 


군주가 ‘군약신강'의 배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 하면 설령 열국 제후들의 침공을 받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백성들의 겁박劫迫을 받게 된다.

#상군서 #상앙


선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적이 휘두르는 창검의 날을 밟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게 했다. 


그 백성들이 진심으로 원해 그러했겠는가? 


아니다. 


백성들이 계속 서로 본받아가며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함으로써 참전하지 않은 데 따른 형벌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건대 신민을 향한 교령敎令은 

‘백성들 가운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경작을 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길이 없고, 


형벌을 피하고자 하는 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형벌을 면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상군서 #상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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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


대개 사람의 현명함{賢}, 부족함{不肖}, 지혜{智}, 우둔함{愚}, 용기{勇}, 비겁{怯), 인{仁}, 의{義}에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며, 천해지기도 하고 귀해지기고 한다. 


이 모두를 조용히{無爲} 판단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유무(有無)를 자세히 살펴서 그 사람의 실과 허를 판정하고, 


상대방의 기호와 욕망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검토하고, 


상대방의 말을 상세히 배열한 후 그것을 다시 검토하여 실질적 정황을 알아내어야 한다. 


이처럼 상대방의 중심 생각{指}을 알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열거나 닫으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혹은 열어 보여주기고 하고 혹은 닫아 감추기도 하는데, 


열어 보여주는 것은 상대방과 정세에 대한 판단을 같이할 때이고, 


닫아 감추는 것은 상대방과 생각을 달리할 때이므로, 


상대방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함께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책략을 자세히 검토하여 먼저 그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여야 하며, 


이리하면 떠나거나 합류해도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판단에 따른 대세를 따를 수 있다.

#귀곡자


입이란 

마음의 문호이고 
마음이란 정신의 주인으로서, 


사람의 의지,욕망,사려,지혜 모두가 이 문호를 통하여 출입하므로, 


그것의 열리고 닫힘을 관리하여 그 출입을 통제하여야 한다.

#귀곡자


옛날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 중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지난 날을 다시 관찰하고 지금을 다시 검증하여야 하고, 


옛날을 다시 알고 지금을 다시 알아야 하며, 


상대방을 다시 이해하고 자기를 다시 이해하여야 한다. 


상대방의 동정(動靜)과 허실(虛實)의 이유가 현재와 합치하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 그 이유를 탐구하여야 하며, 


모든 일은 반복된다는 것이 성인의 뜻이니, 


모든 일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귀곡자


따라서 남을 아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기를 알아야 비로소 남을 알 수 있다. 


만약 자기와 남을 모두 안다면, 

두 눈이 나란히 있는 물고기(比目魚)가 형상을 보는 것 같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며, 


상대방의 말을 관찰하는데 실수가 없어서 마치 자석이 작은 바늘을 끌어 당기는 것 같이 분명하고, 


혓바닥이 불에 잘 익힌 갈비살을 섭취하는 것 같이 절실하여, 


남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적으나 그 정세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신속하여 음과 양을 함께 보고, 원(圓)과 사각(方)을 함께 볼 수 있다.

#귀곡자


내건이란 『귀곡자』에서 주로 신하와 군주 사이의 관계에서 내부에 있는 자기 편을 말하며, 


반드시 내부에 자기 편을 만들어 두어야 자유자재로 나아가고 물러설 수 있으며, 


이것이 안되면 물러서라고 권하고 있다. 


내건을 통하여 일단 의기투합하면 멀리 있어도 가깝게 되고, 


멀리서 소리만 들려도 서로 생각하는 관계가 되고, 


일단 의기가 투합하지 않게 되면 가까이 있어도 멀어지고, 


매일 앞에 나아가도 채용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귀곡자


천하가 뿔뿔이 흩어져 위에 현명한 군주가 없게 되고 제후들에게 도덕이 없어지면, 


소인들은 도적이 되고, 


현인들이 쓰이지 못 하게 되며, 


성인은 도피하여 숨어 버리고, 


이익을 탐하는 사기꾼들이 날뛰게 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의심하고 국가조직이 와해되어 서로간에 활을 쏘고, 


부자가 이산하여 서로간에 반목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틈새의 싹'이라고 한다. 


성인은 이런 '틈새의 싹'을 보면 미리 그것을 법으로 막아내는데, 


세상이 아직 다스려 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봉쇄하고, 


세상이 다스려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세상을 획득한다.

#귀곡자


무엇으로 천하의 권세를 판단한다고 하는가? 


답은 이것이다. 


국가의 대소를 판단하고, 


인구의 다소를 고려하고, 


재화의 유무를 측량하고, 


백성의 다소를 고려하여 여유롭고 부족한 정도가 어떠한지를 판단하며, 


지형의 험준함을 보아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지를 판단하고, 


모략의 면에서는 누가 뛰어나고 누가 떨어지는지를 판단하며, 


군신지간의 친소관계와 누가 현명하고 누가 모자라는지를 판단하고, 


빈객의 지혜와 누가 빈객이 더 많고 누가 적은지를 판단하며, 


천시(天時)의 화와 복을 보아 누가 길하고 누가 흉한지를 알아내고, 


제후의 친척 중에서는 누구를 쓰고 누구를 안 쓰는지를 알아내며, 


백성들의 민심의 방향을 보아 누가 안정되었고 누가 위험한지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증오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사람이 바뀌면 누가 편해지는지 등을 알아내는 것이니, 


이런 것을 알아낸다는 것을 곧 천하의 권력을 계량한다고 하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제후들의 정세를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대단히 기뻐할 때 찾아가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하여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욕망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며, 


또한 그들이 매우 두려워할 때 찾아가 그들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므로 이런 방법으로 제후들의 정세를 알아낼 수 있다. 


이때 그들은 반드시 그 격한 감정과 욕망 때문에 자기의 감정이 변화한 줄을 모르게 되어 사람을 잘못 보고 말도 하지 않으니, 

다시 자기에게 안정책을 묻게 된다.

#귀곡자


자세히 탐구할 때는 


평화(平)롭게 하거나, 


정직(正)하게 하거나, 


기쁨(喜)으로 하거나, 


분노(怒)로 하거나, 


명성(名)으로 하거나, 


행위(行)로서 하거나, 


청렴(廉)으로 하거나, 


믿음(信)으로서 하거나, 


이해(利)로서 하거나, 


비겁(卑)하게 할 수가 있는데, 



평화롭게 한다는 것은 조용히 한다는 것이고, 


정직하게 한다는 것은 곧게 한다는 것이며, 


기쁨으로 한다는 것은 즐겁게 한다는 것이고, 


분노로 한다는 것은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고, 


명성으로 한다는 것은 그 상대를 발동시킨다는 것이며, 


행위로 한다는 것은 성공토록 한다는 것이고, 


청렴으로 한다는 것은 깨끗이 한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이며, 


이익으로 한다는 것은 구하도록 한다는 것이고, 


비겁하게 한다는 것은 아첨한다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지혜로운 사람과의 대화는 박식함에 의지해야 하고, 


모자란 사람과의 대화는 명확한 판단에 의지해야 하며, 


판단을 잘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요점을 집어서 말해야 하고, 


높은 사람과의 대화는 권세에 의지해야 하며, 


부유한 사람과의 대화는 높은 지위에 의지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과의 대화는 이익에 의지해야 하며, 


천한 사람과의 대화는 겸손함에 의지해야 하고, 


용감한 사람과의 대화는 용감함에 의존해야 하며, 


지나친 사람과의 대화는 결연함에 의지해야 한다.

#귀곡자


몸은 안에 있으면서 바깥 일을 말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몸은 바깥에 있으면서 안의 깊은 이야기기를 하면 위험해 진다. 


남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남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며, 


남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면서 따르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멀리해야 어두운(陰) 곳에서 나아가 밝은(陽) 곳에서 그것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떠나는 자는 조용히 놓아주고 놓아주는 자는 직급을 올려주며,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지극히 정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아는 자는 모략을 계획하게 하는 자로서 쓸 수 있으나, 


이것을 알지 못 하는 자는 쓸 수 없다.

#귀곡자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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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싹트기까지 아름다움은 간판으로서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사랑이라는 정열을 북돋아 주며, 상대방이 아름답다는 칭찬을 남들에게서 듣고 있는 동안에 사랑하게 된다. 


강한 감탄은 극히 사소한 희망까지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애론 #스탕달


미련하게 고지식하거나, 누구에게나 미소를 던지는 남자에게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교계에서는 여자에게 진력이 났다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태도이다. 


사람은 너무 보잘것없는 식물을 웃음거리의 자료로 삼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도 우리의 허영심은 너무나 손쉬운 승리를 경멸한다. 


그리고 남자는 어떤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맡겨진 것은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연애론 #스탕달


인생의 불행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이,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억으로 남지 않는 일이다. 


영혼은 너무나 감동하여 교란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의 원인 또는 감동에 따르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일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영혼은 감각 자체가 되어 버린다.

#연애론 #스탕달


정열적인 사랑을 느끼지 못 하는 남자는 동시에 미의 효과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것은 그가 여자에게서 받는 가장 강한 인상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새틴 모자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든거리는 남자는,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 가까이 와도 자기가 냉담한 데 놀란다. 


그런 사람은 남이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자기가 가엾게 생각된다. 


절세의 미인도 이틀째 되는 날에는 그다지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며, 결정 작용을 저해한다. 


그녀들의 가치는 누구나 알고 있다. 


즉 일종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녀들의 애인의 명단에는 바보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왕족이나 백만장자 따위들······

#연애론 #스탕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애정이 두텁고 의심이 많다. 


가장 순진한 여자도 그렇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인생에 실망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소개될 때, 뻔히 알 수 있는 평범한 태도로 나오면, 상상력을 위축시키게 하여 결정 작용을 저해한다. 


이와 반대로 연애는 첫 번째의 소설적인 상황에서 개가를 올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놀라움은 특수한 사건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미 결정 작용에 필요한 두뇌의 작용을 반쯤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연애론 #스탕달


눈짓은 정숙한 교태의 커다란 무기이다. 


눈은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으나, 나중에 언제든지 부정할 수 있다. 


눈짓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론 #스탕달


사랑이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으로 잡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색정의 행복은 훨씬 현실적이며 흔히 농담의 재료가 되기 쉽다. 


정열적인 사랑에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는 그것에 이르기 위한 최후의 한 발자국만큼 완전한 행복은 못 된다. 


그러나 행복이 그 기억을 남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것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연애론 #스탕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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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말로 표현하면 그 도는 늘 이러한 도(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비롯되고, 

이름 있는 것에서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언제나 억지로 보고자 하는 마음 없이 보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되고, 

언제나 억지로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 그 껍데기만을 보게 된다. 


이 둘은 같은 것인데, 이름만 서로 달리한다. 


똑같이 ‘그윽함(신비로움)'이라 하는데, 신비롭고 신비로워서 온갖 신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門이 된다.

#도덕경 #노자 #왕필


현玄이란 그윽함이다. 


고요하고 아무 것도 없으니 처음과 어미가 모두 거기서 나온다.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 


즉 특정하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어서 그윽하다고 했다. 


그것을 그윽하다고 말한 것은 하나(一)인 그윽함은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처럼 특정하게 이름 지어 부르게 되면 그윽한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윽하고도 그윽한 것이다. 


온갖 오묘함은 모두 다 거기서 생겨난다. 


그래서 온갖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했다.

#도덕경 #노자 #왕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앞세우지 않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내버려두지만 (오히려) 몸이 보존된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대아大我)을 이룬다.

#도덕경 #노자 #왕필


최상의 선善은 (언제나)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하지만 그 공功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잘 머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잘 머무르고, 
아주 깊이 헤아리며, 
어질게 잘 어울리고, 
아주 믿음직스럽게 말하며, 
이치에 맞게 잘 다스리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며, 
때를 잘 맞추어 움직인다. 


(그러나) 결코 그 공을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도덕경 #노자 #왕필


혼魂(마음을 관장하는 넋)을 하나로 몸에 싣고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운을 온전히 하고 부드럽게 해서 갓난아이와 같이 될 수 있는가? 


마음을 씻고 닦아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억지로 일삼은 지식을 사용치 않을 수 있는가? 


열리고 닫히는 하늘 문(道)과 같은 암컷이 될 수 있는가? 


사방을 두루 밝히고 (사방에 두루) 미치지만 억지로 일삼지 않을 수 있는가? 


(도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그 공을) 소유하지 않고, (그 공에) 기대지 않으며, 기르지만 그 기른 것을 부리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덕스러움이라고 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없음(텅 빈 공간)이 있으므로 수레로서의 쓸모가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없음(오목하게 파진 부분)이 있으므로 그릇으로서의 쓰임새가 있다. 


창문을 내어 집을 만드는데, 
그 없음(내부의 텅 빈 공간)이 있으므로 집으로서의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로운 것은 없음(無)의 쓰임새 때문이다.

#도덕경 #노자 #왕필


무릇 여기서 무엇무엇 같다고 한 것은 모두 그 모습을 나타내거나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이다. 


무릇 어둠으로(흐릿하게) 다스리면 사물(백성)이 밝음을 얻고, 


혼탁함으로써 고요하면 사물이 맑아지고, 


편안함으로써 움직이면 사물이 살아난다. 


이는 저절로 그러한 이치(道)이다. 


누가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서서히(徐)라는 말은 세밀하면서도 신중하다는 말이다. 


(가득 차기를 바라지 않음은)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치기 때문이다. 


폐蔽란 가려서 덮는다는 말이다.

#도덕경 #노자 #왕필


텅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독실히 하여, 만물이 함께 일어나 되돌아감을 나는 본다.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근원)로 되돌아간다.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고요함(靜)이라 하고, 


고요함을 일러 운명(命)으로 돌아감이라 하고, 


운명으로 돌아감을 일러 늘 그러함(常)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明)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 하면 헛되이 흉함을 일으킨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되니, 


포용함은 곧 공평함이요, 


공평함은 곧 왕이요, 


왕은 곧 하늘이요, 


하늘은 곧 도요, 


도는 곧 영원함이니,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위대한 덕은 오직 도道만을 따른다. 


도라는 것은 오직 황홀하여 없는 듯 있는 듯 하되 그 가운데 형상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하되 그 가운데 사물이 있다. 


깊고도 어둡지만 그 안에 정미함이 있고, 그 정미함이 매우 참되어 그 안에 미더움이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을 떠나지 않고 사물의 근본을 다스린다. 


내가 어떻게 사물의 근본이 그러한지를 알겠는가? 


이로써 안다.

#도덕경 #노자 #왕필


큰 도는 넓고 넓어서 두루 사방에 존재한다. 


만물이 그것에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자랑하지 않고, 


공功이 이루어지지만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만물을 먹여주고 길러주지만 그 운동 변화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항상 무욕하니 작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이 돌아가되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 스스로 크다(위대하다)고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큼(위대함)을 이룬다.

#도덕경 #노자 #왕필


장차 거두어들이려면 반드시 먼저 베풀어야 하고, 


장차 약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강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며, 


장차 없어지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흥성하도록 해주어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러 ‘묘한 밝음(밝음을 감춤)'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견고하고 강한 것을 이기나니,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나라에 이로운 기물器物은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 #노자 #왕필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품으며, 텅 빈 기氣로써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로움·모자람·착하지 못함인데, 왕공王公은 이것들로 칭호를 삼는다. 


그러므로 사물은 혹 덜어내도 (오히려) 보태어지고, 보태어도 (오히려) 덜어내게 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치니, ‘억센 사람은 제 명대로 죽지 못 한다'는 것을 나는 장차 가르침의 아비로(근본으로) 삼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온갖 사물과 형체는 하나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는가? 


‘없음'으로 말미암아서다.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니, 하나를 일컬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는데, 어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드디어 셋을 낳는다. 


없음을 좇아서 있음으로 나아가니 수數는 여기에서 다하고 (즉 모든 수가 여기로부터 나오고), 이렇게 나온 것은 도의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생겨남에 나는 그 주인을 안다. 


비록 그 모양이 만 가지나 텅 빈 기氣의 조화는 하나이다. 


백성들은 저마다 마음이 다르고,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지만, 왕후王侯는 하나를 얻어서 주인이 된다. 


하나로써 주인이 되니 어찌 그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도덕경 #노자 #왕필


큰 나라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굽듯이 하라. 


도道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귀신이 신통력을 부리지 못 한다. 


그 귀신 자체가 신통력을 부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신통력이 사람을 해치지 못 하는 것이다. 


그 신통력만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인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이 둘은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므로 덕德이 함께 이에 돌아간다.

#도덕경 #노자 #왕필


일삼되 억지로 일삼지 않고, 


일하되 의도적으로 일하지 않으며, 


맛을 내되 억지로 맛을 내지 않으니, 


크고 작고 많고 적음에 원망을 덕으로써 갚는다. 


어려운 일을 그 쉬운 것에서부터 하고, 


큰일을 할 때는 그 작은 일에서부터 한다. 


천하의 어려운 것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유발된다. 


이로써 성인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큰일을 이룬다. 


가볍게 승낙하다 보면 반드시 믿음이 적어지게 되고, 


아주 쉽게 여기다 보면 반드시 아주 어려워지게 된다. 


이로써 성인은 오히려 일을 어렵게 여기나니, 마침내 어려움이 없다.

#도덕경 #노자 #왕필


훌륭한 무사武士는 힘으로 상대와 겨루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분노로써 상대를 대하지 않으며, 


적敵을 잘 이기는 사람은 상대와 더불어 맞서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그 아래에 머문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사람을 부리는 자의 힘이라고 하며,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고 하니, 


옛날의 지극한 준칙(道)이라 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사람의 (신체는)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게 굳는다. 


만물 초목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그것이 죽으면 마르고 뻣뻣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기만 하면 승리하지 못 하고, 나무가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 


강하고 큰 것은 낮은 곳에 임하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높은 곳에 임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 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 하다. 


선한 말은 변명하지 않고, 

변명하는 말은 선하지 않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위함으로써 자신은 더욱 갖게 된다. 


남에게 베풀므로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작위 하되 다투지 않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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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대한 중국 문자는 ‘머리'라는 뜻의 '首'와 '가다'라는 뜻의 '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빌헬름도 도를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도를 '길’ '섭리'로, 심지어 예수회의 수도자들은 '신神'으로 번역한다.


이는 모두 번역하기 곤란함을 나타낸다. 


'머리首'는 의식을, 그리고 '가다行'는 '길'을 지시한다. 


그 이념은 다음과 같다.


'의식적으로 가다’ 혹은 '의식적인 길'이다. 


이로써 '천상의 심장'으로서 '두 눈 사이에 살고 있는’ '천상의 빛'이 도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성과 생명은 천상의 빛에 포함되는데, 유화양에 따르면 그것들은 도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우리 텍스트는 “위대한 일자一者인 황금꽃에 관한 비밀을 공개한 것"을 약속한다.


황금꽃은 빛이며, 천상의 빛은 도이다. 


황금꽃은 내가 환자들에게서 자주 마주쳤던 바로 그 만다라 상징에 해당한다.


황금꽃은 규칙적인 기하학적 장식으로, 혹은 만발한 꽃의 조감도로 그려진다. 


그 식물은 저 아래에 있는 어떤 어두움으로부터 움트고 상부에 빛의 꽃을 들어올리고 있는, 빛이나 불꽃의 색채로 모습을 드러낸 형상으로 가장 자주 나타난다(마치 크리스마스트리와 비슷한 상징이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황금꽃의 출현은 또한 ‘설산의 변경’ '근원적 통로’ '가장 지복한 영토’ '무한의 땅’ '의식과 생명이 펼쳐지는 제단'이라고도 부른다. 


『혜명경』은 “만약 죽는 이가 이런 시원始原의 위치를 알지 못 하면, 수천의 탄생과 수만의 세대를 거치더라도 의식과 생명을 하나로 하는 통일성을 발견하지 못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로 있는 첫 출발은 또한 최고의 목표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다의 바닥, 즉 무의식의 어두움 속에 있다.

 
'배아주머니'에서 의식과 생명(본성과 생명, 즉 性과 命)은 아직 '통일체’, 즉 "불에 달구어진 화로 속 불씨처럼 나누어지지 않고 혼합되어있는 것"이다.


"배아주머니 내부에는 지배자의 불이 있다.” 


“배아주머니에서 모든 현자들이 각자의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는 불의 유비를 주목하게 된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정신 수행의 가르침은 신들의 인식을 당연히 전제한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우리의 텍스트가 ‘텅 빔의 중심’ '텅 빔이자 생명력의 신이 사는 곳'으로 표현하듯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생명력에서 자유롭게 된, 의식의 빛을 막 발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수천 겁劫동안에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마야Maya의 미망迷妄은 단순한 이성의 결정에 의해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무게에 해당하는 모든 대가가 지불되는 상태에 이를 정도의 근본적이고도 지루한 준비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의식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 미망은 벗겨지지 않고, 그 내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 환영에서 벗어난 지고함에 도달하지 못 한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우리의 텍스트에 따르면, 무의식의 형태에는 신들뿐만 아니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도 나타난다. 


빌헬름은 ‘魂혼'이라는 단어를 아니무스로 번역하였다. 


실제로 '아니무스'의 개념은 혼에 잘 들어맞는다. 


그 글자의 형상은 '云운'과 '鬼귀'를 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혼은 구름의 정령이고, 보다 드높은 양의 원리에 속하는 호흡의 영靈이어서 남성적이다. 


그것은 죽은 후 위로 상승하여 '선仙’, 즉 '뻗어나가고 현시하는’ 정령 혹은 신이 된다. 


아니마, 즉 '魄백'은 '白백'과 '귀鬼'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백색의 혼령'인데, 저급한 태곳적 육체의 혼으로 음의 원리에 속하므로 여성적이다. 


그것은 죽은 후 아래로 가라앉아 '귀鬼’, 데몬Damon이 된다. 


이는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 망령,유령이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아니무스는 천상의 심장에 있으며, 낮에는 눈(즉 의식)에 살고 밤에는 간肝에서 나와 꿈을 형성한다.” 


아니무스는 “우리가 위대한 공허로부터 획득한 것이고, 근원적 시초부터 언제나 하나의 형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아니마는 ‘보다 무겁고 불분명한 것의 힘'으로, 육체적으로 작용하는데, 주로 육체의 심장에 고착하고 있다.


'쾌락과 분노의 반응'은 그의 작용이다.


“깨어날 때 어둡게 침작하고 있는 자는 아니마에 사로잡혀 있다.”

#황금꽃의_비빌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생각이 재빨리 일어나고 있는 것을 멈추어서 관조하도록 해야 한다. 


관조하여 다시 고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깨달음의 확립에 필요한 두 가지 태도이다. 


즉 그것은 빛의 원환주행이고, 그 원환주행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정이다. 


빛이야말로 관조이다. 


관조 없는 고정은 빛이 없이 이루어지는 원환주행이다. 


고정 없이 이루어지는 관조는 원환주행 없는 빛일 뿐이다. 


잘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명상 상태로 앉아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종종 산만해져버린다. 


산만함을 의식화하는 것은 그것을 없애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태만을 의식하고 있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서로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무의식 상태의 태만은 실제적 태만이고, 의식적 상태의 태만은 전적으로 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청명함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만함은 정신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태만은 정신이 아직 순수하게 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다. 


산만함은 태만보다 훨씬 쉽게 개선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어떤 병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프거나 가려움을 느낀다면, 이는 약으로 다스려야 하는 병에 해당한다. 


태만도 하나의 질병과 같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느끼지 못 하는 병과 관련된다. 


산만함은 모으게 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정돈할 수 있게 한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이제 원환주행이 제대로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징후들이 있다. 


그 첫번째, 명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신들이 계곡에 있게 된다. 


수백 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각 소리는 너무도 뚜렷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모두 계속해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는 언제나 들리도록 되어 있으나 평소에 우리는 그것을 결코 듣지 못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곡에 신들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끔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고요 속에 있노라면 눈의 빛目光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완전히 밝아지는데, 마치 구름 가운데 있는 것같이 되고 만다. 


눈을 열어 자신의 몸을 찾으려 하지만,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이렇게 말한다: 
“텅 빈 방에서 밝게 환해진다虛空生白.” 


이때는 안이든 밖이든 모두 똑같이 환해진다. 


이는 매우 유력한 징후이다.

혹은 명상 상태로 앉아 있으면 몸이 완전히 비단이나 연옥처럼 반짝이게 된다. 


앉아 있는 것이 무겁게 느껴졌으나 이제 위로 끌어올리는 듯 느껴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이 되돌아와서 하늘에 닿는다神歸頂天.” 
시간이 지나면 실제로 날아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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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을 뛰어넘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자기 이상의 것을 창조했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거대한 조류의 한가운데서 그저 썰물이기를, 인간을 초월하느니 차라리 동물로서 퇴화하기를 원하는가? 


원숭이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웃음거리이며, 보잘것없는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도 역시 ‘초인'과 비교한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웃음거리이거나 수치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껏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 왔지만, 그대들의 내부 세계의 대부분은 아직도 벌레로 가득 차 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으며, 아직도 인간은 여느 원숭이 못지않은 원숭이인 것이다. 


그대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결국 '식물'과 '유령’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대들에게 식물과 유령이 되라고 명령하지는 않겠다. 


들으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에 대해 가르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초인은 대지(大地)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초인은 대지의 뜻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사후세계의 희망에 대하여 설득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毒)을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경멸하는 자들이며, 대지가 가장 싫어하는 죽어 가는 자이자 독을 자청하여 물려받은 자들이다. 


대지는 이런 자들에게 지치고 권태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어 사라져야 함은 마땅하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이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보잘것없는 안일함이지 않은가. 


나의 행복은 생존 자체를 변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이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이 지식을 갈구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비참한 향락인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이제까지 나를 광란케 한 적이 없다. 


얼마나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지쳐있는가. 


그 모든 것들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보잘것없는 향락인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정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내가 불꽃도 숯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불꽃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동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히는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동정은 어떠한 십자가의 형벌도 아니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일찍이 이렇게 외쳐본 일이 있는가. 


아아, 일찍이 그대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더라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인간이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 같은 존재이다. 


심연 위에 놓인 하나의 밧줄과 같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 위를 뛰어넘는 것도, 그 위를 지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한 일이며, 공포에 질린 채 떨고 있는 것도, 머물러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의 징검다리요, 결코 어떠한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의 과도(過渡)이자 하나의 몰락이라는 데 있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몰락 이외에는 살아갈 방법을 모르는 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피안(彼岸)을 향해 건너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대한 숭배자요, 또 하나의 피안을 동경하는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몰락하고 희생해야 하는 까닭을 별나라의 배후에서 찾는 자들이 아니라, 앞으로 초인의 대지가 되도록 자신의 몸을 대지에 바치는 자들을 사랑한다. 

나는 인식하기 위해 살며, 또한 언젠가 대지에 초인이 생존할 것을 인식하려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자신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 

나는 초인을 위해 집을 짓고, 초인에게 대지와 동물과 식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일하고 발명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몰락을 더욱 빠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 이유는 바로 덕을 몰락하려는 의지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방울의 정신도 자기 자신을 위해 숨겨두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덕 자체이고자 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성품과 운명을 만들어내는 자를 사랑한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덕을 위해 살고, 또한 자신의 덕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덕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자를 사랑한다. 

하나의 덕은 두개의 덕보다 낫다. 

왜냐하면 덕은 인간의 운명을 이어주는 매우 훌륭한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낌없이 자신의 영혼을 베푸는 자, 어떠한 감사도 바리지 않고, 어떠한 보답도 원치 않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나눠 주고 자기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주사위가 행운을 가져올 때 수치를 느끼고서, ‘나는 그저 속임수 많은 사기꾼인가?’ 하고 자문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멸망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행위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들을 던져 주고는, 항상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실행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그의 몰락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인정하고 지난 세대들을 구제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존하는 사람들과 힘을 겨루면서 몰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신을 징벌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신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영혼이 상처를 받았을 때에도 그 깊이를 잃지 않으며, 사소한 체험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그 다리 위를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은 그의 몰락을 재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고 그의 심장은 자신을 몰락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의 이마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검은 구름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번개가 칠 것임을 예언하고, 또한 예언자로서 멸망해 가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언자이며, 동시에 먹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리하여 이 번개는 '초인'이라고 일컫는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그러나 말해 보라 형제여, 
사자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 약탈하는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하며 망각이다. 


하나의 출발이며 하나의 놀이이다. 


자전하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다. 


그리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여. 


창조라는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야 정신은 그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상과 격리된 자기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아, 형제여! 


내가 창조한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작이며, 인간의 망상이었다. 


그 신은 인간이었다. 


인간과 자아의 한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유령은 나 자신의 잿더미와 불길로부터 내게로 온 것이었다. 


피안에서 나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형제여, 그래서 무엇이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고민하는 자이며, 나 자신을 초극했다. 


나는 나의 잿더미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더욱 빛나는 불꽃을 만들었다. 


보라! 
그때 유령은 나에게서 달아나지 않았던가!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낸 것은 병든 자, 죽어 가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이 달콤하고도 음산한 독소도 역시 육체와 대지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모든 별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했다. 


‘아,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와 행복에 이르는 하늘의 길이라도 있었으면'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빠져 나갈 하나의 출구와 핏빛 샘물을 발견했다. 


이 무뢰한들은 이제 자신들이 육체와 대지에서 벗어난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탈의 선풍과 환희는 누구의 덕택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육체와 대지 덕택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글로 쓴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피로 쓰여진 것만을 사랑한다. 


피를 가지고 쓰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독서하는 게으름뱅이를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라면, 독자에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한 세기를 산다면 정신 그 자체가 악취를 발산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운다면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 자체가 부패해 버릴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국가? 

국가란 무엇인가? 


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민족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국가는 냉혹한 괴물 중에서도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것은 또한 냉정하게 거짓을 일삼는다. 


그리하여 그 기만성이 때에 따라 입에서 굴러 나오곤 한다. 


“나, 즉 국가는 민족이다."라고. 


그것은 거짓말이다. 


일찍이 민족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을 베푼 것은 창조자들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이 민족의 징표를 나는 그대들에게 보여 주련다. 


모든 민족은 제각기 선악에 관한 자기 언어를 갖고 있다. 


그 말을 이웃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 한다. 


민중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습관과 율법 속에 그들의 언어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하여 온갖 거짓말을 한다. 


무슨 말을 하든지 국가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또한 그가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것은 모두 훔친 것이다. 


국가의 모든 것은 가짜이다. 


그것은 훔쳐낸 이빨로 마구 물어뜯는다. 


그렇다. 


그의 내장 자체도 거짓이다. 


선악에 대한 언어의 혼란, 이 정표를 나는 국가의 징표로서 그대들에게 보여 주련다. 


이 징표는 죽음에 대한 의지를 표시하고 있다. 


이 징표는 죽음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눈짓을 보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자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 남아도는 자들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선인이건 악인이건, 만인이 독을 마시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만인이 자기를 상실하는 곳-만인이 스스로 서서히 목숨을 끊는 ‘삶'이라고 불리는 곳이 곧 국가인 것이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창조하는 자의 작품과 현명한 자의 보물을 훔쳐 낸다. 


훔친 물건들을 그들은 문화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질병과 재난이 된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병들어 있으며, 담즙을 뱉어 놓고는 신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서로를 삼키지만 하나도 소화시키질 못 한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얻음으로써 도리어 가난뱅이가 된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와 같은 많은 돈을 탐낸다. 


이 약삭빠르게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의 꼴을 보라! 


그들은 서로를 뛰어넘으며 기어올라서 진흙탕과 깊은 수렁 속에 서로를 끌어들이곤 한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왕관을 가지고 서로 싸운다. 


그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광기이다-마치 행복이 옥좌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옥좌에는 때때로 진흙탕이 앉아 있고, 때때로는 옥좌가 진흙탕에 앉아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대지는 아직도 위대한 영혼들 앞에 개방되어 있다. 


고독하게 홀로 혹은 둘이서 은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은 장소가 남아 있다. 


그 주위는 고요한 바다의 향기로 충만해 있다. 


위대한 혼령에게는 자유로운 생이 개방되어 있다.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적게 지배당한다. 


적당한 가난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국가가 멸망한 곳, 거기에 비로소 참 인간이 등장하며 그들의 삶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꼭 있어야 할 자들의 노래, 단 한 번뿐이며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선율이 몰려온다. 


국가가 없어지는 곳. 


나의 형제들이여,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라! 


그대들은 초인으로 향하는 무지개를, 초인의 다리를 보고 싶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의 친구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나는 그대가 독한 파리 떼에게 쏘이는 것을 본다. 


차갑고 사나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몸을 옮겨라!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그대는 작고 비참한 자들을 너무 가까이하고 살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들의 복수에서 도망쳐라! 


그대에게 그들은 복수만을 일삼는다. 


이제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말라! 


그들은 무수히 많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그대들은 비극과 가슴 아픈 일들을 사랑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암캐를 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은 너무나 잔인한 눈을 갖고 있다. 


고뇌에 가득 찬 자들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의 정욕에 가면을 씌우고는 동정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러한 비유를 그대들에게 말해 주려고 한다. 


자신의 마귀를 내쫓으려다가 도리어 스스로가 암퇘지 무리 속으로 빠져든 자가 많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순결이란 무엇인가? 


순결이란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찾아 왔다. 


우리가 이 어리석음에게로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손님에게 정성을 베풀고 침실을 제공했다. 


이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결혼이란, 창조한 자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를 지닌 자로서 서로 존경하는 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의 결혼의 의미이며 진실이 되도록 하라. 


그런데 너무나 많은 속물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인가? 


아, 빈곤한 한 쌍의 영혼이여, 추잡한 한 쌍의 영혼이여, 가엾은 한 쌍의 향락이여!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결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하늘나라에 의해 맺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용지물들의 하늘나라를.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천국의 그물에 걸린 동물들을.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최상의 사랑이라야 다만 약간의 황홀경이요, 괴로운 정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대에게 보다 높은 길을 가르쳐 주는 등불이어야만 한다. 


그대들은 자신을 초월하여 사랑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우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라. 


그리하여 그대들은 사랑이라는 잔 속의 쓴맛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상의 사랑도 역시 쓴맛이긴 하다. 


그리하여 사랑은 초인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창조자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한다. 


창조자에 대한 목마름, 초인에 대한 화살과 동경. 
형제여, 말해 보라! 


그대의 결혼에 대한 의지도 이러한가? 


이러한 의지를, 이러한 결혼을 나는 신성하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에게 말해 보라. 


어째서 황금이 최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귀하고도 무용하고, 그 빛은 반짝이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자신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황금은 오직 가장 높은 덕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최상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누어 주는 자의 눈은 금빛처럼 빛난다. 


황금의 찬란한 빛은 달과 태양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다. 


나누어 주는 최고의 덕은 귀하고 무용하며, 또한 반짝이면서도 광채가 부드럽다. 


최상의 덕은 나누어 주는 덕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우리의 길은 위를 향해, 종속으로부터 종속을 초극한 곳을 향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라며 타락해 가는 마음은, 우리에겐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를 향해 올라간다. 


정신은 우리들의 신체의 비유이며, 향상의 비유이다. 


모든 덕은 이런 향상의 비유이다. 


그래서 육체는 생성하는 자, 투쟁하는 자로서 역사를 헤쳐 나간다. 


그렇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신은 육체에 대해서 무엇인가? 


정신은 육체의 싸움과 승리의 전령이며, 동료이고, 메아리인 것이다. 


선과 악의 온갖 명칭은 비유이다. 


그런 명칭은 말을 함으로써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암시할 뿐이다. 


그런 명칭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자는 우매하다. 


그대들의 정신은 비유로써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조심하라. 


이때 그대들의 덕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대들의 육체는 향상되고 부활할 것이다. 


그대들의 육체는 크나큰 기쁨에 넘쳐 정신이 황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정신은 창조자, 평가자, 사랑하는 자, 모든 사물의 은인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고독한 자들이여, 깨어 있어라. 


그리고 귀를 기울이라. 


미래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예민한 귀라면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대, 오늘의 고독한 자들이여! 


그리고 세상을 등진 자들이여! 


그대들은 언젠가는 한 대중이 될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 그대들 중에서, 선택된 민족이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된 민족에게서 초인이 태어나야 한다. 


진실로 대지는 구원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벌써 대지의 주위에는 하나의 새로운 향기가 맴돌고 있다. 


축복을 가져다 주는 향기가!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진실로 그대들에게 권하거니와, 나에게서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차라투스트라를 안 것을 부끄럽게 여겨라! 


그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는 친구들을 속였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자는 자기의 적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구를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제자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나의 꽃다발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하지만, 만약 그대들의 존경의 대상이 몰락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몰락하는 존경의 대상에 깔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을 원한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갖는 마지막 의지가 되게 하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그러나 나의 타오르는 창조의 의지는 항상 나의 몸을 인간에게 향하게 했다. 


그것은 도끼로 돌을 쪼개는 것이다. 


아, 그대들, 인간이여. 


돌 속에 한 영상이 나를 위해 잠들어 있다. 


아, 나의 환상의 영상이 그 어느 것보다 단단하고 누구보다도 못생긴 돌 속에 잠들 줄이야! 


비로소 나의 도끼는 그 감옥을 잔혹하게 내리치노라. 


그 돌에서 파편이 튕겨 날아가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나는 그것을 완성할 것이다. 


어떠한 사물 속에서 가장 가벼운 것, 가장 조용한 것, 하나의 그림자가 나에게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즉 초인의 아름다움이 그림자가 되어 나에게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아,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신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선과 악,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자신으로부터 극복되어야 한다. 


평가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평가와 말로써 폭력을 가한다. 


그것이 그대들의 감춰진 사랑이요, 또한 영혼의 불꽃이요, 전율이요, 내뿜는 정열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가치에서는 보다 억센 폭력과 새로운 초극이 성장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알의 껍질은 깨진다. 


그리하여 선악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이란 창조하는 선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일찍이 나 자신은 적나라한, 색깔을 칠하지 않는 그대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새였다. 


해골이 내게 추파를 보냈을 때, 나는 날아가 버렸다. 


나는 차라리 저승에서, 옛날의 망령 사이에서 노예가 되겠다! 


저승의 망령들은 분명히 그대들보다 더 살찌고 배 또한 부르다! 


나는 그대들의 벌거벗은 모습이든, 옷을 입은 모습이든 참을 수가 없다. 


이것이 내 깊숙한 고통이자 슬픔이다. 


그대들, 현대인들이여! 


미래에 대한 공포도, 길 잃은 새를 위협한 것도 그대들의 ‘현실'보다는 좀 더 친근하여 가까이 하기 쉽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태양은 바다를 마시고 그 심연을 빨아올리고자 한다. 


이제 바다의 욕망은 크게 부풀어 오른다. 


바다는 태양의 갈증에 의해 그 입에 흡수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공기가 되고, 빛의 길이 되고, 또 빛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실로 나는 태양처럼 인생과 모든 심해를 사랑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다. 


모든 심오한 것은 나의 높이까지 올라오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그보다 불쾌하고 나쁜 것을 보아 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 대부분은 끔찍한 것이 많아 일일이 말하기도 싫지만, 결코 침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갖고 있지만, 그 밖의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즉,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입, 하나의 커다란 배라든지 또한 어떤 커다란 것에 불과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긋난 불구자'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두려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낭떠러지이다. 


낭떠러지에서는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고 손을 위로 움켜잡는다. 


거기에서 마음은 그 이중의 의지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아,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마음에 깃들어 있는 이중의 의지를 고찰할 수 있는가? 


나의 시선이 드높은 곳을 향해 돌진하고, 내 손이 심연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 


나의 의지는 인간에게 매달린다. 


나는 사슬로써 내 의지를 인간에게 얽어맨다. 


나는 초인에게로 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또 하나의 의지는 초인을 목표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인자이다. 


그것은 동정마저도 죽여 버린다. 


그런 동정이야말로 삶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인간이 깊숙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용기도 역시 괴로움을 깊이 들여다본다. 


그러나 공격적인 용기, 공격하는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인자이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그것은 말한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번!” 


이러한 말 속에 울려 퍼지는 함성이 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은 들으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행복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내가 여자들을 쫒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여인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육욕, 그것은 참회자의 옷을 입은 모든 육체의 경멸자들에게는 하나의 형벌이며,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의해 ‘세속적인 것'으로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욕은 온갖 혼란과 오류의 교사들을 비웃으며 조롱하기 때문이다. 


육욕, 그것은 천민들에게는 그들의 몸을 천천히 태우는 불길이며, 벌레 먹은 모든 재목과 악취가 넘치는 모든 누더기들에게는 금방 뜨거운 불과 연기를 뿜어내는 난로이다. 


육욕, 그것은 자유로운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 낙원의 행복이며, 미래가 현재에게 바치는 넘쳐흐르는 감사이다. 


육욕, 그것은 한층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을 표현하는 위대한 비유적 행복이다. 


즉,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과 결혼 이상의 것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보다 자신과 자신이 더 낯선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낯선가를 확연하게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 


육욕, 하지만 나는 내 사상의 주위에 울타리를 치리라. 


그리고 내 말의 주위에도 울타리를 치겠다. 


돼지와 방탕자들이 나의 정원으로 스며들지 못 하도록!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지배욕, 그것은 냉정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뜨거운 채찍이며, 잔혹한 자들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혹독한 고문이며, 이글거리는 화형장 장작더미의 뜨거운 불꽃이다. 


지배욕, 그것은 허영심이 많은 여러 민족에게 붙어 있는 사악한 파리이며, 불확실한 덕의 조소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말과 온갖 과장을 타고 다닌다. 


지배욕, 그것은 모든 부패한 것과 천박스러운 것을 깨뜨리고 파헤쳐 버리는 지진이며, 눈을 번뜩이고 명령하며 징벌하는 회칠한 무덤의 파괴자이며, 성급한 대답에 던져버린 물음표이다. 


지배욕, 그 눈빛 앞에서는 인간은 기어 다니고, 몸을 웅크리고 복종하고, 뱀이나 돼지보다도 더 천박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내부로부터 거대한 경멸의 절규가 터져 나온다. 


지배욕, 그것은 거대한 경멸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이 교사는 여러 도시와 국가를 향해 “그대는 물러가라!” 하고 설교한다. 


그래서 결국 여러 도시와 국가는 스스로 “나는 물러간다!” 하고 소리치게 될 때까지. 


지배욕, 그것은 순결한 자와 고독한 자들에게로 올라가고, 더 높은 곳에서 자기 스스로 흡족해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올라간다. 


대지의 하늘에 보랏빛 행복을 매혹적으로 그려 보이는 사랑처럼 달아오르면서. 


지배욕, 하지만 높은 것이 권력을 잡고서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랄 때, 누가 그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겠는가! 


사실 이러한 욕구와 하강에는 온전치 못한 점이란 전혀 없는 것이다. 


고독하고 높은 자가 영원토록 고독의 상태에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 하는 것, 산봉우리가 골짜기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고, 높은 곳의 바람이 낮은 곳을 향해 불어 가는 것. 


오, 그러한 동경에 대해 그 누가 올바른 세례명과 덕목을 찾아낼 수 있으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지금까지 나는 나의 아이를 낳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여자를 찾지 못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제외하고는. 


왜냐하면 오, 영원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나의 영토 안에서 누구라도 해를 입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동굴은 좋은 피난처이다. 


또 무엇보다도 나는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단단한 대지 위에 견고한 다리로 다시 서게 하고 싶다. 


하지만 누가 그대의 어깨에서 그대의 슬픔을 없애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도 약하다. 


사실 오랫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제 늙은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하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Posted by 㗢동죽竹
,


그 사람을 보라.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는가. 


그러니 돈을 쫓아가자. 


저 사람은 더 건강하다. 


건강을 추구하자. 


누군가 뭔가를 하고 있는데 매우 만족해한다. 


그를 따라가자.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남의 일이다. 


사회는 절대로 그대가 자기 자신의 잠재성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불행은 그대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불행도 없고 경쟁도 없을 것이다. 


남이 더 많이 가졌거나 그대가 많이 갖고 있지 않아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야망은 독약이다. 


그대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면, 내가 그대를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라. 


그대가 뛰어난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노벨상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라. 


대단한 화가가 되고 싶다면,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나는 그대의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은 명성과 평판, 성공과 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생겼을 때, 그대가 그것을 포기하고 단념해야 한다고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대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하지만 나는 그대가 성공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 


나는 성공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해주겠다. 


나는 성공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벽하리만치 좋은 일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성공을 그대의 동기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바로 지금 그림과 시와 노래를 놓치고 말 것이다. 


성공이 찾아오면, 그대의 두 손은 텅 비게 될 것이다. 


성공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성공은 그대에게 자양분이 될 수 없다. 


성공에는 아무런 영양분이 없다. 


성공은 그저 뜨거운 공기와 같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성공이 그대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서머싯 몸의 삶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아흔한 살이라는 긴 삶을 살았다. 


그는 매우만족스럽고 성취한 삶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이 만족을 줄 수 있다면 오직 그때만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이 성취감을 줄 수 있다면 오직 그때만이다. 


대저택과 수많은 하인들도 그때만이다. 


삶을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평판과 명성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 순간의 회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가 자기 삶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이다. 


자신의 삶이 기쁨이었는가? 


그 삶은 축제였는가? 


그대는 작은 것들에 행복했는가? 


목욕을 하고, 차을 마시고, 바닥을 청소하고, 마당을 거닐고, 나무를 심고, 친구와 대화하거나 연인과 조용히 앉아 있을 때, 혹은 달을 바라보거나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때, 그대는 이 모든 순간에 행복했는가? 


매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는 행복이었는가? 


기쁨으로 빛나는 순간이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가 성공하고 싶다면-그리고 그대는 우연히, 정말로 우연의 일치로 성공한다-그것이 그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마음은 그대를 앞서가기 시작한다. 


마음은 더욱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된다. 


마음은 ‘더 많은 것에 대한 갈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그대가 가진 것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늘 더 많은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진 것과 더 많은 것 사이의 괴리는 늘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대가 가진 것과 그대가 갖고 싶은 것 사이에는 늘 거리가 존재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선택을 만들지말라. 


그대에게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때로는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일 때가 있다. 


때로는 행복이거나 불행일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나는 이것을 영적인 존재의 특질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을 진정으로 종교적인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찬성하면, 동시에 반대하는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반대하면, 동시에 찬성하는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무언가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면, 그대는 존재계를 둘로 나누게 된다. 


그대는 선택을 만들었고, 선택은 지옥이 된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대는 계속 살아가면 된다. 


성공이 오면 그것을 즐겨라. 


실패가 와도 그것을 즐겨라.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성공'의 의미이다. 


링컨이나 히틀러가 될 필요가 없다. 


그저 평범한 사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면, 삶은 그대에게 크나큰 기쁨이 될 것이다. 


단순해져라. 


자기 주변에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놓지 말라. 


요구하지 말라. 


무엇이 오더라도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여라.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여라. 


그대에게 엄청난 기쁨들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대는 그런 기쁨들을 보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성공에 급급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금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놓치게 될 것이다. 


평범해지는 것이 바로 특별해지는 방법이다. 


단순해지는 것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가 가만히 앉아서 ‘나는 정신의 존재이다. 나는 신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여러 층들을 깊게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대의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 그것을 폭로하라. 


그것의 맨 아래의바닥, 맨 아래의 근원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꿰뚫고 들어가라. 


그대가 그 모든 층들을 꿰뚫어보게 되는 날… 그 층들은 마치 양파껍질과 같다. 


양파껍질을 계속 벗겨가듯이, 그대의 존재를 계속해서 벗겨가라. 


그대는 더 새로운 층들을 발견할 것이고, 계속해서 벗겨내면… 문득 어느 날, 더 이상 아무것도 벗길 것이 없고, 손에 아무것도 벗길 것이 없고,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 텅 빔 안에서 탐욕은 사라진다. 


바로 그 텅 빔으로부터 깨달음은 일어난다. 


그 텅 빔 안에 신성divine이 존재한다. 


그 텅 빔이 바로 신godliness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탐욕, 욕망, 야망, 질투심, 소유욕, 정복욕과 같이 마음이 기능하는 모든 방식을 주시해야 한다. 


명심하라. 


그것들은 모두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탐욕이 사라지면 분노 역시 사라질 것이다. 


분노가 사라지면 질투심도 사라질 것이다. 


질투심이 사라지면 폭력이 사라질 것이다. 


폭력이 사라지면 소유욕이 사라진다. 


그것들은 모두가 서로 뒤섞여 있다. 


사실 그것들은 동일한 바퀴에 연결된 바퀴살들이고, 그 모두를 지탱하는 중심의 주체는 바로 에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방식들을 깊게 관찰하라.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탐욕은 자신을 무언가로 채우려는 노력을 말한다. 


그것은 섹스나 음식이 될 수 있고, 돈이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탐욕은 내면의 공허함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다. 


공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내면에 뭔가를 계속 채움으로써 자신의 공허함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 것은 신으로 가는 길을 잃는 것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 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내면의 공허함은 신으로 가는 관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공허한 마음이 악마의 마음, 혹은 악마의 작업이라고 배워왔다. 


그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헛소리이다. 


공허한 마음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문이다. 


공허한 마음이 어떻게 악마의 작업이 될 수 있는가? 


악마는 완전히 사망하는 것이 바로 공허한 마음이다. 


악마는 마음을 뜻하고, 공허한 마음은 무심無心을 뜻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은 말한다. 


“그래, 과거는 좋았다. 
하지만 끝났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반복하며 곱씹었던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벗어난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을 떨쳐버린다. 


그것은 미래에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들이다. 


미래에 대한 꿈은 그대가 과거를 변형하고 조작하고 좀 더 아름답게 치장하고 용납할 만한 것들이다. 


덜 고통스럽고 더 즐거운 꿈이다. 


마음이 이것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그대는 실체를 놓치게 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은 절대로 그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마음은 불행해할 구실을 찾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겠다. 


마음은 불행을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마음의 기능이란 불행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가 마음을 떨쳐버린다면, 돌연 그대는 아무런 이유 없이 행복해진다. 


그런 행복은 아주 자연스럽고, 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대는 호흡할 때 자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대는 그냥 계속 숨을 쉰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는 계속 호흡한다. 


행복은 정확히 그것과 같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래서 동양에서는 행복이 그대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행복에는 외적인 조건이 필요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고, 그것이 그대이다. 


지복은 그대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그것은 성취가 아니다. 


그대가 마음의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지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끔은 미친 사람들이 소위 제정신인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미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물론 잘못된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광인은 마음 아래로 추락한 사람이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 미친 사람들이 그토록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천국은 목표가 아니다. 


천국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대가 현재에 있다면, 신성을 얻을 수 있다.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산다면, 그대는 깨달은 것이다. 


다른 깨달음이란 없다. 


그러면 평범한 삶이 매우 특별해진다. 


그러면 그저 아무도 아니라는 것 자체가 깊은 성취감을 준다. 


나는 이 모든 접근 방식을 산야스sannyas라고 부른다. 


목적과 목표와 미래를 떨쳐버리고,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존재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에 그대 안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다. 


에고는 사라지고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신성만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복이자 진리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죽음은 더 길고 깊은 잠이다. 


매일 잠을 잠으로써 그대는 활기를 되찾고 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 


피곤함은 사라지고, 다시 젊어진다. 


죽음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런 기능을 한다. 


이제는 육체가 보통의 평범한 잠으로는 생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를 변화시킨다. 


육체는 너무 오래되었다. 


좀 더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육체가 필요하다. 


그대가 가진 생명 에너지는 새로운 형태를 원한다. 


죽음은 깊은 잠과 같아서 그대가 수월하게 새로운 형태로 이동하도록 만든다. 


그대가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은 죽음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면 죽음은 삶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 하인이 된다. 


잠처럼 말이다. 


그대의 삶은 영원하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섹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을 억누르면 분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섹스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섹스 에너지가 분노와 짜증과 폭력성으로 바뀌어서 전보다 더 파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야망으로 바뀔 수 있다. 


섹스를 억압해보라. 


섹스를 억압하면 그대에게는 에너지가 생겨서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든 뿜을 수 있다. 


그 에너지는 권력, 돈, 명예, 명성, 숭배, 금욕주의 따위에 대한 추구로 바뀔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유일한 에너지는 바로 성sex 에너지이다. 


그대 안에 여러 종류의 에너지가 있는 게 아니다. 


직 하나의 에너지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힘을 지닌 에너지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는 바로 이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그대의 걱정은 마치 나무의 잎사귀가 안전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모든 것을 돌보며 나뭇잎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몇 미터 혹은 몇 십 미터 높이에도 중력을 버티도록 수분을 제공한다. 


나뭇잎은 걱정하지 않는다. 


나뭇잎은 자신이 거대한 나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 한다. 


그대는 거대한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그대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곧바로 사라진다. 


달리 말하자면, 그대의 에고가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계가 존재한다.'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항상 육체를 기준으로 삼으라. 


마음이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육체에게 물어보라. 


“네 생각은 어떠니?” 
육체가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하면, 그것을 떨쳐버려라.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억누를 수 있겠는가?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무엇이 욕망이고 무엇이 필요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라. 


필요는 육체가 원하는 것이고, 욕망은 육체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욕망은 아무런 뿌리가 없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 그저 떠다닐 뿐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요구는 거의 언제나 그대의 육체로부터 나오고, 마음의 요구는 타인으로부터 온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고, 그 문은 다름 아닌 욕망일 뿐이다. 


욕망들을 죽여라. 


그것들은 피가 없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피도 찾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를 죽이면 거기에 출혈이 있을 것이다. 


필요를 죽이면, 그대의 일부분이 죽을 것이다. 


욕망을 죽여도 그대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욕망을 떨쳐버림으로써 더 많은 자유가 생겨날 것이다. 


욕망이 아닌 필요의 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대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 이미 들어선 것이고, 천국은 멀지 않은 것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긍정적 사고법은 그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테크닉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가진 인성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억압할 뿐이다. 


그것은 선택의 방식이다. 


진정한 자각에 도움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각에 역행한다. 


깨어있는 자각은 언제나 무無선택이다. 


긍정적인 사고법이란 부정적인 것을 무의식에 억지로 넣어두고 긍정적인 사고들로 의식의 마음을 세뇌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무의식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데 있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마음보다 아홉 배는 더 강력하다. 


그래서 어떤 것이 무의식이 되면, 그것은 예전보다 아홉 배 더 강력해진다. 


과거의 방식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고법은 깊은 이해를 담고 있지 않은 매우 빈약한 사고방식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심어준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부정적인 생각들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대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깨어있는 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의식이 될 것이다. 


그대는 바로 그 순수한 의식으로 삶을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면-가령 화가 나는데 그 화를 억눌러서 그 에너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화를 느끼는 상태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려고 노력한다면-그대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화가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눈속임할 뿐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나는 긍정적 사고법이라는 철학을 믿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그 반대, 즉 부정적 사고법도 믿지 않는다. 


둘 다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나의 철학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전체론적이고 실재적이다. 


무엇이든지 간에 전체를 전체로 바라보라. 


좋은 것과 나쁜 것, 낮과 밤, 삶과 죽음, 그 두 가지 모두 존재한다. 


나의 접근법은 존재하는 것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어떤 철학도 투영할 필요가 없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는 늘 다른 누군가가 되라고 배워왔다. 


아무도 그대 자신이 되라고, 자신의 존재를 존경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존재는 타고난 선물이다. 


절대로 모방하지 말라.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바이다. 


절대로 타인을 모방하지 말라.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것은 그대가 존재계에 진 빚이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은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다. 


그래서 그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대가 존재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삶은 매우 짧다. 


달성할 목적이 있다면 서두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해낼지 못 해낼지’ 끊임없이 안달하며 걱정이 앞선다. 


가슴은 벌렁거리고 뿌리부터 흔들린다. 


내면에는 늘 지진이 일어나고, 항상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이다. 


목적을 가지면 조만간 그대는 정신과 병원 상담실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나의 비전은 목적 없는 삶에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붓다들의 비전이다.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한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전적으로 부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순간이 그대에게 주어진다. 


신이나 전체, 혹은 도道, 담마dhamma, 로고스logos라고 불러도 좋은 것으로부터 온 소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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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살아가는 단순한 기쁨을 위해서 순간을 살라. 


그러면 매 순간이 오르가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오르가슴과 같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무나 책무나 명령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대는 여기에 순교자가 되려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완전하게 즐기려고 있는 것이다. 


살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유일한 길은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미래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과거는 저절로 불합리한 게 된다. 


리는 과거를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것을 미래에 언젠가 써먹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과거를 짊어지고 다니겠는가? 


불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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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해야 할 것, 되어야 할 것은 없으며, 되어가는 것은 정지했다. 


되어감이 정지할 때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다. 


존재는 느긋하며 공격적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완전한 현존으로서 매 순간의 맛을 음미할 수 있고 현재에서 현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너무나 서두른 나머지 실체를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대의 눈은 멀리 떨어진 목표, 멀리 떠있는 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대는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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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꿈꾸기만 하는 자가 가질 법한 그대의 기본 철학을 바꾸어라. 


그대의 존재 안으로 편안하게 들어가라. 


어떤 이상향도 갖지 말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더 나은 뭔가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그대는 이미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완벽하다. 


그대에게 결함이 있다면, 그대는 완벽할 정도로 결함이 있다. 


그러나 완벽함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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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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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풀려고 하는 일련의 미스터리극은 곧바로 해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우리는 보통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실제로 그렇다) 것일까? 


두 번째 수수께끼는 미국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에 어째서 미국 국민의 살인율과 자살률이 어떤 때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위험한_정치인 #제임스_길리건


나는 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런 낌새도 못 채고 몇 년을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모두 대통령 선거 주기와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살률과 살인율은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힌 후에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동안에도 줄곧 전염병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증가세는 취임 첫 해나 임기 초반 몇 해 안에 시작되어서 마지막 해나 임기 종반 몇 해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 추세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야 비로소 반전되어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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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폭력 치사 발생률의 평균값과 중간값을 모두 계산했는데 각각 19.4명과 20명이었다. 


나는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유난히 높은 사망률, 
다시 말해서 이 평균값이나 중간값을 웃도는 사망률을 가리키는 데 쓴다. 


그래서 내가 전염병이라고 말할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4명이나 20명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최고치였던 26.5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비전염병 수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1명에서 19.4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을 한암 웃돌았고 내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은 19.4명을 한참 밑돌았다. 
그래서 '능선'과 '골짜기'를 대충 가르는 기준선을 19.4명으로 보든 20명으로 보든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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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카터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은 공화당 정부에서만 일어나고 
전염병 수준에서 비전염병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일어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에서 두 사람 다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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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정부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과 민주당 정부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비교했을 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공화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가 높았고 민주당 정부 때는 순증가세가 낮았다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감소세가 컸고 공화당 정부 때는 순감소세가 작았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의 변화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공화당 정부 때 폭력 치사의 순변화는 증가 일변도였고 민주당 정부 때의 순변화는 감소 일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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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를 통틀어서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자살률과 살인율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사실은 아마 이제 그다지 놀랍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 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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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을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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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또 민주당에 비해 평균 임금, 최저 임금, 종합 번영도(1인당 국내총생산), ‘상품화 지수’(실업보험을 비롯하여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수당의 측정치)를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다양한 측정치들은 서로를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가령 불황은 실업률을 높이는데, 제임스 갤브레이스(James Galbraith)가 지적하듯이 “실업자가 늘어나면 불평등도 확대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줄어들면 불평등도 감소한다.” 
갤브레이스는 이 점을 수학으로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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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썼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수법으로 애용해 온 전략을 갈고 다듬은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이것을 ‘분할 정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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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에 결부된 개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 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생자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주역은 개인이므로,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건, <일리아스>를 읽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건, 일간지를 읽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 폭력 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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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심장부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정으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여기지만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의 위력을 간과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객관적으로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정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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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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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지 체계는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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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한 성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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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살인율, 수감률, 상대적 빈곤율은 지난 40년에 걸쳐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의 10~20퍼센트 수준이었다. 


공화당이 휘그당의 전철을 밟아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고 민주당의 ‘충성스런 반대 세력'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서 온다면 미국은 어떻게 보일까? 


미국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언젠가는 인간적이고 문명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렇게 되려면 사회적 계층화와 위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에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민주당 의원들이 좀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만드는 수치심의 윤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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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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