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인격은 사회적 집단의 결정에 대한 승리이다.
인격은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행위이데 곧, 하나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창조적인 행위는 수동적인 것인데, 인격은 능동적인 것이며, 대립이며, 세계가 끌어가고 있는 짐의 극복이며, 세계의 노예성을 극복하려는 자유의 승리인 것이다.
노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격의 실현에 유해하다.
인격은 역행이고 항쟁이며, 자기와 세계의 정복이며, 예속에 대한 승리이며 해방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또 이성의 수단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이성 자체는 인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본성은 비인격적인 일반적 본성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희랍인의 이해는 인격주의의 철학과 합치하지 않는다.
인격은 합리적인 존재,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격은 자아의 전 사유, 전 의지, 전 감정, 전 창조적인 행위 그것이다.
희랍철학의 이성과 독일관념론의 이성은 비인격적 이성이며, 보편적인 이성이다.
그러나 인격적 이성과 특히 인격적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격주의는 플라톤적인 것 내지는 독일관념론 위에다 그 기초를 둘 수 없는 것이며, 또 자연주의 위에나 진화론 철학이나 또는 생철학 위에 기초를 내릴 수는 없다.
후자의 철학은 인격을 비인격적, 우주적, 생명적 과정 속으로 해소해버린다.
쉘러Scheler는 인격과 유기체 사이, 정신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의 차이점을 잘 말하였다.
인격은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이며, 정신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인격을 혼魂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인격은 하나의 근원적 무의식의 기반을 갖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종종 생에 있어서 연극을 꾸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역할이 아닌 노릇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인격의 이분성Dichotomy은 특히 원시인이나 심리학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건전한 자에게 현저히 나타난다.
준정상적인 문명인에게서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원성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적응이라는 규범적인 성격을 갖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서 허위의 필요성을 낳게 한다.
미개인의 사회적 훈련과 문명화는 유익한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격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은 아주 비인격적일 것이다.
그는 노예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와 자연은 인격 형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은 자연에 대한 의존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인격은 외부에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결정에 대립하며, 내부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부의 결정은 자기 결정인데, 신이라 할지라도 이 결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인격과 신과의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영역 밖에 있으며, 자유의 영역 안에서 신은 인격에 대한 실존적 중심이다.
인격은 전 객체 세계 밖에서 내면의 자기를 결정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유에서 출발한 결정만이 인격이다.
외부에서 규정되고 결정된 것과 객체적 세계의 힘에 기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인격적일 수 없다.
그런 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에고ego 속에서 결정된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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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고뇌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인격은 고뇌이다.
인격과 그 통합을 성취하려는 고뇌는 괴로움이 많은 과정이다.
인격의 자기실현은 저항을 일으키고, 노예화하려는 세상의 권력과의 투쟁을 요구하며, 세상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인격을 부정하고 주위의 세상에로의 동화에 안주하려는 것은 확실히 고뇌를 더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이런 길을 걸으려고 하기 쉽다.
굴종에 안주하면 고뇌가 감소하는데, 굴종을 거부하면 고뇌는 증가한다.
인간 세계의 고통은 인격의 탄생과 인간 자신의 본성을 위한 투쟁에 있다.
심지어 동물계의 개체도 고통이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고난을 야기한다.
만일 사람이 자유를 거부한다면 고난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곧, 인격성은 다시 말하면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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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Peguy는, 개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정복하도록 요청받은 자신 속의 부르주아라고 말하였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고독의 경험을 견디고, 자아 중심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함입되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기를 지키면서 살기 위한 괴로운 투쟁을 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는 순응주의에 의해서, 또한 적응에 의해서 곤란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모색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 곧, 같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폐쇄를 극복하고, 자기 속에 하나의 우주를 전개하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립과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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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으로 인격은 신적 인간성을 통해서 힘을 얻고 해방을 얻는다.
외면적으로 전체세계와 모든 사회와 모든 역사는 인간성과 인격의 궁극성을 통해서 변화되고 해방된다.
공동성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객체화가 아니고, 그것은 인격을 객체화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인격성은 신-인간성God-humanity이어야 하고, 사회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사회와 역사과정에서의 신-인간성의 객체화는 오류와 노예성의 기원이다.
그리것은 인간인격성의 존엄과 자유와 모순되는 인격의 객체적 계층주의hierarchism를 만들어냈다.
거룩함sacredness의 그릇된 관념의 성립이 이것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예속의 여러 가지 형태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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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성격character과 결합한다.
강력한 인격은 표방된 성격이다.
성격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 원리의 승리이다.
그 승리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형태에서의 승리이며, 이 형태는 인간의 영혼-육체 구조soul-body constitution아 결합되어 있다.
성격은 자기를 지배하는 위력의 소유자이며, 그것은 자기에게 대한 예속에의 승리,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예속에의 승리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승리이다.
성격은 무엇보다도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기질temperament은 하나의 자연적인 재질이며, 성격은 정보와 일의 성취에서 얻은 것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불안Angst과 공포Furcht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언어 용법에 상대적인 구별이 있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구별했다.
공포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위험과 일반적인 체험의 일상적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반면에 불안은 경험적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신비에 직면하거나 초월적 심연에 직면하며 미지의 것에 직면했을 때에 불안을 일으킨다.
공포는 염려와 고난의 두려움과 운명의 타격과 연관된다.
공포는 보다 드높은 세계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다 낮은 지평에 관심을 갖고 경험적인 것에 결박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은 초월자에게 직면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사랑이 영원과 직면하고 운명에 대면할 때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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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안과 공포뿜만 아니라 또 동경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동경은 공포보다 불안에 가까운 데, 그것 고유의 자기 특성을 갖는다.
동경은 위험을 통과할 때에 체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경은 확실히 염려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동경은 염려를 가볍게 한다.
동경은 위쪽을 향하는 것으로 인간의 보다 높은 본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유기遺棄와 고독과 세계에서의 소외에 내맡겨져야 한다.
이런 모든 것에서부터의 자기 소외를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통렬히 고뇌를 일으키는 것은 없다.
인격이란 그 발전의 도상에서 이 체험을 통과한다.
동경 속에는 무엇인가 초월자와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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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과 종은 상호관계적이다.
쌍방 모두 상대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인은 자신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
자유인은 자신과 반정립에 있는 어떤 것과도 상관관계 없이 자기 속에 자신의 특성을 갖는다.
상전은 자신에 대한 실재적 의식이지만, 그 의식이 어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노예를 통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다.
상전의 의식이 어떤 타자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노예의 의식은 자기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자유인의 의식은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인데, 그것은 자기에게서 타자의 모든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의미를 동반한다.
노예 상태의 경계성은 자유의식의 결핍 여부 바로 그 선인 것이다.
노예의 세계는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다.
외면화exteriorization는 노예의 근원이며, 자유는 내면화interiorization이다.
노예는 항상 소외, 인간성을 외면적인 것에 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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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성의 근원은 항상 객체화에 있다.
즉, 외면화이며 소외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노예성이다.
즉 지식 획득, 도덕, 종교, 예술, 정치적 삶, 사회적 삶 등에서 노예성을 끝내는 것은 객체와에 대한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예성을 종결짓는 것은 주인의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 된 지위는 노예성의 반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전이 될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타락은 무엇보다도 그가 폭군이라는 사실 속에서 대부분 표현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큰 규모가 또는 작은 규모 속에서, 국가 혹은 세계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가족 속에서, 점포 속에서, 사무실 속에서, 대단히 미미한 지위를 차지하는 관료적 기구 속에서 인간은 폭군 노릇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 속에서 자기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주위의 사람들 위에서 폭군 역할을 하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증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사랑 속에서도 폭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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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의 의지 곧, 제국주의적 의지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립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옹호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적 의지는 인간에 대한 강제를 결행하는 일을 고조시키고, 그것을 인간이 달성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권력의 현실적 문제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히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다.
사람들이 강압에 저항할 때, 권력에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눈살을 거칠고 휘둥그렇게 뜨는 강압적인 태도를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을 폭행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인다.
그러나 인간 생활에는 잘 분별할 수 없는 더욱 세련된 강압 형태가 많이 있다.
심리적 강압은 신체적 강압보다 훨씬 더 혹독하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것은 신체적인 강압의 결과만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암시 곧, 어린애 때부터 받은 암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즉 양육 방법으로 자유를 빼앗고, 판단의 자유에 대한 능력을 빼앗아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돈은 독립을 준다.
그러나 돈의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끔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을 갖고 있는 사람도 예속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예속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자주 목격된다.
맘몬의 왕국the Kingdom of Mammon에서 인간은 노동 팔기를 강요당한다.
그래서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노동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은 적이 없었다.
비교론적으로 말해서 숙련공의 노동은 좀 더 자유롭고, 지적 노동도 그렇지만, 그것들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횡포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대중은 노예적인 노역 속에, 강제 속에,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노동 속에, 공산주의 사회의 형태에 준한 억압 사역bond-service 속에 복역해왔다.
노동의 형식만 변하였을 뿐 인간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은 수동성passivity이다.
노예성에 대한 승리는 창조적인 능동이다.
실존적 시간 안에서만이 창조적 능동은 계시된다.
역사적 능동은 객체화이며, 인격의 핵심에 성취된 것의 투영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 앞에서나, 민족 앞에서나, 혁명 앞에서나, 보편적 의의를 자부하는 어떠한 객체적 통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신은 해방자이다.
신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신학과 신학의 매혹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상숭배가 신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적인 사회적 관계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로 옮겨진 것이다.
객체적 세계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는 객체로서 이해된 신은 인간 예속의 근원이 되었다.
객체로서의 신은 절대가 된 최고의 자연적 세력 곧, 절대가 된 지배성 중 최고의 힘이다.
자연에서 결정성이라는 것은 사회에서의 지배성이다.
그러나 모든 객체화의 밖에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신은 사랑과 자유이며, 결정성이 아니고, 지배성이 아니다.
신 자신이 자유이며, 그는 자유만을 준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신은 절대자가 아니다.
신은 창조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또 인간에 대해서 상관적이다.
신 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사상의 극한적 배후에 깊이 들어가서 정신적 경험의 영역 안에 철학이 불완전하게 합리적으로 절대자라고 이름붙인 파악하기 어려운 신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신 자체를 절대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자기를 감추지 않는 신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신을 군주적 존재로 받아들일 때 신학적 매혹과 예속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종교적 예속과 신에 대한 예속과 교회에 대한 예속 곧, 신의 노예적 관념과 교회의 노예적 관념에의 예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속의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태이다.
또 그것은 인간을 예속하는 근원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객체, 일반자와 외재성, 소외에 대한 예속이었다.
신비론자가 인간은 신에게서도 자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밟고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모든 형태에서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반인격주의이며, 인격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불가피하게 승인하고, 인격 속에 사회적 유기체의 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보편주의이며, 객체화의 결과이고, 외부적인 것에 투입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인격에서 추상되고, 인격은 이것에 굴종한다.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항상 계층적이다.
이것은 오류이며 인격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사회는 인간의 인격보다 고도의 계층적 단계의 인격인 양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노예화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의 유기적인 이상은 곧, 노예화하는 허위이다.
이것은 사회의 매혹이며 우주의 매혹에 버금하는 것이다.
사회는 실로 유기체가 아니고 사회는 협동적 행위이다.
사회의 유기적 관념은 노예화하는 의식의 환상이며, 외재화의 산물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는 우주를 본떠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본떠야 할 것인즉 곧, 계층주의의 모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인격주의의 모형을 따라야 하고, 결정적인 것을 본뜨지 말고 자유를 본떠야 하고, 힘과 강자의 지배 모형에 의하지 않고 심정의 연대성과 자비의 모형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만이 노예적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자유의 근원은 사회 속에는 있을 수 없다.
인간적 자유의 근원은 정신 속에 있다.
사회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정신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그 개인적인 행위에 의해서 객체화의 세계를 파괴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다만 세계로부터 내면적인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객관화의 세계의 파괴는 사회적인 행위이며 역사적인 행위이다.
이 의미는 인간 사이에서 정신적 공동체의 최고도의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세계는 별천지가 되고 지식도 다른 지식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완전한 정신에 의해서만 규명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객체화된 세계의 여러 조직에 봉사할 수는 없다.
종말론적 전망은 그 자신이 '지식론적'인 사회학적 해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객체화의 최후의 극복과, 객체 세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객체 세계의 형태 중 하나인 사회 세력에서의 해방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종말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아마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종말로 향하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문명화된 야만주의'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시적인 야만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이 야만주의 속에는 '자연'이 아니고 기계와 기계주의의 냄새가 난다.
산업적 기술적 문명은 더욱 증대해가는 야만주의의 질적 몰락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명화된 야만주의 속에는 어떤 종류의 '자연'에로의 복귀도 없다.
문명인 속에는 야수와 야만인이 때때로 눈을 뜨는데, 그것은 문명에 의해서 변화된 형태 곧,  타락된 형태에서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노예성에 관한 마지막 진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 세계의 노예에 빠지는데, 자기의 외재화에 대한 노예성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우상의 종'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이다.
인간은 항상 말하자면 자기의 밖에 있는 요인과 자기에게서 소외되면서도 노예성의 내면적 근거에 의해 노예가 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투쟁은 외부적인 객체화된 외재화의 세계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적인 정신적 투쟁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에서 직접 기인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싸움은 인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 속에서 행해지고, 이 투쟁은 객체적 세계 속에 투영된다.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이 노예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며, 자신을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굽실굽실 잘 받아들인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노예성은 객체적 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로서 특색지어진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노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노예현상학의 최후적 진리는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예성은 의식의 한 구조이며, 의식의 객체적 구조의 일종이다.
'의식'은 '존재'를 결정하고, 다만 2차적 과정에서 '의식'이 존재에의 예속에 빠져버린다.
노예적 사회는 인간의 내면적 노예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환상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데, 이 환상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의식처럼 보인다.
이 환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탐색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실존에는 관념의 노예화라는 변증법이 있다.
그것은 실존적인 변증법이며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그런 관념의 기초 위에 서서 자기를 긍정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폭군이 된다.
이 관념의 폭군제는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체제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종교적 국가적 사회적 제반 관념은 노예 제조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이 반동적 내지는 혁명적 관념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사정은 같다.
기묘한 방법에 의해서 관념은 자아 중심적 본능의 봉사에 들어가고, 자아 중심적 본능은 인간을 모멸로 다루는 관념의 봉사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내적 외적 노예성이 항상 승리를 거둔다.
자아 중심적 본능은 항상 객체화의 힘이 된다.
세계를 자기 봉사의 도구로 보는 것 때문에 이기주의자는 항상 자기를 외부적 세계에 투입하고 거기에 종속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이 개인주의의 매혹의 형태를 취하는 일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간단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이것은 적극성 및 소극성의 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격주의가 종종 개인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처럼 말의 용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성격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경우와, 그의 판단이 독립적이며 독창적이며 자유이든가, 그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에 뛰어나 있든가, 자기 속에 고립해 있으면서 교제를 좋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모멸자 또는 자아중심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인격의 가장 드높은 가치의 긍정과 생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정신적 원리만이 정신적 생활의 통일을 유지하고 인격을 건설한다.
인간이 노예화의 힘에 대해서 다만 분열된 요소만을 대치시키고 완전한 인격을 갖지 않을 때 그는 노예성의 가장 다양한 형태에 빠지고 만다.
인간에 대한 노예성의 내적 근원은 인간의 분열된 제반 부분의 자율성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은 내적인 중심의 상실과 더불어 나아간다.
부분으로 분해된 인간은 용이하게도 공포의 일시적 발광 상태에 굴복하지만, 공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성의 상태에 잘 가두는 것이다.
공포는 통합되고 중심이 잡힌 인격과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강한 경험에 의해서 극복된다.
인간의 지성적, 감성적, 감각적 요소는 공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인격은 전체이지만 여기에 대치되어 있는 객체화된 세계는 부분적이다.
그러나 통합된 인격과 최고의 실존의 상만이 객체화된 세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을 보일 완전한 전체로서의 자기를 자각할 수 있다.
자신을 노예로 삼는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은 항상 분열과 분해를 의미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고독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곧, 내면적 보편주의가 객체화된 보편주의와의 투쟁을 경험하는 '창조적인 인격의 고독'과 개인주의자가 사실 속해 있는 객체체화된 보편주의에 대립하여 설정한 '자기황폐와 무능의 고독'이다.
즉, '내적 풍요의 고독'과 '내적 공허의 고독'이다.
영웅주의의 고독과 패배주의의 고독이다.
힘 있는 고독과 약한 것의 고독이다.
자기을 위해서 수동적인 미적 위안 이외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고독은 원칙적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개인주의는 자연주의적 철학이자만 인격주의는 정신의 철학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한 노예성에서와 외적 세력에 의한 노예화에서의 해방은 자아로부터, 자기를 노예화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이기성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향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내재화해야 하며, 또한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 세계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인 존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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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에서 최대의 유혹은 통치권sovereignty을 행사하려는 유혹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매우 강력하게 노예화하는 힘이 숨어 있다.
통치권의 유혹에는 역사상 심히 많은 종류의 형태가 있다.
이 유혹들은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 유혹은 역사상 사람에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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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양심이 직면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는 극히 단순한 초보적인 양식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곧, 국가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복음서에서는 이 문제는 가야바Caiaphas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한 국민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도 한 사람이 국민을 위해서 죽는 것이 낫다.' 이 말에 의해서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가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는 항상 이 가야바의 말을 반복한다.
그것이 국가의 신앙고백이다.
정치가는 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또 그 세력의 증대를 위해서 죄 없는 인간이 죽는 것이 좋다거나 또 죽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찬성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난다.
국가 위에 새겨진 이 악마적인 낙인은 국가가 늘 그리스도의 사형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진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운명이다.
동일한 문제가 드레퓌스 사건Dreyfus case에도 있었다.
그때 나온 문제는 '죄 없는 인간이 프랑스의 국가 및 군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처벌되어도 좋다'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제를 명예의 문제 곧, 국가의 도덕적 양심의 문제로 삼은 것은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명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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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권력과 공포에 의해서  그 모습이 꾸겨져 있었다.
국가는 공포심을 고무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고통을 당한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비참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
특히 공포심에 사로잡힌 정치적 권력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최대의 폭력과 잔인성을 휘두르는 것은 실로 이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폭군은 항상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의 악마적인 원리는 원력의지에 의할 뿐만 아니라 공포심에 의한 것이다.
자유란 공포를 이기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이 공포를 느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포를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 사상의 위대한 점은 공포심에서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해방하려는 소망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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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와 인민은 상호 의존과 노예성의 상태에 있다.
'지도자 정신'leadership의 이념은 인격 원리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서 역시 상호적 노예성의 한 형태이다.
'지도자'라는 자는 지도자에게 끌려가는 인민과 같은 정도로 노예이다.
그러나 국가가 가장 염기할 특징과 또 국가 권위의 원리에서 나오는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관료주의이다.
어떤 국가도 피할 수 없는 관료주의는 그 세력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고 스스로를 인민의 공복으로 생각하지 않고,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실로 치명적인 경향을 가진 것이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중앙집권 과정의 산물이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당파에 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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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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