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아리랑을 처음 읽게 된 시기는 200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용은 잊어만 갔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건 내용을 읽으면서 솟구치는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이란 이런 것이었다.

첫째, 우당 이회영 선생은 누구일까?

둘째, 우당 선생님이 따른 '아니키즘'은 무엇일까?

셋째, 약산 김원봉은 누구일까?

넷째, 약산이 이끈 '의열단'은 무엇일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입장에서 이 호기심의 대상들은 한번도 본적도 없고, 들었던 적도 없었다.

이 작은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하나하나 찾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이, 이 호기심이, 이 궁금증이  철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역사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그래서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은 어쩌면 스승 같은 존재이다.

소설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보다 더 수준 높은 독서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도, 아니키즘도, 약산 김원봉도, 의열단도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

적어도 과거 이들의 정보조차 전혀 없었던 나에게는 반가울 뿐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들이 schema-배경지식-가 되어 읽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노선과 인물들의 성격을 과거의 나보다는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 아리랑의 배경무대인 김제에는 '아리랑문학관'과 '아리랑문학마을'이 있다.

이 두 곳을 가본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아리랑'을 다시 펴보고 싶을 것이다.

18년이 지나 다시 읽은 나처럼 말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

숫타니파타를 처음 접하게 되는 가장 큰 구절은 아마도 공지영 작가님이 쓰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소설의 제목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SNS나 인터넷 혹은 몇 분들의 개인 블로그나 감성이 충만한 분들이 올리거나 읊는 하나의 시 때문이 아닐까?

그 시는 이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아름다운 시 아니 불경이 숫타니파타 속에 있다.

나는 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 덕분에 숫타니파타를 읽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숫타니파타를 읽게 되면서 놀라움을 갖게 되는 요인은

첫째, 불교 경전이 아니라 하나의 시집이다.

詩(시 시)는 言(말씀 언)과 寺(절 사)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숫타니파타와 같은 이러한 불교 경전으로 인해 '시'라는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둘째, 초기 경전의 단순함과 순수함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군더더기 없이 녹아들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사견들이 덕지덕지 붙기 마련이지만, 이 숫타니파타는 주제가 단순하다.

그래서 순수하다.

셋째, 경전의 한글화이다.

보통 경전이라 함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따라서 의미나 뜻을 모르는 체 주구장창 목탁 치며 읊어댄다.

물론 의미 전달을 쉽게 하기 위해 노력하신 법정 스님이나 몇몇의 다른 분들-전재성 님-의 덕분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순수한 경전을 우리 독자들은 한글로 쉽게 더 많은 불교 경전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 하는 불경 따위 읊어대는 불교의 방식을 많이 비판한다.

물론 경전의 불교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심히 읽어보면 아직도 어려운 단어, 알 수 없는 단어가 많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등.

 

이러한 접근이 쉽지 않은 아쉬움이 많기에 이 '숫타니파타'라는 책은 각별하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배울 점 많은 불교의 핵심교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

이 책의 의의는 지은이가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에게 직접 들은 후 썼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박태원으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과 '천변풍경' 등을 쓴 소설가이다.

이 소설가 박태원이 해방 후 귀국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와 유자명이 쓴 '의열단간사' 그리고 의열단원들의 편지와 신문기사를 참고해서 썼다고 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인터뷰가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의열단 자체가 워낙 비밀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부족한 점이다.

따라서 김산이 말하고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이나 단원들이 이야기 한 의열단의 이야기는 어쩌면 파편적인 정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단체의 지도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정보의 고급성 아닐까?

의열단을 직접 만들고, 직접 계획하고, 직접 행동한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 점, 이 하나만으로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약산과 의열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말이다.

 

'THE BOOK > 서가 속 영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랑 / 조정래  (0) 2019.02.02
숫타니파타  (0) 2019.01.30
중국의 붉은 별 / 에드거 스노  (0) 2019.01.16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0) 2017.01.15
아리랑 / 님 웨일즈  (0) 2014.09.13
Posted by 㗢동죽竹
,

사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그의 부인인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에 의해서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즉, 중국의 지도자보다는 항일 혁명가들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투쟁 속에서 그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들을 맨 처음 찾아가고, 맨 처음 인터뷰했으며, 맨 처음 관찰한 것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 많은 부분이 알려졌지만, 작가인 에드거 스노가 쓰기 전에는 그들의 기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 그리고 지도부에 대한 맨 처음, 시초, 시작 등으로 보면 된다.

 

내용에 대해서 특히 흥미를 갖게 하는 건, 모택동이나 주은래 등 지도부들의 주민에 대한 자세이다.

마치 탈권위의 실증 그 자체인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옆집 아저씨나 동네 형과 같은 모습으로 주민들 혹은 나이 어린 병사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모습이 적어도 나에겐 강력한 흥미를 주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에 의해서 중국민들의 지지와 호감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중국 공산당의 파편적 지식은 모택동의 독재적인 모습이었다면, 이 책 중국의 붉은 별은 탈권위적 평등 사회 그리고 초기 조직의 순수함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평등과 순수함만으로 이 책을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THE BOOK > 서가 속 영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숫타니파타  (0) 2019.01.30
약산과 의열단 / 박태원  (0) 2019.01.19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0) 2017.01.15
아리랑 / 님 웨일즈  (0) 2014.09.13
와주테이의 박쥐들 / 이동형  (0) 2014.09.08
Posted by 㗢동죽竹
,


열자가 말했다.
"옛날 성인들은 음陰과 양陽을 근거로 해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
모든 형체를 지닌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기 때문이다.
'태역'이란 것은 기운(氣)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란 것은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시'란 것은 형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소'란 것은 성질(質)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기운과 형체와 성질이 갖추어졌으되 서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을 혼동 상태(渾淪)라 말한다.
혼돈 상태란 만물이 서로 혼돈을 이루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역易이라 말하는 것이다.
'역'에는 형체와 한계가 없다.
'역'이 변하여 일一이 되고, '일'이 변하여 칠七이 되며, '칠'이 변하여 구九가 된다.
'구'로 변화한 것은 끝머리에 이른 것이어서, 곧 다시 변하여 '일'이 된다.
'일'은 형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서 땅이 되고, 중간의 조화를 이룬 기운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정기를 품고 있고, 만물은 변화하고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정신精神이란 하늘의 몫이요, 육체란 땅의 몫인 것이다.
하늘에 속하는 것은 맑고 흩어지는 것이며 땅에 속하는 것은 탁하고 모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은 형체를 떠나서 각각 그의 참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귀신(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귀신이란 돌아간다(歸, 鬼와 같은 음)는 뜻으로서 그의 참된 위치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자공이 배움에 싫증이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쉴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에는 쉴 곳이란 없는 법이야."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면 불룩하고 우뚝하고 봉곳하고 불쑥한데 그 곳이 쉴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위대하다, 죽음이여! 군자는 쉬게 되고 소인은 굴복을 하게 되는 것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사賜여, 그대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은 알지만 삶의 괴로움은 알지 못 한다.
늙음의 고단함은 알지만 늙음의 편안함은 알지 못 한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이 쉬는 것임은 알지 못 하고 있다."
#열자 #열어구 


안자晏子가 말했다.
"훌륭하다. 옛날부터 있어 온 죽음이여!
어진 사람은 휴식을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굴복을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람의 덕德이 귀착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 말했다.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된다.
길을 가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자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온 천하 사람들이 집을 잃으면 비난할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형체입니다.
생명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기운이 조화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따라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자손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변화의 껍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다니면서도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지탱하는 강한 양陽의 기운인데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가 물었다.
"타고난 바탕대로 시작한 것이 습성으로 발전하고 천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육지에서 나서 육지에서 안심하고 지냈는데 이것이 바탕입니다.
다시 물에서 자라나 물에서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습성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는 까닭도 모르면서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그것이 천성입니다."
#열자 #열어구 


그러므로 옛날 말에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부드러움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했다.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곧 위태로워질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를 지키면 어떤 사람을 이기는 일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이러한 도를 지키면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기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고 맡아 다스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맡아 다스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열자 #열어구 


깨어 있는 것에는 여덟 가지 징험이 있고 꿈을 꾸는 것에는 여섯 가지 징후가 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징험이라 말하는가?
첫째는 일하는 것,
둘째는 행동하는 것,
셋째는 무엇인가 얻는 것,
넷째는 무엇인가 잃는 것,
다섯째는 슬픈 일을 당하는 것,
여섯째는 즐거운 일이 있는 것,
일곱째는 살고 있는 것,
여덟째는 죽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징험은 형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무엇을 여섯 가지 징후라 말하는가?
첫째는 올바로 꾸는 꿈,
둘째는 놀라 깨는 꿈,
셋째는 무엇을 그리워하는 꿈,
넷째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꾸는 꿈,
다섯째는 기쁜 꿈,
여섯째는 두려운 꿈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징험은 정신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한 물체가 차고 비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변화로 통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일을 통해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음기陰氣가 강하면 곧 큰 강물을 건너면서 두려워하는 꿈을 꾼다.
양기陽氣가 강하면 곧 큰 불 속을 지나면서 데는 꿈을 꾼다.
음과 양의 기가 모두 강하면 곧 남을 살려 주거나  죽이는 꿈을 꾼다.
매우 배부를 적에는 남에게 주는 꿈을 꾸고 매우 배고플 적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뜨고 허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마음이 가라앉고 실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물에 빠지는꿈을 꾼다.
허리띠를 깔고 자면 곧 뱀을 꿈에 보게 된다.
날아가던 새가 와서 머리털을 물면 곧 날아 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날씨가 음산해질 때에는 불을 꿈꾸게 되고 병이 나려 할 때에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 술 마시는 사람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고, 꿈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통곡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하 굽이의 지혜가 많다는 영감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렸다.
"당신의 똑똑하지 못한 짓은 너무 하오!
늙은 나이에 가진 힘으로는 산의 터럭 하나 정도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인데 산의 저 많은 흙과 돌을 모두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북산의 우공은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신 마음이 굳어 있어 굳은 생각은 본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과부된 부인의 어린 아들만도 못 하구려.
비록 나는 죽게 된다 하더라도 자식은 남아 있소.
내 자식은 또 손자를 낳을 것이고 손자는 또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손자를 낳아서 자자손손이 영원히 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은 더 불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평평해지지 않으리라 걱정을 하십니까?"
#열자 #열어구 #우공이산 #愚公移山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복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지 못하는 것도 하늘이 내린 벌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데, 사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게 된다.
그렇지만 사는 사람을 살게 하고 죽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모두가 운명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열자 #열어구 


운명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없고, 이치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차이가 없으며, 마음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거스르거나 순종하는 차이가 없고, 본성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편안함과 위태로운 차이가 없다.
곧 이것을 일컬어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일도 없지만 완전히 자기를 맡기지 않은 일도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도 성실한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제黃帝의 책에 씌여 있다.
"지극한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과 같고 움직이는 것은 기계와 같다.
또한 가만히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움직이는 까닭도 알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여러 사람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 일도 없다.
홀로 갔다 홀로 오며 홀로 나갔다가 홀로 들어오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태곳적 사람들은 사람의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면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예로도 권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본성을 따라 노닐며 만물이 좋아하는 일을 거스르지 않고, 죽은 뒤의 명예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은 형벌로써도 어찌 하는 수도 없었다.
명예에 앞세우고 뒤로 미루는 것과 오래 살고 짧게 사는 일에 대해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열자 #열어구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다.
어진 사람과 성인도 역시 죽게 되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게 된다.
살아서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같은 훌륭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만 남는다.
살아서는 걸桀왕이나 주紂왕 같은 포악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가 된다.
썩은 뼈만 남게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지냈고, 자공子貢은 위衛나라에서 재물을 모았다.
원헌의 가난함은 삶을 손상시켰고, 자공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몸에 해를 끼쳤다.
그러니 가난한 것도 안 되지만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만 괜찮은가?
삶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몸을 편안히 하는 사람은 재물을 모을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일 때문이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명예, 셋째는 지위, 넷째는 재물이다.
이 네 가지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며 위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두고서 '자연의 이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목숨을 다루는 이는 밖에 있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거늘 어찌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귀함을 뽐내지 않거늘 어찌 명예를 부러워하겠는가?
권세를 추구하지 않거늘 어찌 지위를 부러워하겠는가?
부를 탐하지 않거늘 어찌 재물을 부러워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그와 대적할 것이 없고 목숨을 다루는 힘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는 말에 '사람이 결혼과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정욕이 반은 없어지고 사람이 입고 먹는 일에 쫓기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어진다' 했다.
#열자 #열어구 


열자가 호구자림壺丘子林에게 배웠다.
호구자림이 말했다.
"그대가 남보다 뒤지도록 처신할 줄만 안다면 곧 처신을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자가 말했다.
"남보다 뒤지게 처신한다는 데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대의 그림자를 뒤돌아보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열자가 자기 그림자를 뒤돌아보니 자기 몸을 굽히면 곧 그림자도 굽고 몸을 곧게 세우면 곧 그림자도 반듯해졌다.
그러니 굽고 곧은 것은 몸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림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히고 곧게 세우는 것을 남에게 맡겨 두고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남보다 뒤지게 처신하면서도 남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시씨가 말했다.
"무릇 때를 얻은 사람은 잘 되고 때를 잃은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쓴 방법은 우리와 같은데도 결과가 우리와 다른 것은 때를 잃었기 때문이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천하의 이치는 언제나 옳은 게 없고 일은 언제나 그른 게 없습니다.
전날에는 잘 쓰이다가도 지금은 버려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버려지다가도 뒤에는 잘 쓰이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쓰이고 쓰이지 않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일정하게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틈을 타고 때를 만나서 일에 원만히 대응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지혜가 진실로 부족하다면 당신이 공자처럼 학문을 지녔고 여상呂尙과 같은 술법을 지녔다 하더라도, 어느 곳을 가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의 힘은 나라의 성문 빗장 기둥을 뽑을 수 있었지만, 힘으로는 유명해지려 들지 않았다.
묵자는 공수반公輸般의 공격을 막아 그를 굴복시켰으나, 병법으로 이름을 날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리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한 거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심도자가 말했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게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많음으로써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것이오.
학문이란 근본이 다른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근본이 여러 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학문을 하는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오.
오직 결과가 같아서 동일한 곳으로 돌아가야지만 얻고 잃은 게 없게 되는 것이오.
당신은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익혔으면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군요.
슬픈 일이오!"
#열자 #열어구 #다기망양 #多歧亡羊

Posted by 㗢동죽竹
,


옛날에 수라는 사람은 손재주가 정교한 장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수의 손가락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아끼는 것은 자신에게는 이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의 소유이면서 또한 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도 크다.
귀한 바와 천한 바로 논한다면, 천자가 될 만큼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삶의 존귀함과 견주기에는 부족하다.
가볍고 무거운 바로 논한다면, 천하를 소유할 만큼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내 삶의 소중함과는 바꿀 수 없다.
편안한 바와 위태로운 바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라도 내 삶을 잃으면 결코 다시 돌이켜 얻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도 있는 사람들은 늘 신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신중히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과 생명의 실질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전체가 함께 함을 반드시 맨 앞으로 내세웠으니, 전체가 함께 하면 천하가 화합된다.
화합은 전체가 함께 함으로부터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옛날의 기록을 한번 보면, 천하를 얻은 자와 천하를 잃은 자가 많은데, 그들이 천하를 얻은 것은 오로지 전체가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천하를 잃은 것은 오로지 사사로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천하는 임금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천하이다.
음양의 조화는 어느 한 부류의 사물만을 편애하여 자라게 해주지 않고, 단 이슬과 때에 맞는 비는 어느 한 사물에만 편애하여 내려주지 않으며, 천하 만민의 임금은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는다.
#여씨춘추 #여불위 


요리사는 음식의 맛을 내지만 감히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요리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요리사가 음식의 맛을 내면서 이를 먹는다면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왕자(王者)나 패자(覇者)와 같은 우두머리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닦달거리고 포악하더라도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봉지로 나누어 주므로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왕자나 패자와 같은 우두머리들이 닦달거리고 포악하면서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한다면,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어떠한 것도 나은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모자라는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은 점을 빌림으로써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보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빌리는 사람은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또한 투쟁이 비롯되어 내려온 바도 매우 오래 되었으니, 일찍이 이 투쟁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 나이 많은 자와 나이 어린 자,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더불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단지 큰 투쟁과 작은 투쟁이 있을 따름이었다.
투쟁의 기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 속에 있으면서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투쟁이고, 흘려보는 것도 투쟁이고,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는 것도 투쟁이고, 건방진 말도 투쟁이고, 밀고 당기는 것도 투쟁이고, 끌어당기고 뒤집는 것도 투쟁이고, 패지어 싸우는 것도 투쟁이고, 삼군(三軍)의 대부대로 치고 싸우는 것도 투쟁이다.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투쟁으로서 크고 작은 싸움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군대가 진실로 의롭다면, 포악한 군주들을 주살함으로써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 의로운 군대를 좋아함이 마치 효자가 인자한 어버이를 보듯 하고, 주린 자가 맛있는 음식을 보듯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환호하며 그리고 달려감이 마치 강한 쇠뇌로 깊은 골짜기에 화살을 쏜 것과 같고, 큰물이 쌓여서 막아놓은 둑을 무너뜨림과 같다.
#여씨춘추 #여불위 


이제 천금과 기장쌀을 뭉친 주먹밥을 어린아이에게 보인다면 어린아이는 반드시 주먹밥을 취할 것이다.
화씨(和氏)의 구슬과 천금을 세속의 사람에게 보인다면 세속의 사람은 반드시 천금을 취할 것이다.
또 화씨의 구슬과 도덕의 지극히 오묘한 말을 현자에게 보인다면 현자는 반드시 지극히 오묘한 말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지혜가 오묘하면 오묘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오묘하고, 어떤 사람의 지혜가 거칠면 거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거칠다고 말할 수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선비들의 신조 중에서 (선비는) 능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므로 부귀보다 더 존중되는 것이니, 어떠한 이익이나 권력도 이러한 선비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그의 뜻을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정말로 능욕을 당한다면 이들은 즐거운 삶을 영위할 것이 없다.
이 같은 사람들은 권세를 잡아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관직에 처해서도 절대로 관직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으며,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휘할 때에도 절대로 용기가 꺾이어 패주하는 일이 없다.
충신도 역시 이와 같다.
진실로 군주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롭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삶을 내팽개치는 일도 감히 마다하거나 어기지 않고서 군주와 나라를 보위한다.
나라에 이 같은 선비가 있다면 가히 인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재는 본디 얻기가 어렵지만, 사실 걱정은 얻기 어려운 선비가 있어도 이를 몰라보는 데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말은 잘하나 논리에 맞지 않고, 미덥기는 하나 이치에 맞지 않고, 용감하기는 하나 의리에 맞지 않고, 법을 잘 지키기는 하나 실정에 맞지 않으니, 이는 어리둥절한 채로 빨리 달리는 말을 타는 것과 같고, 미친 채로 오나라 간장(干將)의 명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은 반드시 이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
#여씨춘추 #여불위 


지혜의 우열은 멀리 내다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늘날이 옛날과 갖는 관계는 옛날이 그 후세와 갖는 관계와 같고, 오늘날이 후세와 갖는 관계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현재를 잘 살피고 알면 지나간 과거를 알 수 있고, 과거를 알면 앞으로 올 미래를 알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 앞과 뒤는 같은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무릇 도리에 어긋난 사람의 병은 진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세상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부질없이 얽매이는 바가 많은데, 얽매이는 바가 있으면 듣는 일이 반드시 어그러지게 된다.
얽매이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요체는 반드시 사람이 좋아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에 바탕을 둔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서쪽 벽을 보지 않고, 남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북쪽에 눈을 두지 않으니, 마음에 이미 존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가까이 하면 멀어지고 멀리하면 가까워지는 것이 있다.
때도 역시 이러하다.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없으면 천자가 되지 못 하고,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있다 하더라도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없으면 역시 천자가 되지 못 한다.
성인이 보는 때와 인사의 관계는 마치 걸음이 그림자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도 있는 선비가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은둔하여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기도 하고, 또 힘들여 일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벼슬 한번 하지 않은 위치에서 천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제후의 지위로부터 천하를 얻게 되는 사람도 있고, 낮고 천한 위치로부터 삼왕(三王)과 같은 위대한 천자들을 보필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사내의 위치에서 천자의 세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시기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명철한 군주란 만물을 빠짐없이 두루 보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군주의 도리를 소유하고 있는 군주란 모든 것을 몸소 시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이다.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는 일은 줄어들면서도 나라는 다스려지는 것이고,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임금에게로 집중되면서도 간사함은 막히게 되는 것이다.
간사함이 막히면 (유가·묵가·종횡가 등) 이단의 논설을 펴는 자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됨으로써 참 모습이 깨우쳐지고, 허위가 꾸며지지 않음으로써 일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극히 잘 다스려짐"이라고 부른다.
#여씨춘추 #여불위


남이 옮기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를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 번 이리저리 전해지다 보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는 원숭이와 같고, 원숭이는 고릴라와 같으며, 고릴라는 사람과 같지만, 사람이 개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잘못을 크게 저지르는 이유이다.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면 복이 되지만,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옮기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깊이 따져봐야 하며, 그것이 사람에 관한 것일 때에는 반드시 이치로써 사실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
#여씨춘추 #여불위 

Posted by 㗢동죽竹
,


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시작하면 얼마나 열중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는 언젠가 델포이에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감히 신탁(神託)을 받아온 것이오 - 내가 말했듯이, 여러분! 떠들지 말아 주기 바라오 - 즉, 나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 그는 물은 것이오.
그러자 그곳 무녀(巫女)는 나보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준 것이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의 형제가 여러분에게 증언해 줄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은 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크든 작든 간에 나 자신이 결코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지혜 있는 자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체 신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혜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이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구나 하고 말이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은 지혜 있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리려고 애를 썼소.
그런데 그 결과 나는 그의 미움을 샀고, 그 자리에 동석해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에게 적의를 갖게 되었소.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소.

나는 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사실상 아름다움이나 선(善)을 모르고 있지만 이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모르니까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달은,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모양이다.
하고 말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럽소.
그러나 역시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말하자면 마침 그곳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인 그들보다 그 뜻을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오.
더욱이 시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이런 것을 알았소.
즉, 그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타고난 것에 의한 것이며, 신의 예언자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처럼 신의 계시로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훌륭한 말을 많이 늘어 놓지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뜻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보건대 시인들도 무언가 정치가와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시를 쓴다는 것을 믿고 다른 일에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건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인간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정치가들에서 느낀 것처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한테서 떠나온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래서 나는 신탁을 대신하여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소.
어느 쪽을 나는 택해야 할 것인가,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지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이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편이 나를 위해서 좋다고 결론지었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지혜는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지혜가 있는 자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탁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는 신을 도와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나랏일이건 집안일이건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할 여가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는 있소만, 이것도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나 자기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고 학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흔히 말하듯이, '천상의 일과 지하의 일을 가르친다' 든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든가, '비리(非理)를 강변한다' 든가 하는 말을 지껄여 대는 것이오.
그것은 즉, 생각건대 그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가 보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무엇을 아는 체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오.
그 사람들은 명예심만은 강하니까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이고 설득적으로 나에 관한 말을 하고,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중상으로 여러분의 귀를 가득 채워 버리고 만 것이오.
멜레토스가 나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도, 아니토스나 리콘이 나를 공격한 것도 다 이것이 원인이었으며, 멜레토스는 작가들을 대신해서, 아니토스는 장인들과 정치가를 대신해서, 리콘은 변론가의 입장에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처음에 한 말이오만, 지금 이렇게 거대해진 이 중상을 이런 짧은 시간에 내가 여러분한테서 제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상과 같은 것이 진실인 것이오.
나는 여러분에게 크든 작든 간에 조금도 숨김없이 얼버무리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소.
물론 나는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들의 증오는 바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이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또는 장차의 조사에서 발견하게 되겠거니와, 이것이 비방의 이유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고 보면, 나를 제외한 아테네 시민 모두가 훌륭하고 착한 인간을 만들고 있지만, 나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불행을 당신에게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해 다오.
당신은 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만이 그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뿐이거나 혹은 극히 소수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다루거나 하며 그것을 나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귀신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만일 귀신이 신의 방계(傍系)의 자식들로서 님프나 그밖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여성들한테 태어난 사생아라면, 신의 자식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노새가 말과 나귀의 새끼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말과 나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죽음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군들이 나를 배치했던 장소를 고수했던 내가,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했을 때-나는 그렇게 믿고, 또 풀이했소만-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야말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나를 법정에 끌어내야 마땅할 것이오.
그것은 신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며, 지혜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
바로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소.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경애하고 있소.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신에게 복종하겠소.
그리고 나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충고하고 내 소신을 밝히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때의 내말은 평소의 내 말과 변함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여!
당신은 지혜에 있어서나 무력에 있어서나 가장 명성이 높고 위대한 나라 아테네 사람이면서 오직 막대한 돈을 손에 넣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소?
명성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 것을 왜 부끄러워하지 않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설득했을 그런 말이 부족해서 내가 진 줄 알고 있을 것이오.
천만에, 나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말의 부족 때문은 아니오.
오히려 후안무치(厚顔無恥)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한탄하는 등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듣고 있는 많은 일들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러분이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징벌이 내릴 거라는 것이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 것보다 제우스 신에 맹세코 훨씬 쓰라린 형벌이 될 것이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로부터 벗어나고 여러분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여러분을 심판하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오.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고 있어서 여러분은 깨닫지 못 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젊으니까 그만큼 거셀 것이며, 여러분은 또 그만큼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여러분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책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은 잘못이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명예롭지도 못한 도피법이오.
남을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편이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한 방법이오.
이상이 내게 사형의 투표를 한 여러분에 대한 내 예언이며, 이것으로 이제 작별하기로 하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른 면으로 고찰해 보더라도 죽음이 선이라는 희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소.
죽는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오.
말하자면, 전혀 무(無)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거나,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듯이, 그것은 영혼의 이동으로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주거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만일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는 일이고, 사람이 자면서 꿈 하나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이란 아주 놀랄 만한 소득일 것이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평생에 꿈도 안 꿀 만큼 숙면을 취한 밤을 골라내어 그 밖의 낮과 밤을 나란히 놓고 비교·대조하는 형식으로 관찰해서, 그런 밤보다 더 좋고 더 즐겁게 산 낮과 밤이 자기 생애에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말해야 한다면, 생각건대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대왕일지라도 그런 밤이 그렇지 않은 낮과 밤에 비해서 극히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죽음이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크게 덕을 보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모든 시간이 만일 이와 같은 것이라면, 단 하룻밤보다도 길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오.
한편, 죽음이란 여기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

Posted by 㗢동죽竹
,


이 <<사자의 서>>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들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둘째는 사후세계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는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셋째는 사자가 환생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자궁 입구를 막아 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살아 있을 때 여러 영적인 안내서들을 통해 실제 수행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계의 가르침을 통해 존재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도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사후세계도 거치지 않고, 공중에 일직선으로 난 큰 길을 따라 태어남이 없는 근원의 세계로 곧바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시기

호흡이 멎었을 때 사자의 생명력은 지혜가 머무는 생명 에너지 센터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자의 의식체는 자연 상태에서 최초의 투명한 빛을 체험할 것이다.
그 뒤 생명력은 신체의 뒤쪽으로 가서 척추 오른쪽과 왼쪽의 생명 에너지 통로를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이때 사후세계가 순간적으로 밝아 오게 된다.
따라서 생명력이 배꼽에 있는 생명 에너지 센터를 통과한 뒤 왼쪽 에너지 통로 속으로 달려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여기에 적힌 지시대로 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생명력이 이렇게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내부에 아직 들숨이 남아 있는 기간으로, 밥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때 임종자가 잠에 빠져들려고 하거나 수면 상태가 계속되려고 하면 이를 막아야 하며, 목의 동맥은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눌러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직 머리 정수리의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 확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자를 인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 다르마카야의 완전한 마음을 처음으로 얼핏 목격하게 된다.
마지막 날숨이 멎고 아직 몸 안에 숨이 남아 있는 기간이 바로 생명력이 중앙 에너지 통로에 머무는 기간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의식체가 기절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도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을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투명한 빛을 알아보지 못 했을지라도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을 알아볼 수 있으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 하면 세 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가 밝아 온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 세 번째 빛의 단계에서는 살아 있을 때 쌓은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환영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초에니 바르도의 가르침을 읽어 주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많은 힘을 갖고 있고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때쯤 사자는 자기 곁에 음식물이 따로 차려져 있고, 옷은 수의로 갈아입혀졌으며, 잠자리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애통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이 자기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실망한 채로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사자는 소리와 색과 빛 세 가지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고 두렵게 하며 마침내 몹시 지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존재의 근원 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가르침이 행해져야만 한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그대는 내가 읽어 주는 이 구절들을 잘 따라 외우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두려운 어떤 환영이 눈 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요한 비밀을 잊지 말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육체와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이때, 그대는 순수한 진리의 세계를 잠깐 경험하게 되리라.
그것은 밝고 눈부시고 미묘하며 무서울 정도로 빛이 난다.
마치 봄날의 풍경 속을 가로질러가는 신기루처럼 끝없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고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참 자아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천상계의 존재들에게서 나오는 어두운 흰색 빛에 이끌리지 말라.
그대여, 그것에 애착을 갖지 말라.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그 어둔 빛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천상계의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여섯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대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그 빛을 쳐다보지 말라.
깊은 신뢰를 갖고 눈부신 푸른색 빛을 바라보라.
그대의 오 마음을 바이로차나에게 향하고, 내가 읽어 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또한 모든 붓다들의 조상이며 모든 선(善)의 아버지인 사만타바드라(보현)와 모든 선의 어머니인 사만타바드리가  한몸으로 결합된 모습으로 그대를 비추러 나타날 것이다.
이들 마흔두 명의 완전한 신들이 그대 앞에 나타나 그대를 비출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며, 그대 자신의 순수한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들 여러 세계들은 그대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 가슴의 네 부분에서 나오며, 가슴의 중심부를 합하면 모두 다섯 개의 방향이 된다.
그것들 모두는 그대 안에서 나와 그대를 비춘다.
신들 역시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세월 이전부터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비쳐 나오는 빛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 이끌리지 말라.
그러므로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약하게 갖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무념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형상들과 빛들은 그대 자신 속으로 녹아들 것이고, 그대는 붓다 경지를 얻게 되리라.
아모가싯디(불공성취불)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의 초록색 빛의 길은 그대를 향해 열려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지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지혜의 빛들과 함께 윤회계의 여섯 세계로부터 순수하지 못한 환영의 빛들이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대는 "저것들이 무슨 빛일까?"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천상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흰색 빛, 아수라의 거인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초록색 빛, 인간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노란색 빛, 동물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푸른색 빛, 굶주린 귀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붉은색 빛, 지옥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회색 빛이다.
순수한 지혜의 빛과 함께 이들 여섯 색채의 빛이 그대를 비출 것이다.
이때 두려워하거나 어떤 것에도 끌리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하여금 무념 상태에서 쉬게 하라.
만일 그대가 지혜의 순수한 빛들을 두려워하고, 여섯 세계의 순수하지 못한 빛들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여섯 세계의 어느 한곳에서 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러한 생각의 형상들이 나타나면 그대는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말라.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신의 신체들 역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텅 빈 것이 텅 빈 것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을 떠나면 평화의 신이나 분노의 신이나 피를 마시는 신이나, 여러 형태의 머리를 한 신들이나 무지개 빛이나 죽음의 대왕의 끔찍한 모습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대의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명상하라.
나아가 그대는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하거나, 그대 소유의 물건을 다른 이들이 갖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미련 때문에 그것들에 애착을 갖거나 상속자들에게 분노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감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쳐 설령 그대가 높고 행복한 차원에 태어날 운명이었다 해도 그대는 지옥계나 불행한 귀신들이 사는 아귀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세상에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려라.
그대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들을 단념하라.
누가 그대의 재산을 갖든 불행한 생각을 갖지 말라.
그것들을 기꺼이 단념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마음에서 나온 텅 빈 몸이 나에게 내려올 때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이 사후세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악한 행위들의 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수호신들이여, 그 고통을 내쫓아 주소서.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위대한 진언(眞言)이 되어 울리게 하소서.
아무런 보호자도 없는 나를 내 생전에 쌓은 업(業)이 추적해 올 때
자비의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일 때문에 슬픔이 내게로 밀려올 때
깊은 명상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행복한 빛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가르침이 담고 있는 특별한 기술은 이 순간에서 특히 중요하다.
지금 어떤 빛이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것을 자비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어느 곳으로부터 빛이 뻗어 나와서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곳이 자비의 신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기술이다.
이것은 그대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막아 준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그대의 수호신이 누구이든 그 수호신을 마음 속에 떠올려 명상하라.
마치 마술사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그 수호신을 눈 앞에 떠올리고 그에 대해 명상하라.
만일 그대에게 특별한 수호신이 없다면 자비의 신을 명상하거나 아니면 나에 대해 명상하라.
명상의 대상이 정해졌으면 그를 마음 속에 그리면서 고요히 명상하라.
이제 그 수호신의 영상을 겉에서부터 녹여 서서히 사라지게 하라.
그 영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사념도 일으키지 말고 명상하라.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세계에서 비쳐 나오는 투명한 빛을 명상하라.
그대여, 이것은 더없이 심오한 기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그대는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 환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보게 될 때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대 자신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 남녀를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 스승의 여성 원리로 여기고 그들에 대해 명상하라.
그들에게 절하라.
겸허한 믿음을 갖고 마음 속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를 올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인 안내를 부탁할 결심을 하라.
이 결심만으로도 자궁문은 닫힐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해도 자궁문이 닫히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충동이 생긴다면 수호신에게 명상하듯이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의 여성 원리, 또는 자비의 수호신과 그의 여성 원리에 대해 명상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Posted by 㗢동죽竹
,


삶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이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것들 모두 맑고 투명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하지만 시간의 의미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그리고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순수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고 편하게 의식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슬픔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이라 부르는 그 심상치 않은 것에 대해서, 이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또 슬픔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다루려 한다면 단편적으로밖에는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랑이 지닌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슬픔의 본질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이해해야 하는데,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둘은 하나다.
시간에 대해 이해하다 보면 생각과 마주치게 되고, 생각을 이해하면 시간이 끝나고 따라서 슬픔이 끝난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다면 우리는 슬픔을 바라볼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슬픔을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숭배하거나 아니면 파괴해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나 사원 안에 또는 마음 속 어두운 구석에 넣어 두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붙잡고 있다.
아니면 발로 차버리거나 집어던져버리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슬픔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거기에 고상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찾겠다는(이건 말 그대로 난센스다) 말 따위는 하지 않고도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만이 슬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니 슬픔은 조금도 받아들여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모든 감상적인 생각과 자기연민에서 샘솟는 모든 감정표출인 슬픔을 이미 버렸다.
그러면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죽음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놀라운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는 것이 사라져야 그 안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그때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 다음에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다.
현명한 사람은 시간과 생각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매순간 죽어가고, 결코 경험을 쌓아두거나 모아 놓지 않는 마음은 순결하면 따라서 변함없는 사랑의 상태에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 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말· 상징·이미지들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말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이 곧 이미지요 상징이며, 우리의 사고는 곧 말로 표현하기· 상징화하기 · 상상하기 · 라벨을 붙여 분류하기이다.
이미지나 상징 또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기억도 없겠지.
따라서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죽음이라는 실재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말이다.
맞나?
또한 확실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아는 것 즉 과거의 결과인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그리고 모르는 것 즉 미래에 직면할 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그 감각은 우리가 그것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도 거기 있을까?
감각은 단어가 없어도 존재할까?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 어떤 비판이나 평가나 억제도 없이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고 다만 관찰만 하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기억이 아니다.
사랑은 쾌락도 아니다.
사랑이 섹스와 관계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이건 찬성하고 다른 건 비난하며 세속적인 사랑과 신성한 사랑을 구분하는 행위로 후퇴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거에 대한 죽음, 모든 고통·갈등·슬픔에 대한 죽음이 없으면 사랑을 전체로 완전하게 만날 수 없다.
그때 사랑이 있다.
바로 그때 하고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은 자기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과거에서 끌어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곧 죽음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사랑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애착이 없을 때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과거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은 이용될 수 있으며 지식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그때 나의 살아있음은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며, 배움과 감동이 있는 모르는 것의 영역에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궁극적인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㗢동죽竹
,


이리하여 저는 광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치고 나니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습니다.
고독이라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 거지요.
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면
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저는 땅에 내린 당신의 뿌리이고
당신은 거기서 하늘로 피어난 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햇볕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게로 몸을 기울여
내 귀에다 달콤하게 속삭이시며
마치 바다가 시냇물을 받아들이듯
나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그리고 친구여, 내 안의 '나'는
언제나 침묵의 집에 머무르고 있어서
끝끝내 알아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답니다.

굳이 내 말이나 행동을 그대가 믿어 주길 바라진 않는답니다.
내 말은 바로 그대의 생각이 소리로 나온 것이고
내 행동은 그대의 바람이 실행에 옮겨진 것뿐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무덤 파는 사람

한번은 나의 죽은 자아 하나를 묻고 있는데
무덤 파는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온 사람 중에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그런데 제가 왜 마음에 드십니까?"

"여기에 오는 사람은 하나같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데 당신만은
웃으며 왔다 웃으며 가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아, 밤이여! 그렇답니다. 우린 쌍둥이랍니다.
그대는 우주를 드러내고
나는 내 영혼을 드러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Posted by 㗢동죽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