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대가 노자를 이해하려고 할 때, 노자는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어떤 배가 동쪽을 향해서 움직이고 어떤 배는 서쪽을 향해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는 동쪽이 서쪽이며 서쪽이 동쪽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둘이 하나라고 말한다.
노자는 정반대가 통합되고 일치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단지 삶의 대변인일 뿐이다.
만일 삶이 불합리하다면 노자도 불합리하다.
만일 삶이 불합리한 논리를 갖고 있다면 노자도 삶에 대해서 불합리한 논리를 갖는다.
노자는 단지 삶을 반사할 뿐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든 단지 받아들일 뿐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붓다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은 간단하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너무도 비범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와 같이 너무도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노자를 이해하려면 정신적으로 더 성장해야 할 것이다.
만일 붓다가 그대 곁을 지나간다면, 그대는 즉시 그를 알아 볼 것이다.
어떤 초인이 그대 곁을 지나쳤다.
붓다는 초인의 매력을 간직하고 다닌다.
그러므로 그를 놓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그대의 이웃일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나도 평범하기 때문에, 너무도 비범하게 평범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자의 아름다움이다.
비범해지는 것은 쉽다.
단지 노력과 수련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깊은 내적인 수련이다.
그대는 훌륭히 수련을 쌓을 수 있으며 완전히 비세속적으로 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해진다는 것은 정말로 가장 비범한 일이다.
어떤 노력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노력이 없는 상태가 필요하다.
어떤 훈련도, 어떤 방법도, 어떤 수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오로지 이해만이 도움이 된다.
명상까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이해만이 도움이 된다.
단지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용기를 갖고 삶을 사는 것뿐이다.
삶이 좋든 싫든, 성스럽든 악하든, 천당이든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숨으려 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마주치는 것이다.
노자가 되거나, 노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실, 그대가 노자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노자이다.
붓다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꼭 붓다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자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 노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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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비도덕적일 때, 오직 그때만이 도덕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대가 제대로 된 인격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오직 그때만이 인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산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굴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계발하려고도 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게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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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되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말해질 수 있는 진리는 그 순간 바로 거짓이 된다."
그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와 함께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그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사트상(내적인 세계로 완전히 진입된 상태)'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와 함께 살았고, 그와 함께 움직였으며, 그의 존재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에게 그들 자신을 열어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더욱더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 속에서 노자는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렸다.
90년 동안 그는 어느 것에 대해서 말하거나 쓰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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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에 노자는 그의 제자들을 떠났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언덕으로, 히말라야로 옮겨간다.
나는 그곳에서 죽을 준비를 할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은 좋다.
살아있을 동안에 세상에 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는 완전히 혼자 있을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완전한 순수성과 고독 속에서 본래의 근원으로 갈 수 있다."
제자들은 매우 슬펐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몇 백리나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노자는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홀로 국경선을 넘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경비병이 그를 붙잡았다.
그 경비병 또한 노자의 제자였다.
그가 말했다.
"만일 스승님께서 책을 쓰지 않는다면 국경선을 넘는 것을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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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리는 말해질 수 없는가?
무엇이 어려운가?
진리가 말해질 수 없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진리는 항상 침묵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서 말이 그칠 때, 진리는 실현된다.
침묵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어떻게 소리를 통해서 말해 질 수 있겠는가?
진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만일 진리가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생각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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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리는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침묵과 무심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심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한다.
마음은 떨어져 나가야 한다.
진리에 도달하지 전의 필요조건으로써 떨어져 나가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은 깨달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진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마음이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어떤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언어는 무익하다.
진리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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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질 수는 있으나, 신은 말해질 수 없다.
사랑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질 수 있으나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그 '무엇'이 상대적으로 남는다.
그 무엇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의 지적인 이해력, 교육 정도, 그리고 이해하려는 욕망에 따라 상대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또한 스승과 연관되어있어 스승에 의존한다.
스승의 표현방식, 전달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적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경험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표현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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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표현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제쳐두고라도, 어떤 경험일지라도 경험은 전달될 수 없다.
그대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는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단어는 사전에 있다.
그 뜻을 이해하진 못할지라도 사전을 통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는 그대 안에 있다.
의미는 경험을 통해서 온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사전에 있고, 언어에 있으며, 문법에 있다.
그러나 경험적인 의미, 실존적인 의미는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경험해보았다면, 즉시 그 '사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다.
그 말은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말할지라도, 그대가 그대의 체험을 끌어오지 않는 한, 그말은 공허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경험이 그말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의미 있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공허하게 남을 뿐이다.
말,말,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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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이고 진정한 의미는 실존적인 경험을 통해서 온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진리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진리를 훔칠 수도, 빌릴 수도, 살 수도, 도둑질할 수도, 구걸할 수도 없다.
아무런 방법도 없다.
그대가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의 길, 나는 이것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의 길은 그 경험에 도달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다.
단지 그 경험에 도달한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써 어떤 신비스런 것이 그대에게 전달될 것이다.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의 뛰어오름이다.
그것은 불이 타오르는 등잔에서 타고 있지 않은 등잔으로 불꽃이 튀는 것과 같다.
타고 있지 않은 등잔을 타고 있는 등잔 가까이 가져가 보라.
불꽃은 튀게 된다.
그와 똑같은 일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거기에 경전을 넘어선 전달이 있다.
메시지가 아니라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삶이 전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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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自意識이 병이다.
사실 자의식이 없게 되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법 속에서, 둘 사이에서, 딜레마 사이에서 어떻게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항상 선택한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그러면 추함은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그대는 종교적이기를 선택한다.
그러면 종교적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그대는 성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러면 죄는 그대의 그림자가 된다.
선택하라.
그러면 그대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 바로 그것이 삶을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하지 마라.
선택 없음이 되라.
삶이 흘러가도록 놔둬라.
때로는 그것이 신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것이 악마처럼 보인다.
그 둘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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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삶이 상호의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의존적이어서도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
양자는 모두 극단이다.
바로 그 중간, 삶이 균형을 이루는 곳에 상호의존이 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꽃을 다치게 하면 곧 벌을 다치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어느 것도 섬처럼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섬처럼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현상일 것이다.
거의 신화나 꿈이 될 것이다.
노자는 상호의존을 믿는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취하라, 선택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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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항상 선택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선택을 통해서 살아간다.
만일 그대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떨어져 나간다.
이것이 노자의 길이다.
어떻게 마음을 버릴 것인가?
방법은, "선택하지 마라!"
그가 어떤 명상도 권하지 않은 이유도 어떤 명상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선택 없이 삶이 오는 대로 살아라.
떠다녀라.
어느 곳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마라.
어떤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지 마라.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미래나 과거에 구애받지 마라.
그러면 심포니가 그대 영혼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이 그대 안에서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대는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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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자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한다.
세 가지가 가능하다.
첫 번째, 행위 속에 있으면서 비행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행위를 버리고 히말라야로 가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비세속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시장 안에 살면서 시장이 그대 안에 사는 것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겉으로는 움직이면서도 내면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침묵이 있다.
나는 말하는 동시에 말하지 않고 있다.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마라.
행동하면서 행동하지 마라.
만일 비행위와 행위가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조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아름다운 현상이 된다.
추함에 반대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도 포함하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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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현자는 히말라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남는다.
그는 일을 처리하지만 행위 없이 처리한다.
그는 내면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행위는 바깥에 있을 뿐이다.
중심에서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이다.
폭풍의 중심을 찾는 것이다.
폭풍은 바깥에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는 아무 것도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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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정말로 어떤 바람도 없고, 어떤 명예나 명성, 성공, 야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귀결로써 성공과 승리가 생겨난다.
그대의 빈 마음 안으로 전 존재가 쏟아진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결이다.
결과가 아니다.
결과는 그것을 바랄 때 성립되는 것이며, 귀결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때, 아무런 욕망 없고, 그것에 대한 생각도 없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귀결은 존재의 내면 법칙의 한 부분으로써 생겨난다.
그 법칙이 곧 도道라고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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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곧 브라마Brahma,(창조의 신)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그대 바깥의 어느 곳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신은 전체의 텅 빈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의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크리슈나를 찾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찾아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마하비라를 찾아다닌다.
모든 사람이 다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텅 빈 상태를 찾지 않는다.
그러지 않다면 그대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
공간은 그대 주위 어느 곳에서나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이 신이다.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그대가 그 안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분해될 그 공간이 바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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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어 없어진다.
그 물고기는 다름 아닌 바닷물일 뿐이다.
그대의 경우도 똑같다.
텅 빈 상태는 그대 주위에 어느 곳에도 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텅 빈 상태가 그대 안에도 있다.
텅 빈 상태가 어떻게 두 종류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텅 빈 상태는 언제나 똑같다.
죄인에게나 성자에게나 텅 빈 공간은 똑같은 것이다.
죄인은 바깥에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성자는 바깥에 성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벽에 너무도 집착하고 있어 벽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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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나를 칼로 자른다면 나의 육체를 자르는 것이지 나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내면의 비어있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한다면 나는 벽으로써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면의 비어있는 상태는 행위자가 아니다.
이 비유를 기억하라!
이것이 노자의 핵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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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텅 빈 그릇이라
그것을 내어 쓰되 다함이 없으며
가히 그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다.

만약 도道나 신神이 비어있지 않다면 그들의 쓰임은 무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 소모될 것이다.
만일 신이 소모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그는 죽을 것이고 다 소모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개념은 하늘 어딘가에 앉아서 만물에 관여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결코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는 '그'도 아니며 '그녀'도 아니다.
도를 설명할 때 쓰는 말들은 다 부적당하다.
도는 무한히 거대한 공간이며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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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空의 상태가 곧 그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텅 빈 상태가 아닌 비실재가 될 때 그대는 고통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상의 뜻이다.
명상이란 곧 텅 빈 상태가 되는 것, 안이 비어있는 것이다.
어떤 생각도 떠다니지 않으며, 내용물도 없고, 오로지 공간만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갑자기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고통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 역시 사라진다.
죽음 또한 생각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사라진다.
모든 과거의 짐은 생각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라진다.
생각이 없이는 욕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치지도 않는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미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미친 사람이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사실 사람은 너무도 생각이 많아서, 그 생각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친다.
생각이 너무도 복잡한 것이다.
미친 사람은 위대한 사색가이고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그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너무 여러 측면에서 한꺼번에 생각한다.
그의 마차에는 사방으로 말들이 매여 있다.
그의 생각들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데도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너무도 분열되어있고 너무도 갈라져 있다.
오직 텅 빈 상태만이 나누어지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그대가 텅 빈 공간을 나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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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힘껏 당긴다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알맞은 순간에 멈추었다면 하고,

활이 부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활을 힘껏 당길 때,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 활은 오래도록 쓸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활을 최대로 당기지 마라.
왜냐하면 최대라는 것은 항상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은 완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벽과 함께 진화는 멈추기 때문이다.
완벽은 곧 죽음이다.
그리고 결함은 곧 삶이다.
삶은 결함이 있는 것을 사랑한다.
완벽해보라.
그대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삶은 그대를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불완전하게 남으라.
그러면 생기가 넘칠 것이고 삶은 그대를 어디에서나 지지할 것이다.
노자나 나의 목표가 완벽이 아니라 전체성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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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물러나라.
그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어떤 일에 그대가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대가 행복을 얻었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기분이 좋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축복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물러서라.
그리고 즐겨라.
그 안에서 놀아라.
그것과 함께 춤을 춰라.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그런데 마음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마음은 말한다.
"지금 이 상태는 좋다.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더 얻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가능한 것, 이미 현실화된 것까지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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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채근했다.
"나에게 말해보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지.
그저 무슨 일인지만 말해보게."
그가 말했다.
"저는 99의 악순환에 걸려든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99를 갖게 되면 거기에 악순환이 생긴다.
그대는 그것이 100이 되기를 원하다.
이것이 바로 수평선이다.
그리고 100이 된다고 해서 거기서 그친다고 생각하지 마라.
마음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모른다.
마음은 중단을 모른다.
그래서 늘 실패한다.
마음은 어디에도 서지 않고 계속 달린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리고 Z에 이르러 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 달린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대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물러나라
그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그것이 도이다.
극단으로 가지 마라.
항상 한계 안에서 일을 하라.
한계 속에서 머물러라.
그것이 산야신의 규율이다.
항상 중간에 머물러라.
항상 한계 안에 있어라.
항상 만족한 채로 머물러라.
더,더,더를 갈망하지 마라.
수평선을 버리고 수직선으로 들어가라.
물러서라.
그러면 충족될 것이다.
그대는 삶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충족(fulfillment,성취,실현, 달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적 균형과 전체적인 고요함의 깊은 순간이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 자유,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 부른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대는 이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無이다.
그대는 무에서 나왔다.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無이다.
무에서 무로!
그리고 무와 무 사이에서 유가 생긴다.
존재의 강은 무의 두 강둑 사이를 흐른다.
존재는 아름답다.
그러나 비존재 또한 아름답다.
삶은 좋다.
그러나 죽음 또한 좋다.
삶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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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퀴의 배꼽, 바퀴의 축은 비어있다.
그러나 바퀴 전체가 그것에 의존한다."
노자는 그것을 왜 바퀴의 배꼽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배꼽과 똑같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배꼽 가까이에 단전丹田/hara이라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단전은 몸 안에 있는 블랙홀이다.
일본에서는 노자의 말을 따라서 몸 안 어느 곳에 죽음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음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죽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죽음은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그대 안에서 자라고 있다.
삶의 길 어디에선가 죽음을 갑자기 만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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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공emptiness,空에 대해서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혼자 있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혼자 있으면 제가 비어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친구를 찾고 연인을 찾는다.
이때의 모든 노력은 불운하게 되어있다.
자신의 비어있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워한다.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척할 때 그는 단지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비어있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다.
내면 어딘가에 공과 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빈 공간을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연애의 거의 99%는 거짓이다.
조만간에 그대는 그대의 연인이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연인들은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자기를 우롱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자신도 상대와 똑같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비애와 어리석음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해한다면,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모두에게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홀로 조용히 있지 못하는 것은 그대의 외로움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이 그 외로움을 채워주길 바란다는 걸 의미한다.
그대는 위장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대와 똑같이 한다.
그도 역시 홀로 있지 못한다.
홀로 있지 못하는 두 사람이 서로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은 비극적인 현상,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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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빈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을 억압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그것을 느끼고 즐겨라.
그러면 차츰차츰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단 그대가 외로움loneliness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면 그것은 홀로 있음aloneness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빈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가 아니다.
그때 그것은 순수가 된다.
너무도 순수하여 형상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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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과 외로움 사이의 차이를 항상 기억하라!
외로움은 상처와 같다.
외로움은 그대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갈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그대의 환상 속에, 마음 속에, 그리고 꿈속에 있다.
다른 사람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이다.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대가 홀로 있음을 느끼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은 그대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그대의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대의 순수함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행복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황홀해진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그대의 존재 그리고 비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대는 전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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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조심스럽다.
지혜는 망설인다.
지혜는 확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는 결코 이론으로 한정될 수 없다.
모든 이론은 삶보다도 작고 좁다.
그리고 삶은 이론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엔 삶은 너무도 거대하고 무한하다.
현명한 사람은 오직 한 가지만을 안다.
그가 모른다는 것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수천 가지를 알며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지식적인 사람의 바보스러움이 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실들을 계속해서 축적한다.
자신의 존재가 건드려 보지도 않은 이론과 언어, 철학을 계속해서 기억 속에 축적한다.
그는 거대한 지식의 창고가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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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을 갖고 있어

미묘한 지혜란 무엇인가?
그들은 직접 그리고 즉시 진리를 안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알았다.
그것은 빌려온 지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혜는 그것이 직접적일 때만이 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무지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의 무지를 지식으로 계속 감추고 있다.
그러면 왜 지혜를 미묘하다고 부르는가?
왜 그냥 지혜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것을 미묘하다고 부르는 이유 속에 핵심이 잇다.
지혜는 직접적이지만 미묘하다.
그것은 삶을 즉각적으로 직면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지만 삶 속에서는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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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움직여야 한다.
잘 이해하라.
우선, 지혜는 다른 데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알음알이로 빌려와서 마음 속에 쌓아놓는 것이 아니다.
그대 스스로가 그것을 대면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보다 더 직접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미묘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 스스로의 직접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간접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해서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화살과 같이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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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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