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이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것들 모두 맑고 투명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하지만 시간의 의미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그리고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순수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고 편하게 의식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슬픔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이라 부르는 그 심상치 않은 것에 대해서, 이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또 슬픔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다루려 한다면 단편적으로밖에는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랑이 지닌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슬픔의 본질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이해해야 하는데,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둘은 하나다.
시간에 대해 이해하다 보면 생각과 마주치게 되고, 생각을 이해하면 시간이 끝나고 따라서 슬픔이 끝난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다면 우리는 슬픔을 바라볼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슬픔을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숭배하거나 아니면 파괴해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나 사원 안에 또는 마음 속 어두운 구석에 넣어 두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붙잡고 있다.
아니면 발로 차버리거나 집어던져버리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슬픔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거기에 고상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찾겠다는(이건 말 그대로 난센스다) 말 따위는 하지 않고도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만이 슬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니 슬픔은 조금도 받아들여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모든 감상적인 생각과 자기연민에서 샘솟는 모든 감정표출인 슬픔을 이미 버렸다.
그러면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죽음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놀라운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는 것이 사라져야 그 안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그때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 다음에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다.
현명한 사람은 시간과 생각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매순간 죽어가고, 결코 경험을 쌓아두거나 모아 놓지 않는 마음은 순결하면 따라서 변함없는 사랑의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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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 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말· 상징·이미지들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말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이 곧 이미지요 상징이며, 우리의 사고는 곧 말로 표현하기· 상징화하기 · 상상하기 · 라벨을 붙여 분류하기이다.
이미지나 상징 또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기억도 없겠지.
따라서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죽음이라는 실재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말이다.
맞나?
또한 확실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아는 것 즉 과거의 결과인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그리고 모르는 것 즉 미래에 직면할 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그 감각은 우리가 그것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도 거기 있을까?
감각은 단어가 없어도 존재할까?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 어떤 비판이나 평가나 억제도 없이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고 다만 관찰만 하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기억이 아니다.
사랑은 쾌락도 아니다.
사랑이 섹스와 관계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이건 찬성하고 다른 건 비난하며 세속적인 사랑과 신성한 사랑을 구분하는 행위로 후퇴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거에 대한 죽음, 모든 고통·갈등·슬픔에 대한 죽음이 없으면 사랑을 전체로 완전하게 만날 수 없다.
그때 사랑이 있다.
바로 그때 하고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은 자기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과거에서 끌어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곧 죽음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사랑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애착이 없을 때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과거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은 이용될 수 있으며 지식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그때 나의 살아있음은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며, 배움과 감동이 있는 모르는 것의 영역에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궁극적인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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