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항상 그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완력에 호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설령 당국이 외부의 적에 대해서 전쟁을 걸지 않을지라도 그에 대한 준비는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
국가는 막대한 금액을 군비에 지불한다.
이것이 재력의 탕진이 되고 백성은 막중한 부담을 짊어진다.
국가 생활의 법은 다음과 같다.
곧,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늑대라는 것이다.
조직화된 문명국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세력을 집단살육에 대한 준비로 가장 먼저 소비한다.
사람들이 바치는 희생은 먼저 이 비인간적 목적을 위해서 제공된다.
전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으로 여겨질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전쟁의 악순환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탈출을 바라고 있다.
전쟁은 집단 최면이다.
전쟁이 가능한 것은 집단 최면의 소행이다.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 최면술의 힘의 노예가 된다.
그들도 이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전쟁 분위기는 전쟁 자체와 같은 성질을 띠고 또 그것에 대한 준비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서 집단적인 분위기이다.
또 인격, 개인의식, 개인적 양심이 마비된 분위기이다.
전쟁과 관련된 일체의 것은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며, 극단일 뿐만 아니라 반인격주의의 극단이며 극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격의 부정이다.
전쟁을 승인할 때 인간은 인격 아닌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군대는 각 사람이 그중의 한 부분으로서 스스로를 느끼는 일종의 계급적인 조직이다.
군대는 각 사람이 전체의 공통적 생명을 나누었고, 그 가운데 일정한 위치를 지킨다.
이것이 인격으로 하여금 전혀 특수한 분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그 속에서 노예성과 폭력이 조직적으로 경험되며 유쾌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것이 특수한 유혹이며, 전쟁에 대한 노예성이라는 특별한 매혹이고, 인간성의 무서운 자연력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성전'聖戰이란 관념은 옛날에도 하나의 모독적인 야유였다.
객체화된 역사에서 가짜로 이름을 그렇게 붙여본 것 이외에는 '거룩'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는데, 세계악의 극단적인 표현에 '신성'이란 특징을 적용했다면 그것은 악마의 유혹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결코 참으로 '거룩'하지 못 했다.
하물며 전쟁이 '거룩'할 수는 없다.
현대 생활이 문제가 되고, 세계의 파국을 예상하는 전쟁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즈음에이따위 폭언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에 관한 군대적인 관념은 반 기독교적이며 반 복음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명예의 관념에서는 그것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은 수준에 있다.
이런 관념은 결투의 유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뒷골목의 살인과 흡사한 일인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가 명예의 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전체적인 전쟁 또한 그렇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의 양성은 곧 귀족적인 유형의 양성이다.
그것은 곧, 비인격적인 세계 환경에 매몰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물, 내면적으로 독립하며, 자유로운 인물, 인생의 모든 고귀한 질적인 만족에까지 고양되고 곤궁하고 버린 바 된 낮은 세계로 내려갈 수 있는 인물의 양성인 것이다.
진정한 귀족의 주요한 상징은 고양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아량인데, 곧 내적 품성에서 나오는 것과 낮아지는 준비와 그리고 원한을 품지 않는 정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종족적 및 가족적 귀족은 과거의 조상·전통·관습의 노예성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며 편벽偏僻하다.
그것은 운동의 가치와 자유를 선택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인격적 귀족주의는 평가의 자유가 있고 운동의 자유가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개인이며, 종종 크게 고양된 개인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 정신을 극복함에 따라 인격이 된다.
부르주아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는 비인격적이다.
모든 사회 계급은 비인격적인 부르주아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귀족도, 프롤레타리아도, 지식인도 그들은 곧잘 부르주아가 된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르주아성을 극복하지 못 한다.
부르주아는 항상 노예이다.
그들은 재산과 금전의 노예이며, 부유하게 되려는 욕망의 노예이며, 부르주아적 여론의 노예이며, 사회적 지위의 노예이며,그가 착취하는 노예의 노예이며, 그가 공포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예이다.
부르주아인 것은 정신과 혼이 해방되지 않은 상태이다.
곧, 외면적 결정에 생명의 전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부르주아는 재산에 대해서 특수한 태도를 갖고 있다.
부르주아의 문제는 '존재'와 '소유'와의 관계의 문제이다.
부르주아는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릴 수 없고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 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 표준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부르주아는 재산, 돈, 부, 생산수단,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부르주아를 그렇게까지 신장시킨 재산은 그의 인격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즉, 그로 하여금 본질이 되게 하지는 못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혁명에서 신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혁명에는 종말론적 순간이 있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서 시간의 끝이 다가옴이다.
그러나 혁명은 질병이고, 사회를 개혁할 창조적인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고, 무력증의 세력이 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
보복에 대한 갈망과 미움이 폭발한 것이고, 거기서 살인이 일어난다.
혁명에는 그동안 쌓인 원한이 작동하는 것이고 창조적인 감정들을 죽인다.
악마적인 요소가 없는 혁명을 꿈꿀 것이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는 항상 그것이 승리한다.
혁명은 아주 작은 정도로 자유의 깃발 아래 서 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는 운명의 깃발 아래 서 있다.
혁명은 인간 사회의 운명이다.
혁명에서 사람들은 국가와 귀족제와 부르주아와 거짓 신성과 우상들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곧바로 다른 우상들과 새로운 거짓 신성들을 만들고 새로운 참주의 노예로 빠진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일반적으로 권력이란 항상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혁명의 잔인성이 결정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공포에 의해서이고, 혁명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테러의 불가피성도 그러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학대를 시작한다.
학대 마니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학대가 항상 그에게서 예상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의 모든 주위에서 위험과 음모와 자신들을 덮치려는 시도만을 보는 사람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없다.
바로 광적인, 동물적이고 불가사의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고문을 자행하고, 교수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형에 처하고, 교수하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총살한다.
이단의 학대, 고문 그리고 처형도 역시 공포의 결과이다.
공포가 한 가지 악이나 많은 악 즉, 소위 어떤 신조나 인생관으로 악으로 규정된 것과 마주하는 것이 인간 삶과 역사에서 가장 큰 악 중의 하나이다.
이 공포는 인간 본성을 일그러뜨리고, 인간 양심을 어둡게 하며, 자주 한 인간을 야수로 변질시킨다.
이러한 일이 혁명이나 심리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반혁명에서 자주 일어나고, 전쟁 중에 발생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 문제의 해결은 파라다이스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극히 초보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일상의 빵은 모든 사람들에게 또 각 사람에게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하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비인간화가 되고 비인격화가 된 인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은 착취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이 상품화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의 의의와 존엄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추방되고 생존을 위한 모든 보장이 박탈된 사람들이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간 생존의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깊이 뿌리박힌 허위와 다른 것이 없다.
인류 대다수의 궁핍과 불행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경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법들은 부르주아 정치경제의 발명일 뿐이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인간의 활동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정리하려고 했을 때 마르크스는 아주 옳았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적 문제는 사회의 조직에 갱생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생활 내에서 분자적 과정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권위적 행동에서가 아니라 자유의 결과로서 결정된다.
권력에 의해서 절대적 성격을 띠는 정치적 방법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심히 허구적인 해결이다.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지 못한다.
공정과 정의를 실재화하는 것은 실로 강제적이며 사회적인 방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동포적 및 우애의 정신은 심원한 분자적 과정의 산물로서 자유에서 창조된다.
사회 문제는 전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격주의는 진리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항상 정신에 근거한 자유는 그 사회적 투사에서 패러독스를 환기시킨다.
사회생활에서 형식적 자유는 노예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자유는 그런 종류에 속한다.
자유에는 정도와 단계가 있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생활에서, 양심에서, 사상에서, 창조력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그 최대한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는 물질생활의 수준에까지 내려가는 정도로 제한되며 최소한도에 도달한다.
남자나 여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또 노동자의 참다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제적 자유는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강자가 약자를 압박하고 그를 노예화하며 빵조각마저도 약자에게 거부할 것이다.
경제의 자율성은 오류이며 환상적 자유이다.
그러나 그릇된 일원론 혹은 전체주의는 경제생활에서 자유의 제한을 자유 전체의 제한으로 옮겨가고, 심지어 정신생활에서의 자유의 말살에까지 옮겨간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가 통과하고 있는 모든 전체주의적 조직의 커다란 해독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랑의 엑스타시의 절정에는 죽음의 엑스타시와의 접촉이 있다.
엑스타시는 그 진수에서 초월의 과정이며 일상 세계의 한계 밖으로의 탈출이다.
사랑과 죽음은 인간 생활의 가장 중대한 현상이다.
모든 사람은 설사 특별한 천부의 재질이나 창조적 충동의 능력을 갖지 못한 자도 사랑의 경험을 갖고 또 죽음의 경험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
삶 자체 속에 죽음의 경험이 있고 죽음의 신비와의 접촉이 있다.
인생에서 최대의 긴장은 사랑과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 실존의 긴박성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을 정복한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강하고 또 동시에 죽음으로 통한다.
그것은 인간을 죽음의 막다른 곳에 둔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패러독스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강대한 잠재의식적 매력에 의해서 성은 인간을 객체화된 세계에 얽매이게 한다.
이 객체화의 세계는 결정론과 필연성이며, 내부에서가 아니고 외부에서의 결정이며, 객체를 향한 인간성에서의 결정이 지배하는 곳이다.
여기에 성의 신비가 놓여 있다.
인간 해방은 동시에 강제하는 개체 세계의 일부인 성의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객체 세계만이 강제적일 수 있는데, 성은 강제적이다.
인간은 강제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성적 욕구의 충족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는 그런 종속적인 환상의 존재이다.
성은 인간에게 비인격적이며 '일반'의 힘이며 종속적이다.
사랑만이 인격적이다.
인격적인 것은 성욕이 아니라 사랑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노예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고 또 때로는 그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해방을 열망한다.
일반인이 자유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보다 더 큰 오류는 자유를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는 어려운 것이다.
노예 상태에 머무르는 편이 오히려 쉽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 해방에 대한 동경은 어떤 향상적 진보가 인간에 의해서 달성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내적으로 노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또 세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정신적 원리가 있다.
인간의 해방은 종종 상상하는 바와 같이 자연이나 이성이나 사회의 요구가 아니라 정신의 요구이다.
인간은 다만 정신뿐만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구조이며, 동물이며, 또 물질계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은 자유이며 자유는 정신의 승리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세계는 악이다.
그것은 세계에 물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는 물질이 악이라는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사악한 경향에서 발생한다.
근본적 대립은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자유와 노예성이다.
정신적인 승리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종속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장 알아내기 어려운 형태로 인간을 노예성으로 던져 넣는 거짓된 환상에 대한 승리이다.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악은 이것이라고 명백히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선의 거짓된 모습을 취하는 것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모습의 거짓된 모습을 하고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
이런 사례가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보편적 일반적 추상 관념은 고양된 행태의 악이다.
나는 이 일에 관하여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논하여 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만은 불충분하다.
죄는 원시적 외모를 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만이 아니다.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까지도 가능하며 인생의 모든 면에서 발견되는 죄와의 거짓된 싸움에 매혹되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은 참 죄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 죄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정신생활의 노예적인 왜곡의 하나이다.
인간에 의해서 외부에서 폭력으로 느끼도록 하는 노예성은 못된 짓이지만,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이 종당에는 그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노예성은 더욱 못된 짓이다.
악마적 성격은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인데, 무한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상대적인 것에 달라붙고, 거룩한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야비한 것에 달라붙고, 신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달라붙는 것이다.
인간의 국가에 대한 관계, 문명에 대한 교회의 관계까지도 악마적인 것이 된다.
공동체이면서 우의友誼 관계인 실존적 의미의 교회도 있고 또 객체화이면서 사회제도인 교회도 있다.
객체화로서의, 또 사회제도로서의 교회가 신성하고 오류가 없다고 인정할 때 우상의 창조와 인간의 노예성이 시작된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도착이며 종교생활 내부에 있는 악마적 요소다.
인간 생활은 상상적이며 과장되고, 고양된 열정, 종교적, 국민적, 사회적 정열에 의해서 불구가 되고 또 타락시키는 공포에 의해서 손상을 받는다.
이 토양 속에서 인간의 노예화가 발생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최고의 이념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서운 노예성으로 변경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노예성에 대한 정신적 승리는 첫째로 공포 즉,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근본적인 종교적 현상과 내면적 삶의 심각성의 기호를 보았다.
성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공포는 노예성이다.
이 양자가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 세상에서 인간은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이 공포는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약화되고 둔화되어 있다.
보통 일상생활의 조직은 생사의 위험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으나 안전 확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영역 안에 몰입하고 그 이해관계에 흡수되어서 인간은 심연과 심연에 속한 불안을 저버린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창조성은 노예성에서의 해방이다.
인간은 창조적 활동의 상태에 있을 때에 자유롭다.
창조성은 순간의 엑스타시로 인도한다.
창조의 산물은 시간 속에 있으나 창조적 활동 자체는 시간 밖에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영웅적 행위는 시간 밖으로 인도한다.
어떤 종말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간의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은 영웅적 행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순수한 영웅주의는 긍지와 자기 긍정에서 오는 하나의 매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의 정신적 해방 속에는 자유와 진리와 사랑을 목표하는 운동이 있다.
자유가 공허하여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롭지 않은 진리의 지식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는 또 진리와 의미와 신의 실재를 전제로 한다.
진리와 의미는 해방시키고, 그리고 다시 해방은 진리와 의미에 이른다.
자유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인격, 자유로우며 창조적인 인격을 실현하는 것은 자유와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원리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항상 왜곡된 것을 가져오게 되고 인간의 인격을 훼손한다.
이 원리의 각자는 그 속에서 또 그것에 의해서 유혹과 노예성의 근원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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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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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격은 사회적 집단의 결정에 대한 승리이다.
인격은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행위이데 곧, 하나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창조적인 행위는 수동적인 것인데, 인격은 능동적인 것이며, 대립이며, 세계가 끌어가고 있는 짐의 극복이며, 세계의 노예성을 극복하려는 자유의 승리인 것이다.
노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격의 실현에 유해하다.
인격은 역행이고 항쟁이며, 자기와 세계의 정복이며, 예속에 대한 승리이며 해방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또 이성의 수단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이성 자체는 인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본성은 비인격적인 일반적 본성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희랍인의 이해는 인격주의의 철학과 합치하지 않는다.
인격은 합리적인 존재,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격은 자아의 전 사유, 전 의지, 전 감정, 전 창조적인 행위 그것이다.
희랍철학의 이성과 독일관념론의 이성은 비인격적 이성이며, 보편적인 이성이다.
그러나 인격적 이성과 특히 인격적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격주의는 플라톤적인 것 내지는 독일관념론 위에다 그 기초를 둘 수 없는 것이며, 또 자연주의 위에나 진화론 철학이나 또는 생철학 위에 기초를 내릴 수는 없다.
후자의 철학은 인격을 비인격적, 우주적, 생명적 과정 속으로 해소해버린다.
쉘러Scheler는 인격과 유기체 사이, 정신적 존재와 생명적 존재의 차이점을 잘 말하였다.
인격은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이며, 정신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인격을 혼魂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인격은 하나의 근원적 무의식의 기반을 갖는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간은 종종 생에 있어서 연극을 꾸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역할이 아닌 노릇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인격의 이분성Dichotomy은 특히 원시인이나 심리학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건전한 자에게 현저히 나타난다.
준정상적인 문명인에게서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원성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적응이라는 규범적인 성격을 갖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서 허위의 필요성을 낳게 한다.
미개인의 사회적 훈련과 문명화는 유익한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격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은 아주 비인격적일 것이다.
그는 노예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사회와 자연은 인격 형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은 자연에 대한 의존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인격은 외부에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결정에 대립하며, 내부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부의 결정은 자기 결정인데, 신이라 할지라도 이 결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인격과 신과의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영역 밖에 있으며, 자유의 영역 안에서 신은 인격에 대한 실존적 중심이다.
인격은 전 객체 세계 밖에서 내면의 자기를 결정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유에서 출발한 결정만이 인격이다.
외부에서 규정되고 결정된 것과 객체적 세계의 힘에 기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인격적일 수 없다.
그런 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에고ego 속에서 결정된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인격은 고뇌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인격은 고뇌이다.
인격과 그 통합을 성취하려는 고뇌는 괴로움이 많은 과정이다.
인격의 자기실현은 저항을 일으키고, 노예화하려는 세상의 권력과의 투쟁을 요구하며, 세상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인격을 부정하고 주위의 세상에로의 동화에 안주하려는 것은 확실히 고뇌를 더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이런 길을 걸으려고 하기 쉽다.
굴종에 안주하면 고뇌가 감소하는데, 굴종을 거부하면 고뇌는 증가한다.
인간 세계의 고통은 인격의 탄생과 인간 자신의 본성을 위한 투쟁에 있다.
심지어 동물계의 개체도 고통이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고난을 야기한다.
만일 사람이 자유를 거부한다면 고난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곧, 인격성은 다시 말하면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일깨운다.
#노예냐_자유냐 #니콜라스A베르댜예프 


페기Peguy는, 개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정복하도록 요청받은 자신 속의 부르주아라고 말하였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고독의 경험을 견디고, 자아 중심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함입되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기를 지키면서 살기 위한 괴로운 투쟁을 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는 순응주의에 의해서, 또한 적응에 의해서 곤란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모색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 곧, 같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폐쇄를 극복하고, 자기 속에 하나의 우주를 전개하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립과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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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으로 인격은 신적 인간성을 통해서 힘을 얻고 해방을 얻는다.
외면적으로 전체세계와 모든 사회와 모든 역사는 인간성과 인격의 궁극성을 통해서 변화되고 해방된다.
공동성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객체화가 아니고, 그것은 인격을 객체화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인격성은 신-인간성God-humanity이어야 하고, 사회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사회와 역사과정에서의 신-인간성의 객체화는 오류와 노예성의 기원이다.
그리것은 인간인격성의 존엄과 자유와 모순되는 인격의 객체적 계층주의hierarchism를 만들어냈다.
거룩함sacredness의 그릇된 관념의 성립이 이것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예속의 여러 가지 형태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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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성격character과 결합한다.
강력한 인격은 표방된 성격이다.
성격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 원리의 승리이다.
그 승리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형태에서의 승리이며, 이 형태는 인간의 영혼-육체 구조soul-body constitution아 결합되어 있다.
성격은 자기를 지배하는 위력의 소유자이며, 그것은 자기에게 대한 예속에의 승리,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예속에의 승리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승리이다.
성격은 무엇보다도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기질temperament은 하나의 자연적인 재질이며, 성격은 정보와 일의 성취에서 얻은 것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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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Angst과 공포Furcht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언어 용법에 상대적인 구별이 있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구별했다.
공포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위험과 일반적인 체험의 일상적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반면에 불안은 경험적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신비에 직면하거나 초월적 심연에 직면하며 미지의 것에 직면했을 때에 불안을 일으킨다.
공포는 염려와 고난의 두려움과 운명의 타격과 연관된다.
공포는 보다 드높은 세계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다 낮은 지평에 관심을 갖고 경험적인 것에 결박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은 초월자에게 직면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사랑이 영원과 직면하고 운명에 대면할 때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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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안과 공포뿜만 아니라 또 동경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동경은 공포보다 불안에 가까운 데, 그것 고유의 자기 특성을 갖는다.
동경은 위험을 통과할 때에 체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경은 확실히 염려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동경은 염려를 가볍게 한다.
동경은 위쪽을 향하는 것으로 인간의 보다 높은 본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유기遺棄와 고독과 세계에서의 소외에 내맡겨져야 한다.
이런 모든 것에서부터의 자기 소외를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통렬히 고뇌를 일으키는 것은 없다.
인격이란 그 발전의 도상에서 이 체험을 통과한다.
동경 속에는 무엇인가 초월자와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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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과 종은 상호관계적이다.
쌍방 모두 상대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인은 자신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
자유인은 자신과 반정립에 있는 어떤 것과도 상관관계 없이 자기 속에 자신의 특성을 갖는다.
상전은 자신에 대한 실재적 의식이지만, 그 의식이 어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노예를 통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다.
상전의 의식이 어떤 타자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노예의 의식은 자기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자유인의 의식은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식인데, 그것은 자기에게서 타자의 모든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의미를 동반한다.
노예 상태의 경계성은 자유의식의 결핍 여부 바로 그 선인 것이다.
노예의 세계는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다.
외면화exteriorization는 노예의 근원이며, 자유는 내면화interiorization이다.
노예는 항상 소외, 인간성을 외면적인 것에 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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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성의 근원은 항상 객체화에 있다.
즉, 외면화이며 소외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노예성이다.
즉 지식 획득, 도덕, 종교, 예술, 정치적 삶, 사회적 삶 등에서 노예성을 끝내는 것은 객체와에 대한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예성을 종결짓는 것은 주인의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 된 지위는 노예성의 반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전이 될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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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타락은 무엇보다도 그가 폭군이라는 사실 속에서 대부분 표현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큰 규모가 또는 작은 규모 속에서, 국가 혹은 세계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가족 속에서, 점포 속에서, 사무실 속에서, 대단히 미미한 지위를 차지하는 관료적 기구 속에서 인간은 폭군 노릇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 속에서 자기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주위의 사람들 위에서 폭군 역할을 하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증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사랑 속에서도 폭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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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의 의지 곧, 제국주의적 의지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립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옹호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적 의지는 인간에 대한 강제를 결행하는 일을 고조시키고, 그것을 인간이 달성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권력의 현실적 문제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히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다.
사람들이 강압에 저항할 때, 권력에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눈살을 거칠고 휘둥그렇게 뜨는 강압적인 태도를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을 폭행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인다.
그러나 인간 생활에는 잘 분별할 수 없는 더욱 세련된 강압 형태가 많이 있다.
심리적 강압은 신체적 강압보다 훨씬 더 혹독하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것은 신체적인 강압의 결과만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암시 곧, 어린애 때부터 받은 암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즉 양육 방법으로 자유를 빼앗고, 판단의 자유에 대한 능력을 빼앗아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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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독립을 준다.
그러나 돈의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끔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을 갖고 있는 사람도 예속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예속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자주 목격된다.
맘몬의 왕국the Kingdom of Mammon에서 인간은 노동 팔기를 강요당한다.
그래서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노동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은 적이 없었다.
비교론적으로 말해서 숙련공의 노동은 좀 더 자유롭고, 지적 노동도 그렇지만, 그것들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횡포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대중은 노예적인 노역 속에, 강제 속에,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노동 속에, 공산주의 사회의 형태에 준한 억압 사역bond-service 속에 복역해왔다.
노동의 형식만 변하였을 뿐 인간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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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성은 수동성passivity이다.
노예성에 대한 승리는 창조적인 능동이다.
실존적 시간 안에서만이 창조적 능동은 계시된다.
역사적 능동은 객체화이며, 인격의 핵심에 성취된 것의 투영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 앞에서나, 민족 앞에서나, 혁명 앞에서나, 보편적 의의를 자부하는 어떠한 객체적 통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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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신은 해방자이다.
신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신학과 신학의 매혹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상숭배가 신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적인 사회적 관계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로 옮겨진 것이다.
객체적 세계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는 객체로서 이해된 신은 인간 예속의 근원이 되었다.
객체로서의 신은 절대가 된 최고의 자연적 세력 곧, 절대가 된 지배성 중 최고의 힘이다.
자연에서 결정성이라는 것은 사회에서의 지배성이다.
그러나 모든 객체화의 밖에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신은 사랑과 자유이며, 결정성이 아니고, 지배성이 아니다.
신 자신이 자유이며, 그는 자유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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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절대자가 아니다.
신은 창조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또 인간에 대해서 상관적이다.
신 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사상의 극한적 배후에 깊이 들어가서 정신적 경험의 영역 안에 철학이 불완전하게 합리적으로 절대자라고 이름붙인 파악하기 어려운 신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신 자체를 절대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자기를 감추지 않는 신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신을 군주적 존재로 받아들일 때 신학적 매혹과 예속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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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예속과 신에 대한 예속과 교회에 대한 예속 곧, 신의 노예적 관념과 교회의 노예적 관념에의 예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속의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태이다.
또 그것은 인간을 예속하는 근원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객체, 일반자와 외재성, 소외에 대한 예속이었다.
신비론자가 인간은 신에게서도 자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밟고 가야 할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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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태에서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반인격주의이며, 인격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불가피하게 승인하고, 인격 속에 사회적 유기체의 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보편주의이며, 객체화의 결과이고, 외부적인 것에 투입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인격에서 추상되고, 인격은 이것에 굴종한다.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항상 계층적이다.
이것은 오류이며 인격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사회는 인간의 인격보다 고도의 계층적 단계의 인격인 양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노예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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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유기적인 이상은 곧, 노예화하는 허위이다.
이것은 사회의 매혹이며 우주의 매혹에 버금하는 것이다.
사회는 실로 유기체가 아니고 사회는 협동적 행위이다.
사회의 유기적 관념은 노예화하는 의식의 환상이며, 외재화의 산물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는 우주를 본떠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본떠야 할 것인즉 곧, 계층주의의 모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인격주의의 모형을 따라야 하고, 결정적인 것을 본뜨지 말고 자유를 본떠야 하고, 힘과 강자의 지배 모형에 의하지 않고 심정의 연대성과 자비의 모형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만이 노예적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자유의 근원은 사회 속에는 있을 수 없다.
인간적 자유의 근원은 정신 속에 있다.
사회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정신에서 나오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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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개인적인 행위에 의해서 객체화의 세계를 파괴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다만 세계로부터 내면적인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객관화의 세계의 파괴는 사회적인 행위이며 역사적인 행위이다.
이 의미는 인간 사이에서 정신적 공동체의 최고도의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세계는 별천지가 되고 지식도 다른 지식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완전한 정신에 의해서만 규명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객체화된 세계의 여러 조직에 봉사할 수는 없다.
종말론적 전망은 그 자신이 '지식론적'인 사회학적 해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객체화의 최후의 극복과, 객체 세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객체 세계의 형태 중 하나인 사회 세력에서의 해방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종말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아마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종말로 향하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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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야만주의'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시적인 야만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이 야만주의 속에는 '자연'이 아니고 기계와 기계주의의 냄새가 난다.
산업적 기술적 문명은 더욱 증대해가는 야만주의의 질적 몰락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명화된 야만주의 속에는 어떤 종류의 '자연'에로의 복귀도 없다.
문명인 속에는 야수와 야만인이 때때로 눈을 뜨는데, 그것은 문명에 의해서 변화된 형태 곧,  타락된 형태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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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예성에 관한 마지막 진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 세계의 노예에 빠지는데, 자기의 외재화에 대한 노예성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우상의 종'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이다.
인간은 항상 말하자면 자기의 밖에 있는 요인과 자기에게서 소외되면서도 노예성의 내면적 근거에 의해 노예가 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투쟁은 외부적인 객체화된 외재화의 세계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적인 정신적 투쟁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에서 직접 기인한다.
자유와 노예성 간의 싸움은 인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 속에서 행해지고, 이 투쟁은 객체적 세계 속에 투영된다.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이 노예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며, 자신을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굽실굽실 잘 받아들인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노예성은 객체적 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로서 특색지어진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노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노예현상학의 최후적 진리는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예성은 의식의 한 구조이며, 의식의 객체적 구조의 일종이다.
'의식'은 '존재'를 결정하고, 다만 2차적 과정에서 '의식'이 존재에의 예속에 빠져버린다.
노예적 사회는 인간의 내면적 노예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환상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데, 이 환상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의식처럼 보인다.
이 환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탐색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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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에는 관념의 노예화라는 변증법이 있다.
그것은 실존적인 변증법이며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그런 관념의 기초 위에 서서 자기를 긍정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폭군이 된다.
이 관념의 폭군제는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체제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종교적 국가적 사회적 제반 관념은 노예 제조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이 반동적 내지는 혁명적 관념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사정은 같다.
기묘한 방법에 의해서 관념은 자아 중심적 본능의 봉사에 들어가고, 자아 중심적 본능은 인간을 모멸로 다루는 관념의 봉사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내적 외적 노예성이 항상 승리를 거둔다.
자아 중심적 본능은 항상 객체화의 힘이 된다.
세계를 자기 봉사의 도구로 보는 것 때문에 이기주의자는 항상 자기를 외부적 세계에 투입하고 거기에 종속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이 개인주의의 매혹의 형태를 취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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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는 간단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이것은 적극성 및 소극성의 두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격주의가 종종 개인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처럼 말의 용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성격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경우와, 그의 판단이 독립적이며 독창적이며 자유이든가, 그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에 뛰어나 있든가, 자기 속에 고립해 있으면서 교제를 좋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모멸자 또는 자아중심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인격의 가장 드높은 가치의 긍정과 생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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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원리만이 정신적 생활의 통일을 유지하고 인격을 건설한다.
인간이 노예화의 힘에 대해서 다만 분열된 요소만을 대치시키고 완전한 인격을 갖지 않을 때 그는 노예성의 가장 다양한 형태에 빠지고 만다.
인간에 대한 노예성의 내적 근원은 인간의 분열된 제반 부분의 자율성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은 내적인 중심의 상실과 더불어 나아간다.
부분으로 분해된 인간은 용이하게도 공포의 일시적 발광 상태에 굴복하지만, 공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성의 상태에 잘 가두는 것이다.
공포는 통합되고 중심이 잡힌 인격과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강한 경험에 의해서 극복된다.
인간의 지성적, 감성적, 감각적 요소는 공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인격은 전체이지만 여기에 대치되어 있는 객체화된 세계는 부분적이다.
그러나 통합된 인격과 최고의 실존의 상만이 객체화된 세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을 보일 완전한 전체로서의 자기를 자각할 수 있다.
자신을 노예로 삼는 인간의 자기에 대한 노예성은 항상 분열과 분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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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곧, 내면적 보편주의가 객체화된 보편주의와의 투쟁을 경험하는 '창조적인 인격의 고독'과 개인주의자가 사실 속해 있는 객체체화된 보편주의에 대립하여 설정한 '자기황폐와 무능의 고독'이다.
즉, '내적 풍요의 고독'과 '내적 공허의 고독'이다.
영웅주의의 고독과 패배주의의 고독이다.
힘 있는 고독과 약한 것의 고독이다.
자기을 위해서 수동적인 미적 위안 이외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고독은 원칙적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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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는 자연주의적 철학이자만 인격주의는 정신의 철학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한 노예성에서와 외적 세력에 의한 노예화에서의 해방은 자아로부터, 자기를 노예화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이기성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향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내재화해야 하며, 또한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 세계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인 존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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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에서 최대의 유혹은 통치권sovereignty을 행사하려는 유혹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매우 강력하게 노예화하는 힘이 숨어 있다.
통치권의 유혹에는 역사상 심히 많은 종류의 형태가 있다.
이 유혹들은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 유혹은 역사상 사람에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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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양심이 직면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는 극히 단순한 초보적인 양식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곧, 국가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복음서에서는 이 문제는 가야바Caiaphas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한 국민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도 한 사람이 국민을 위해서 죽는 것이 낫다.' 이 말에 의해서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가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는 항상 이 가야바의 말을 반복한다.
그것이 국가의 신앙고백이다.
정치가는 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또 그 세력의 증대를 위해서 죄 없는 인간이 죽는 것이 좋다거나 또 죽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찬성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난다.
국가 위에 새겨진 이 악마적인 낙인은 국가가 늘 그리스도의 사형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진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운명이다.
동일한 문제가 드레퓌스 사건Dreyfus case에도 있었다.
그때 나온 문제는 '죄 없는 인간이 프랑스의 국가 및 군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처벌되어도 좋다'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제를 명예의 문제 곧, 국가의 도덕적 양심의 문제로 삼은 것은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명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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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권력과 공포에 의해서  그 모습이 꾸겨져 있었다.
국가는 공포심을 고무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고통을 당한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비참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
특히 공포심에 사로잡힌 정치적 권력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최대의 폭력과 잔인성을 휘두르는 것은 실로 이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폭군은 항상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의 악마적인 원리는 원력의지에 의할 뿐만 아니라 공포심에 의한 것이다.
자유란 공포를 이기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이 공포를 느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포를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 사상의 위대한 점은 공포심에서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해방하려는 소망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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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와 인민은 상호 의존과 노예성의 상태에 있다.
'지도자 정신'leadership의 이념은 인격 원리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서 역시 상호적 노예성의 한 형태이다.
'지도자'라는 자는 지도자에게 끌려가는 인민과 같은 정도로 노예이다.
그러나 국가가 가장 염기할 특징과 또 국가 권위의 원리에서 나오는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관료주의이다.
어떤 국가도 피할 수 없는 관료주의는 그 세력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고 스스로를 인민의 공복으로 생각하지 않고,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실로 치명적인 경향을 가진 것이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중앙집권 과정의 산물이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당파에 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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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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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중 어떤 것은 정확성 때문에, 또는 더 좋고 훌륭한 대상들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영혼에 관한 탐구를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영혼)에 관한 지식은 모든 진리, 특히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들의 제일원리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사랑과 미움, 분노, 온순함, 공포감, 동정심, 용기, 그리고 즐거움 등과 같은 영혼의 모든 영향받음은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과 동시에 신체도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강하고 분명한 영향받음이 발생할 때, 아무런 노여움이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때로는 화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신체가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사소하고도 불분명한 원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움직여지기도 한다.
(그런 사실을 입증할) 훨씬 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때로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이 전혀 없이도 공포감을 느낄 때와 같은 영향받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영혼의 영향받음들은 질료 안에서 실현된 형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향받음)들은 그런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영혼이 우연하게 신체(의 옷을) 입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신체는) 그 자신의 형상과 형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수의 기술이 피리 안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술은 (그 자신의) 도구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영혼은 (그 자신의) 신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일종의 조화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조화는 상반자(相反者)들의 혼화 또는 합성이며, 신체는 상반자들로부터 합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는 혼합된 (요소)들의 비율 또는 합성인 반면에, 영혼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다.
운동을 유발하는 것은 조화가 아니며,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조화라는 단어를 영혼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보다 건강 또는 전반적인 신체의 '훌륭한 기능 수행들'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러한 부적절함은) '영혼의 영향받음'과 기능들을 일종의 조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영혼이 원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인식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움직여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도 참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영혼은 한편 으로는 인식, 감각, 의견 형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망과 희망을 (포함한) 욕구 일반이다.
또한 생물의 장소운동은 영혼에 의해 (생성되며), 성장, 성숙, 그리고 쇠퇴도 영혼에 의해 야기된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것은 영혼 전체에 속하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감각하고,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등의 (기능을 하는) 것은 (영혼) 전체가 하는 것인가, 또는 (각각) 다른 부분들이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인가?
생명은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 안에 있는가 또는 다수의 (부분)들이나 모든 (부분)들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의) 이유인가?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 부분들을 가지며, 어떤 하나의 부분으로는 생각하고 다른 부분으로는 갈망한다고 말한다.
만약 영혼이 부분들을 갖는다면, 그 영혼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 그것이 신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대로, 영혼이 신체를 단일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혼이 신체를) 떠나면, (신체는) 해체되고 부패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그것(영혼)을 단일하게 만드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일 것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스스로에 의한 영양섭취', 성장, 그리고 쇠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공유하는 모든 자연적 실체는 합성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는) 생명을 가지는 신체이므로, 신체 (그 자체가) 영혼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는 어떤 (다른) 주체를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가) 주체 또는 질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혼은 반드시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실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여야 한다.
그리고 실체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영혼은) 그런 신체의 현실태일 것이다.
(현실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지식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숙고이다.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잠을 잠'과 '잠에서 깸'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깸'은 숙고와 유사한 반면에, '잠을 잠'은 '(지식)의 소유'와 유사하며, '그것의이용'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숙고보다) 지식이 먼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제일 현실태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은 '기관들을 가지는' (신체)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눈동자와 시력이 눈을 (구성)하듯이, 영혼과 신체는 생물을 (구성)한다.
따라서 영혼은, 그리고 만약 (영혼의) 부분들이 있다면, 그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의 어떤 부분들은 (신체의) 부분들의 현실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리를 막는 어떤 (부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부분들이 어떤 신체의 현실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이 신체의 현실태라는 것이 선원과 배의 (관계와) 같은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이것이 영혼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자 개요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말해진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가 구분했던 바와 같이 세 가지 의미에서 (신체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운동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능동인 또는 작용인)', '무엇을 위해(목적인)', 그리고 '영혼을 가진 신체의 실체로서(형상인)' (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영혼에_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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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가 말했다.
"옛날 성인들은 음陰과 양陽을 근거로 해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
모든 형체를 지닌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기 때문이다.
'태역'이란 것은 기운(氣)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란 것은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시'란 것은 형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태소'란 것은 성질(質)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상태이다.
기운과 형체와 성질이 갖추어졌으되 서로 분리되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을 혼동 상태(渾淪)라 말한다.
혼돈 상태란 만물이 서로 혼돈을 이루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역易이라 말하는 것이다.
'역'에는 형체와 한계가 없다.
'역'이 변하여 일一이 되고, '일'이 변하여 칠七이 되며, '칠'이 변하여 구九가 된다.
'구'로 변화한 것은 끝머리에 이른 것이어서, 곧 다시 변하여 '일'이 된다.
'일'은 형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서 땅이 되고, 중간의 조화를 이룬 기운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정기를 품고 있고, 만물은 변화하고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정신精神이란 하늘의 몫이요, 육체란 땅의 몫인 것이다.
하늘에 속하는 것은 맑고 흩어지는 것이며 땅에 속하는 것은 탁하고 모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은 형체를 떠나서 각각 그의 참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귀신(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귀신이란 돌아간다(歸, 鬼와 같은 음)는 뜻으로서 그의 참된 위치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자공이 배움에 싫증이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쉴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에는 쉴 곳이란 없는 법이야."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면 불룩하고 우뚝하고 봉곳하고 불쑥한데 그 곳이 쉴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위대하다, 죽음이여! 군자는 쉬게 되고 소인은 굴복을 하게 되는 것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사賜여, 그대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은 알지만 삶의 괴로움은 알지 못 한다.
늙음의 고단함은 알지만 늙음의 편안함은 알지 못 한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이 쉬는 것임은 알지 못 하고 있다."
#열자 #열어구 


안자晏子가 말했다.
"훌륭하다. 옛날부터 있어 온 죽음이여!
어진 사람은 휴식을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굴복을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람의 덕德이 귀착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 말했다.
죽은 사람을 돌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된다.
길을 가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자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온 천하 사람들이 집을 잃으면 비난할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형체입니다.
생명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기운이 조화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따라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자손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겨 놓은 변화의 껍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다니면서도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지탱하는 강한 양陽의 기운인데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가 물었다.
"타고난 바탕대로 시작한 것이 습성으로 발전하고 천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육지에서 나서 육지에서 안심하고 지냈는데 이것이 바탕입니다.
다시 물에서 자라나 물에서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습성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는 까닭도 모르면서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그것이 천성입니다."
#열자 #열어구 


그러므로 옛날 말에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부드러움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했다.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곧 위태로워질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를 지키면 어떤 사람을 이기는 일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이러한 도를 지키면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기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고 맡아 다스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맡아 다스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열자 #열어구 


깨어 있는 것에는 여덟 가지 징험이 있고 꿈을 꾸는 것에는 여섯 가지 징후가 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징험이라 말하는가?
첫째는 일하는 것,
둘째는 행동하는 것,
셋째는 무엇인가 얻는 것,
넷째는 무엇인가 잃는 것,
다섯째는 슬픈 일을 당하는 것,
여섯째는 즐거운 일이 있는 것,
일곱째는 살고 있는 것,
여덟째는 죽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징험은 형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무엇을 여섯 가지 징후라 말하는가?
첫째는 올바로 꾸는 꿈,
둘째는 놀라 깨는 꿈,
셋째는 무엇을 그리워하는 꿈,
넷째는 잠을 자지 않으면서 꾸는 꿈,
다섯째는 기쁜 꿈,
여섯째는 두려운 꿈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징험은 정신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한 물체가 차고 비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변화로 통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일을 통해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음기陰氣가 강하면 곧 큰 강물을 건너면서 두려워하는 꿈을 꾼다.
양기陽氣가 강하면 곧 큰 불 속을 지나면서 데는 꿈을 꾼다.
음과 양의 기가 모두 강하면 곧 남을 살려 주거나  죽이는 꿈을 꾼다.
매우 배부를 적에는 남에게 주는 꿈을 꾸고 매우 배고플 적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뜨고 허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마음이 가라앉고 실해져서 병이 난 사람은 물에 빠지는꿈을 꾼다.
허리띠를 깔고 자면 곧 뱀을 꿈에 보게 된다.
날아가던 새가 와서 머리털을 물면 곧 날아 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날씨가 음산해질 때에는 불을 꿈꾸게 되고 병이 나려 할 때에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 술 마시는 사람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고, 꿈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통곡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하 굽이의 지혜가 많다는 영감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렸다.
"당신의 똑똑하지 못한 짓은 너무 하오!
늙은 나이에 가진 힘으로는 산의 터럭 하나 정도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인데 산의 저 많은 흙과 돌을 모두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북산의 우공은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신 마음이 굳어 있어 굳은 생각은 본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과부된 부인의 어린 아들만도 못 하구려.
비록 나는 죽게 된다 하더라도 자식은 남아 있소.
내 자식은 또 손자를 낳을 것이고 손자는 또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손자를 낳아서 자자손손이 영원히 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은 더 불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평평해지지 않으리라 걱정을 하십니까?"
#열자 #열어구 #우공이산 #愚公移山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복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죽지 못하는 것도 하늘이 내린 벌이다.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 죽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데, 사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게 된다.
그렇지만 사는 사람을 살게 하고 죽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모두가 운명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열자 #열어구 


운명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없고, 이치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차이가 없으며, 마음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거스르거나 순종하는 차이가 없고, 본성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에게는 편안함과 위태로운 차이가 없다.
곧 이것을 일컬어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일도 없지만 완전히 자기를 맡기지 않은 일도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도 성실한 사람이다.
#열자 #열어구 


황제黃帝의 책에 씌여 있다.
"지극한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과 같고 움직이는 것은 기계와 같다.
또한 가만히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움직이는 까닭도 알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여러 사람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나 모습을 바꾸지 않는 일도 없다.
홀로 갔다 홀로 오며 홀로 나갔다가 홀로 들어오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태곳적 사람들은 사람의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면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예로도 권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본성을 따라 노닐며 만물이 좋아하는 일을 거스르지 않고, 죽은 뒤의 명예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은 형벌로써도 어찌 하는 수도 없었다.
명예에 앞세우고 뒤로 미루는 것과 오래 살고 짧게 사는 일에 대해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열자 #열어구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는 것이다.
어진 사람과 성인도 역시 죽게 되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게 된다.
살아서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같은 훌륭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만 남는다.
살아서는 걸桀왕이나 주紂왕 같은 포악한 임금도 죽어서는 썩은 뼈가 된다.
썩은 뼈만 남게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지냈고, 자공子貢은 위衛나라에서 재물을 모았다.
원헌의 가난함은 삶을 손상시켰고, 자공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몸에 해를 끼쳤다.
그러니 가난한 것도 안 되지만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만 괜찮은가?
삶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몸을 편안히 하는 사람은 재물을 모을 줄을 모른다.
#열자 #열어구 


양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일 때문이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명예, 셋째는 지위, 넷째는 재물이다.
이 네 가지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며 위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두고서 '자연의 이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목숨을 다루는 이는 밖에 있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거늘 어찌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귀함을 뽐내지 않거늘 어찌 명예를 부러워하겠는가?
권세를 추구하지 않거늘 어찌 지위를 부러워하겠는가?
부를 탐하지 않거늘 어찌 재물을 부러워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그와 대적할 것이 없고 목숨을 다루는 힘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는 말에 '사람이 결혼과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정욕이 반은 없어지고 사람이 입고 먹는 일에 쫓기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어진다' 했다.
#열자 #열어구 


열자가 호구자림壺丘子林에게 배웠다.
호구자림이 말했다.
"그대가 남보다 뒤지도록 처신할 줄만 안다면 곧 처신을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자가 말했다.
"남보다 뒤지게 처신한다는 데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대의 그림자를 뒤돌아보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열자가 자기 그림자를 뒤돌아보니 자기 몸을 굽히면 곧 그림자도 굽고 몸을 곧게 세우면 곧 그림자도 반듯해졌다.
그러니 굽고 곧은 것은 몸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림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히고 곧게 세우는 것을 남에게 맡겨 두고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남보다 뒤지게 처신하면서도 남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시씨가 말했다.
"무릇 때를 얻은 사람은 잘 되고 때를 잃은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쓴 방법은 우리와 같은데도 결과가 우리와 다른 것은 때를 잃었기 때문이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천하의 이치는 언제나 옳은 게 없고 일은 언제나 그른 게 없습니다.
전날에는 잘 쓰이다가도 지금은 버려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버려지다가도 뒤에는 잘 쓰이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쓰이고 쓰이지 않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일정하게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틈을 타고 때를 만나서 일에 원만히 대응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지혜가 진실로 부족하다면 당신이 공자처럼 학문을 지녔고 여상呂尙과 같은 술법을 지녔다 하더라도, 어느 곳을 가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열자 #열어구 


공자의 힘은 나라의 성문 빗장 기둥을 뽑을 수 있었지만, 힘으로는 유명해지려 들지 않았다.
묵자는 공수반公輸般의 공격을 막아 그를 굴복시켰으나, 병법으로 이름을 날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리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한 거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열자 #열어구 


심도자가 말했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게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많음으로써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것이오.
학문이란 근본이 다른 여러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근본이 여러 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학문을 하는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오.
오직 결과가 같아서 동일한 곳으로 돌아가야지만 얻고 잃은 게 없게 되는 것이오.
당신은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익혔으면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군요.
슬픈 일이오!"
#열자 #열어구 #다기망양 #多歧亡羊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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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수라는 사람은 손재주가 정교한 장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수의 손가락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아끼는 것은 자신에게는 이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의 소유이면서 또한 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도 크다.
귀한 바와 천한 바로 논한다면, 천자가 될 만큼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삶의 존귀함과 견주기에는 부족하다.
가볍고 무거운 바로 논한다면, 천하를 소유할 만큼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내 삶의 소중함과는 바꿀 수 없다.
편안한 바와 위태로운 바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라도 내 삶을 잃으면 결코 다시 돌이켜 얻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도 있는 사람들은 늘 신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신중히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과 생명의 실질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전체가 함께 함을 반드시 맨 앞으로 내세웠으니, 전체가 함께 하면 천하가 화합된다.
화합은 전체가 함께 함으로부터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옛날의 기록을 한번 보면, 천하를 얻은 자와 천하를 잃은 자가 많은데, 그들이 천하를 얻은 것은 오로지 전체가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천하를 잃은 것은 오로지 사사로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천하는 임금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천하이다.
음양의 조화는 어느 한 부류의 사물만을 편애하여 자라게 해주지 않고, 단 이슬과 때에 맞는 비는 어느 한 사물에만 편애하여 내려주지 않으며, 천하 만민의 임금은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는다.
#여씨춘추 #여불위 


요리사는 음식의 맛을 내지만 감히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요리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요리사가 음식의 맛을 내면서 이를 먹는다면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왕자(王者)나 패자(覇者)와 같은 우두머리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닦달거리고 포악하더라도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봉지로 나누어 주므로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왕자나 패자와 같은 우두머리들이 닦달거리고 포악하면서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사사로이 한다면, 왕자나 패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어떠한 것도 나은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모자라는 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은 점을 빌림으로써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보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빌리는 사람은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또한 투쟁이 비롯되어 내려온 바도 매우 오래 되었으니, 일찍이 이 투쟁이 눈 깜짝할 사이라도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 나이 많은 자와 나이 어린 자,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더불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단지 큰 투쟁과 작은 투쟁이 있을 따름이었다.
투쟁의 기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 속에 있으면서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투쟁이고, 흘려보는 것도 투쟁이고,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는 것도 투쟁이고, 건방진 말도 투쟁이고, 밀고 당기는 것도 투쟁이고, 끌어당기고 뒤집는 것도 투쟁이고, 패지어 싸우는 것도 투쟁이고, 삼군(三軍)의 대부대로 치고 싸우는 것도 투쟁이다.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투쟁으로서 크고 작은 싸움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군대가 진실로 의롭다면, 포악한 군주들을 주살함으로써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 의로운 군대를 좋아함이 마치 효자가 인자한 어버이를 보듯 하고, 주린 자가 맛있는 음식을 보듯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환호하며 그리고 달려감이 마치 강한 쇠뇌로 깊은 골짜기에 화살을 쏜 것과 같고, 큰물이 쌓여서 막아놓은 둑을 무너뜨림과 같다.
#여씨춘추 #여불위 


이제 천금과 기장쌀을 뭉친 주먹밥을 어린아이에게 보인다면 어린아이는 반드시 주먹밥을 취할 것이다.
화씨(和氏)의 구슬과 천금을 세속의 사람에게 보인다면 세속의 사람은 반드시 천금을 취할 것이다.
또 화씨의 구슬과 도덕의 지극히 오묘한 말을 현자에게 보인다면 현자는 반드시 지극히 오묘한 말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지혜가 오묘하면 오묘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오묘하고, 어떤 사람의 지혜가 거칠면 거칠수록 그가 취하는 바도 그만큼 거칠다고 말할 수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선비들의 신조 중에서 (선비는) 능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므로 부귀보다 더 존중되는 것이니, 어떠한 이익이나 권력도 이러한 선비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그의 뜻을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정말로 능욕을 당한다면 이들은 즐거운 삶을 영위할 것이 없다.
이 같은 사람들은 권세를 잡아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관직에 처해서도 절대로 관직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으며,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휘할 때에도 절대로 용기가 꺾이어 패주하는 일이 없다.
충신도 역시 이와 같다.
진실로 군주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롭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삶을 내팽개치는 일도 감히 마다하거나 어기지 않고서 군주와 나라를 보위한다.
나라에 이 같은 선비가 있다면 가히 인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재는 본디 얻기가 어렵지만, 사실 걱정은 얻기 어려운 선비가 있어도 이를 몰라보는 데 있다.
#여씨춘추 #여불위 


말은 잘하나 논리에 맞지 않고, 미덥기는 하나 이치에 맞지 않고, 용감하기는 하나 의리에 맞지 않고, 법을 잘 지키기는 하나 실정에 맞지 않으니, 이는 어리둥절한 채로 빨리 달리는 말을 타는 것과 같고, 미친 채로 오나라 간장(干將)의 명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은 반드시 이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
#여씨춘추 #여불위 


지혜의 우열은 멀리 내다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늘날이 옛날과 갖는 관계는 옛날이 그 후세와 갖는 관계와 같고, 오늘날이 후세와 갖는 관계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현재를 잘 살피고 알면 지나간 과거를 알 수 있고, 과거를 알면 앞으로 올 미래를 알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 앞과 뒤는 같은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무릇 도리에 어긋난 사람의 병은 진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세상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부질없이 얽매이는 바가 많은데, 얽매이는 바가 있으면 듣는 일이 반드시 어그러지게 된다.
얽매이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요체는 반드시 사람이 좋아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에 바탕을 둔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서쪽 벽을 보지 않고, 남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북쪽에 눈을 두지 않으니, 마음에 이미 존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사물에는 본디 가까이 하면 멀어지고 멀리하면 가까워지는 것이 있다.
때도 역시 이러하다.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없으면 천자가 되지 못 하고, 걸과 주 같은 폭군의 시기가 있다 하더라도 탕임금과 무왕 같은 현자가 없으면 역시 천자가 되지 못 한다.
성인이 보는 때와 인사의 관계는 마치 걸음이 그림자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도 있는 선비가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은둔하여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기도 하고, 또 힘들여 일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벼슬 한번 하지 않은 위치에서 천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제후의 지위로부터 천하를 얻게 되는 사람도 있고, 낮고 천한 위치로부터 삼왕(三王)과 같은 위대한 천자들을 보필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사내의 위치에서 천자의 세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시기이다.
#여씨춘추 #여불위 


명철한 군주란 만물을 빠짐없이 두루 보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군주의 도리를 소유하고 있는 군주란 모든 것을 몸소 시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이다.
백관의 존재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는 일은 줄어들면서도 나라는 다스려지는 것이고, 군주가 잡아야 할 바를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임금에게로 집중되면서도 간사함은 막히게 되는 것이다.
간사함이 막히면 (유가·묵가·종횡가 등) 이단의 논설을 펴는 자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됨으로써 참 모습이 깨우쳐지고, 허위가 꾸며지지 않음으로써 일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극히 잘 다스려짐"이라고 부른다.
#여씨춘추 #여불위


남이 옮기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를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 번 이리저리 전해지다 보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는 원숭이와 같고, 원숭이는 고릴라와 같으며, 고릴라는 사람과 같지만, 사람이 개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잘못을 크게 저지르는 이유이다.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면 복이 되지만, 남이 옮기는 말을 듣고서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옮기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깊이 따져봐야 하며, 그것이 사람에 관한 것일 때에는 반드시 이치로써 사실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
#여씨춘추 #여불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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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시작하면 얼마나 열중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는 언젠가 델포이에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감히 신탁(神託)을 받아온 것이오 - 내가 말했듯이, 여러분! 떠들지 말아 주기 바라오 - 즉, 나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 그는 물은 것이오.
그러자 그곳 무녀(巫女)는 나보다 지혜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준 것이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의 형제가 여러분에게 증언해 줄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신은 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크든 작든 간에 나 자신이 결코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지혜 있는 자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체 신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혜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이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구나 하고 말이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은 지혜 있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리려고 애를 썼소.
그런데 그 결과 나는 그의 미움을 샀고, 그 자리에 동석해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에게 적의를 갖게 되었소.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소.

나는 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사실상 아름다움이나 선(善)을 모르고 있지만 이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모르니까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달은,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모양이다.
하고 말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럽소.
그러나 역시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말하자면 마침 그곳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인 그들보다 그 뜻을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오.
더욱이 시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이런 것을 알았소.
즉, 그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타고난 것에 의한 것이며, 신의 예언자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처럼 신의 계시로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소.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훌륭한 말을 많이 늘어 놓지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뜻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보건대 시인들도 무언가 정치가와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시를 쓴다는 것을 믿고 다른 일에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건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인간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정치가들에서 느낀 것처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한테서 떠나온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래서 나는 신탁을 대신하여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소.
어느 쪽을 나는 택해야 할 것인가,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지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이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편이 나를 위해서 좋다고 결론지었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지혜는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지혜가 있는 자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탁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는 신을 도와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나랏일이건 집안일이건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할 여가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는 있소만, 이것도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나 자기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고 학문하는 사람에 대해서 흔히 말하듯이, '천상의 일과 지하의 일을 가르친다' 든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든가, '비리(非理)를 강변한다' 든가 하는 말을 지껄여 대는 것이오.
그것은 즉, 생각건대 그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가 보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무엇을 아는 체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오.
그 사람들은 명예심만은 강하니까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이고 설득적으로 나에 관한 말을 하고,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중상으로 여러분의 귀를 가득 채워 버리고 만 것이오.
멜레토스가 나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도, 아니토스나 리콘이 나를 공격한 것도 다 이것이 원인이었으며, 멜레토스는 작가들을 대신해서, 아니토스는 장인들과 정치가를 대신해서, 리콘은 변론가의 입장에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내가 처음에 한 말이오만, 지금 이렇게 거대해진 이 중상을 이런 짧은 시간에 내가 여러분한테서 제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상과 같은 것이 진실인 것이오.
나는 여러분에게 크든 작든 간에 조금도 숨김없이 얼버무리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소.
물론 나는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들의 증오는 바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이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또는 장차의 조사에서 발견하게 되겠거니와, 이것이 비방의 이유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그러고 보면, 나를 제외한 아테네 시민 모두가 훌륭하고 착한 인간을 만들고 있지만, 나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불행을 당신에게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해 다오.
당신은 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만이 그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뿐이거나 혹은 극히 소수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다루거나 하며 그것을 나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귀신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만일 귀신이 신의 방계(傍系)의 자식들로서 님프나 그밖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여성들한테 태어난 사생아라면, 신의 자식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노새가 말과 나귀의 새끼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말과 나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죽음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군들이 나를 배치했던 장소를 고수했던 내가,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했을 때-나는 그렇게 믿고, 또 풀이했소만-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야말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나를 법정에 끌어내야 마땅할 것이오.
그것은 신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며, 지혜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
바로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소.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경애하고 있소.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신에게 복종하겠소.
그리고 나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충고하고 내 소신을 밝히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때의 내말은 평소의 내 말과 변함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여!
당신은 지혜에 있어서나 무력에 있어서나 가장 명성이 높고 위대한 나라 아테네 사람이면서 오직 막대한 돈을 손에 넣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소?
명성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 것을 왜 부끄러워하지 않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서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설득했을 그런 말이 부족해서 내가 진 줄 알고 있을 것이오.
천만에, 나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말의 부족 때문은 아니오.
오히려 후안무치(厚顔無恥)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한탄하는 등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듣고 있는 많은 일들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러분이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징벌이 내릴 거라는 것이오.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 것보다 제우스 신에 맹세코 훨씬 쓰라린 형벌이 될 것이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로부터 벗어나고 여러분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여러분을 심판하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오.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고 있어서 여러분은 깨닫지 못 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젊으니까 그만큼 거셀 것이며, 여러분은 또 그만큼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여러분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책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은 잘못이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명예롭지도 못한 도피법이오.
남을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편이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한 방법이오.
이상이 내게 사형의 투표를 한 여러분에 대한 내 예언이며, 이것으로 이제 작별하기로 하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다른 면으로 고찰해 보더라도 죽음이 선이라는 희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소.
죽는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오.
말하자면, 전혀 무(無)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거나,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듯이, 그것은 영혼의 이동으로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주거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만일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는 일이고, 사람이 자면서 꿈 하나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이란 아주 놀랄 만한 소득일 것이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평생에 꿈도 안 꿀 만큼 숙면을 취한 밤을 골라내어 그 밖의 낮과 밤을 나란히 놓고 비교·대조하는 형식으로 관찰해서, 그런 밤보다 더 좋고 더 즐겁게 산 낮과 밤이 자기 생애에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말해야 한다면, 생각건대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대왕일지라도 그런 밤이 그렇지 않은 낮과 밤에 비해서 극히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죽음이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크게 덕을 보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모든 시간이 만일 이와 같은 것이라면, 단 하룻밤보다도 길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오.
한편, 죽음이란 여기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소크라테스의_변명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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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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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자의 서>>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들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둘째는 사후세계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는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셋째는 사자가 환생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자궁 입구를 막아 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살아 있을 때 여러 영적인 안내서들을 통해 실제 수행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계의 가르침을 통해 존재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으로 인도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사후세계도 거치지 않고, 공중에 일직선으로 난 큰 길을 따라 태어남이 없는 근원의 세계로 곧바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시기

호흡이 멎었을 때 사자의 생명력은 지혜가 머무는 생명 에너지 센터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자의 의식체는 자연 상태에서 최초의 투명한 빛을 체험할 것이다.
그 뒤 생명력은 신체의 뒤쪽으로 가서 척추 오른쪽과 왼쪽의 생명 에너지 통로를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이때 사후세계가 순간적으로 밝아 오게 된다.
따라서 생명력이 배꼽에 있는 생명 에너지 센터를 통과한 뒤 왼쪽 에너지 통로 속으로 달려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여기에 적힌 지시대로 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생명력이 이렇게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내부에 아직 들숨이 남아 있는 기간으로, 밥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때 임종자가 잠에 빠져들려고 하거나 수면 상태가 계속되려고 하면 이를 막아야 하며, 목의 동맥은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눌러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직 머리 정수리의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 확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자를 인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 다르마카야의 완전한 마음을 처음으로 얼핏 목격하게 된다.
마지막 날숨이 멎고 아직 몸 안에 숨이 남아 있는 기간이 바로 생명력이 중앙 에너지 통로에 머무는 기간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의식체가 기절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도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을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최초의 투명한 빛을 알아보지 못 했을지라도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을 알아볼 수 있으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 하면 세 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가 밝아 온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이 세 번째 빛의 단계에서는 살아 있을 때 쌓은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환영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초에니 바르도의 가르침을 읽어 주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많은 힘을 갖고 있고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때쯤 사자는 자기 곁에 음식물이 따로 차려져 있고, 옷은 수의로 갈아입혀졌으며, 잠자리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애통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이 자기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실망한 채로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사자는 소리와 색과 빛 세 가지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고 두렵게 하며 마침내 몹시 지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존재의 근원 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가르침이 행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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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내가 읽어 주는 이 구절들을 잘 따라 외우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두려운 어떤 환영이 눈 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요한 비밀을 잊지 말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육체와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이때, 그대는 순수한 진리의 세계를 잠깐 경험하게 되리라.
그것은 밝고 눈부시고 미묘하며 무서울 정도로 빛이 난다.
마치 봄날의 풍경 속을 가로질러가는 신기루처럼 끝없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고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참 자아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천상계의 존재들에게서 나오는 어두운 흰색 빛에 이끌리지 말라.
그대여, 그것에 애착을 갖지 말라.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그 어둔 빛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천상계의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여섯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대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그 빛을 쳐다보지 말라.
깊은 신뢰를 갖고 눈부신 푸른색 빛을 바라보라.
그대의 오 마음을 바이로차나에게 향하고, 내가 읽어 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또한 모든 붓다들의 조상이며 모든 선(善)의 아버지인 사만타바드라(보현)와 모든 선의 어머니인 사만타바드리가  한몸으로 결합된 모습으로 그대를 비추러 나타날 것이다.
이들 마흔두 명의 완전한 신들이 그대 앞에 나타나 그대를 비출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며, 그대 자신의 순수한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들 여러 세계들은 그대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 가슴의 네 부분에서 나오며, 가슴의 중심부를 합하면 모두 다섯 개의 방향이 된다.
그것들 모두는 그대 안에서 나와 그대를 비춘다.
신들 역시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세월 이전부터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비쳐 나오는 빛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 이끌리지 말라.
그러므로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약하게 갖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무념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형상들과 빛들은 그대 자신 속으로 녹아들 것이고, 그대는 붓다 경지를 얻게 되리라.
아모가싯디(불공성취불)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의 초록색 빛의 길은 그대를 향해 열려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지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지혜의 빛들과 함께 윤회계의 여섯 세계로부터 순수하지 못한 환영의 빛들이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대는 "저것들이 무슨 빛일까?"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천상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흰색 빛, 아수라의 거인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초록색 빛, 인간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노란색 빛, 동물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푸른색 빛, 굶주린 귀신들의 세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붉은색 빛, 지옥계로부터 오는 어두운 회색 빛이다.
순수한 지혜의 빛과 함께 이들 여섯 색채의 빛이 그대를 비출 것이다.
이때 두려워하거나 어떤 것에도 끌리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하여금 무념 상태에서 쉬게 하라.
만일 그대가 지혜의 순수한 빛들을 두려워하고, 여섯 세계의 순수하지 못한 빛들에 이끌린다면 그대는 여섯 세계의 어느 한곳에서 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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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러한 생각의 형상들이 나타나면 그대는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말라.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신의 신체들 역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텅 빈 것이 텅 빈 것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을 떠나면 평화의 신이나 분노의 신이나 피를 마시는 신이나, 여러 형태의 머리를 한 신들이나 무지개 빛이나 죽음의 대왕의 끔찍한 모습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대의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명상하라.
나아가 그대는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하거나, 그대 소유의 물건을 다른 이들이 갖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미련 때문에 그것들에 애착을 갖거나 상속자들에게 분노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감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쳐 설령 그대가 높고 행복한 차원에 태어날 운명이었다 해도 그대는 지옥계나 불행한 귀신들이 사는 아귀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세상에 두고 온 재산에 집착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려라.
그대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들을 단념하라.
누가 그대의 재산을 갖든 불행한 생각을 갖지 말라.
그것들을 기꺼이 단념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마음에서 나온 텅 빈 몸이 나에게 내려올 때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이 사후세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악한 행위들의 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수호신들이여, 그 고통을 내쫓아 주소서.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위대한 진언(眞言)이 되어 울리게 하소서.
아무런 보호자도 없는 나를 내 생전에 쌓은 업(業)이 추적해 올 때
자비의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일 때문에 슬픔이 내게로 밀려올 때
깊은 명상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행복한 빛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 가르침이 담고 있는 특별한 기술은 이 순간에서 특히 중요하다.
지금 어떤 빛이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것을 자비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어느 곳으로부터 빛이 뻗어 나와서 그대를 비출지라도, 그곳이 자비의 신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기술이다.
이것은 그대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막아 준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그대의 수호신이 누구이든 그 수호신을 마음 속에 떠올려 명상하라.
마치 마술사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그 수호신을 눈 앞에 떠올리고 그에 대해 명상하라.
만일 그대에게 특별한 수호신이 없다면 자비의 신을 명상하거나 아니면 나에 대해 명상하라.
명상의 대상이 정해졌으면 그를 마음 속에 그리면서 고요히 명상하라.
이제 그 수호신의 영상을 겉에서부터 녹여 서서히 사라지게 하라.
그 영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사념도 일으키지 말고 명상하라.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세계에서 비쳐 나오는 투명한 빛을 명상하라.
그대여, 이것은 더없이 심오한 기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그대는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 환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보게 될 때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대 자신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 남녀를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 스승의 여성 원리로 여기고 그들에 대해 명상하라.
그들에게 절하라.
겸허한 믿음을 갖고 마음 속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를 올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인 안내를 부탁할 결심을 하라.
이 결심만으로도 자궁문은 닫힐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해도 자궁문이 닫히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충동이 생긴다면 수호신에게 명상하듯이 그대의 신적인 스승과 그의 여성 원리, 또는 자비의 수호신과 그의 여성 원리에 대해 명상하라.
#티벳_사자의_서 #파드마삼바바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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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이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것들 모두 맑고 투명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하지만 시간의 의미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그리고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순수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고 편하게 의식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슬픔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이라 부르는 그 심상치 않은 것에 대해서, 이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또 슬픔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다루려 한다면 단편적으로밖에는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랑이 지닌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슬픔의 본질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이해해야 하는데,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둘은 하나다.
시간에 대해 이해하다 보면 생각과 마주치게 되고, 생각을 이해하면 시간이 끝나고 따라서 슬픔이 끝난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다면 우리는 슬픔을 바라볼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슬픔을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숭배하거나 아니면 파괴해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나 사원 안에 또는 마음 속 어두운 구석에 넣어 두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붙잡고 있다.
아니면 발로 차버리거나 집어던져버리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슬픔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거기에 고상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찾겠다는(이건 말 그대로 난센스다) 말 따위는 하지 않고도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만이 슬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니 슬픔은 조금도 받아들여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모든 감상적인 생각과 자기연민에서 샘솟는 모든 감정표출인 슬픔을 이미 버렸다.
그러면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죽음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놀라운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는 것이 사라져야 그 안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그때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 다음에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다.
현명한 사람은 시간과 생각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매순간 죽어가고, 결코 경험을 쌓아두거나 모아 놓지 않는 마음은 순결하면 따라서 변함없는 사랑의 상태에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 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말· 상징·이미지들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말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이 곧 이미지요 상징이며, 우리의 사고는 곧 말로 표현하기· 상징화하기 · 상상하기 · 라벨을 붙여 분류하기이다.
이미지나 상징 또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기억도 없겠지.
따라서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죽음이라는 실재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말이다.
맞나?
또한 확실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아는 것 즉 과거의 결과인 마음이 불확실한 것에 직면할 때, 그리고 모르는 것 즉 미래에 직면할 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그 감각은 우리가 그것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도 거기 있을까?
감각은 단어가 없어도 존재할까?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 어떤 비판이나 평가나 억제도 없이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고 다만 관찰만 하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기억이 아니다.
사랑은 쾌락도 아니다.
사랑이 섹스와 관계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이건 찬성하고 다른 건 비난하며 세속적인 사랑과 신성한 사랑을 구분하는 행위로 후퇴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거에 대한 죽음, 모든 고통·갈등·슬픔에 대한 죽음이 없으면 사랑을 전체로 완전하게 만날 수 없다.
그때 사랑이 있다.
바로 그때 하고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은 자기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과거에서 끌어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곧 죽음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사랑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애착이 없을 때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과거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은 이용될 수 있으며 지식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그때 나의 살아있음은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며, 배움과 감동이 있는 모르는 것의 영역에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궁극적인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
#삶과_죽음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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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저는 광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치고 나니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습니다.
고독이라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 거지요.
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면
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저는 땅에 내린 당신의 뿌리이고
당신은 거기서 하늘로 피어난 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햇볕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게로 몸을 기울여
내 귀에다 달콤하게 속삭이시며
마치 바다가 시냇물을 받아들이듯
나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그리고 친구여, 내 안의 '나'는
언제나 침묵의 집에 머무르고 있어서
끝끝내 알아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답니다.

굳이 내 말이나 행동을 그대가 믿어 주길 바라진 않는답니다.
내 말은 바로 그대의 생각이 소리로 나온 것이고
내 행동은 그대의 바람이 실행에 옮겨진 것뿐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무덤 파는 사람

한번은 나의 죽은 자아 하나를 묻고 있는데
무덤 파는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온 사람 중에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그런데 제가 왜 마음에 드십니까?"

"여기에 오는 사람은 하나같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데 당신만은
웃으며 왔다 웃으며 가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아, 밤이여! 그렇답니다. 우린 쌍둥이랍니다.
그대는 우주를 드러내고
나는 내 영혼을 드러내니까요."
#어느_광인의_이야기 #칼릴_지브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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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시적이어라.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써라.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삶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쓰고 사람을 담뿍 담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
단 아주 간접적으로 하는 것.
삶이 그대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질 때 더욱더 용기를 가져라.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여라.
아니면 실패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공격적이라면 실패할 것이다.
사랑,행복,명상,진리 또한 그대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이나 오직 미묘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을 갖고 있어

깊은 이해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느낄 때, 다른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 설 때,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바라볼 때 그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항상 눈이 멀어있고 논쟁을 하려고 한다.
그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그르다고 한다.
그는 항상 논쟁한다.
그의 논쟁은 지긋지긋한 것이 된다.
그는 항상 교만하고 방어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는 부정할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조심하는 모습은 마치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그는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깨어있는 것이다.

망설이는 모습은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아니다.
그는 망설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론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마치 탁한 물처럼 자유롭게 뒤섞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자유롭게 섞인다.
그에게는 깨끗함과 불결함, 선함과 악함 등, 모든 분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태양 같은 의식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이다.
창녀의 집에 머물거나 수녀의 집에 머물거나 예수에게는 똑같다.
그는 잠을 자러 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똑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창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며 수녀도 같은 것의 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깨끗하지 않고 아무도 불결하지 않다.
모든 이중성이 사라져버렸다.
초월되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 안에서 산다.
그가 자유롭게 섞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절대적인 죽음은 사념이 완전히 없어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절대적인 죽음은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고, 이제는 삶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 사라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두 번째 단계는 삶에 대해서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노자는 이것을 영원한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 영원한 법칙을 아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며, 이것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는다.
성인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어떠한 논리적인 구분도 하지 않고 하나를 품는다.
그는 하나, 즉 전체를 선택한다.
모든 대립되는 것을 포함하는 전체를 선택한다.
그는 삶을 죽음과 함께 선택한다.
증오에 반대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체를 선택하고 온 세상의 모범이 된다.
그가 세상의 모범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귀결이다.
스스로 생겨나는 현상이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지극한 부드러움은
지극히 단단한 것을 통과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외적인 세상에서는 물이며 내면의 세계에서는 사랑이다.
물과 사랑은 여러 면에서 서로 비슷하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은 빈 장소를 찾는다.
사랑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만일 그대가 이기주의자라면, 사랑은 그대에게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기주의자는 에고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도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대에게 오지 못 한다.
사랑은 그대가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텅 비어있기를 바란다.
물 또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는다.
그러므로 물은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 계속 흘러가 큰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텅 빈 공간이다.
그렇게 물은 바다에 도달한다.
강은 히말라야의 꼭대기를 향해서 흐를 수 없다.
그와 정반대이다.
강은 히밀라야의 최정상에 있는 빙상에서부터 나와 점점 낮은 곳으로 움직여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텅 빈 장소, 즉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곧 강물의 집이다.
사랑 또한 빈 곳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갈망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한다.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떻게 '얻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비어있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직접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도 없다.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대를 찾아오게 할 수 있다.
그대는 단지 비어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보라.
수많은 강줄기가 그대를 향해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별과 돌, 모래와 바다, 나무와 새들까지도, 그대가 움직이는 곳마다 갑자기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를 것이다.
사랑은 물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은 쉴 수 있는 빈 장소를 찾는다.
나무 옆을 지나가 보라.
만일 그대가 비어있다면, 갑자기 나무의 사랑이 그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사랑은 물과 같다.
물을 부어 보라.
물은 자신이 쉴 수 있는 가장 빈 곳을 찾는다.
사랑은 내면의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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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완성은 불완전한 것 같다.

물론 그대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대가 완벽한 사람을 만나보면 그는 마치 불완전해 보일 것이다.
왜 그럴까?
매우 미묘하지만 잘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완벽한 사람은 절대로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주의자는 절대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완벽한 인간은 전체적이지만 완벽주의자는 부분적이다.
완벽주의자는 어떤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가꾸고 다듬는다.
그는 매우 완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머문다.
왜냐하면 함께 어우러져야 할 많은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완벽할 수 없다.
오직 전체적인 삶만이 완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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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인간은 절대로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성장하고 또 성장한다.
그의 완성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완성은 과정이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거기에 끝이 없다.
진정한 삶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처음이나 끝이란 말은 거짓된 말이다.
그 어느 것도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삶에서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대의 완벽은 죽은 것이다.
결국 끝에 도달한다.
끝에 도달한 사람은 마치 석상과 같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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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며

내면을 깊이 들어가면 그대가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란 그대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알게 된다면 인간 전체를 안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분노를 알게 된다면 모든 분노를 안 것이고, 자신의 폭력을 알게 된다면 모든 전쟁을 안 것이다.
전쟁터에 갈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의 폭력을 알면 모든 폭력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알면 모든 사랑, 이 세상 사랑의 모든 역사를 안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다 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대양으로부터 물 한 방울을 취하는 것과 같다.
물 한 방울을 분석하면 바다 전체를 안 것이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 바다 전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바다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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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잃으려 한다.

도를 추구하는 자는 정반대다.
지식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자, 되어감이 아닌 '있음being'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날마다 잃어버린다.
자신을 비우고 잊어버린다.
그가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잊어버리는 법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단 한 가지는 어떻게 완전히 짐을 덜어내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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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리는 사랑보다도 더 깊다.
세 가지 차원을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 차원은 머리의 차원이다.
가장 피상적인 차원이다.
언어와 개념과 이론의 세계이다.
그대는 머리를 매우 쉽게 조종할 수 있다.
그대는 거기에서 주인이다.
그 다음 머리보다 더 깊은 두 번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가슴의 차원이다.
거기서 그대는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노예이다.
그것은 조종될 수가 없다.
사랑이 주인이고 그대는 노예가 된다.
사랑이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슴은 머리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마음은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뒤를 볼 수도 있고 안을 볼 수도 있다.
약간의 일별이 가능하다.
시가 가능하고, 미술이 가능하고 음악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모두 머리가 가슴을 언뜻 본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 세 번째 차원이 있다.
존재의 차원이며 마지막 단계이다.
실체 그 자체이며 근본 그 자체이다.
그것이 그대의 존재이다.
머리는 생각하고, 가슴은 느끼며, 존재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신, 진리, 황홀경, 열반, 깨달음, 이들이 존재에 속한다.
머리는 이런 것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두 번째 차원인 가슴과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가슴보다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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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엉킴을 풀며

어떻게 그 엉킴을 풀 것인가?
그것을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의해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곤란에 처했을 때 그대는 항상 충고를 한다.
그런데 똑같은 어려움이 그대에게 일어났을 때, 그대는 그렇게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왜 그대의 지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렇게 잘 움직이는가?
거기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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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생각한다.
즉 위대한 사람은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가 커지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문제가 작을 때, 손 안에 있을 때 처리한다.
그러면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문제를 순간순간 다룰 때, 그대는 항상 짐으로부터 벗어나 신선할 수 있다.
그대의 존재 위에는 먼지가 앉지 않는다.
그대는 신선하고 젊고 처녀 같은 상태로 다음 순간으로 미끄러져간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미끄러져 나오듯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간다.
낡은 허물은 뒤에 놔두고 생생하고 더 젊은 피부가 나온다.
그때 삶은 신비가 된다.
그것은 결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축복이 내려온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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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를 행하고

완전히 내려놓아라.
이완해라.
진리를 추구하려는 긴장을 풀어라.
진리를 추구하려고 여기에 올 때, 그대는 세속적인 마음을 갖고 온다.
세상에서는 야망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쟁이 매우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애를 쓰면서 서로 싸우면서 경쟁하고 있다.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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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은 서늘하고 무관심은 차갑다.
사랑과 증오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서늘하다.
그러나 무관심에 대비해서 자비심의 느낌을 말한다면, 자비심은 따뜻하다.
자비심은 무관심의 차가움에 비해서는 따뜻하며 사랑과 증오의 뜨거움에 비해서는 서늘한 거서이다.
덕은 곧 자비심이다.
사랑도 증오도 아니다.
덕은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덕은 무관심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자비심이 마치 무관심처럼 보일 것이다.
그 차이점은 매우 미묘하다.
서늘함은 마치 차가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서늘함은 살아있고 신선하다.
차가움은 단지 죽어있는 것이다.
덕은 곧 자비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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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려운 것은 쉬울 때가 있다.
조금만이라도 주의한다면 그것을 알 것이다.
씨앗을 부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큰 나무를 파괴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모든 것은 씨앗의 형태를 갖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은 마치 씨앗과 같다.
만일 그것을 그 순간 버리고 싶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분노가 그대 내면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리고 그대 존재 속에서 넓게 퍼져 결국에는 그대를 압도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때는 그 분노를 파괴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꼭 그대 자신을 파괴하는 것 같을 것이다.
분노는 이미 그대의 일부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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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것을 어렵게 여김으로써
결코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노자는 말한다.
"처음부터 다룬다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마라.
만일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면 뒤로 미루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쉬운 일인데, 왜 지금 신경을 써야 하나? 내일 할 수 도 있다."
일은 쉽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그것을 어렵게 여기고, 그 즉시 문제를 처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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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나오며
구층 다락도 한 덩어리 흙 쌓기에서 시작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은 또한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
시작이 곧 끝이다.
이 순간이 전체다.
천마일이나 되는 여행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목표에 신경 쓰지 마라.
첫 걸음을 딛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면 두 번째 걸음은 첫 걸음에서부터 나오고 세 번째가 그 뒤를 따른다.
전혀 그런 일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내일이 걱정하도록 하라.
내일을 생각하지 마라.
즐겨라!
이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즐겨라.
그럼으로써 수단이 곧 목표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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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인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것을 복귀시킨다.
이리하여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도와서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욕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욕망은 아무런 욕망 없음을 욕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욕망은 슬픔만을 낳기 때문이다.
욕망은 그대가 내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여기에 있고 욕망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
삶은 이 순간에 있지만 욕망은 항상 미래의 다른 곳에 있다.
욕망은 곧 뒤로 미루는 것이다.
꿈이며 희망일 뿐 결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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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내어맡김을 지지한다.
그는 말한다.
"삶에 내어맡겨라.
삶이 그대를 이끌게 하라.
그대가 삶을 이끌려고 하지 마라.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삶이 그대를 조종하고 지배하게 하라.
삶이 그대를 소유하게 하라.
그대는 단지 내어맡기기만 하라!
그대는 단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만 말하라.
모든 힘을 삶에게 주고 삶과 함께 있어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다 내어맡겨 버리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사실 그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유한한 존재가 아닌 무한이 된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형상화된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형상이 없는, 광대한, 계속 팽창하는 존재가 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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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말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무한한 삶이 그대 안에서 흐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의 흐름에 장애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어마어마한 공空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안에서 구름이 떠다닐 수 있고 별들이 오갈 수 있다.
아무 것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잃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내어맡겼기 때문이다.
존재의 경지에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생생하다.
육체는 물론 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가장 내적인 중심은 생생한 채로, 신선한 채로 남는다.
그것은 결코 늙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두드리지_마라_문은_열려있다 #오쇼_라즈니쉬 #노자 #도덕경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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