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마음이 관계 안에 있는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할 때 그런 무질서가 나타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마음이 아첨하는 말뿐만 아니라 모욕도 기록하지 않고, 모욕 받았다는 것을 알기만 할 수 있을까?
마음은 자기가 받은 것을 알면서도 기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관계에서 마음이 늘 그렇게 깨끗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해답은 사랑이다.
모욕 받은 것, 칭찬 받은 것을 기록하지 않는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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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내 것이라는 느낌· 내가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느낌 · 나는 덩치가 큰 사람이라는 느낌 · 작은 사람이라는 느낌 · 모욕을 받았다는 느낌 · 칭찬을 받았다는 느낌 · 나는 매우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야심만만한 사람이라는 느낌 · 나는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이라는 느낌의 중심이다.
나라는 느낌이 마음의 중심이고, 마음 그 자체다.
마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리고 '난 꽤 꽨찮은 사람이야.'라는 느낌 ·'난 훌륭한 사람인 게 분명해.'라는 느낌 · '난 정말 영리해.'라는 느낌 · '난 정말 어리석고 둔해.'라는 느낌들 주위에 벽을 쌓으면 쌓을수록, 마음이 패턴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마음은 더 갇히고 무뎌진다.
그러면 마음은 고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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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지 않는 바로 그 관심이 인간의 품위를 가져온다.
마음이 비교하고 있는 한 사랑은 없다.
마음은 늘 판단하고 비교하고, 저울에 달고, 어디 약점이 없나 찾는 데 혈안이 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비교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할 때 아이들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 다른 집 아이들과도 비교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자기들의 아이고, 그들은 자기 아이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대는 자기보다 좀 더 낫고 품위 있고 부유한 누구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사랑이 없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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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에 대해 알려면 이름 붙이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내 아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을 때 나는 무얼 할까?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가 노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그 아이를 관찰하고 연구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뭔가를 사랑할 땐 자연히 그것과 교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말이나 이름이나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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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랑은 마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이 정말로 고요할 때만, 마음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묻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고 탐색하지 않으며, 소유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을 때에만, 다시 말해 마음이 정말로 침묵할 때에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음이 더 이상 자기를 투사하지 않고 자기의 기분·욕구·충동·감춰진 두려움을 추구하지 않을 때, 더 이상 자아실현을 추구하지 않고 믿음의 노예에서 벗어날 때, 오직 그때에만 사랑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개 사랑에는 질투나 야망이 수반되고, 개인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추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존재할 때, 분명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랑은 우리가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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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제의 진짜 원인은 마음이다.
즉 밤낮으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는 마음이다.
마음은 몹시 피상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여러 세대를 낭비해 가면서 마음을 길러왔고, 점점 더 영리하고 치밀하고 교활하게, 점점 더 부정직하고 부정하게 만들어왔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활동을 보아도 그런 것들이 분명하게 보인다.
우리 마음의 본질이 부정직하고 속이고 실제를 직시할 수 없게 되어 있어,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음이 바로 문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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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한 사람은 성적 욕구를 영원히 끝내면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히 끝내고 싶어 한다.
저 사람이 성적 욕구를 열심히 찾고 열심히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있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오히려 그가 마음의 작용을 자유롭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마음이 전혀 방해받지 않는 영원한 상태를 찾으려고 애쓰기만 하는 한, 마음은 갇히게 되며 따라서 결코 창조적일 수가 없다.
마음이 뭔가가 되고자 하고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래야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진다.
오직 그때에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그 창조적인 것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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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각인가?
사랑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인가?
그대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나?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머릿속 그림이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우리 관계에서 생기는 감각과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감각이나 추억인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건 단순히 생각 즉 마음이 반영된 것 아닌가?
생각이 사랑인가?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
우리에게 사랑이란 곧 감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머릿속 그림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다.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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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은 사방에서 좌절된다.
그리고 말한다.
'난 사랑할 때 행복해. 그러니 사랑해야 해.'라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생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소유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피아노든 재산의 일부든 사상이든 믿음이든 간에, 소유하고 있으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함으로 인해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그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뒤따라오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그것으로 가슴을 채운다.
가슴이 공허하기 때문에, 마음은 '난 그 사랑을 가져야 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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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직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에만 존재하고 또 자기 인식을 통해 존재하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모든 작용이 완전히 드러나고 이해되면 그때 그대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랑은 감각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 사랑은 뭔가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아무런 결과도 없는,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는 동일시하고 불안해하고 소유하려는 나가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가, 나가 활동하는 한 사랑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다.
그때문에 나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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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우리는 공허하고 외로우며,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로 위장하려고 애를 쓴다.
명상·신을 찾기·사회활동·라디오 듣기·술 마시기·그 밖에 하고 싶은 것 하기.
외로움을 직시하고 그것과 함께 하고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무엇이든 다른 걸 하려고 할 것이다.
도망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든 술 마시는 것을 통해서든 간에 도망치기는 마찬가지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한, 신을 숭배하는 것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공허함으로부터 달아나는 사람은 그 도피가 신을 찾는 것이든 술고래가 되는 것이든 모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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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외로움과 홀로 있는 것은 다르다.
외로움은 궁극적인 자기고립 작용이다.
그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 수록 그대는 더 고립되며, 자의식은 고립되는 작용이다.
그러나 홀로있음은 고립이 아니다.
외로움이 끝날 때에만 홀로있음이 있다.
홀로있음은 모든 영향, 즉 밖으로부터의 영향과 기억이라는 내적인 영향 둘 다 완전히 멈춘 상태이다.
그리고 마음이 홀로있음이라는 그 상태에 있을 때에만 그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려면 외로움을 이해해야 하고, 이렇게 고립되는 작용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아와 자아의 활동이다.
따라서 자아를 이해하면 고립이 멈추기 시작하고, 따라서 외로움이 멈추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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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해 보니 거기 무슨 관계라도 있는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상대방을 통해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상대방을 통해 위안이나 우정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통해 위안을 찾고 의존하는 등등을 할 때, 거기에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비꼬려는 게 아니라 관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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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외로움이라는 이 느낌을 만들었다.
생각은 자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제한되어 있고 단편적이며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 공허함, 이 외로움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생각이 이것을 깨달을 때, 외로움은 없다.
그때 애착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나는 애착과 애착에 내포되어 있는 것-탐욕·두려움·외로움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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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쾌락인가?
그대가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알다시피 욕망은 감각의 결과다.
감각은 생각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감각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각으로부터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은 만족하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사랑인가?
애착이 사랑인가?
애착에는 갈등이 있고 불안감이 있으며 불안감이 많을수록,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많을수록, 그대는 더 많이 애착을 가지게 되고, 소유하게 되고, 지배하고, 주장하고, 요구하게 되며, 여기에서 관계 안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면 그대가 생각하는 이 갈등이 사랑의 일부인가?
우리는 묻고 있다.
그것이 사랑인가?
쾌락이 사랑인가?
쾌락은 추억의 움직임이다.
문장을 암기하지 마라, 다만 귀기울여 듣기만 하라.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 즐거움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대가 지난밤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산 위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커다란 기쁨 아닌가?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생각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그걸 간직해야 해, 그걸 기억해야 해, 그걸 숭배해야 해, 그걸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말썽이 시작된다.
그때 쾌락의 모든 움직임은 활동을 시작한다.
그 쾌락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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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나는 그 모든 작용을 객관적으로 보며,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보라.
전에는 이 공허함을 채우려고 에너지를 쓰며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으나, 지금은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걸 안다-마음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에너지를 탕진하지 않고 있다.
생각은 고요해졌고, 마음은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 침묵 속에는 외로움이 없다.
그 침묵이 있을 때, 그 완전한 마음의 침묵이 있을 때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고, 그것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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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거기에는 오직 지고의 행복만이 있으며, 사랑은 쾌락을 넘어서 있다.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것은 교활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이 완전히 침묵할 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비가 오고 있다.
그대는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귀로 들을 수도 있고, 그 깊은 침묵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완전히 침묵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다면 그때의 아름다움은 말로 옮기거나 화폭 위에 옮길 수 없을 정도다.
그 아름다움은 자기표현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지고의 행복이지, 쾌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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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더 이상은 행복인 덕 또는 저항 만들기 중 그 어느 것도 찾으려 애쓰지 않을 때,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인 홀로있음, 고립이 아닌 홀로있음, 창조적인 것인 홀로있음을 알기 위해 홀로 있을 필요가 있다.
홀로 있는 마음은 이미 더럽혀지고 타락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홀로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안다면, 우리 모두 자각하고 있는 외로움이 아마도 실체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이 정지한 채 매우 고요하고 만족과 도피를 추구하는 데에서 자유로울 때, 그대는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이 완전히 끝나야 한다.
마음은 생각의 결과이고, 생각은 단지 끝을 향해 가는 통로이자 수단일 뿐이다.
삶이 단순히 어떤 것으로 가는 통로일 때, 거기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고요할 때,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참을 참으로 볼 때 사랑이 생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사랑의 행위이며, 지식의 행위가 아니다.
지식은 단순한 경험이며, 경험은 사랑이 아니다.
경험은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작용을 이해할 때 생겨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는 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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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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