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람의 현명함{賢}, 부족함{不肖}, 지혜{智}, 우둔함{愚}, 용기{勇}, 비겁{怯), 인{仁}, 의{義}에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며, 천해지기도 하고 귀해지기고 한다. 


이 모두를 조용히{無爲} 판단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유무(有無)를 자세히 살펴서 그 사람의 실과 허를 판정하고, 


상대방의 기호와 욕망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검토하고, 


상대방의 말을 상세히 배열한 후 그것을 다시 검토하여 실질적 정황을 알아내어야 한다. 


이처럼 상대방의 중심 생각{指}을 알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열거나 닫으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혹은 열어 보여주기고 하고 혹은 닫아 감추기도 하는데, 


열어 보여주는 것은 상대방과 정세에 대한 판단을 같이할 때이고, 


닫아 감추는 것은 상대방과 생각을 달리할 때이므로, 


상대방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함께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책략을 자세히 검토하여 먼저 그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여야 하며, 


이리하면 떠나거나 합류해도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판단에 따른 대세를 따를 수 있다.

#귀곡자


입이란 

마음의 문호이고 
마음이란 정신의 주인으로서, 


사람의 의지,욕망,사려,지혜 모두가 이 문호를 통하여 출입하므로, 


그것의 열리고 닫힘을 관리하여 그 출입을 통제하여야 한다.

#귀곡자


옛날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 중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지난 날을 다시 관찰하고 지금을 다시 검증하여야 하고, 


옛날을 다시 알고 지금을 다시 알아야 하며, 


상대방을 다시 이해하고 자기를 다시 이해하여야 한다. 


상대방의 동정(動靜)과 허실(虛實)의 이유가 현재와 합치하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 그 이유를 탐구하여야 하며, 


모든 일은 반복된다는 것이 성인의 뜻이니, 


모든 일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귀곡자


따라서 남을 아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기를 알아야 비로소 남을 알 수 있다. 


만약 자기와 남을 모두 안다면, 

두 눈이 나란히 있는 물고기(比目魚)가 형상을 보는 것 같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며, 


상대방의 말을 관찰하는데 실수가 없어서 마치 자석이 작은 바늘을 끌어 당기는 것 같이 분명하고, 


혓바닥이 불에 잘 익힌 갈비살을 섭취하는 것 같이 절실하여, 


남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적으나 그 정세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신속하여 음과 양을 함께 보고, 원(圓)과 사각(方)을 함께 볼 수 있다.

#귀곡자


내건이란 『귀곡자』에서 주로 신하와 군주 사이의 관계에서 내부에 있는 자기 편을 말하며, 


반드시 내부에 자기 편을 만들어 두어야 자유자재로 나아가고 물러설 수 있으며, 


이것이 안되면 물러서라고 권하고 있다. 


내건을 통하여 일단 의기투합하면 멀리 있어도 가깝게 되고, 


멀리서 소리만 들려도 서로 생각하는 관계가 되고, 


일단 의기가 투합하지 않게 되면 가까이 있어도 멀어지고, 


매일 앞에 나아가도 채용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귀곡자


천하가 뿔뿔이 흩어져 위에 현명한 군주가 없게 되고 제후들에게 도덕이 없어지면, 


소인들은 도적이 되고, 


현인들이 쓰이지 못 하게 되며, 


성인은 도피하여 숨어 버리고, 


이익을 탐하는 사기꾼들이 날뛰게 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의심하고 국가조직이 와해되어 서로간에 활을 쏘고, 


부자가 이산하여 서로간에 반목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틈새의 싹'이라고 한다. 


성인은 이런 '틈새의 싹'을 보면 미리 그것을 법으로 막아내는데, 


세상이 아직 다스려 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봉쇄하고, 


세상이 다스려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세상을 획득한다.

#귀곡자


무엇으로 천하의 권세를 판단한다고 하는가? 


답은 이것이다. 


국가의 대소를 판단하고, 


인구의 다소를 고려하고, 


재화의 유무를 측량하고, 


백성의 다소를 고려하여 여유롭고 부족한 정도가 어떠한지를 판단하며, 


지형의 험준함을 보아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지를 판단하고, 


모략의 면에서는 누가 뛰어나고 누가 떨어지는지를 판단하며, 


군신지간의 친소관계와 누가 현명하고 누가 모자라는지를 판단하고, 


빈객의 지혜와 누가 빈객이 더 많고 누가 적은지를 판단하며, 


천시(天時)의 화와 복을 보아 누가 길하고 누가 흉한지를 알아내고, 


제후의 친척 중에서는 누구를 쓰고 누구를 안 쓰는지를 알아내며, 


백성들의 민심의 방향을 보아 누가 안정되었고 누가 위험한지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증오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사람이 바뀌면 누가 편해지는지 등을 알아내는 것이니, 


이런 것을 알아낸다는 것을 곧 천하의 권력을 계량한다고 하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제후들의 정세를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대단히 기뻐할 때 찾아가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하여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욕망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며, 


또한 그들이 매우 두려워할 때 찾아가 그들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므로 이런 방법으로 제후들의 정세를 알아낼 수 있다. 


이때 그들은 반드시 그 격한 감정과 욕망 때문에 자기의 감정이 변화한 줄을 모르게 되어 사람을 잘못 보고 말도 하지 않으니, 

다시 자기에게 안정책을 묻게 된다.

#귀곡자


자세히 탐구할 때는 


평화(平)롭게 하거나, 


정직(正)하게 하거나, 


기쁨(喜)으로 하거나, 


분노(怒)로 하거나, 


명성(名)으로 하거나, 


행위(行)로서 하거나, 


청렴(廉)으로 하거나, 


믿음(信)으로서 하거나, 


이해(利)로서 하거나, 


비겁(卑)하게 할 수가 있는데, 



평화롭게 한다는 것은 조용히 한다는 것이고, 


정직하게 한다는 것은 곧게 한다는 것이며, 


기쁨으로 한다는 것은 즐겁게 한다는 것이고, 


분노로 한다는 것은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고, 


명성으로 한다는 것은 그 상대를 발동시킨다는 것이며, 


행위로 한다는 것은 성공토록 한다는 것이고, 


청렴으로 한다는 것은 깨끗이 한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이며, 


이익으로 한다는 것은 구하도록 한다는 것이고, 


비겁하게 한다는 것은 아첨한다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지혜로운 사람과의 대화는 박식함에 의지해야 하고, 


모자란 사람과의 대화는 명확한 판단에 의지해야 하며, 


판단을 잘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요점을 집어서 말해야 하고, 


높은 사람과의 대화는 권세에 의지해야 하며, 


부유한 사람과의 대화는 높은 지위에 의지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과의 대화는 이익에 의지해야 하며, 


천한 사람과의 대화는 겸손함에 의지해야 하고, 


용감한 사람과의 대화는 용감함에 의존해야 하며, 


지나친 사람과의 대화는 결연함에 의지해야 한다.

#귀곡자


몸은 안에 있으면서 바깥 일을 말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몸은 바깥에 있으면서 안의 깊은 이야기기를 하면 위험해 진다. 


남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남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며, 


남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면서 따르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멀리해야 어두운(陰) 곳에서 나아가 밝은(陽) 곳에서 그것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떠나는 자는 조용히 놓아주고 놓아주는 자는 직급을 올려주며,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지극히 정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아는 자는 모략을 계획하게 하는 자로서 쓸 수 있으나, 


이것을 알지 못 하는 자는 쓸 수 없다.

#귀곡자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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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싹트기까지 아름다움은 간판으로서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사랑이라는 정열을 북돋아 주며, 상대방이 아름답다는 칭찬을 남들에게서 듣고 있는 동안에 사랑하게 된다. 


강한 감탄은 극히 사소한 희망까지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애론 #스탕달


미련하게 고지식하거나, 누구에게나 미소를 던지는 남자에게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교계에서는 여자에게 진력이 났다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태도이다. 


사람은 너무 보잘것없는 식물을 웃음거리의 자료로 삼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도 우리의 허영심은 너무나 손쉬운 승리를 경멸한다. 


그리고 남자는 어떤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맡겨진 것은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연애론 #스탕달


인생의 불행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이,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억으로 남지 않는 일이다. 


영혼은 너무나 감동하여 교란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의 원인 또는 감동에 따르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일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영혼은 감각 자체가 되어 버린다.

#연애론 #스탕달


정열적인 사랑을 느끼지 못 하는 남자는 동시에 미의 효과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것은 그가 여자에게서 받는 가장 강한 인상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새틴 모자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든거리는 남자는,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 가까이 와도 자기가 냉담한 데 놀란다. 


그런 사람은 남이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자기가 가엾게 생각된다. 


절세의 미인도 이틀째 되는 날에는 그다지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며, 결정 작용을 저해한다. 


그녀들의 가치는 누구나 알고 있다. 


즉 일종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녀들의 애인의 명단에는 바보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왕족이나 백만장자 따위들······

#연애론 #스탕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애정이 두텁고 의심이 많다. 


가장 순진한 여자도 그렇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인생에 실망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소개될 때, 뻔히 알 수 있는 평범한 태도로 나오면, 상상력을 위축시키게 하여 결정 작용을 저해한다. 


이와 반대로 연애는 첫 번째의 소설적인 상황에서 개가를 올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놀라움은 특수한 사건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미 결정 작용에 필요한 두뇌의 작용을 반쯤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연애론 #스탕달


눈짓은 정숙한 교태의 커다란 무기이다. 


눈은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으나, 나중에 언제든지 부정할 수 있다. 


눈짓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론 #스탕달


사랑이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으로 잡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색정의 행복은 훨씬 현실적이며 흔히 농담의 재료가 되기 쉽다. 


정열적인 사랑에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는 그것에 이르기 위한 최후의 한 발자국만큼 완전한 행복은 못 된다. 


그러나 행복이 그 기억을 남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것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연애론 #스탕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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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말로 표현하면 그 도는 늘 이러한 도(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비롯되고, 

이름 있는 것에서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언제나 억지로 보고자 하는 마음 없이 보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되고, 

언제나 억지로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 그 껍데기만을 보게 된다. 


이 둘은 같은 것인데, 이름만 서로 달리한다. 


똑같이 ‘그윽함(신비로움)'이라 하는데, 신비롭고 신비로워서 온갖 신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門이 된다.

#도덕경 #노자 #왕필


현玄이란 그윽함이다. 


고요하고 아무 것도 없으니 처음과 어미가 모두 거기서 나온다.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 


즉 특정하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어서 그윽하다고 했다. 


그것을 그윽하다고 말한 것은 하나(一)인 그윽함은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처럼 특정하게 이름 지어 부르게 되면 그윽한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윽하고도 그윽한 것이다. 


온갖 오묘함은 모두 다 거기서 생겨난다. 


그래서 온갖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했다.

#도덕경 #노자 #왕필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앞세우지 않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내버려두지만 (오히려) 몸이 보존된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대아大我)을 이룬다.

#도덕경 #노자 #왕필


최상의 선善은 (언제나)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하지만 그 공功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잘 머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잘 머무르고, 
아주 깊이 헤아리며, 
어질게 잘 어울리고, 
아주 믿음직스럽게 말하며, 
이치에 맞게 잘 다스리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며, 
때를 잘 맞추어 움직인다. 


(그러나) 결코 그 공을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도덕경 #노자 #왕필


혼魂(마음을 관장하는 넋)을 하나로 몸에 싣고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운을 온전히 하고 부드럽게 해서 갓난아이와 같이 될 수 있는가? 


마음을 씻고 닦아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억지로 일삼은 지식을 사용치 않을 수 있는가? 


열리고 닫히는 하늘 문(道)과 같은 암컷이 될 수 있는가? 


사방을 두루 밝히고 (사방에 두루) 미치지만 억지로 일삼지 않을 수 있는가? 


(도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그 공을) 소유하지 않고, (그 공에) 기대지 않으며, 기르지만 그 기른 것을 부리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덕스러움이라고 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없음(텅 빈 공간)이 있으므로 수레로서의 쓸모가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없음(오목하게 파진 부분)이 있으므로 그릇으로서의 쓰임새가 있다. 


창문을 내어 집을 만드는데, 
그 없음(내부의 텅 빈 공간)이 있으므로 집으로서의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로운 것은 없음(無)의 쓰임새 때문이다.

#도덕경 #노자 #왕필


무릇 여기서 무엇무엇 같다고 한 것은 모두 그 모습을 나타내거나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이다. 


무릇 어둠으로(흐릿하게) 다스리면 사물(백성)이 밝음을 얻고, 


혼탁함으로써 고요하면 사물이 맑아지고, 


편안함으로써 움직이면 사물이 살아난다. 


이는 저절로 그러한 이치(道)이다. 


누가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서서히(徐)라는 말은 세밀하면서도 신중하다는 말이다. 


(가득 차기를 바라지 않음은)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치기 때문이다. 


폐蔽란 가려서 덮는다는 말이다.

#도덕경 #노자 #왕필


텅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독실히 하여, 만물이 함께 일어나 되돌아감을 나는 본다.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근원)로 되돌아간다.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고요함(靜)이라 하고, 


고요함을 일러 운명(命)으로 돌아감이라 하고, 


운명으로 돌아감을 일러 늘 그러함(常)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明)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 하면 헛되이 흉함을 일으킨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되니, 


포용함은 곧 공평함이요, 


공평함은 곧 왕이요, 


왕은 곧 하늘이요, 


하늘은 곧 도요, 


도는 곧 영원함이니,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위대한 덕은 오직 도道만을 따른다. 


도라는 것은 오직 황홀하여 없는 듯 있는 듯 하되 그 가운데 형상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하되 그 가운데 사물이 있다. 


깊고도 어둡지만 그 안에 정미함이 있고, 그 정미함이 매우 참되어 그 안에 미더움이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을 떠나지 않고 사물의 근본을 다스린다. 


내가 어떻게 사물의 근본이 그러한지를 알겠는가? 


이로써 안다.

#도덕경 #노자 #왕필


큰 도는 넓고 넓어서 두루 사방에 존재한다. 


만물이 그것에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자랑하지 않고, 


공功이 이루어지지만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만물을 먹여주고 길러주지만 그 운동 변화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항상 무욕하니 작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이 돌아가되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 스스로 크다(위대하다)고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큼(위대함)을 이룬다.

#도덕경 #노자 #왕필


장차 거두어들이려면 반드시 먼저 베풀어야 하고, 


장차 약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강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며, 


장차 없어지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흥성하도록 해주어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러 ‘묘한 밝음(밝음을 감춤)'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견고하고 강한 것을 이기나니,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나라에 이로운 기물器物은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 #노자 #왕필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품으며, 텅 빈 기氣로써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로움·모자람·착하지 못함인데, 왕공王公은 이것들로 칭호를 삼는다. 


그러므로 사물은 혹 덜어내도 (오히려) 보태어지고, 보태어도 (오히려) 덜어내게 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치니, ‘억센 사람은 제 명대로 죽지 못 한다'는 것을 나는 장차 가르침의 아비로(근본으로) 삼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온갖 사물과 형체는 하나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는가? 


‘없음'으로 말미암아서다.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니, 하나를 일컬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는데, 어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드디어 셋을 낳는다. 


없음을 좇아서 있음으로 나아가니 수數는 여기에서 다하고 (즉 모든 수가 여기로부터 나오고), 이렇게 나온 것은 도의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생겨남에 나는 그 주인을 안다. 


비록 그 모양이 만 가지나 텅 빈 기氣의 조화는 하나이다. 


백성들은 저마다 마음이 다르고,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지만, 왕후王侯는 하나를 얻어서 주인이 된다. 


하나로써 주인이 되니 어찌 그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도덕경 #노자 #왕필


큰 나라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굽듯이 하라. 


도道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귀신이 신통력을 부리지 못 한다. 


그 귀신 자체가 신통력을 부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신통력이 사람을 해치지 못 하는 것이다. 


그 신통력만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인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이 둘은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므로 덕德이 함께 이에 돌아간다.

#도덕경 #노자 #왕필


일삼되 억지로 일삼지 않고, 


일하되 의도적으로 일하지 않으며, 


맛을 내되 억지로 맛을 내지 않으니, 


크고 작고 많고 적음에 원망을 덕으로써 갚는다. 


어려운 일을 그 쉬운 것에서부터 하고, 


큰일을 할 때는 그 작은 일에서부터 한다. 


천하의 어려운 것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유발된다. 


이로써 성인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큰일을 이룬다. 


가볍게 승낙하다 보면 반드시 믿음이 적어지게 되고, 


아주 쉽게 여기다 보면 반드시 아주 어려워지게 된다. 


이로써 성인은 오히려 일을 어렵게 여기나니, 마침내 어려움이 없다.

#도덕경 #노자 #왕필


훌륭한 무사武士는 힘으로 상대와 겨루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분노로써 상대를 대하지 않으며, 


적敵을 잘 이기는 사람은 상대와 더불어 맞서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그 아래에 머문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사람을 부리는 자의 힘이라고 하며,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고 하니, 


옛날의 지극한 준칙(道)이라 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사람의 (신체는)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게 굳는다. 


만물 초목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그것이 죽으면 마르고 뻣뻣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기만 하면 승리하지 못 하고, 나무가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 


강하고 큰 것은 낮은 곳에 임하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높은 곳에 임한다.

#도덕경 #노자 #왕필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 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 하다. 


선한 말은 변명하지 않고, 

변명하는 말은 선하지 않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위함으로써 자신은 더욱 갖게 된다. 


남에게 베풀므로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작위 하되 다투지 않는다.

#도덕경 #노자 #왕필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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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대한 중국 문자는 ‘머리'라는 뜻의 '首'와 '가다'라는 뜻의 '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빌헬름도 도를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도를 '길’ '섭리'로, 심지어 예수회의 수도자들은 '신神'으로 번역한다.


이는 모두 번역하기 곤란함을 나타낸다. 


'머리首'는 의식을, 그리고 '가다行'는 '길'을 지시한다. 


그 이념은 다음과 같다.


'의식적으로 가다’ 혹은 '의식적인 길'이다. 


이로써 '천상의 심장'으로서 '두 눈 사이에 살고 있는’ '천상의 빛'이 도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성과 생명은 천상의 빛에 포함되는데, 유화양에 따르면 그것들은 도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황금꽃의_비밀 #칼_구스타프_융 #리하르트_빌헬름


우리 텍스트는 “위대한 일자一者인 황금꽃에 관한 비밀을 공개한 것"을 약속한다.


황금꽃은 빛이며, 천상의 빛은 도이다. 


황금꽃은 내가 환자들에게서 자주 마주쳤던 바로 그 만다라 상징에 해당한다.


황금꽃은 규칙적인 기하학적 장식으로, 혹은 만발한 꽃의 조감도로 그려진다. 


그 식물은 저 아래에 있는 어떤 어두움으로부터 움트고 상부에 빛의 꽃을 들어올리고 있는, 빛이나 불꽃의 색채로 모습을 드러낸 형상으로 가장 자주 나타난다(마치 크리스마스트리와 비슷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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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꽃의 출현은 또한 ‘설산의 변경’ '근원적 통로’ '가장 지복한 영토’ '무한의 땅’ '의식과 생명이 펼쳐지는 제단'이라고도 부른다. 


『혜명경』은 “만약 죽는 이가 이런 시원始原의 위치를 알지 못 하면, 수천의 탄생과 수만의 세대를 거치더라도 의식과 생명을 하나로 하는 통일성을 발견하지 못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로 있는 첫 출발은 또한 최고의 목표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다의 바닥, 즉 무의식의 어두움 속에 있다.

 
'배아주머니'에서 의식과 생명(본성과 생명, 즉 性과 命)은 아직 '통일체’, 즉 "불에 달구어진 화로 속 불씨처럼 나누어지지 않고 혼합되어있는 것"이다.


"배아주머니 내부에는 지배자의 불이 있다.” 


“배아주머니에서 모든 현자들이 각자의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는 불의 유비를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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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수행의 가르침은 신들의 인식을 당연히 전제한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우리의 텍스트가 ‘텅 빔의 중심’ '텅 빔이자 생명력의 신이 사는 곳'으로 표현하듯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생명력에서 자유롭게 된, 의식의 빛을 막 발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수천 겁劫동안에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마야Maya의 미망迷妄은 단순한 이성의 결정에 의해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무게에 해당하는 모든 대가가 지불되는 상태에 이를 정도의 근본적이고도 지루한 준비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의식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 미망은 벗겨지지 않고, 그 내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 환영에서 벗어난 지고함에 도달하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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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텍스트에 따르면, 무의식의 형태에는 신들뿐만 아니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도 나타난다. 


빌헬름은 ‘魂혼'이라는 단어를 아니무스로 번역하였다. 


실제로 '아니무스'의 개념은 혼에 잘 들어맞는다. 


그 글자의 형상은 '云운'과 '鬼귀'를 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혼은 구름의 정령이고, 보다 드높은 양의 원리에 속하는 호흡의 영靈이어서 남성적이다. 


그것은 죽은 후 위로 상승하여 '선仙’, 즉 '뻗어나가고 현시하는’ 정령 혹은 신이 된다. 


아니마, 즉 '魄백'은 '白백'과 '귀鬼'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백색의 혼령'인데, 저급한 태곳적 육체의 혼으로 음의 원리에 속하므로 여성적이다. 


그것은 죽은 후 아래로 가라앉아 '귀鬼’, 데몬Damon이 된다. 


이는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 망령,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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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무스는 천상의 심장에 있으며, 낮에는 눈(즉 의식)에 살고 밤에는 간肝에서 나와 꿈을 형성한다.” 


아니무스는 “우리가 위대한 공허로부터 획득한 것이고, 근원적 시초부터 언제나 하나의 형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아니마는 ‘보다 무겁고 불분명한 것의 힘'으로, 육체적으로 작용하는데, 주로 육체의 심장에 고착하고 있다.


'쾌락과 분노의 반응'은 그의 작용이다.


“깨어날 때 어둡게 침작하고 있는 자는 아니마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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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재빨리 일어나고 있는 것을 멈추어서 관조하도록 해야 한다. 


관조하여 다시 고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깨달음의 확립에 필요한 두 가지 태도이다. 


즉 그것은 빛의 원환주행이고, 그 원환주행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정이다. 


빛이야말로 관조이다. 


관조 없는 고정은 빛이 없이 이루어지는 원환주행이다. 


고정 없이 이루어지는 관조는 원환주행 없는 빛일 뿐이다. 


잘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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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상태로 앉아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종종 산만해져버린다. 


산만함을 의식화하는 것은 그것을 없애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태만을 의식하고 있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서로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무의식 상태의 태만은 실제적 태만이고, 의식적 상태의 태만은 전적으로 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청명함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만함은 정신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태만은 정신이 아직 순수하게 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다. 


산만함은 태만보다 훨씬 쉽게 개선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어떤 병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프거나 가려움을 느낀다면, 이는 약으로 다스려야 하는 병에 해당한다. 


태만도 하나의 질병과 같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느끼지 못 하는 병과 관련된다. 


산만함은 모으게 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정돈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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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환주행이 제대로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징후들이 있다. 


그 첫번째, 명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신들이 계곡에 있게 된다. 


수백 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각 소리는 너무도 뚜렷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모두 계속해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는 언제나 들리도록 되어 있으나 평소에 우리는 그것을 결코 듣지 못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곡에 신들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끔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고요 속에 있노라면 눈의 빛目光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완전히 밝아지는데, 마치 구름 가운데 있는 것같이 되고 만다. 


눈을 열어 자신의 몸을 찾으려 하지만,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이렇게 말한다: 
“텅 빈 방에서 밝게 환해진다虛空生白.” 


이때는 안이든 밖이든 모두 똑같이 환해진다. 


이는 매우 유력한 징후이다.

혹은 명상 상태로 앉아 있으면 몸이 완전히 비단이나 연옥처럼 반짝이게 된다. 


앉아 있는 것이 무겁게 느껴졌으나 이제 위로 끌어올리는 듯 느껴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이 되돌아와서 하늘에 닿는다神歸頂天.” 
시간이 지나면 실제로 날아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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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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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을 뛰어넘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자기 이상의 것을 창조했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거대한 조류의 한가운데서 그저 썰물이기를, 인간을 초월하느니 차라리 동물로서 퇴화하기를 원하는가? 


원숭이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웃음거리이며, 보잘것없는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도 역시 ‘초인'과 비교한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웃음거리이거나 수치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껏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 왔지만, 그대들의 내부 세계의 대부분은 아직도 벌레로 가득 차 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으며, 아직도 인간은 여느 원숭이 못지않은 원숭이인 것이다. 


그대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결국 '식물'과 '유령’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대들에게 식물과 유령이 되라고 명령하지는 않겠다. 


들으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에 대해 가르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초인은 대지(大地)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초인은 대지의 뜻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사후세계의 희망에 대하여 설득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毒)을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경멸하는 자들이며, 대지가 가장 싫어하는 죽어 가는 자이자 독을 자청하여 물려받은 자들이다. 


대지는 이런 자들에게 지치고 권태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어 사라져야 함은 마땅하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이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보잘것없는 안일함이지 않은가. 


나의 행복은 생존 자체를 변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이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이 지식을 갈구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비참한 향락인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이제까지 나를 광란케 한 적이 없다. 


얼마나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지쳐있는가. 


그 모든 것들은 궁핍과 불결과 그리고 보잘것없는 향락인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정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내가 불꽃도 숯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불꽃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할 때이다. 


'나의 동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히는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동정은 어떠한 십자가의 형벌도 아니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일찍이 이렇게 외쳐본 일이 있는가. 


아아, 일찍이 그대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더라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인간이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 같은 존재이다. 


심연 위에 놓인 하나의 밧줄과 같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 위를 뛰어넘는 것도, 그 위를 지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한 일이며, 공포에 질린 채 떨고 있는 것도, 머물러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의 징검다리요, 결코 어떠한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의 과도(過渡)이자 하나의 몰락이라는 데 있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몰락 이외에는 살아갈 방법을 모르는 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피안(彼岸)을 향해 건너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대한 숭배자요, 또 하나의 피안을 동경하는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몰락하고 희생해야 하는 까닭을 별나라의 배후에서 찾는 자들이 아니라, 앞으로 초인의 대지가 되도록 자신의 몸을 대지에 바치는 자들을 사랑한다. 

나는 인식하기 위해 살며, 또한 언젠가 대지에 초인이 생존할 것을 인식하려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자신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 

나는 초인을 위해 집을 짓고, 초인에게 대지와 동물과 식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일하고 발명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몰락을 더욱 빠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 이유는 바로 덕을 몰락하려는 의지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방울의 정신도 자기 자신을 위해 숨겨두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덕 자체이고자 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성품과 운명을 만들어내는 자를 사랑한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덕을 위해 살고, 또한 자신의 덕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덕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자를 사랑한다. 

하나의 덕은 두개의 덕보다 낫다. 

왜냐하면 덕은 인간의 운명을 이어주는 매우 훌륭한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낌없이 자신의 영혼을 베푸는 자, 어떠한 감사도 바리지 않고, 어떠한 보답도 원치 않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나눠 주고 자기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주사위가 행운을 가져올 때 수치를 느끼고서, ‘나는 그저 속임수 많은 사기꾼인가?’ 하고 자문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멸망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행위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들을 던져 주고는, 항상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실행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그의 몰락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인정하고 지난 세대들을 구제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존하는 사람들과 힘을 겨루면서 몰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신을 징벌하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신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영혼이 상처를 받았을 때에도 그 깊이를 잃지 않으며, 사소한 체험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그 다리 위를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은 그의 몰락을 재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고 그의 심장은 자신을 몰락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의 이마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검은 구름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번개가 칠 것임을 예언하고, 또한 예언자로서 멸망해 가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언자이며, 동시에 먹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리하여 이 번개는 '초인'이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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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해 보라 형제여, 
사자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 약탈하는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하며 망각이다. 


하나의 출발이며 하나의 놀이이다. 


자전하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다. 


그리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여. 


창조라는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야 정신은 그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상과 격리된 자기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아, 형제여! 


내가 창조한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작이며, 인간의 망상이었다. 


그 신은 인간이었다. 


인간과 자아의 한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유령은 나 자신의 잿더미와 불길로부터 내게로 온 것이었다. 


피안에서 나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형제여, 그래서 무엇이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고민하는 자이며, 나 자신을 초극했다. 


나는 나의 잿더미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더욱 빛나는 불꽃을 만들었다. 


보라! 
그때 유령은 나에게서 달아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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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낸 것은 병든 자, 죽어 가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이 달콤하고도 음산한 독소도 역시 육체와 대지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모든 별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했다. 


‘아,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와 행복에 이르는 하늘의 길이라도 있었으면'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빠져 나갈 하나의 출구와 핏빛 샘물을 발견했다. 


이 무뢰한들은 이제 자신들이 육체와 대지에서 벗어난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탈의 선풍과 환희는 누구의 덕택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육체와 대지 덕택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글로 쓴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피로 쓰여진 것만을 사랑한다. 


피를 가지고 쓰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독서하는 게으름뱅이를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라면, 독자에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한 세기를 산다면 정신 그 자체가 악취를 발산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운다면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 자체가 부패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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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국가란 무엇인가? 


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민족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국가는 냉혹한 괴물 중에서도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것은 또한 냉정하게 거짓을 일삼는다. 


그리하여 그 기만성이 때에 따라 입에서 굴러 나오곤 한다. 


“나, 즉 국가는 민족이다."라고. 


그것은 거짓말이다. 


일찍이 민족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을 베푼 것은 창조자들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이 민족의 징표를 나는 그대들에게 보여 주련다. 


모든 민족은 제각기 선악에 관한 자기 언어를 갖고 있다. 


그 말을 이웃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 한다. 


민중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습관과 율법 속에 그들의 언어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하여 온갖 거짓말을 한다. 


무슨 말을 하든지 국가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또한 그가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것은 모두 훔친 것이다. 


국가의 모든 것은 가짜이다. 


그것은 훔쳐낸 이빨로 마구 물어뜯는다. 


그렇다. 


그의 내장 자체도 거짓이다. 


선악에 대한 언어의 혼란, 이 정표를 나는 국가의 징표로서 그대들에게 보여 주련다. 


이 징표는 죽음에 대한 의지를 표시하고 있다. 


이 징표는 죽음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눈짓을 보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자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 남아도는 자들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선인이건 악인이건, 만인이 독을 마시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만인이 자기를 상실하는 곳-만인이 스스로 서서히 목숨을 끊는 ‘삶'이라고 불리는 곳이 곧 국가인 것이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창조하는 자의 작품과 현명한 자의 보물을 훔쳐 낸다. 


훔친 물건들을 그들은 문화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질병과 재난이 된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병들어 있으며, 담즙을 뱉어 놓고는 신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서로를 삼키지만 하나도 소화시키질 못 한다. 


이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얻음으로써 도리어 가난뱅이가 된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와 같은 많은 돈을 탐낸다. 


이 약삭빠르게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의 꼴을 보라! 


그들은 서로를 뛰어넘으며 기어올라서 진흙탕과 깊은 수렁 속에 서로를 끌어들이곤 한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왕관을 가지고 서로 싸운다. 


그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광기이다-마치 행복이 옥좌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옥좌에는 때때로 진흙탕이 앉아 있고, 때때로는 옥좌가 진흙탕에 앉아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대지는 아직도 위대한 영혼들 앞에 개방되어 있다. 


고독하게 홀로 혹은 둘이서 은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은 장소가 남아 있다. 


그 주위는 고요한 바다의 향기로 충만해 있다. 


위대한 혼령에게는 자유로운 생이 개방되어 있다.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적게 지배당한다. 


적당한 가난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국가가 멸망한 곳, 거기에 비로소 참 인간이 등장하며 그들의 삶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꼭 있어야 할 자들의 노래, 단 한 번뿐이며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선율이 몰려온다. 


국가가 없어지는 곳. 


나의 형제들이여,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라! 


그대들은 초인으로 향하는 무지개를, 초인의 다리를 보고 싶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의 친구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나는 그대가 독한 파리 떼에게 쏘이는 것을 본다. 


차갑고 사나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몸을 옮겨라!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그대는 작고 비참한 자들을 너무 가까이하고 살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들의 복수에서 도망쳐라! 


그대에게 그들은 복수만을 일삼는다. 


이제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말라! 


그들은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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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비극과 가슴 아픈 일들을 사랑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암캐를 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은 너무나 잔인한 눈을 갖고 있다. 


고뇌에 가득 찬 자들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의 정욕에 가면을 씌우고는 동정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러한 비유를 그대들에게 말해 주려고 한다. 


자신의 마귀를 내쫓으려다가 도리어 스스로가 암퇘지 무리 속으로 빠져든 자가 많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순결이란 무엇인가? 


순결이란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찾아 왔다. 


우리가 이 어리석음에게로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손님에게 정성을 베풀고 침실을 제공했다. 


이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결혼이란, 창조한 자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를 지닌 자로서 서로 존경하는 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의 결혼의 의미이며 진실이 되도록 하라. 


그런데 너무나 많은 속물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인가? 


아, 빈곤한 한 쌍의 영혼이여, 추잡한 한 쌍의 영혼이여, 가엾은 한 쌍의 향락이여!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결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하늘나라에 의해 맺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용지물들의 하늘나라를.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천국의 그물에 걸린 동물들을.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최상의 사랑이라야 다만 약간의 황홀경이요, 괴로운 정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대에게 보다 높은 길을 가르쳐 주는 등불이어야만 한다. 


그대들은 자신을 초월하여 사랑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우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라. 


그리하여 그대들은 사랑이라는 잔 속의 쓴맛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상의 사랑도 역시 쓴맛이긴 하다. 


그리하여 사랑은 초인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창조자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한다. 


창조자에 대한 목마름, 초인에 대한 화살과 동경. 
형제여, 말해 보라! 


그대의 결혼에 대한 의지도 이러한가? 


이러한 의지를, 이러한 결혼을 나는 신성하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에게 말해 보라. 


어째서 황금이 최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귀하고도 무용하고, 그 빛은 반짝이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자신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황금은 오직 가장 높은 덕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최상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누어 주는 자의 눈은 금빛처럼 빛난다. 


황금의 찬란한 빛은 달과 태양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다. 


나누어 주는 최고의 덕은 귀하고 무용하며, 또한 반짝이면서도 광채가 부드럽다. 


최상의 덕은 나누어 주는 덕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우리의 길은 위를 향해, 종속으로부터 종속을 초극한 곳을 향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라며 타락해 가는 마음은, 우리에겐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를 향해 올라간다. 


정신은 우리들의 신체의 비유이며, 향상의 비유이다. 


모든 덕은 이런 향상의 비유이다. 


그래서 육체는 생성하는 자, 투쟁하는 자로서 역사를 헤쳐 나간다. 


그렇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신은 육체에 대해서 무엇인가? 


정신은 육체의 싸움과 승리의 전령이며, 동료이고, 메아리인 것이다. 


선과 악의 온갖 명칭은 비유이다. 


그런 명칭은 말을 함으로써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암시할 뿐이다. 


그런 명칭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자는 우매하다. 


그대들의 정신은 비유로써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조심하라. 


이때 그대들의 덕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대들의 육체는 향상되고 부활할 것이다. 


그대들의 육체는 크나큰 기쁨에 넘쳐 정신이 황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정신은 창조자, 평가자, 사랑하는 자, 모든 사물의 은인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고독한 자들이여, 깨어 있어라. 


그리고 귀를 기울이라. 


미래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예민한 귀라면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대, 오늘의 고독한 자들이여! 


그리고 세상을 등진 자들이여! 


그대들은 언젠가는 한 대중이 될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 그대들 중에서, 선택된 민족이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된 민족에게서 초인이 태어나야 한다. 


진실로 대지는 구원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벌써 대지의 주위에는 하나의 새로운 향기가 맴돌고 있다. 


축복을 가져다 주는 향기가!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진실로 그대들에게 권하거니와, 나에게서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차라투스트라를 안 것을 부끄럽게 여겨라! 


그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는 친구들을 속였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자는 자기의 적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구를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제자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나의 꽃다발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하지만, 만약 그대들의 존경의 대상이 몰락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몰락하는 존경의 대상에 깔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을 원한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갖는 마지막 의지가 되게 하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그러나 나의 타오르는 창조의 의지는 항상 나의 몸을 인간에게 향하게 했다. 


그것은 도끼로 돌을 쪼개는 것이다. 


아, 그대들, 인간이여. 


돌 속에 한 영상이 나를 위해 잠들어 있다. 


아, 나의 환상의 영상이 그 어느 것보다 단단하고 누구보다도 못생긴 돌 속에 잠들 줄이야! 


비로소 나의 도끼는 그 감옥을 잔혹하게 내리치노라. 


그 돌에서 파편이 튕겨 날아가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나는 그것을 완성할 것이다. 


어떠한 사물 속에서 가장 가벼운 것, 가장 조용한 것, 하나의 그림자가 나에게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즉 초인의 아름다움이 그림자가 되어 나에게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아,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신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선과 악,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자신으로부터 극복되어야 한다. 


평가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평가와 말로써 폭력을 가한다. 


그것이 그대들의 감춰진 사랑이요, 또한 영혼의 불꽃이요, 전율이요, 내뿜는 정열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가치에서는 보다 억센 폭력과 새로운 초극이 성장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알의 껍질은 깨진다. 


그리하여 선악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이란 창조하는 선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일찍이 나 자신은 적나라한, 색깔을 칠하지 않는 그대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새였다. 


해골이 내게 추파를 보냈을 때, 나는 날아가 버렸다. 


나는 차라리 저승에서, 옛날의 망령 사이에서 노예가 되겠다! 


저승의 망령들은 분명히 그대들보다 더 살찌고 배 또한 부르다! 


나는 그대들의 벌거벗은 모습이든, 옷을 입은 모습이든 참을 수가 없다. 


이것이 내 깊숙한 고통이자 슬픔이다. 


그대들, 현대인들이여! 


미래에 대한 공포도, 길 잃은 새를 위협한 것도 그대들의 ‘현실'보다는 좀 더 친근하여 가까이 하기 쉽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태양은 바다를 마시고 그 심연을 빨아올리고자 한다. 


이제 바다의 욕망은 크게 부풀어 오른다. 


바다는 태양의 갈증에 의해 그 입에 흡수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공기가 되고, 빛의 길이 되고, 또 빛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실로 나는 태양처럼 인생과 모든 심해를 사랑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다. 


모든 심오한 것은 나의 높이까지 올라오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그보다 불쾌하고 나쁜 것을 보아 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 대부분은 끔찍한 것이 많아 일일이 말하기도 싫지만, 결코 침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갖고 있지만, 그 밖의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즉,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입, 하나의 커다란 배라든지 또한 어떤 커다란 것에 불과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긋난 불구자'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두려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낭떠러지이다. 


낭떠러지에서는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고 손을 위로 움켜잡는다. 


거기에서 마음은 그 이중의 의지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아,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마음에 깃들어 있는 이중의 의지를 고찰할 수 있는가? 


나의 시선이 드높은 곳을 향해 돌진하고, 내 손이 심연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 


나의 의지는 인간에게 매달린다. 


나는 사슬로써 내 의지를 인간에게 얽어맨다. 


나는 초인에게로 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또 하나의 의지는 초인을 목표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인자이다. 


그것은 동정마저도 죽여 버린다. 


그런 동정이야말로 삶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인간이 깊숙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용기도 역시 괴로움을 깊이 들여다본다. 


그러나 공격적인 용기, 공격하는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인자이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그것은 말한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번!” 


이러한 말 속에 울려 퍼지는 함성이 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은 들으라.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행복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내가 여자들을 쫒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여인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육욕, 그것은 참회자의 옷을 입은 모든 육체의 경멸자들에게는 하나의 형벌이며,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의해 ‘세속적인 것'으로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욕은 온갖 혼란과 오류의 교사들을 비웃으며 조롱하기 때문이다. 


육욕, 그것은 천민들에게는 그들의 몸을 천천히 태우는 불길이며, 벌레 먹은 모든 재목과 악취가 넘치는 모든 누더기들에게는 금방 뜨거운 불과 연기를 뿜어내는 난로이다. 


육욕, 그것은 자유로운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 낙원의 행복이며, 미래가 현재에게 바치는 넘쳐흐르는 감사이다. 


육욕, 그것은 한층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을 표현하는 위대한 비유적 행복이다. 


즉,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과 결혼 이상의 것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보다 자신과 자신이 더 낯선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낯선가를 확연하게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 


육욕, 하지만 나는 내 사상의 주위에 울타리를 치리라. 


그리고 내 말의 주위에도 울타리를 치겠다. 


돼지와 방탕자들이 나의 정원으로 스며들지 못 하도록!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지배욕, 그것은 냉정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뜨거운 채찍이며, 잔혹한 자들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혹독한 고문이며, 이글거리는 화형장 장작더미의 뜨거운 불꽃이다. 


지배욕, 그것은 허영심이 많은 여러 민족에게 붙어 있는 사악한 파리이며, 불확실한 덕의 조소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말과 온갖 과장을 타고 다닌다. 


지배욕, 그것은 모든 부패한 것과 천박스러운 것을 깨뜨리고 파헤쳐 버리는 지진이며, 눈을 번뜩이고 명령하며 징벌하는 회칠한 무덤의 파괴자이며, 성급한 대답에 던져버린 물음표이다. 


지배욕, 그 눈빛 앞에서는 인간은 기어 다니고, 몸을 웅크리고 복종하고, 뱀이나 돼지보다도 더 천박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내부로부터 거대한 경멸의 절규가 터져 나온다. 


지배욕, 그것은 거대한 경멸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이 교사는 여러 도시와 국가를 향해 “그대는 물러가라!” 하고 설교한다. 


그래서 결국 여러 도시와 국가는 스스로 “나는 물러간다!” 하고 소리치게 될 때까지. 


지배욕, 그것은 순결한 자와 고독한 자들에게로 올라가고, 더 높은 곳에서 자기 스스로 흡족해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올라간다. 


대지의 하늘에 보랏빛 행복을 매혹적으로 그려 보이는 사랑처럼 달아오르면서. 


지배욕, 하지만 높은 것이 권력을 잡고서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랄 때, 누가 그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겠는가! 


사실 이러한 욕구와 하강에는 온전치 못한 점이란 전혀 없는 것이다. 


고독하고 높은 자가 영원토록 고독의 상태에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 하는 것, 산봉우리가 골짜기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고, 높은 곳의 바람이 낮은 곳을 향해 불어 가는 것. 


오, 그러한 동경에 대해 그 누가 올바른 세례명과 덕목을 찾아낼 수 있으랴!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지금까지 나는 나의 아이를 낳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여자를 찾지 못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제외하고는. 


왜냐하면 오, 영원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나의 영토 안에서 누구라도 해를 입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동굴은 좋은 피난처이다. 


또 무엇보다도 나는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단단한 대지 위에 견고한 다리로 다시 서게 하고 싶다. 


하지만 누가 그대의 어깨에서 그대의 슬픔을 없애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도 약하다. 


사실 오랫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제 늙은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하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_이렇게_말했다 #프리드리히_니체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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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보라.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는가. 


그러니 돈을 쫓아가자. 


저 사람은 더 건강하다. 


건강을 추구하자. 


누군가 뭔가를 하고 있는데 매우 만족해한다. 


그를 따라가자.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남의 일이다. 


사회는 절대로 그대가 자기 자신의 잠재성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불행은 그대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불행도 없고 경쟁도 없을 것이다. 


남이 더 많이 가졌거나 그대가 많이 갖고 있지 않아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야망은 독약이다. 


그대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면, 내가 그대를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라. 


그대가 뛰어난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노벨상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라. 


대단한 화가가 되고 싶다면,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나는 그대의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은 명성과 평판, 성공과 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생겼을 때, 그대가 그것을 포기하고 단념해야 한다고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대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하지만 나는 그대가 성공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 


나는 성공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해주겠다. 


나는 성공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벽하리만치 좋은 일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성공을 그대의 동기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바로 지금 그림과 시와 노래를 놓치고 말 것이다. 


성공이 찾아오면, 그대의 두 손은 텅 비게 될 것이다. 


성공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성공은 그대에게 자양분이 될 수 없다. 


성공에는 아무런 영양분이 없다. 


성공은 그저 뜨거운 공기와 같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성공이 그대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서머싯 몸의 삶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아흔한 살이라는 긴 삶을 살았다. 


그는 매우만족스럽고 성취한 삶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이 만족을 줄 수 있다면 오직 그때만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이 성취감을 줄 수 있다면 오직 그때만이다. 


대저택과 수많은 하인들도 그때만이다. 


삶을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평판과 명성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 순간의 회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가 자기 삶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이다. 


자신의 삶이 기쁨이었는가? 


그 삶은 축제였는가? 


그대는 작은 것들에 행복했는가? 


목욕을 하고, 차을 마시고, 바닥을 청소하고, 마당을 거닐고, 나무를 심고, 친구와 대화하거나 연인과 조용히 앉아 있을 때, 혹은 달을 바라보거나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때, 그대는 이 모든 순간에 행복했는가? 


매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는 행복이었는가? 


기쁨으로 빛나는 순간이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가 성공하고 싶다면-그리고 그대는 우연히, 정말로 우연의 일치로 성공한다-그것이 그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마음은 그대를 앞서가기 시작한다. 


마음은 더욱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된다. 


마음은 ‘더 많은 것에 대한 갈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그대가 가진 것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늘 더 많은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진 것과 더 많은 것 사이의 괴리는 늘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대가 가진 것과 그대가 갖고 싶은 것 사이에는 늘 거리가 존재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선택을 만들지말라. 


그대에게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때로는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일 때가 있다. 


때로는 행복이거나 불행일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나는 이것을 영적인 존재의 특질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을 진정으로 종교적인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찬성하면, 동시에 반대하는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반대하면, 동시에 찬성하는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무언가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면, 그대는 존재계를 둘로 나누게 된다. 


그대는 선택을 만들었고, 선택은 지옥이 된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대는 계속 살아가면 된다. 


성공이 오면 그것을 즐겨라. 


실패가 와도 그것을 즐겨라.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성공'의 의미이다. 


링컨이나 히틀러가 될 필요가 없다. 


그저 평범한 사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면, 삶은 그대에게 크나큰 기쁨이 될 것이다. 


단순해져라. 


자기 주변에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놓지 말라. 


요구하지 말라. 


무엇이 오더라도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여라.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여라. 


그대에게 엄청난 기쁨들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대는 그런 기쁨들을 보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성공에 급급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금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놓치게 될 것이다. 


평범해지는 것이 바로 특별해지는 방법이다. 


단순해지는 것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대가 가만히 앉아서 ‘나는 정신의 존재이다. 나는 신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여러 층들을 깊게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대의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 그것을 폭로하라. 


그것의 맨 아래의바닥, 맨 아래의 근원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꿰뚫고 들어가라. 


그대가 그 모든 층들을 꿰뚫어보게 되는 날… 그 층들은 마치 양파껍질과 같다. 


양파껍질을 계속 벗겨가듯이, 그대의 존재를 계속해서 벗겨가라. 


그대는 더 새로운 층들을 발견할 것이고, 계속해서 벗겨내면… 문득 어느 날, 더 이상 아무것도 벗길 것이 없고, 손에 아무것도 벗길 것이 없고,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 텅 빔 안에서 탐욕은 사라진다. 


바로 그 텅 빔으로부터 깨달음은 일어난다. 


그 텅 빔 안에 신성divine이 존재한다. 


그 텅 빔이 바로 신godliness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탐욕, 욕망, 야망, 질투심, 소유욕, 정복욕과 같이 마음이 기능하는 모든 방식을 주시해야 한다. 


명심하라. 


그것들은 모두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탐욕이 사라지면 분노 역시 사라질 것이다. 


분노가 사라지면 질투심도 사라질 것이다. 


질투심이 사라지면 폭력이 사라질 것이다. 


폭력이 사라지면 소유욕이 사라진다. 


그것들은 모두가 서로 뒤섞여 있다. 


사실 그것들은 동일한 바퀴에 연결된 바퀴살들이고, 그 모두를 지탱하는 중심의 주체는 바로 에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방식들을 깊게 관찰하라.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탐욕은 자신을 무언가로 채우려는 노력을 말한다. 


그것은 섹스나 음식이 될 수 있고, 돈이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탐욕은 내면의 공허함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다. 


공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내면에 뭔가를 계속 채움으로써 자신의 공허함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 것은 신으로 가는 길을 잃는 것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잊는 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내면의 공허함은 신으로 가는 관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공허한 마음이 악마의 마음, 혹은 악마의 작업이라고 배워왔다. 


그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헛소리이다. 


공허한 마음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문이다. 


공허한 마음이 어떻게 악마의 작업이 될 수 있는가? 


악마는 완전히 사망하는 것이 바로 공허한 마음이다. 


악마는 마음을 뜻하고, 공허한 마음은 무심無心을 뜻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은 말한다. 


“그래, 과거는 좋았다. 
하지만 끝났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반복하며 곱씹었던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벗어난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을 떨쳐버린다. 


그것은 미래에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들이다. 


미래에 대한 꿈은 그대가 과거를 변형하고 조작하고 좀 더 아름답게 치장하고 용납할 만한 것들이다. 


덜 고통스럽고 더 즐거운 꿈이다. 


마음이 이것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그대는 실체를 놓치게 된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마음은 절대로 그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마음은 불행해할 구실을 찾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겠다. 


마음은 불행을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마음의 기능이란 불행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가 마음을 떨쳐버린다면, 돌연 그대는 아무런 이유 없이 행복해진다. 


그런 행복은 아주 자연스럽고, 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대는 호흡할 때 자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대는 그냥 계속 숨을 쉰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는 계속 호흡한다. 


행복은 정확히 그것과 같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그래서 동양에서는 행복이 그대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행복에는 외적인 조건이 필요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고, 그것이 그대이다. 


지복은 그대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그것은 성취가 아니다. 


그대가 마음의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지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끔은 미친 사람들이 소위 제정신인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미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물론 잘못된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광인은 마음 아래로 추락한 사람이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 미친 사람들이 그토록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천국은 목표가 아니다. 


천국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대가 현재에 있다면, 신성을 얻을 수 있다.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산다면, 그대는 깨달은 것이다. 


다른 깨달음이란 없다. 


그러면 평범한 삶이 매우 특별해진다. 


그러면 그저 아무도 아니라는 것 자체가 깊은 성취감을 준다. 


나는 이 모든 접근 방식을 산야스sannyas라고 부른다. 


목적과 목표와 미래를 떨쳐버리고,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존재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에 그대 안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다. 


에고는 사라지고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신성만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복이자 진리이다.

#성공이란_무엇인가 #오쇼_라즈니쉬


죽음은 더 길고 깊은 잠이다. 


매일 잠을 잠으로써 그대는 활기를 되찾고 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 


피곤함은 사라지고, 다시 젊어진다. 


죽음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런 기능을 한다. 


이제는 육체가 보통의 평범한 잠으로는 생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를 변화시킨다. 


육체는 너무 오래되었다. 


좀 더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육체가 필요하다. 


그대가 가진 생명 에너지는 새로운 형태를 원한다. 


죽음은 깊은 잠과 같아서 그대가 수월하게 새로운 형태로 이동하도록 만든다. 


그대가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은 죽음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면 죽음은 삶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 하인이 된다. 


잠처럼 말이다. 


그대의 삶은 영원하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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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을 억누르면 분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섹스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섹스 에너지가 분노와 짜증과 폭력성으로 바뀌어서 전보다 더 파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야망으로 바뀔 수 있다. 


섹스를 억압해보라. 


섹스를 억압하면 그대에게는 에너지가 생겨서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든 뿜을 수 있다. 


그 에너지는 권력, 돈, 명예, 명성, 숭배, 금욕주의 따위에 대한 추구로 바뀔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유일한 에너지는 바로 성sex 에너지이다. 


그대 안에 여러 종류의 에너지가 있는 게 아니다. 


직 하나의 에너지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힘을 지닌 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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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바로 이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그대의 걱정은 마치 나무의 잎사귀가 안전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모든 것을 돌보며 나뭇잎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몇 미터 혹은 몇 십 미터 높이에도 중력을 버티도록 수분을 제공한다. 


나뭇잎은 걱정하지 않는다. 


나뭇잎은 자신이 거대한 나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 한다. 


그대는 거대한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그대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곧바로 사라진다. 


달리 말하자면, 그대의 에고가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계가 존재한다.'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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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육체를 기준으로 삼으라. 


마음이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육체에게 물어보라. 


“네 생각은 어떠니?” 
육체가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하면, 그것을 떨쳐버려라.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억누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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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욕망이고 무엇이 필요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라. 


필요는 육체가 원하는 것이고, 욕망은 육체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욕망은 아무런 뿌리가 없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 그저 떠다닐 뿐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요구는 거의 언제나 그대의 육체로부터 나오고, 마음의 요구는 타인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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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고, 그 문은 다름 아닌 욕망일 뿐이다. 


욕망들을 죽여라. 


그것들은 피가 없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피도 찾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를 죽이면 거기에 출혈이 있을 것이다. 


필요를 죽이면, 그대의 일부분이 죽을 것이다. 


욕망을 죽여도 그대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욕망을 떨쳐버림으로써 더 많은 자유가 생겨날 것이다. 


욕망이 아닌 필요의 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대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 이미 들어선 것이고, 천국은 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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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법은 그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테크닉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가진 인성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억압할 뿐이다. 


그것은 선택의 방식이다. 


진정한 자각에 도움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각에 역행한다. 


깨어있는 자각은 언제나 무無선택이다. 


긍정적인 사고법이란 부정적인 것을 무의식에 억지로 넣어두고 긍정적인 사고들로 의식의 마음을 세뇌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무의식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데 있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마음보다 아홉 배는 더 강력하다. 


그래서 어떤 것이 무의식이 되면, 그것은 예전보다 아홉 배 더 강력해진다. 


과거의 방식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고법은 깊은 이해를 담고 있지 않은 매우 빈약한 사고방식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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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부정적인 생각들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대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깨어있는 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의식이 될 것이다. 


그대는 바로 그 순수한 의식으로 삶을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면-가령 화가 나는데 그 화를 억눌러서 그 에너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화를 느끼는 상태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려고 노력한다면-그대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화가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눈속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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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긍정적 사고법이라는 철학을 믿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그 반대, 즉 부정적 사고법도 믿지 않는다. 


둘 다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나의 철학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전체론적이고 실재적이다. 


무엇이든지 간에 전체를 전체로 바라보라. 


좋은 것과 나쁜 것, 낮과 밤, 삶과 죽음, 그 두 가지 모두 존재한다. 


나의 접근법은 존재하는 것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어떤 철학도 투영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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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늘 다른 누군가가 되라고 배워왔다. 


아무도 그대 자신이 되라고, 자신의 존재를 존경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존재는 타고난 선물이다. 


절대로 모방하지 말라.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바이다. 


절대로 타인을 모방하지 말라.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것은 그대가 존재계에 진 빚이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은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다. 


그래서 그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대가 존재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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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매우 짧다. 


달성할 목적이 있다면 서두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해낼지 못 해낼지’ 끊임없이 안달하며 걱정이 앞선다. 


가슴은 벌렁거리고 뿌리부터 흔들린다. 


내면에는 늘 지진이 일어나고, 항상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이다. 


목적을 가지면 조만간 그대는 정신과 병원 상담실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나의 비전은 목적 없는 삶에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붓다들의 비전이다.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한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전적으로 부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순간이 그대에게 주어진다. 


신이나 전체, 혹은 도道, 담마dhamma, 로고스logos라고 불러도 좋은 것으로부터 온 소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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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살아가는 단순한 기쁨을 위해서 순간을 살라. 


그러면 매 순간이 오르가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오르가슴과 같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무나 책무나 명령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대는 여기에 순교자가 되려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완전하게 즐기려고 있는 것이다. 


살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유일한 길은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미래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과거는 저절로 불합리한 게 된다. 


리는 과거를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것을 미래에 언젠가 써먹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과거를 짊어지고 다니겠는가? 


불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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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해야 할 것, 되어야 할 것은 없으며, 되어가는 것은 정지했다. 


되어감이 정지할 때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다. 


존재는 느긋하며 공격적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완전한 현존으로서 매 순간의 맛을 음미할 수 있고 현재에서 현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너무나 서두른 나머지 실체를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대의 눈은 멀리 떨어진 목표, 멀리 떠있는 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대는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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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꿈꾸기만 하는 자가 가질 법한 그대의 기본 철학을 바꾸어라. 


그대의 존재 안으로 편안하게 들어가라. 


어떤 이상향도 갖지 말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더 나은 뭔가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그대는 이미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완벽하다. 


그대에게 결함이 있다면, 그대는 완벽할 정도로 결함이 있다. 


그러나 완벽함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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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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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풀려고 하는 일련의 미스터리극은 곧바로 해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우리는 보통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실제로 그렇다) 것일까? 


두 번째 수수께끼는 미국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에 어째서 미국 국민의 살인율과 자살률이 어떤 때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위험한_정치인 #제임스_길리건


나는 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런 낌새도 못 채고 몇 년을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모두 대통령 선거 주기와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살률과 살인율은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힌 후에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동안에도 줄곧 전염병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증가세는 취임 첫 해나 임기 초반 몇 해 안에 시작되어서 마지막 해나 임기 종반 몇 해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 추세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야 비로소 반전되어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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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폭력 치사 발생률의 평균값과 중간값을 모두 계산했는데 각각 19.4명과 20명이었다. 


나는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유난히 높은 사망률, 
다시 말해서 이 평균값이나 중간값을 웃도는 사망률을 가리키는 데 쓴다. 


그래서 내가 전염병이라고 말할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4명이나 20명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최고치였던 26.5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비전염병 수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1명에서 19.4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을 한암 웃돌았고 내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은 19.4명을 한참 밑돌았다. 
그래서 '능선'과 '골짜기'를 대충 가르는 기준선을 19.4명으로 보든 20명으로 보든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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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카터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은 공화당 정부에서만 일어나고 
전염병 수준에서 비전염병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일어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에서 두 사람 다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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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정부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과 민주당 정부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비교했을 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공화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가 높았고 민주당 정부 때는 순증가세가 낮았다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 정부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감소세가 컸고 공화당 정부 때는 순감소세가 작았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의 변화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공화당 정부 때 폭력 치사의 순변화는 증가 일변도였고 민주당 정부 때의 순변화는 감소 일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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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를 통틀어서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자살률과 살인율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사실은 아마 이제 그다지 놀랍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 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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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을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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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또 민주당에 비해 평균 임금, 최저 임금, 종합 번영도(1인당 국내총생산), ‘상품화 지수’(실업보험을 비롯하여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수당의 측정치)를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다양한 측정치들은 서로를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가령 불황은 실업률을 높이는데, 제임스 갤브레이스(James Galbraith)가 지적하듯이 “실업자가 늘어나면 불평등도 확대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줄어들면 불평등도 감소한다.” 
갤브레이스는 이 점을 수학으로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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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썼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수법으로 애용해 온 전략을 갈고 다듬은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이것을 ‘분할 정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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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에 결부된 개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 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생자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주역은 개인이므로,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건, <일리아스>를 읽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건, 일간지를 읽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 폭력 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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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심장부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정으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여기지만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의 위력을 간과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객관적으로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정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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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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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지 체계는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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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한 성향이 강하다.

#위험한_정치인 #제임스_길리건


서유럽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살인율, 수감률, 상대적 빈곤율은 지난 40년에 걸쳐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의 10~20퍼센트 수준이었다. 


공화당이 휘그당의 전철을 밟아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고 민주당의 ‘충성스런 반대 세력'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서 온다면 미국은 어떻게 보일까? 


미국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언젠가는 인간적이고 문명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렇게 되려면 사회적 계층화와 위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에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민주당 의원들이 좀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만드는 수치심의 윤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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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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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란 주인, 영웅, 짐승, 그리고 포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또한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비겁하게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포주와 여성 역할 남창이라는 봉건적 관계 속에서 보호받기 위해서는 노예 상태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형적 포주는 결코 노예를 보호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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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은 섹슈얼리티를 권력에, 자신만의 쾌락에, 그리고 상대의 고통과 굴욕감에 자동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아르망의 파트너는 글자 그대로 그에게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교는 지배력을 확인하는 작업이며, 자신의 계급을 알려 주는 것이자, 항복하고 봉사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생자를 통해 자신의 계급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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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진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행위가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 깊이 관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는 문화가 승인하는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보여 주는 응축된 척도로 기능한다. 


그래서 섹스는 인간의 여타 행위들 가운데 성 정치학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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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양성 간의 관계의 체제를 사심 없이 검토해 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양성 간의 관계가 보여 주는 상황은 막스 베버Marx Weber가 지배와 종속 관계라 불렀던 ‘지배herrschaft'의 현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질서 안에서 거의 검토되지 않을 뿐더러 인식되고 있지도 않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되어 있는 것은 바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생득적 우월성이다. 


이러한 양성 간의 체제를 통하여 가장 교묘한 형태의 '내면의 식민화'가 이루어져 왔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보다 강고하고, 그 어떤 형태의 계급 차별보다 완강하며, 더욱 획일적이고 분명 더 영속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성 차별이 아무리 완화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의 지배는 우리 문화에 가장 널리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가장 근본적인 권력 개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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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치학은 양성이 기질temperament이나 역할role, 지위status에 관하여 가부장제적 형태로 “사회화"되는 과정을 통해 합의를 얻는다. 


‘지위'에 대해 말하자면, 남성이 우월하다는 편견을 승인하는 것은 남성에게 우월한 지위를, 여성에게 열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첫 번째 항목인 '기질'은 고정관념이 된 성 범주("남성적masculine”, “여성적feminine” 등)를 따라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는 것과 관계된다. 


이는 지배 집단의 필요와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며, 지배 집단의 구성원들이 종속 집단이 그럴 것이라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측면들에 따라 규정된다. 


즉 남성은 공격성, 지성, 힘, 효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은 수동성, 무지, 온순함, “미덕”, 비효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를 보충해 주는 것은 두 번째 요인으로 지적된 '성 역할'이다. 


성 역할은 각 성에 적절한 행위와 몸짓, 태도에 대한 조화롭고도 정교한 코드를 할당해 준다. 


행위에 대해서 살펴보면, 성 역할은 여성에게 가사와 육아를, 

남성에게는 이를 제외한 인간적 성취, 이해관계, 야망 등을 할당한다. 


여성은 생물학적 경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동물의 활동(동물도 나름의 방식으로 출산을 하고 새끼를 양육한다)에 비교해 볼 때 확실히 인간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은 대부분 남성에게 귀속된다. 


물론 '지위'는 다시 그러한 성 역할의 할당에서 비롯된다. 


이 세가지 범주를 분석해 보면, 

'지위'는 정치적 요소, 

'성 역할'은 사회적 요소, 

'기질'은 심리적 요소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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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주요한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사회의 거울이자 사회와 긴밀히 연관된 곳이다. 


즉 전체 가부장제 내부에 있는 단위인 것이다. 


가족은 개인과 사회구조를 매개하면서, 정치적인 권위나 여타의 권위가 불충분한 곳에서 지배와 순응을 행사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도구이자 기초 단위인 가족이 하는 역할은 원형적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사회의 작인(作人,agent)으로 기능하면서 구성원에게 사회에 적응하고 순응할 것을 권장하는 동시에, 가장家長을 통해 국민을 지배하는 가부장제 국가 정부의 단위로 작동한다. 


여성에게 법적 시민권을 허용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조차 여성은 가족을 통해서만 지배를 받으며, 국가와는 그 어떤 형식적 관계도 맺지 못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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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서구 가부장제는 궁정풍 연애courtly love와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 때문에 많이 약화되었다고 생각되곤 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영향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 


동양의 풍습이나 “남자다움machismo"에 대한 노골적인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기사도 행동이 얼마나 여성에게 많이 양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종속된 여성에게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 주는 일종의 유희적 보상인 것이다. 


또한 기사도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부당함을 일시적으로 완화해 주는 동시에, 그 부당함을 위장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기사도 태도는 지배 집단이 종속 집단을 어느 정도 높여주는 척하는 일종의 게임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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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들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처'라는 용어로 설명하며, 새나 뱀의 공격을 받아 절단되어 현재 상태가 된 것이라고 추론했다. 


한 번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계속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여성 생식기에 대한 오늘날의 속어는 “깊이 베인 상처gash"다. 


프로이트는 여성 생식기를 "거세되었다"는 용어로 설명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생식기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혐오는 종교적·문화적·문학적 금기로 입증된다. 


문자 이전 사회에서 여성 생식기를 남근을 거세하는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이라고 믿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생식기에 대한 공포가 그러한 금기의 주된 요인이었다. 


문자 이전 사회의 가부장제에서나 문명화된 가부장제에서나,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보여주는 훈장인 남근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남성의 끝없는 자랑인 동시에 끝없는 불안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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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 혁명은 일차적으로 가부장제라는 제도를 종식시켜야 한다. 


또한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동시에 지위와 역할, 기질에 대한 전통적 사회화를 폐기해야 한다. 


성 혁명은 분리된 성적 하위문화를 통합할 것이며, 이전에는 차별화되어 있었던 양성의 인간적 경험을 융합할 것이다. 


여기에 관계된 것은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범주화되었던 특질들을 재검토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양성의 바람직한 인간형을 재평가하는 것 또한 수반된다. 


즉 남자답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조장하는 것, 
지나친 수동성을 "여성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는 양성 모두에 쓸모없는 일이다) 등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남성적"기질이 지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되는 것, 
부드러움과 사려 깊음이 "여성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특징들은 양성 모두에 적절한 것들이다)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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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성 혁명의 쟁점을 무시하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여성을 위한 투표권"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 혁명을 사소하게 각주 처리하면서 무시하거나, 그것을 노출증 환자들이 성적인 방식으로 일으킨 시시한 잔물결 정도로 오해했다. 


그러나 성 혁명의 시작이 보여 준 거대한 문화적 변화는, 적어도 역사가들이 열정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의 네다섯 번의 사회적 격변만큼이나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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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혁명이 지향했던 것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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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누군가의 아량으로 얻어지는 도금된 쾌락 정도로 생각될 때는,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해방을 위해 투쟁하려는 동기가 생겨나기 힘들다. 


계속해서 말하자면, 성 혁명과 이를 이끌어 온 여성운동은 기사도 정신의 가면을 벗기고, 그 정중한 예의라는 것이 교묘한 조작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해야만 한다. 


또한 공동의 대의를 위해 계급의 전선을 뛰어넘어야 하고, 숙녀와 공장 노동자가, 방탕한 여성과 지체 높은 여성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 혁명의 성공 여부는 이를 얼마만큼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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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다른 “불평등한 권력 형태"를 비교한 자신의 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인 계급은 자신의 특권을 항상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고 응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가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농장주 계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연[본성]'이라는 근거 위에서 자신의 부당한 행위를 정당화했으며, 종속 집단의 위치는 생득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주정치 또한 오래된 가부장제적 권위에서 나온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근거로 스스로를 옹호했다. 


“따라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일반적으로 '관습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하며, 일상적인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 또한 보편적인 관습이며, 그것에 일탈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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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오펜의 『모권론Das Mutterrecht』은 가모장제 기원 이론을 최초로 정식화한 것이다. 


엥겔스는 여가장제(女家長制,matriarchate)를 개인 사유재산도 없고 가족 사유재산도 없는 원시적 공산주의로 보았다. 


사회주의는 부분적으로는 부에 근거한 불공평한 정치 질서가 없는 세계의 사례를 제시해야 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를 제시해야 했다. 


따라서 여가장제는 사회주의가 과거로부터 찾아내고자 했던 ‘단순한 사회’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가모장제"의 성격이 어떠하든(여기에서 엥겔스가 근거하고 있는 인류학적 논의는 오늘날 더욱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개탄해마지 않았던 그 모든 병폐(여성에서 시작하여 다른 형태의 노예제로 나아간, 개인의 소유라는 병폐, 계급, 신분, 계층 제도라는 병폐, 지배계급과 재산가 계급이라는 병폐, 부의 불공평한 분배로의 발전이라는 병폐, 마지막으로 국가라는 병폐)를 수반했다고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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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최초의 사유재산이었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혼해서 남성의 배타적인 성적 소유권의 확립(여성에게는 상호적 소유가 아니었다)을 통해 사유재산이 되었다는 엥겔스의 믿음은 이미 가부장제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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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비용 없이 우연한 만남으로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들조차도 여전히 매춘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때로 경제적 압박감이 없는 여성들로 성욕을 채우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러한 매춘 행위를 통해 여성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남성의 우월성을 “공언"하거나 최소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매춘을 지속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동기가 없는 매춘은 심리적 중독의 일종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창녀를 정의하는) ‘성매매’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기혐오를 쌓는 중독 행위인 것이다. 


그러한 자기혐오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여성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는 설명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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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이 단지 해부학적 특성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유일하고 일차적인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면, 여성은 결코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인지 능력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시작되는 아이의 양육은, (아무리 아이가 어리고 사랑스럽다 해도) 교육할 시간도 없고 그럴 취미도 없어서 괴로워하는 불행한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보다, 최고로 훈련된 직업 양육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엥겔스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급진적 결론은, 현재 이해되는 수준에서의 가족이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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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정부政府는 특히 가부장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 국가나 독재국가는 주로 가부장제적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는 성 혁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규모로 발흥했고, 이후 곧 폐기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 가족의 응집력은 일차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의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경제적 평등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위는 정서적 유대 관계보다는 경제적·법적인 실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현대의 핵가족조차도 여타의 인간적 노력을 남성에게 부여하고 여성의 일을 비천한 가사일과 강박적 양육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성 역할에 있어서 전통적인 분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남성 우월주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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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가장 불행한 측면 중 하나는, 학문이나 과학적 관심사가 문화에 너무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나치 독일은 자신만의 사회조사 방법을 고안했고, 


인종차별 국가는 자신의 광적 증오를 합리화 해 주는 인종차별 과학을 꾸며 냈다. 


미국의 사회과학은 수십 년간 상당한 자유를 성취하면서 인종차별적 편견을 이제 막 몰아내고 있는데 반해, 
수십 년간의 반동의 산물인 강력한 “성 차별적” 편견은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에 만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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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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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란 완벽한 자유의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허가를 구하거나 남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고 마음대로 자신의 재산과 신체를 처리할 수 있는 상태다. 


자연 상태란 또한 평등 상태다. 


모든 권력과 사법권이 호혜적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큰 권력을 갖지 못 한다. 


인간은 모든 종種과 신분이 같은 채로 평등하게 태어나 자연의 같은 이점과 같은 기능을 이용하면서 살아가므로 누구도 남에게 예속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동등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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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으며, 

자연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자연법의 근간을 이루는 이성은, 이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인류에게 동등하고 독립적이므로 누구도 남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상의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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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전 인류를 보호하는 권리에 의해” 죄를 징벌하고 범죄의 재발을 예방할 권력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모든 합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연 상태에서 살인자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 목적은 두 가지다. 


한편으로는 그 행위에 대한 본보기로 징벌을 가함으로써 누구도 아무런 배상 없이 그와 비슷한 위해를 가하지 못 하도록 억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이나 일반적 규칙과 기준을 거부하면서 부정한 폭력과 살육을 저지르고 전 인류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범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범죄자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처리해도 된다. 


그런 사나운 야수와 함께한다면 인간은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안전을 도모할 수도 없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자연법의 토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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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가 나의 동의없이 나를 자신의 권력 밑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는 나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 하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구든 내 자유의 권리를 짓밟고 힘으로 나를 누르지 않고서는 나를 자신의 절대 권력 밑에 둘 수 없고 나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런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나를 보호하는 길이다. 


이성은 나를 보호해주는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라고 내게 명한다. 


따라서 나를 노예화하려는 사람은 나와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남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도 빼앗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유는 다른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상태에서 사회나 국가 구성원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을 간주되어야 하며, 그런 상태는 전쟁 상태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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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자연 상태와 전쟁 상태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을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화, 우호, 상호 원조, 보호의 상태는 증오, 악의, 폭력, 상호 파괴의 상태와 크게 다르다. 


세속의 공통적 지배자가 없고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권력을 가지고 이성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자연 상태다. 

그러나 타인에게 무력을 행사하거나 무력의 의도를 내보이는데도 구제를 호소할 세속의 공통적 지배자가 없는 경우는 전쟁 상태다. 


그런 호소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 인간은 공격자가 같은 사회에 사는 동료 국민이라 해도 전쟁을 벌일 권리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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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목적은 법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고 구제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본래의 목적이 충실히 관철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들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하늘에 호소하는 것뿐이다. 


호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고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판결을 내릴 권위가 없으면 사소한 불화라도 파멸로 향할 수 있다. 


이런 전쟁 상태야말로 인간이 자연 상태를 버리고 사회를 형성하게 된 주요한 이유다. 


세속의 권위와 권력이 있으면, 호소로 구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전쟁 상태가 중단되고 다툼이 그 권력의 판결로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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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연적 자유는 세속의 어떤 상위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인간의 의지나 입법 권력 아래 놓이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법의 지배만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자유는 동의에 의해 국가 내에 확립된 입법권 이외의 어떤 권력에도 예속되지 않고, 
그 입법권이 위탁받은 임무에 따라 법제화한 것 이외에 어떤 의지의 지배나 어떤 법의 제약에서도 벗어난 생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로버트 필머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어떤 법에도 구애되지 않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다. 


정부 아래 인간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정한 입법권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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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사물들이 공유로 주어졌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 

“자기 신체, 행동 혹은 노동의 소유자라는 것 자체가 재산의 중요한 근간이다”. 


발명과 기술로 생활의 편의가 향상된 이후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부양하고 편리를 추구하는 데 이용하는 대부분의 물자들은 완전히 자신만의 것이며, 

남들과 공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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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성원이 사회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법이 정한 형벌을 가한다. 


그에 따라 정치사회에 알맞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서로 결집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자기들 간의 다툼을 판결하고 죄인을 징벌하는 권위가 부여된 공통의 법과 재판소를 가진 사람들은 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그런 공통의 기구(물론 세속적인 기구를 가리킨다)가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는 법과 재판소가 없고 각자가 스스로 판결하고 집행한다. 


그것이 앞에서 제시한 완벽한 자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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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국가는 사회 구성원이 저지르는 범죄에 어떤 징벌이 합당한지 결정하는 권력(입법권)과 그 사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 사회 구성원에게 가한 위해를 징벌할 권력(전쟁과 평화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 목적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재산을 최대한 보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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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들어와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모든 사람은, 

자연법을 거스르는 범죄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징벌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개인이 위정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모든 사안에 관해 범죄의 판결권을 입법기구에 위임하는 것은 곧 국가에 개인의 힘을 이용할 권리를 양도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언제든 그것을 이용해 판결권을 집행할 수 있다. 


그 판결은 개인이 직접 할 수도 있고 대표가 맡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개인 자신의 판결인 것은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 시민사회가 행사하는 입법권과 집행권의 기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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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안을 판결할 때 필연적을 따르는 자연 상태의 불편을 피하거나 치유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위해를 당하거나 다툼이 일어날 때 호소할 수 있는 권위 기구를 설립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은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판결을 의뢰할 수 있는 권위 기구가 없다면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문다고 보아야 한다. 


절대군주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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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모두가 타인의 위반 행위를 징벌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게 행사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이 많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인간은 확립된 정부의 법 아래로 들어가 안전을 도모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징벌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그 대신 별도로 임명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 혹은 공동체가 위임한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그 징벌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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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았듯이 인간이 처음 사회를 이루었을 때는 다수가 공동체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게 되므로 그것을 이용해 수시로 공동체를 위한 법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리들을 통해 그 법을 집행할 수 있다. 


그런 정부 형태는 완벽한 민주정이다. 


입법권을 소수의 선출된 사람들, 그들의 상속자나 후계자에게 위임하면, 그것은 과두정이다. 


또 입법권을 한 사람의 수중에 맡기면 군주정이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의 상속자들에게까지 권력이 넘어가면 세습 군주정이 되며, 


당사자에게만 권력이 주어지고 그가 죽을 때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만 가지는 경우에는 선거 군주정이 된다. 


공동체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혼합해 나름의 정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존_로크_시민정부 #존_로크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해 전횡적인 권력을 갖지 못 하며, 


단지 자연법이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하는 한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국가와 입법기구에 위임할 수 있는 권력도 그 정도에 그치며, 
입법기구는 그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 권력은 최대한으로 확장되어도 사회의 공익을 넘어서지는 못 한다. 


이 권력은 단지 국민을 보호하는 목적만 가지고 있으므로 국민을 파괴하고 예속하고 빈곤하게 만들 권리는 결코 가지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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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간은 권력을 쥐고 싶은 유혹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입법권을 가진 사람이 집행권마저 장악하다면 자신이 만든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할 때 자신의 개인적 이득에 맞추려 하거나, 


공동체의 나머지와 구별되고 사회와 정부의 목적에 어긋나는 이해관계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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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목적은 공동체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 목적을 위해 어떤 변형이 가해진다 해도 어느 누구를 침해하는 것일 수는 없다. 


정부의 누구도 다른 목적을 도모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침해란 공익을 손상시키거나 저해하는 행위를 가리킬 따름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군주가 애초부터 공동체의 이익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왕정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악과 혼란의 뿌리이자 근원이다. 


군주가 그런 존재라면, 왕정의 국민들은 상호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결성하는 합리적인 집단이 되지 못 한다. 


또한 지배자를 섬기게 된 이유도 공익을 수호하고 촉진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국민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며, 지배자의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 지배자의 뜻대로 조종되는 열등한 무리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런 조건으로 사회를 형성할 만큼 이성을 결여하여 짐승이나 다름없다면, 

왕권은 이따금 현실에서도 보듯이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전횡적인 권력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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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부정한 정복자는 칼로 위협해 소유권을 획득하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왕의 옷을 입은 자든 하찮은 악한이든 위해와 범죄를 저지른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추종자가 많다 해도 범죄자는 어디까지나 범죄자이며, 

오히려 그럴수록 더 큰 범죄자다. 


차이가 있다면 큰 강도는 작은 강도를 핍박해 복속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큰 강도는 이 세계의 허약한 정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며, 권력을 틀어쥐고 범죄자들을 응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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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을 외국의 찬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찬탈은 일종의 국내 정복이다. 


차이가 있다면 찬탈자는 타인의 권리를 빼앗으므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찬탈이라고 하면 정부의 형태와 규칙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인물의 교체에 불과하다. 


찬탈자가 자신의 권력을 국가의 적법한 군주나 통치자의 권리 이상으로 확대하면 그것은 찬탈을 넘어 전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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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탈이 타인의 권리를 빼앗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전제는 어느 누구의 권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아예 권리 자체를 넘어선 권력 행사를 가리킨다. 


이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해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자격을 갖춘 통치자라 해도 법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를 잣대로 삼게 마련이다.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 복수심, 탐욕 혹은 기타 비정상적인 열정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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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평범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군주나 입법기구가 위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지를 누가 판단하는가?” 


물론 군주가 정당한 왕권을 행사하고 있다면, 그런 의문은 불만과 파벌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퍼뜨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군주의 측근이나 부하가 처신을 잘 하고 있는지, 


주어진 위탁에 따라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판단할 사람이라면, 


그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가 위탁에 어긋나면 그를 해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 이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개인의 특별한 경우에 적용된다면, 


수백만 명의 복지가 걸린 중대한 사안, 


혹은 막지 않고 놔두면 대단히 곤란하고 값비싸고 위험한 대가를 치를 만한 중대한 해악이 연관된 사안에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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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기구에 영속적인 권력을 내준 것은 정치권력을 영구히 양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이 입법권의 지속 기간에 제약을 두었거나 그 최고 권력을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시적으로만 부여했을 경우, 


혹은 그 권력을 가진 측의 잘못으로 인해 권력이 상실되었을 경우, 
상실되거나 기한이 종료된 권력은 사회로 반환되고 국민이 다시 최고 권력자의 권리를 되찾게 된다. 


그럴 경우 국민은 스스로 판단해 자체적으로 입법권을 보유하거나, 


새 입법기구를 설치하거나, 
종전 체제를 그대로 두고 인물만 교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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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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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생의 한가운데 도달하게 되면 

스스로가 악마보다 더 위대할 것도 

예언자보다 더 미천할 것도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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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넉넉함은 우리의 얼굴을 아름답게 하고 

연민의 정과 존경심을 낳습니다. 


모든 존재 안의 정신은 그의 눈을 통해 나타나며 

얼굴의 표정과 몸짓에서 현상합니다. 


우리의 용모와 말과 행동은 

내면의 넉넉함보다 위대하지 못 합니다. 


눈이 영혼의 창이면 말은 그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그 때 강물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들어와, 들어오라고, 

우리는 바다로 가고 있어.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들어와! 


이젠 나와 함께 있어야지. 


우리는 바다로 가고 있어. 


어서 들어와. 


나에게로 오면 모든 슬픔과 기쁨을 잊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인 근원적인 바다에 다다르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곧 잊게 될 거야!”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영혼의 일치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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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마음을 사로잡는 지혜.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둘 수 있다면 


그의 정신 속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진실로 그 사람은 


신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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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친구는 그대 요구가 응답된 존재입니다. 


친구는 그대가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써 수확을 거두는 밭입니다. 


친구는 그대의 식탁이며 화로입니다. 


그대는 허기가 질 때면 그에게로 와서 평화를 찾습니다. 


그대 친구가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대는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또 '그래'라고 말하기를 억누르지 마십시오. 


친구가 말이 없다면, 그대 가슴은 친구의 가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말 없는 우정 속에서도 모든 생각, 모든 갈망, 모든 기대가 요구하지 않아도 기쁨으로 유지되고 또 나눠지는 것입니다. 


친구와 헤어질 때에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대가 친구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은 친구가 없을 때 더욱 뚜렷해지기에. 


마치 산을 오르는 등산가가 평야에 내려와서 볼 때 산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우정을 맺는 데는 결코 영혼을 깊이 하는 것 이외에 어떤 목적도 두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 자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다만 그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그 그물에는 무익한 것만 걸릴 것입니다. 


그대 친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십시오. 


친구가 그대 사랑의 조수의 썰물 때를 알고 있으면 그로 하여금 그 밀물 때도 알게 하십시오. 


다만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찾는 친구라면 그런 친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하여 빛을 찾으십시오. 


그대의 요구를 채워 주는 것은 친구의 우정이지 그대의 공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정의 아름다움 속에 웃음이 깃들게 하고 또한 기쁨을 나누게 하십시오. 


사소한 이슬 방울 속에서도 마음은 아침을 찾아내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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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건네 주는 그대의 오른손과 


받고 있는 왼손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잘 없어지지 않으며 


두 손이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서도 그 거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대가 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며 


받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실로 가장 먼 거리는 


그대의 꿈과 현실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오직 실천하는 것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은 


기다리는 우울과 


당신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영원한 결혼을 주었습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괴로움을 주는 분이여, 


당신을 따르기에 지치고 


약해진 내 육신을 바라보아 주십시오.

내 마음은 군주였으나 


이제 당신의 노예가 되었고 


나의 인내는 안락했으나 


지금은 나에 대한 형벌입니다.

나의 젊음은 친구였으나 


오늘날 나의 비난자가 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을 신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더 무엇을 바라시렵니까?

어서와요, 감미로운 죽음이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나와 같은 인간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가득찬 


당신의 가슴으로 안아 주십시오. 


나에게 키스해 주십시오.

나의 입술은 어머니의 입술에도, 


님의 볼에도 키스하지 않았고, 


달콤한 애정의 입맞춤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빨리 와 안아 주십시오. 


죽음이여, 나의 애인이여.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마음이 행하는 바를 따르십시오. 


모든 중요한 일에 있어 


당신의 마음만이 올바른 길잡이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삶의_향기 #칼릴_지브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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