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 그것은 곧 실제 있는 그대로를 깨닫는 것, 실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그것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탈바꿈시키려고 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덕을 가져오며,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기억을 간직하지 않을 때에만, 저항의 수단으로서 정의를 추구하지 않을 때에만 자유가 있으며, 그 자유 안에서 실체가, 경험되어야 하는 것을 누리는 지고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결국, 나는 바로 나의 선입견, 내가 원하는 것들, 나의 욕망, 내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서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할지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욕망이 목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목적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삶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혹은 마음이 자신의 조건화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마음이 그 자신의 조건화에서 자유로워질 때, 자유 그 자체가 바로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어떤 진리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유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권위를 절대 따르지 않는다면, 두려움이 없다면, 다시 말해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랑이 생깁니다.

두려움 없는 마음이 정말로 시시하지 않는 마음이며, 진짜 깊이가 있는 마음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그런 마음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유로울 때뿐이기 때문이며,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자유로울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진정한 발견은 강요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며 사회적 영향의 압력이 없는 곳인, 자발적인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 왜 생각하는지, 그리고 생각의 근원과 동기를 관찰하려면 자발적이라는 느낌, 자유롭다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영향이라도 관찰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에 어떤 강요나 압력을 가한다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도대체 생각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고, 마음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유에는 보통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실현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되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 말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친척들로부터 자유롭고, 아니면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싶어 합니다.

자유에 대한 모든 관념은 그 두 가지, 즉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아니면 무엇이 되기 위한 자유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둘 다 반작용이지요?

둘 다 생각의 결과이고, 어떤 형태로든 내적이거나 외적인 강요의 결과물입니다.

생각은 그런 과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지각이란 어떤 것을 볼 때 그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한순간에 아는 겁니다.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진짜인지를 한순간에 아는 이 지각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교활함, 그 지식, 그 지지에 바탕을 두고 추론하는 지성은 본질적인 게 아닙니다.

무언가의 진실을 한순간에 알았던 일이 여러분에게도 분명 가끔씩 일어났을 겁니다.

이를 테면, 나는 아무것에도 속할 수 없구나, 하는 사실 같은 것을 말입니다.

그게 지각입니다.

분석하지 않고, 추론하지 않고, 어떡하면 지각하지 않을까 하고 지성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것들을 하지 않고서, 한순간에 어떤 것의 진실을 보는 것이 지각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유는 여러분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귀중한 열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결코 신이나 진리 즉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찾지 않을 사랑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해도, 다시 말해 온갖 덕을 기르고, 희생을 바치고, 노예를 기르고, 사람을 섬길 방법을 찾아도, 자유가 없으면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있는 실체에 빛을 비추지 못합니다.

그 실체, 뭔가 측정할 수 없는 그것은 자유가 있을 때에만 찾아옵니다.

그 자유는 아무것도 지지하지 않을 때에만,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을 때에만, 괴로워하지 않고 냉소적이지 않고 희망을 갖거나 실망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하는 완전한 내면의 자유입니다.

그런 마음만이 측정할 수 없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요한 문제는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하다는 것인데, 누구도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거나 아니면 마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스스로를 이해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앎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말이에요.

자기를 알려면 뛰어난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추론하고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지식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우 명철한 마음입니다.

즉 조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홀로 있을 수 있는 마음, 자신이 홀로 있음을, 자신이 비어 있음을 직시할 수 있는 마음,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마음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과거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자유는 전혀 없습니다.

마음이 결코 새롭고 신선하고 순진무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건 신선하고 순진무구한 마음뿐입니다.

자유는 나이와는 아무 관계없고, 경험과도 아무 관계없습니다.

자유의 본질은 바로 의식적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이기도 한 습관의 전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습관을 끝내는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보는 문제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자유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내용물 전부를 완전히 비우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거 아닌가요?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딸, 여러분의 아들, 또는 뭐라고 부르건 간에 그것을 여러분은 사랑합니다.

그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사랑에 동기가 있습니까?

제발, 고개를 가로젓지 마세요.

우리에겐 동기가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상대방과 섹스를 하고, 편안함을 주거나 그에게 음식을 먹입니다.

아니면 그에게 의존하고, 그를 소유하고, 그를 지배하고, 그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합니다.

소유, 집착, 그 모든 것이 그 말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질투, 분노, 미움, 불안감, 두려움 같은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자유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㗢동죽竹
,

부귀를 가벼이 여길 줄 알아도 부귀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가벼이 하지 못하며, 명예와 의리를 중히 여길 줄 알아도 다시 명예와 의리를 중히 하는 마음까지 중요시 한다면 이는 현상 세계의 티끌을 쓸어버리지 못한 것이요, 마음속의 사소한 장애를 잊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뽑아내어 깨끗이 하지 못하면 돌은 치웠으나 잡초가 다시 살아날까 두렵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일이 없으면 곧 잡된 생각이 있지나 않은지 살피고, 일이 있으면 곧 경박한 의지가 있지나 않은지 살피며, 뜻대로 되어갈 때는 교만한 언사와 얼굴빛이 있지나 않은지 살피고,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원망하는 감정을 품고 있지나 않은지 살핀다.

이렇게 때때로 점검하여 많은 것은 적게 만들며 있는 것은 없애는 것,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진면목이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쉬파리가 천리마에 붙어 다니면 빠르기는 하지만 뒤에 붙어가는 부끄러움을 벗어나기 어렵다.

담쟁이가 소나무에 의지하여 높이 오르기는 하지만 남에게 의지해서 기어오른다는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풍상을 끼고 살지라도 새나 물고기처럼 사람에게 빌붙듯 하지 않는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자신의 욕망은 방종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되므로 마땅히 이를 억제하는 방법을 써서 억눌러야 한다.

그 방법은 오직 참을 인忍 한 자에 있다.

남의 욕망을 거역해서는 안 되므로 마땅히 이에 순응하는 방법을 써서 조절해야 한다.

그 방법은 오직 용서할 서恕 한 자에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 대해서는 서恕를 적용하고 남에 대해서는 인忍으로 억누르려 하니 이것을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원수의 화살은 피하기 쉬우나 은혜를 베푼 이의 창은 막기 어려우며, 고난 중의 함정은 빠져나가기 쉬우나 즐거운 때의 함정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하늘이 사람에게 화禍를 끼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작은 복을 주어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복이 왔을 때는 무턱대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전후 사정을 살펴보고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하늘이 사람에게 복福을 내리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작은 화를 주어 경계하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닥쳐왔을 때에는 근심만 할 것이 아니라 전후 사정을 잘 살펴보고서 조심스럽게 해결해야 한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보통 사람은 순탄한 환경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군자는 고난 속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보통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만 군자는 일이 마음먹은 대로 진행될 때 오히려 걱정한다.

이와 같이 대개 보통 사람의 걱정이나 즐거움은 감정에 따라 변하지만 군자의 걱정과 즐거움은 이치에 따라 달라진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초연한 태도나 한가한 마음은 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니 어찌 겉모습을 꾸미겠는가.

청아한 외모와 의젓한 기골氣骨은 남의 관심을 바라지 않으니 쓸데없이 연지를 바를 필요가 없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굼벵이는 아주 더러우나 매미로 변해 가을바람에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이 없으나 개똥벌레로 변해 여름 달 아래 광채를 발한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으로부터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두움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일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형세가 위축된 사람은 마땅히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하고, 공과 행行을 원만히 이룬 선비는 그 말로를 잘 살펴야 한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도덕을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적막하게 지내지만 권세에 의지하고 아부하는 사람은 영원히 처량하다.

통달通達한 사람은 사물을 볼 때 사물 외적인 것을 보고 죽은 뒤의 자신을 생각한다.

차라리 한때의 적막을 받아들일지언정 영원히 처량하게 되는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성긴 대밭에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대나무에 소리가 머물지 않으며, 차가운 연못 위를 기러기가 날아가도 기러기가 날아간 뒤에는 연못에 그림자가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도 일이 생기면 마음이 비로소 나타나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따라서 빈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기생이라도 늘그막에 한 지아비를 따르면 일생의 화류花柳생활이 장애가 되지 않고, 정숙한 부인일지라도 늙어서 정절을 잃으면 반평생 지킨 절개가 모두 허사가 된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볼 때 다만 인생의 뒷부분만을 본다" 하였으니 진실로 명언明言이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끝까지 태만하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영웅이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은혜를 베풀 때에는 처음에는 박하게 하고 나중에는 후하게 해야 한다.

먼저 후하게 베풀고 나중에 박하게 베풀면 사람들이 은혜를 곧 잊고 만다.

위엄은 처음에 엄격하게 하고 나중에는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먼저 너그럽게 대하고 나중에 엄격하게 대하면 사람들이 가혹하다고 원망할 것이다.

#채근담 #홍자성 #만해_한용운_역해

Posted by 㗢동죽竹
,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 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면 그뿐이다.
그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 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프라즈나 파라미타,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지혜, 저 피안(彼岸)의 경지로부터 온 지혜다.
이 지혜는 모든 종류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을 막론하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것에도 동일시되지 않을 때 이 지혜가 찾아온다.
각성의 불꽃이 연기조차 없이 순수하게 타오를 때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은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심경(The Hear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핵심, 종교의 심장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것을 잊지 말라.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 하라.
그 전에 멈추면 안 된다.
만일 '너는 이것이다. 너는 저것이다.' 하는 대답이 나온다면 특정한 센터(center)가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개의 센터를 통과하고 그들이 내놓은 모든 대답이 지워진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질문 자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현존(現存)한다.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얻은 모든 대답이 터무니없다.
그리고 결국에는 물음을 던지는 일까지 터무니없게 된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 또한 사라진다.
질문과 대답은 공존(共存)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과 대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 쪽 면이 사라지면 다른 쪽 면도 존재할 수 없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렇게 물음과 답이 사라질 때 그대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초월의 차원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반야(般若)'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이다.
이 반야화(般若花)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면의 철저한 침묵 안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현현(顯現)되도록 허용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 반야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이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적당한 토양이 필요할 뿐이다.
반야는 항상 독창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며,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대의 것'이라는 이 말은 거기에 어떤 에고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는 그대의 자성(自性, self-nature)에서 솟아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저 너머에 속한' '저 너머로부터 온'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이라는 뜻이다.
바라밀다의 차원에서 그대는 시간이 사라진 상태로 들어간다.
그대는 공간이 사라진 내면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시간은 그대의 외부에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에는 시간이 사라지는 교차점이 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진리··· 지혜의 완성이 진리이다.
진리는 고귀하고 아름답다.
성스럽고 선한다.
왜 그것을 성스럽다고 하는가?
모든 붓다들이 그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다를 탄생시키는 자궁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디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붓다는 인간이 다섯 개의 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텅 빈 다섯 개의 '스칸다(skandha)'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에고(ego)'라고 불리는 부산물이 생성된다.
이것은 게속해서 째깍거리는 시계와 같다.
분명히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시계를 뜯고 모든 부품을 분해해서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 보라.
어디에 그 소리가 있는가?
아무데서도 찾지 못할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부산물이다.
그 소리는 부품들의 결합에 불과했다.
각 부품이 함께 작동하면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나'라고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섯 가지 요소와 함께 작용하면서 '나'라고 불리는 째깍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나'는 텅 비어 있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거기서 어떤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초연함(Non-grabbing)이 진정한 삶을 사는 방식이다.
집착과 소유가 없어야 한다.
만사가 저절로 일어나게 하라.
삶이 저절로 일어나는 해프닝(happening)이 되게 하라.
그러면 거기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대한 바가 없으므로 실망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다.
성공과 실패라는 게임이 포기되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밤에 달이 자장가를 부르면 잠잔다.
배고프면 먹는다.
이것이 선사(禪師)들이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잔다. 그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나태함(inaction)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하러 나가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돈벌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 사는 착취자가 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행위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배고플 때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행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이다. 
 
공(空)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공(空)과 다름이 없나니,
무릇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공(空)이며,
공(空)한 것은 모두가 형상이니라.
감각, 지각, 충동, 인식 작용도
이와 같느니라.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形象)이다.  
 
남성은 여성이며, 여성은 남성이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삶이다.
사리푸트라여, 서로 상반되는 것들은 상반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깊숙히 관통하며,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이 근원적인 통찰을 보여 주기 위해 붓다는 말한다.-형상은 무형(無形)이며, 무형은 형상이다. 현현(顯現)되지 않은 것은 현현되며, 현현된 것은 다시 현현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사리푸트라여, 그들은 하나이다.
이원적 대립은 표피적인 차원일 뿐이다.
깊은 속에서는 그 모두가 하나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만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만물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 자연 상태 그대로를 따른다. 만물은 오고가는 법이다."
이 수용성 안에서, 이 타트하타(tathata) 안에서, 이 여여(如如)함 속에서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그대는 근심으로부터 해방된다.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
멸(滅)하는 것도 없고, 변(變)하는 것도 없고, 생성하는 것도 없다.
만물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하라.
이런 흐름에 참가하라.
그저 존재하라.
이 존재 안에 침묵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 존재가 자유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리푸트라여, 여기 내가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이 차원에서는 윤회(輪廻)와 열반(涅槃)이 하나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구별이 없다.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의 차별이 없다.
모든 차별은 사념이 지어낸 것이니, 내가 존재하는 이 차원에는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념이 사라지면 차별 또한 사라진다."
죄인도 사념에서 나왔고, 성자도 사념에서 나왔다.
좋고 나쁨도 사념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념이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낸다.
붓다는 지식이 사라질 때 사념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때 이원성(二元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념을 버려라.
왜곡 작용을 일삼는 이 매체를 내던져라. 
그리고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라.
마음속에 어떠한 관념도 없이, 마땅히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관념 없이 직접 보라.
순진무구한 눈으로 보라.
지식을 걷어치우고 보라.
그러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이렇게 근심걱정이 사라질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붓다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념이라는 삐뚤어진 매개체를 통해 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완벽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색안경을 덮어쓰고 있다.
이 색안경이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색칠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색안경을 벗어 던져라!
이것이 '마음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이다.
마음이라는 색안경을 버려라.
그러면 거기에 침묵이 있다.
이 침묵 안에서 그대는 신성하다.
그대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신성한 존재였다.
다만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空) 안에는
형상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충동도 없고, 의식도 없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다.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을 비롯하여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다.
무지를 비롯하여 무지의 소멸도 없다.
쇠약과 죽음도 없으며,
이 쇠약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으며,
고통의 멈춤도 없고, 고통을 없애는 길도 없다.
아무 인식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무(無)는 피안(彼岸)의 향기다.
무(無)는 초월의 세계를 향해 열린 가슴이며, 일천 장의 연꽃잎이 만개하는 것이다.
무(無)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이 향기로 가득 찼을 때, 그의 내면이 이 절대적인 무(無)에 도달했을 때, 이 무(無)가 그를 완전히 채웠을 때, 그리하여 그가 구름 한 점 없이 순수한 하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해진다.
이 무(無)는 붓다가 니르바나(涅槃)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 무(無)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無)는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무(無)는 충만하다.
가득차서 흘러 넘친다.
무(無)를 부정적인 상태,단순한 부재(不在) 상태로 생각하지 말라.
무(nothingness)는 물질이 아닌 것(no-thingness)을 의미한다.
물질이 사라지고 궁극적인 실체만 남았다.
형상은 사리지고 무형(無形)만 남았다.
한정된 것들은 사라지고 무한한 것만 남았다.
그러므로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無)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空)안에는
형상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느낄 자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에고가 없을 때는 느낌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각도 없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는 붓다가 말한 '네 개의 거룩한 진리(four noble truths, 四聖諦)'에 대해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통(苦)이다.
모든 인간이 고통을 받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둑카(dukha), 고통, 아픔, 불행, 번뇌 속에 있다.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고통의 원인(集) 탄하(tanha),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존재한다.
이것이 첫 번째 거룩한 진리, '아리야 사티야(arya satya)'이다.
그리고 고통에는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은 욕망에 있다는 것이 두 번째 거룩한 진리이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세 번째 거룩한 진리는, 이 욕망이 멈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滅).
니로드하(nirodha), 욕망은 멈춰질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욕망이 멈추면 고통은 사라진다.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욕망을 멈추게 함으로써 고통마저 없애는 여덟 개의 길(팔정도, 八正道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보디사트바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득(無得) 때문이니라.
사념의 장막이 없으므로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顚倒)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槃)에 이르니라. 
 
삼세(三世)에
붓다로서 출현하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완성에 귀의하였기에
최상의 옳고 완전한 깨달음을
온전히 깨우치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제 나는 그대에게 말할 수 있다.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의지해야 할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각성과 주의 깊음(attentiveness)이 그것이다.
그대가 의지할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내면의 근원, 내면의 실존이 그것이다.
그 밖의 모든 의지처는 버려야 한다.
명상의 완성 외에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말라.
세속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일체를 놓아 버려야 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공(空)도 자유롭게 놔 두어라.
찬성이나 반대 어느 쪽에도 구애받지 말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라.
어디에서도 안식처나 의지할 곳을 찾지 말라.
이것이 진정한 출가(renunciation)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顚倒)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槃)에 이르니라.  
 
붓다는 열반에 대해 이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무(無)의 상태로 들어가라. 그러면 열반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마지막 단계에 열반은 저절로 찾아온다.
그러니 열반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그대는 열반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만 무(無)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이 무(無)가 자라기 시작하여 점점 더 광대해지고, 어느 날엔가 그대의 존재 전체를 덮어 버린다.
그때 열반이 있다.
그대는 우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위대한 진언,
심원한 지혜의 진언,
비길 데 없는 최고의 진언으로 알아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 주나니,
진리 안에서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는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이 진언은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바하.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만트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이다.
가령, 만트라는 에고를 버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데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 귀신이다.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빼앗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빼앗아야 한다.
그대의 불행, 야망, 질투, 두려움, 탐욕, 증오, 집착, 이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귀신들이다.
만트라는 이 귀신들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고안된 속임수이다.
일단 귀신들을 버리고 나면 만트라 또한 버려야 한다.
귀신들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더 이상 만트라를 갖고 다닐 필요는 없다.
그때 그대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귀신도 허구였고 만트라도 허구였다.
그러나 도움이 되기는 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만트라는 이처럼 되어 있다. 
 
갔다, 갔다, 저 너머로 갔도다, 완전히 넘어갔도다.
오, 위대한 깨달음이여, 모두 기뻐할지어다. 
 
붓다는 '갔다(gone)'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광물권, 생물권, 정신권, 그리스도권이라는 네 단계에 대해 '갔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갔다'는 물질로부터 떠났다, 육체로부터 떠났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떠났다, 만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떠났다.
붓다는 두 번째로 '갔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삶으로부터, 이 삶고 죽음의 수레바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저 너머로 갔도다'라는 말에서 그는 세 번째로 '갔다'는 말을 사용한다.
마음, 사념, 생각, 자아, 에고를 넘어갔다.
'완전히 넘어갔도다'는 말에서 네 번째 '갔다'가 나온다.
이제 저 너머에 있는 것, 그리스도권마저 넘어갔다.
창조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갔다.
삶의 원(圓)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이다.
또한 이것은 알파(alpha)이기도 하다.
그대는 여러 책이나 사원에서 뱀이 제 입에 꼬리를 물고 있는 상징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상징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경전은 수세기 동안 중국, 한국, 태국, 일본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단순히 독송(讀誦)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를 계속 독송한다.
그러나 이런 독송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이 만트라가 단순히 반복적인 독송에 끝나서는 안 된다.
이 만트라는 깊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이 만트라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이름과 형상으 넘어서 계속 가라.
모든 아이덴티티(identity)와 한계를 넘어서 계속 가라.
더욱 더 거대하고 광활한 존재가 되라.
저 하늘조차 그대를 제한하지 못한다.
가라, 끝없이 가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Posted by 㗢동죽竹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을 뛰어넘으셨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에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나머지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지금 내가 깨달은 세계, 반야의 완성을 통해 조견한 세계, 제법이 공한 이 모습의 세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그러므로 공의 모습 속에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

따라서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또한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는 모든 식계도 없다.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뿐만이냐!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12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고·집·멸·도 또한 없는 것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앎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의식과 꿈같은 생각들을 멀리 벗어나 버리고, 끝내 열반에 도달한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의 정등각을 얻는다.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의 사실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야말로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다.

진실한 것이요,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겠습니다.

곧 그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하여집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Posted by 㗢동죽竹
,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반야바라밀다심경 약본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멋과 닿임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도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이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도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3번)

반야바라밀다심경 약본


꿰뚫어 봄이 자재한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 모두 비어있음을 꿰뚫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에서벗어났느니라.

사리자여, 육신의 무더기들이 진공과 다르지 않고, 진공이 육신의 무더기들과 다르지 않으니, 육신의 무더기들이 곧 진공이요, 진공이 곧 육신의 무더기들이라.

느낌·인식·의지·의식의 무더기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참된 공상은 생겨난 적이 없기데 없어질 수도 없으며, 더러움이 없기에 깨끗해질 수도 없으며, 늘어남이 없기에 줄어들 수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참된 공상에는 육신의 무더기들도 없고, 느낌·인식·의지·의식의 무더기들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생각)도 없으며, 형상(빛깔),소리,냄새,맛,닿음(감촉),법(정신·물질)도 없으며, 눈의 요소도 없고 따라서 의식의 요소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따라서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도 없기 때문에,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느니라.

그 무엇도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리는 장애(번뇌)가 없고, 걸리는 장애가 없기에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고, 번뇌망상을 영원히 여의었기 때문에 이를 궁극의 열반이라 하느니라.

삼세(現法)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참된 성품의 가르침이며, 큰 밝음의 가르침이며, 더 이상 없음의 가르침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음의 가르침이니, 능히 온갖 괴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진실된 가르침이지 결코 허망한 가르침이라 알지 말라.

그러므로 바른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가르침을 다시 말하노니, 가르침은 이러하니라.

나와 모든 경계가 공하고 두 가지가 공한 그것마저 공하니,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라.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을 일체가 '유有'라는 영혼불멸론과 일체가 '무無'라는 영혼절멸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두 가지 극단을 버린 것을 중도라 한다.

중도 연기를 바탕으로 이러한 인과관계의 가르침을 그대로 바르게 보고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않고 남의 견해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을 신해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삿된 견해를 끊고 정법에 의지하여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지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을 신행이라 한다.

바른 법을 배우고 바른 행을 갖추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중도 연기의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정신은 육신의 감각접촉을 통하여 생겨난 느낌·인식·의지(의도적 행위)·의식(알음알이)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육신과 정신을 다섯 가지의 무더기들(오五蘊온)이라 하는 것이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눈,귀,코,혀,몸,뜻(생각)도 없으며 형상(빛깔), 소리,냄새,맛, 닿음(감촉), 법(정신·물질)도 없으며


오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온의 근본 바탕인 육근(안·이·비·설·신·의)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육경(색·성·향·미·촉·법)이 존재한다하더라도 밖의 경계를 인식할 수 있는 육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육경이 있되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무명의 마음이 비록 팔만사천 번뇌와 정욕情欲이 있어서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수많은 온갖 악이 한량없고 끝없으나, 간추려 말하자면 모두 삼독三毒을 근본으로 삼는다.

삼독이란 탐욕(탐貪)과 분노(진瞋)와 어리석음(치癡)이다.

이 삼독이 자연히 본래부터 온갖 악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지만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은 그 수가 한량없는 것과 같다.

이 삼독의 뿌리가 낱낱 뿌리에서 백천만억의 온갖 나쁜 업을 내는 것은 앞의 비유보다 갑절이나 더하여 비유할 수도 없다.

육식六識은 육근六根이 밖의 대상을 만나 일어나는 알음알이의 요소가 생겨남을 말한다.

눈이 형상을 만나 눈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고

귀가 소리를 만나 귀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고

코가 냄새를 만나 코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고

혀가 맛을 만나 혀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고

몸이 감촉을 만나 몸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고

생각이 법을 만나 의식의 알음알이가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육식의 알음알이가 '나의 영혼'이라는 '자아(Atman)' 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시적이고 변하지 않으면 안되며, 괴로움의 원천인 것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나의 영원한 자아' 혹은 '나의 영혼'이라고 여기는 것은 응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이러한 것을 이해한다면 육체와 느낌과 인식과 의지와 의식을 '자아'라고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형상을 취하게 되면, 그것이 아상(자아에 대한 집착)·인상(자아가 영원하다는 것에 대한 집착)·중생상(모든 생명체에 대한 집착)·수자상(영혼에 대한 집착)에 집착함이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이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법이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않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Posted by 㗢동죽竹
,

 

 

그런데 많은 종류의 이상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남의_업적을_가로채는_사람

☞도덕은 아랑곳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사람

☞남을 착취하여 부당이득을 노리는 사람

☞남의 업적을 슬쩍 가로채려는 사람

☞공동체의 관심보다 자신의 관심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

 

 

하지만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사람의 행동이 당신에게 남긴 상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도 된다.

만약 혼자서 이런 부당함에 대응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동원해서 겪은 일을 함께 나눠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함께 행동을 취해야 한다.

사장을 찾아가서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사람의 비열한 행동에 대해 알려라.

아마 사장도 사실을 알면 기뻐할 것이다.

그런 직원한테 책임이 막중한 자리를 맡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무이다.

아니면 남의 업적을 가로챈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당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 당신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라.

 

 

#뭐든지_아는_체하는_사람

☞고압적인 자세로 잘난 체하는 사람

☞묻지도 않은 충고를 하는 사람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상대방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

 

 

· 당신이 뭐든지 아는 체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솔직하게 얘기하라.

무시당한 것 같고, 어린 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다고 말하라.

·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말하라.

동등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존중받고 싶다고 말하라.

· 구체적인 개선 방법을 제시하라.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확실하게 미리 상의를 하고, 대화 시간을 정하고, 대화 규칙(가령 당신이 얘기를 할 때 중간에 자꾸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을 만들라고 제안한다.

 

 

#화를_잘_내는_사람

☞성급하고 잘 흥분하는 다혈질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내는 사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사람

☞별일 아닌 일에도 싸움을 거는 사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당신의 자율성을 제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조망할 수 없거나 그가 잘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은 그에게 불안감을 야기한다.

그는 자기 영역 안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전투장에 둘러싸여 있고 싶어한다.

사장들은 보통 자기 사무실 안에서 가장 큰소리를 내고, 남녀 사이의 폭력은 가장 익숙한 집 안에서 벌어진다.

경기 규칙도 그 사람이 정한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왜 누구를 괴롭힐지는 오직 그 사람이 정한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겠는가?

우선 그의 요구에 응해주면 안 된다

당신은 그의 공격을 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신호를 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더 이상 대응하지 않겠다.'

그 대신 어떤 조건에서 다시 대화를 나눌지를 당신이 정해라.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별로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고르거나 그 사람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노려라

그런 다음에 폭력이 배제된 대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인가?

내가 상처를 입지 않고 그의 분노를 계속 받아줄 수 있을 만큼 강한가?

그러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무뎌져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하루 종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길길이 날뛰든 말든 상관없다.

당신이 개의치 않으면 그의 비난은 소용이 없다.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당신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사람은 그냥 멍청하고 단순한 거대한 초록색 괴물 헐크라고 생각해라.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당신의 신경을 짓밟지 못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변신이 끝나고 나면 작고 창백하고 완전히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이 당신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그가 당신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거짓말을_일삼는_사람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사람

☞습관적으로 남을 속여 이득을 꾀하는 사람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위선자

☞모든 일을 부풀려 말하는 사람

거짓말쟁이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존재가 거짓말투성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발각될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

이런 긴장감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증세는 다음과 같다.

· 직접적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 눈을 자주 깜빡이거나 지그시 오래 감는다.

· 눈동자를 자주 굴리거나 눈빛이 경직된다.

· 팔다리를 자주 움직이거나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꼰다.

· 얼굴을 자주 긁적이거나 입술에 자주 침을 묻힌다.

· 어색하거나 과장된 표정을 짓는다.

· 말하고 있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몸짓을 사용한다.

· 평소와 다른 말투를 사용한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했던 말을 자주 반복한다.

당신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그래, 그래 네 마음대로 지껄여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진실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가 하는 거짓말을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거짓말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느껴지면 당신 자신을 보호하고 더 이상 허황된 이야기를 들어주는 '수취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수신을 거부하고 거짓말을 반송해라.

#남의_성공을_시기하는_사람

☞남이 잘 되면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람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공연히 깎아내리려는 사람

☞주위 사람이 잘나가면 샘내는 사람

그룹 내에서는 시기하는 사람의 경쟁심을 누그러트리기가 좀 더 수월한 편이다.

'우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해라.

당신의 부서가 성공하는 데 그가 비록 기여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독려해라.

상대가 비관적인 말을 해도 그의 말을 바꿔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비건설적인 비판이 마치 건설적인 제안철머 들리도록 해봐라.

그러면 상대는 이겼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당신은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

#까다로운_척하는_사람

☞투덜투덜 불평하는 사람

☞일부러 까다롭게 구는 사람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

☞무뚝뚝하고 뚱한 사람

그가 아무리 불만을 토로하고 괴로워하더라도 결코 동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의 불만족은 당신의 인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이 사실만 인지하고 있으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죄책감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 사람의 말에 동조를 해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동감을 표하더라도 서로의 책임과 본분,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만 하면 된다.

#불평불만이_많은_사람

☞소송을 좋아하는 사람

☞매사에 원칙만 따지는 사람

☞목소리가 크면 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

☞논쟁을 즐기는 싸움닭

불평가와 잘 지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 중 대부분은 함께 싸우든가 그냥 등을 돌리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모든 것에 개입하지 않는 중간자적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편 아니면 네 편이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불평가와 잘 지내고 싶거나 반드시 그래야 한다면 그를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혀야 한다.

당신이 평온해지기 위해서는 불평가가 변해야 한다.

그에게 진심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그때그때_인격이_달라지는_사람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사람

☞야심을 품은 출세주의자

☞그때그때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자

☞조직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려는 사람

그때그때 인격이 달라지는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그의 지위를 계속해서 인정하고, 그가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해줘라.

그런데 만약 이때 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면 당신에게 불쾌한 말들을 날리더라도 그것이 당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잊지 마라.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당신의 상사보다 훨씬 우위에 있을 수 있다.

#거저_먹으려는_사람

☞다른 사람에 의지해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사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

☞남에게 빈대 붙어 사는 사람

☞힘들이지 않고 남의 것을 차지하는 얌체 같은 사람

· 더 이상 거저먹으려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고, 만약 부탁을 들어주게 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요구하라.

그렇게 하면 확실하게 "안 돼."라고 말했을 경우 거절을 당한 사람이 욕을 하거나 비난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끈질겨야 한다.

하지만 거저먹으려는 사람이 당신이 더 이상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는 당신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 다른 '희생자'들을 찾아서 공동으로 대응하라.

함께 힘을 모으면 거저먹으려는 사람에게 거절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반성하기는커녕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혼자서 비참함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에, 서로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것에 대해 기쁨을 나눌 수 있다.

#불행_바이러스를_퍼뜨리는_사람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는 사람

☞불길한 예언을 즐겨하는 사람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비관론자

☞습관적으로 회의론을 퍼뜨리는 사람

따라서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서 불행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긍정적인 점을 이끌어내보자.

이들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불안과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귀신 같이 그 흠을 찾아내어 물고 늘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의구심이 실제로 타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행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면 신과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을 더욱더 강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이 그 사람에게 얘기를 꺼내볼 용기를 낸다면 '나 전달법'을 사용해보자.

"기분 좋은 내 감정을 너한테도 전염시킬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또는 "나는 네가 우려하는 점이 뭔지 알겠어. 하지만 지금은 내 계획에 확신을 갖고 추진하고 싶어."

당신이 이런 얘길 핵심을 찌르면 그가 당분간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둘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관주의자가 더욱 수위를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런데 말이야, 만약 네가········."라고 운을 뗄 것이다.

바로 이때 얘기를 계속 들어줄지 여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다행히도 당신은 희망차고 역동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

#긍정을_강요하는_사람

☞어물쩍 넘어가는 사람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무마하는 사람

☞서로 잘 어울리게 하려는 조화론자

그러니 당신은 긍정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저 당신 자신에게 집중하라.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당신의 감정에 대해 해석할 권한을 되찾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기분이 좋은지 또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지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개인적인 일이고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

 

Posted by 㗢동죽竹
,

위대한 도(道)는 험난하지 않다.
좋고 싫음을 가리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이나 미움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료해서 숨길 것이 없다.
하지만 털끝만한 구별이라도 하게 되면
하늘과 땅은 한없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픈 마음이 있으면
좋다거나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좋고 싫음의 갈등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가 선택하면 분열하게 된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은 통일체다.
존재는 분열하지 않은 채 깊은 조화 속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일체성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분열(mind)이 숨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그 양쪽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고, 추한 것은 아름다워진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없다.
경계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흐른다.
마음에는 고정된 경계가 있다.
고정성이 마음의 본질이고 유동성이 <삶>의 본질이다.
마음에 항상 강박관념이 깃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늘 고정돼 있고 그 자체에 고정성이 있다.
그리고 <삶>은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체로 부드럽게 양극을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해서는 안 된다.
<삶>을 있는 그대로, 그 전체성(全體性)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을 함께, 사랑과 미움을 함께, 행복과 불행을 함께, 고민과 환희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두 가지와 함께 살아간다면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어디에서 선택이 들어올까?
만약 고민은 환희와 다를 바 없고, 환희는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면-그렇게 된다면 어디에 선택이 있는 것이고,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 선택이 떨어져 나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물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는 동안은
마음의 평안은 헛되이 어지러진다.
도(道)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그러나, 좋다든가 안 된다는가 택한 탓으로
참 모습을 못 볼 뿐이다.
뒤얽히는 바깥 일 속에도
안쪽의 공무(空無) 속에도 살아서는 안 된다.
평온하게 무엇을 구하지도 말고
위대한 일체성 속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그릇된 사물의 인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적을 얻으려고 행동을 억눌러 보아도
바로 그 노력이 도리어 인간을 행동으로 채운다.
어느 쪽이든 한편의 극단이 있는 한
결코 일체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단 하나밖에 없는 이 도(道)에 살지 않는 한
행동하는 일도 정적을 얻으려는 일도
단정하는 일도 부정하는 일도 이루지 못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도>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남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어야 마땅한 모습이다.
완전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들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대만이 분열돼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과거는 자연에 속하고 미래는 신에 속한다.
인간은 두 영원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처럼 긴장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을 향하고, 때로는 신을 향해 움직인다.
어떤 때는 이쪽, 어떤 때는 저쪽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동요해 안정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잡아라, 그러면 어느 쪽의 길이라도 상관없다.
장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리잡는 것을 지지한다.
자연의 품에 자리를 잡는다면 인간은 신처럼 된다.
그대는 신이 된다.
붓다는 앞으로 나아가 신이 되는 길을 지지한다.
그렇게 해도 인간은 자리를 잡는다.
뒤로 물러서든가, 아니면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힘차게 나아가든가다.
단, 다리 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것의 하나다.
다시 말해서 뒤로 돌아가든 앞으로 나아가든 인간은 똑같은 종착역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돌아가고 나아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리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인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탁하지 않은 눈으로 어떤 생각도 품지 말고 그대는 그저 바라본다.
그대는 어떤 거부나 받아들임도 없이 오로지 순수하게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눈 뒤에 사고(mind) 따위는 존재하지 않듯이, 마치 자신의 눈이 단순한 거울에 지나지 않듯이, 거울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제 앞에 온 물체를 무엇이든 그저 비출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다.
만약 그대의 눈 뒤에 사고(mind)가 없다면, 그 눈이 그냥 비추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로지 보기만 할 뿐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비난이나 칭찬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더할 나위없이 명료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명료성, 의견도 편견도 지니지 않는 이 눈-그것으로 그대는 광명을 얻는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는 수동적이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력은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수동적이려고 애를 쓸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행동적이 되어라.
몸과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하면 수동성이 찾아온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것은 오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생각토록 하라.
그러면 무념이 찾아온다.
그대가 사고를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것은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한다.
완전한 것만 떨쳐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완전한 것은 스스로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간다.
행동적이 되어라.
행동 그 자체가 수동성이 일어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전면적으로 활동하라, 그러면 전면적으로 수동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 두 극단이 만나고 미묘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 미묘한 균형이 사먀크트바(samyktva)다.
그 미묘한 균형이 정적이다.
그 미묘한 균형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평안, 절정, 최고의 상태다.
왜냐하면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바깥과 안, 능동성과 수동성이 균형을 유지할 때-갑자기 인간은 그 양쪽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 그대는 이미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갑자기 그대는 제3의 세력-방관자, 목격자다.
하지만, 그것은 분투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시도해 보라, 그것도 모든 일에.
그대가 누구에게 미움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 이동하려고 애써 보라.
그대가 누구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로 옮기려고 애써 보라.
무엇을 느끼든 그대가 한 가운데로 움직이려 애를 쓴다면 틀림없이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양 극단의 사이에 그 양쪽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사랑도 느끼지 않고 미움도 느끼지 않게 되는 지점이다.
이것이 붓다가 우페크샤, 즉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관심이라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니다.
우페크샤란 그곳에 서면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그런 중간점을 뜻한다.
그곳에서는 이미 「나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미워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누구한테도 동화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떤 초월이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초월이 개화(開花)다.
바로 그것이 달성해야만 하는 성숙, 바로 그곳이 종착역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세상만사의 실재를 부정하면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세상만사의 공허를 주장하면
역시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만큼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다.
말이나 생각을 그만 두는 게 좋다.
그러면 모를 일 무엇 하나 없다.
#신심명 #승찬

보는 것은 직접적이다.
만지는 것은 직접적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간접적이다.
생각하면 놓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는 실재를 알 수 있다.
춤추는 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노래하는 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자는 실재를 계속해서 놓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생각하는 것은 멈추어야 하지만, 무의식이 되어 멈추는 게 아니다.
더욱 의식적으로, 좀 더 빈틈없이 의식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고에 흘러들어가 있는 에너지를 의식 속에 쏟아부어 자기 안에 '지켜보는 자'가 일어서도록.
그러므로 명심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은 영창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고과정을 '지켜보는 자'가 됨으로써 멈춰야 한다는 것을.
그대가 깊이 보고 언어를 꿰뚫는다면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틈이 생긴다.
구름이 갈라지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대는 빈틈없이 의식하고 느끼고 있다-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의식 속으로 끌어올려진다.
불꽃은 더 크고 요란하게 타오른다.
그리고 그대는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좀 더 많은 것을 만지고, 좀 더 많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대의 행위는 어떤 새로운 질(質)을-'신성한 것'의 질을 띤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
그러나 겉모습만 좇으면 바탕을 잃는다.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이 공허한 세계에 나타나는 겉모습의 변화를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지한 탓이다.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의견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무르지 말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모든 보완 관계는 절대의 하나에서 비롯됐다지만
그 하나에도 사로잡혀서는 아니 된다.
이 길 안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에 해입을 것은 없다.
세상사에 방해 받는 일 없으면
그것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사물을 분간하는 힘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전의 마음은 이미 없다.

#신심명 #승찬

그대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작은 세포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었다.
그런 다음 작은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꿈 많은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찢기고 실망으로 가득찬 한 실패자, 한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내면을 본다면 모든 게 변함없이 그대로다.
의식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인간은 놀란다.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
의식에는 나이가 없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열두 살인지 마흔 살인지 예순 살인지 모른다.
나이는 육신이나 껍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나이를 갖지 않는다.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일단 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절대에 중심이 잡히면 그대의 질은 변한다.
그러면 인간은 볼 수 있다.
인간은 거울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거울에 실재가 비친다.
하지만,먼저 자신이 거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눈을 감는 순간, 그대는 엄청난 부자일는지 모르지만, 내면은 한 가난한 거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위대한 대통령이나 수상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죽음은, 그 권력이 단순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권력은 죽음 가까이 다가서면 무기력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하는 것만이 힘이다.
다른 모든 것은 무기력하다.
인간은 한 순간 그것을 믿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 진실을 불러들이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늘 떠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바로 그 죽음이 판단기준이다.
무엇이든 죽음이 무효로 하는 것은 효력을 잃는다.
무엇이든 죽음이 승인하는 것이 인정을 받는다.
무엇이든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무엇이든 죽음보다 강력한 것이 실재다.
실재는 죽지 않는다.
비실재(非實在)는 수만 번 죽음을 맞이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허를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갑자기 인간은 겉모습과 공허를 초월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 하나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고 무엇 하나 공허가 아니다.
모든 것이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다.
모든 나무, 모든 강, 모든 바다가 '신성'으로 흘러넘친다.
그때 신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것을 진리라고 불러도 좋고, 또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표현으로 불러도 좋다.
그 실재는 어디에나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상념의 대상이 없어지면
생각하는 주체도 사라진다.
마음이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듯.
사물이 대상인 것은 생각하는 주체 탓
마음이 마음인 것은 사물 탓이다.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이해하는 게 좋다.
이 공 속에서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각자와 함께 전 세계를 포함한다.
만약 성기고 촘촘한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으면
편견에도 의견에도 유혹되는 일은 없다.

#신심명 #승찬

일단 꿈꾸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해했다면 대상 세계는 사라진다.
세상은 있어도 그것은 객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생명력을 지닌다.
모든 것이 주체가 된다.
종교인들이, 「모든 게 신이다」하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신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어딘가에 앉아서 제어하거나 조작하거나 공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신이란 비유에 불과하다.
그 비유는,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비슷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주체성이 있고 모든 것은 살아서 고동치고 있다-게다가 그 고동은 자잘한 과정이 아니다-그 고동은 전체의 맥동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깨닫는 게 좋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에워싸는 '사물'의 세상 탓이다.
자신이라는 경계가 존재하는 것은 자신 주위에 있는 '사물'의 경계 때문이다.
그 경계가 없어지면 자신이라는 경계도 사라진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의존하고 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바깥 세상의 '사물'은 서로 접합돼 있다.
다리가 놓여 있다.
한쪽 둑이 없어지면 다리는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 그 다리와 더불어 다른 한쪽의 둑도 사라진다.
둑은 한쪽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대성의 의미다.
그래서 그때 거기에 통일체가 있다.
공(空)의 통일체다.
인간은 공, 꽃도 공이다.
그 꽃에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중심이 있을 수 있겠나?
이것은 붓다의 가장 심오한 깨우침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것을 이토록 아름답게 주장해 온 사람들은 불교도들뿐이었다.
불교도는 말한다.
그곳에 아트만(atman)은 없다, 자기는 없다고.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빚어 왔다.
왜냐하면 힌두교들은 그 신앙의 대부분이 아트만과 자기와 초자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한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사고작용(mind)이 전면적으로 침묵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겠나?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소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전체인데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태와 배경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붓다의 공(空), 아나타(anatta : 에고가 없는 상태)다
이 말은 아름답다.
아나타, 무아(無我).
자신은 이제 없다.
그래도 자신은 존재한다.
사실 인간은 전체로써 존재한다.
인간은 개인으로가 아니라, 한정되고 분리되어 존재한다.
뭔가에 둘러싸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전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는, 구별되고 한정된 존재로는 이제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위대한 도(道)에 사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시야가 좁은 자는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수록 그 걸음걸이는 더디다.
그리고 집착은 멈출 곳을 모른다.
깨달음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엉뚱한 길이다.

사물에 대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케 하라.
그러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사물의 자연과 자신의 자연에 따르는 게 좋다.
그러면 가로막히는 일 없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생각이 울타리 속에 있으면 진리가 숨는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둡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잡한 판단작업은 성가심과 피로를 가져다 줄 뿐,
구별하고 차별하는 일에 무슨 득이 있는 걸까?

#신심명 #승찬 

오로지 이 한 길만을 걷고 싶다면
감각과 상념의 세상도 꺼려서는 안 된다.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광명의 징후다.
현명한 자는 목표를 갖지 않고
우둔한 자는 스스로 제 발을 묶는다.
존재하는 것은 유일, 법, 참됨뿐.
구별은 무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날 뿐이다.
분별력으로 큰 마음을 구하는 것이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크다

#신심명 #승찬

그럼 이 위대한 도(道)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대한 도(道)란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차 뭔가 된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데는 어떤 시간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지금까지 늘 그 안에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대 는 그 목적지에 있다.
그대는 그 목적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대는 그곳에서 나와서는 존재하지 못 한다.
그대가 그곳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그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어디로 가든 그대는 그대의 도(道)를 자신 속에 지니고 간다.
그것은 그대의 고유 본성이다.
그것은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 놓거나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대는 이미 그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 '그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미래를 볼 필요가 없다.
오로지 이곳에 있도록 하라.
그러면 그것은 그대의 눈에 뜨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안심도 불안도 망상 탓이다.
광명과 함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
모든 시비는 무지한 해석으로 일어난다.
꿈 같고 허공의 꽃 같은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얻음과 올바름, 그릇됨과 같은 생각들은
결국은 한 순간에 멈춰야만 한다.
한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멈춘다.
상념이 어떤 구별도 하지 않으면
만물은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단 하나의 정수(精髓)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정수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해탈이다.
모든 게 동등하게 보일 때
영원의 자아에 다다른다.
그곳은 비교도 비유도 불가능한
인과((因果)의 굴레가 벗겨진 곳이다.

#신심명 #승찬

오로지 보도록 하라.
그러면 문제는 그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뭔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투영하면 상대는 사랑스럽게 보인다.
미움을 투영하면 상대는 추하게 보인다.
상대는 없다.
그대는 참된 그 사람을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는 사고의 눈을 통해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경전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로 가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고 없이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것 뿐이다.
꽃을 볼 때도 머리가 뭐라고 말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그대는 오로지 그것을 보기만 하라.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지금의 그대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고에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념에 의해 무형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형의 실체가 보이게 되면 전 세계는 마치 하나의 바다와 같다.
그리고 모든 형태는 그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파도 속에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그 '하나인 것'이.
지금은 모든 것이 '여럿'이다.
그것은 사물이 '여럿'이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 갈라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물이 '여럿'으로 보인다.
마치 거울을 깨뜨린 것과 같다-많은 파편이 있다.
그 깨어진 거울조각마다 영상이 생기고 많은 얼굴이 보이게 된다.
그곳에 서 있는 그대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울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얼굴이 보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이원성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면
하나 자체도 머물 수 없다.
이런 궁극의 땅에는 
어떤 규칙이나 묘사도 적합치 않다.
도(道)와 조화를 이루면 하나가 된 마음에서
이기심의 모든 노력은 그친다.
의심과 망설임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
단 한 차례의 가격으로 멍에는 벗겨지고
모두 멈춤 없이 흐르고, 다시 기억하는 자도 없다.
모든 것은 텅 빈 채 명료하고
마음의 힘을 쓰는 일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제 사고도 감정도 지식도 상상력도
이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승찬은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그 곳에 뭔가 정지해 있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정지에 이른다.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인간은 달린다, 인간은 걷는다,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은 어디로 향한다는 것일까?
오로지 어디에선가 쉬기 위해서 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달리는 것은 휴식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움직임은 정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정적은 이미 그곳에 있다.
뜀박질해 보라.
자신 속에 있는 무엇인가는 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달리지 못한다.
자신의 의식은 정지한 채 그대로다.
인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무엇인가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그 부동(不動)의 중심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감정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 속의 무엇인가는 그것에 얽매임 없이 휩쓸리지 않는 그대로다.
이 연관성이 있는 모든 인생은, 결코 관련을 맺는 일 없는 그 요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자신이 사랑 속에 있을 때나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그것이 미움으로 바뀌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미움이 돼 가는지를.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자신이 한 발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대의 생명을 밝히고 있는 불이 순간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그대의 젊음이 어떤 식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지를 지켜 보는 것이다.
반대의 극단을 주시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부한 패턴은 보강되는 게 아니고 그것에 의해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사랑 속에서 미움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 모두를 초월한 정적을 달성하게 된다.
만약 삶과 죽음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와같이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이 실재와 바로 조화하기 위해서는
의심이 일어나면 그냥 '둘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좋다.
이 '불이(不二)' 속에서 무엇 하나 분리되는 것도 없고
또 배제되는 것도 없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광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 진실로 돌아감을 이른다.
이 진리는 시공의 크고 작음을 초월한다.
그곳에서는 한 순간의 생각도 만년의 영원과 다를 바 없다.

#신심명 #승찬

'진여'의 태도라는 것은 운명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나 운명이나 팔자와 같은 어떤 것도 끌어들이지 않는다.
단순하게 사실을 보라, 사태의 '사실성'을 그냥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하면 그것에 문이 있다.
문은 항상 있다.
그래서 인간은 초월한다.
'진여'란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와같은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그리고 일단 어우러지면 인간은 '진여' 속에, 타타타 속에, 이해 속에 어우러진다.
그곳에는 자신이라는 자도 없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없다.
자기도 없고 다른 자도 없다.
'진여' 속에서, 삼라만상 본성의 깊은 이해 속에서 경계는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육체는 좁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좁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광대한 하늘처럼 한없이 넓다.
이 육체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이 육체는 아주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에너지만 더 담겨도 이 그릇은 넘쳐 버린다.
인간의 섹스란 이 그릇, 이 좁은 육체가 넘친 것이다.
하지만 사하스라라가 열린다면,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천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한장 한장 하염없이 벌어져 결코 끝나는 일은 없다.
전체가 담긴다 해도 여전히 무한한 공간이 남아 있다.
붓다는 우주보다 크다고들 한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물론 그 육체가 우주보다 클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붓다는 연꽃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주보다 크다.
이제 이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백만이라는 우주가 그 속으로 떨어져 재흡수되어 연꽃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하면서도 여전히 성장을 계속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여기도 공(空), 저기도 공(空)
하지만 무한한 우주가 늘 눈 앞에 있다.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음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경계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심이나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이 실재와 아무 연관도 없다.
하나가 모두인 세상을 걷고
식별하는 일 없이 뒤섞여 가라.
이런 깨달음 속에 사는 게
미완성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길이다.
이 '믿음'속에 사는 게 '불이(不二)'로 향하는 길이다.
'불이'야 말로 '믿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다. 그곳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다.

#신심명 #승찬

실재를 보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별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바다는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 역시 그런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대가 죽으면 벌레가 그 육체를 먹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먹이가 된다.
그대는 나이가 들어 죽은 다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음식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로 많은 것을 자신의 식량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들의 먹을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식량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슬이다.
그런데 그대는 삶에 매달리려 한다.
그럼 사과는 어떻게 되는가?
사과 역시 삶에 집착하려 한다.
밀은 어떨까?
밀 역시 밀로만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삶은 끝나는 수밖에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옳다.
승찬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승찬은,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언어는 정신(mind)의 창조물이다.
시간 역시 정신의 창조물이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면 시간은 사라진다.
생각을 버리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해 간다.
시간은 없다.
시간이 없으면 그곳에 영원이 있다.
시간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있다.
진리는 영원하다.
그리고 인간이 손에 넣은 모든 것은, 그 진리가 극히 짧은 순간에 비친 투영에 불과하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모든 메시지는 마음과 말과 시간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Posted by 㗢동죽竹
,

생각이란 기억의 반응이며, 기억은 종족·지역사회·집단·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개인에 의해서 축적되고 물려받고 획득되어온 배경이다.

이 배경은 마음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결과이며 그것이 축적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마음은 기억이며, 도전이나 요구를 받으면 언제나 반응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마치 연상작용을 통해서 움직이는 전자두뇌의 반응과 같다.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므로 본질적으로 시간의 산물인 동시에 시간의 창조자이기도 한다.

사실 죽음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다.

죽음은 그대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재미있게 즐기고 있을 때, 귀기울여 듣고 있을 때, 회사에 가고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 여기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가족을 잃어버릴까봐, 친구도 없이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워한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두렵고, 모아둔 경험과 재산이 없어질까봐 두렵다.

우리가 겁나서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집착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이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그때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을, 모든 지식·모든기억·모든 다툼을 버리고 그것들을 다음 날로 가져가지 않으면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나더라도 거기에는 새로 태어남이 있다.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죽음이라는 사실과 마주치면 우린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면 그 이름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느낌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며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죽음은 뭔가 새로운 것이며, 죽음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도전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것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마음은 새로운 사실·새로운 사건·새로운 감각을 만나면 언제가 즉시 거기에 라벨을 붙이고 '이건 다른 것들과 달라.'라고 하거나 '이것도 다른 것들과 같은 거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즉 새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아닌가?

삶과 사랑과 죽음은 함께 붙어 다닌다.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삶은 신선한 상태로 매일매일 살아있음 속에 있다.

그 투명함, 그 순수함을 갖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언제나 나가 있는 그런 마음 상태는 죽어야 한다.

사랑 없이는 덕도 없다.

사랑이 없이는 평화도 없고 관계도 없다.

진리만 홀로 존재하는 차원으로 마음이 끝없이 들어가는 토대가 바로 이 사랑이다.

마음은 완전히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이해한다.

따라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계속되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가 없다.

죽는 것만이 창조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삶이 곧 죽음일 때 거기에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사랑과 창조가 그런 것처럼.

내 자신에 대해서라면 영속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이걸 그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다-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생김새를 나타내는 이름, 이름인 말, 말인 생각, 생각에 의해 편집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 그러한 나라는 연속성이 있다면,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름, 이 몸 즉 유기체의 생김새, 그리고 영혼의 완전한 구조는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견해·믿음·애착·욕심·시기심을 버리는 것이 매일 매순간 죽는 것이다.

매순간 모든 야심에 끝을 낸다면, 그때 그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끝없는  움직임만 있는 심연에 이르게 되며 그러다가 느닷없이 끝에 서게 되는 이 놀라운 상태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죽음이 실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 살아서 움직이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아주 놀라운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 대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을 관찰하고, 제발 내 말로 인해 최면에 걸리지 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실천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다.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표현에 만족하지 말라.

그 표현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면, 삶이 얼마나 많은 도피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어떻게 사로잡혀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사실을 살펴보고 심사숙고하고 탐험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세히 조사하는 게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는 시간도 없고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는 영원하다.

그것은 삶이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사랑이며 거기에는 실현이나 좌절은 없다.

이것들은 사실들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단순히 슬픔 그 자체를 바라보기만 하면 절대 슬프지 않다.

자신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그저 인식하기만 한다면 거기에서는 절대로 슬픔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허망함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고 싶어하는 그 순간, 투쟁과 불안과 짜증나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이 결국에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대가 무언가를 사랑할 때면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본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아이를 바라볼 것이다.

섬세한 얼굴 표정, 동그랗게 뜬 눈, 놀랍도록 순진한 느낌을 관찰한다.

나무 한 그루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전 존재로 그것을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물들은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심함은 어떤 습관을 부인하고 부정할 때 생긴다.

추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추하다는 것을 알 때,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보면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때, 원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으며, 그것을 향한 문을 결코 닫지 않으면서 그렇게 완전하게 존재할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내면적으로 민감해질 때, 그때 그것으로부터 놀라운 힘을 지닌 무심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대가 지금, 오늘,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다음 생에(그런 것이 있다면) 다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중요한 건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씨앗이나 슬픔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것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

 

 

Posted by 㗢동죽竹
,

치요노千代能의 오도송悟道頌

텅 비워진 내 손
#치요노 #千代能 #텅_비워진_내_손 #오도송 #悟道頌

Posted by 㗢동죽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