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도(道)는 험난하지 않다.
좋고 싫음을 가리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이나 미움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료해서 숨길 것이 없다.
하지만 털끝만한 구별이라도 하게 되면
하늘과 땅은 한없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픈 마음이 있으면
좋다거나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좋고 싫음의 갈등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가 선택하면 분열하게 된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은 통일체다.
존재는 분열하지 않은 채 깊은 조화 속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일체성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분열(mind)이 숨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그 양쪽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고, 추한 것은 아름다워진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없다.
경계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흐른다.
마음에는 고정된 경계가 있다.
고정성이 마음의 본질이고 유동성이 <삶>의 본질이다.
마음에 항상 강박관념이 깃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늘 고정돼 있고 그 자체에 고정성이 있다.
그리고 <삶>은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체로 부드럽게 양극을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해서는 안 된다.
<삶>을 있는 그대로, 그 전체성(全體性)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을 함께, 사랑과 미움을 함께, 행복과 불행을 함께, 고민과 환희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두 가지와 함께 살아간다면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어디에서 선택이 들어올까?
만약 고민은 환희와 다를 바 없고, 환희는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면-그렇게 된다면 어디에 선택이 있는 것이고,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 선택이 떨어져 나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물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는 동안은
마음의 평안은 헛되이 어지러진다.
도(道)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그러나, 좋다든가 안 된다는가 택한 탓으로
참 모습을 못 볼 뿐이다.
뒤얽히는 바깥 일 속에도
안쪽의 공무(空無) 속에도 살아서는 안 된다.
평온하게 무엇을 구하지도 말고
위대한 일체성 속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그릇된 사물의 인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적을 얻으려고 행동을 억눌러 보아도
바로 그 노력이 도리어 인간을 행동으로 채운다.
어느 쪽이든 한편의 극단이 있는 한
결코 일체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단 하나밖에 없는 이 도(道)에 살지 않는 한
행동하는 일도 정적을 얻으려는 일도
단정하는 일도 부정하는 일도 이루지 못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도>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남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어야 마땅한 모습이다.
완전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들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대만이 분열돼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과거는 자연에 속하고 미래는 신에 속한다.
인간은 두 영원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처럼 긴장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을 향하고, 때로는 신을 향해 움직인다.
어떤 때는 이쪽, 어떤 때는 저쪽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동요해 안정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잡아라, 그러면 어느 쪽의 길이라도 상관없다.
장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리잡는 것을 지지한다.
자연의 품에 자리를 잡는다면 인간은 신처럼 된다.
그대는 신이 된다.
붓다는 앞으로 나아가 신이 되는 길을 지지한다.
그렇게 해도 인간은 자리를 잡는다.
뒤로 물러서든가, 아니면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힘차게 나아가든가다.
단, 다리 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것의 하나다.
다시 말해서 뒤로 돌아가든 앞으로 나아가든 인간은 똑같은 종착역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돌아가고 나아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리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인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탁하지 않은 눈으로 어떤 생각도 품지 말고 그대는 그저 바라본다.
그대는 어떤 거부나 받아들임도 없이 오로지 순수하게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눈 뒤에 사고(mind) 따위는 존재하지 않듯이, 마치 자신의 눈이 단순한 거울에 지나지 않듯이, 거울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제 앞에 온 물체를 무엇이든 그저 비출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다.
만약 그대의 눈 뒤에 사고(mind)가 없다면, 그 눈이 그냥 비추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로지 보기만 할 뿐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비난이나 칭찬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더할 나위없이 명료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명료성, 의견도 편견도 지니지 않는 이 눈-그것으로 그대는 광명을 얻는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는 수동적이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력은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수동적이려고 애를 쓸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행동적이 되어라.
몸과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하면 수동성이 찾아온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것은 오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생각토록 하라.
그러면 무념이 찾아온다.
그대가 사고를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것은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한다.
완전한 것만 떨쳐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완전한 것은 스스로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간다.
행동적이 되어라.
행동 그 자체가 수동성이 일어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전면적으로 활동하라, 그러면 전면적으로 수동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 두 극단이 만나고 미묘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 미묘한 균형이 사먀크트바(samyktva)다.
그 미묘한 균형이 정적이다.
그 미묘한 균형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평안, 절정, 최고의 상태다.
왜냐하면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바깥과 안, 능동성과 수동성이 균형을 유지할 때-갑자기 인간은 그 양쪽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 그대는 이미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갑자기 그대는 제3의 세력-방관자, 목격자다.
하지만, 그것은 분투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시도해 보라, 그것도 모든 일에.
그대가 누구에게 미움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 이동하려고 애써 보라.
그대가 누구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로 옮기려고 애써 보라.
무엇을 느끼든 그대가 한 가운데로 움직이려 애를 쓴다면 틀림없이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양 극단의 사이에 그 양쪽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사랑도 느끼지 않고 미움도 느끼지 않게 되는 지점이다.
이것이 붓다가 우페크샤, 즉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관심이라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니다.
우페크샤란 그곳에 서면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그런 중간점을 뜻한다.
그곳에서는 이미 「나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미워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누구한테도 동화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떤 초월이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초월이 개화(開花)다.
바로 그것이 달성해야만 하는 성숙, 바로 그곳이 종착역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세상만사의 실재를 부정하면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세상만사의 공허를 주장하면
역시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만큼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다.
말이나 생각을 그만 두는 게 좋다.
그러면 모를 일 무엇 하나 없다.
#신심명 #승찬

보는 것은 직접적이다.
만지는 것은 직접적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간접적이다.
생각하면 놓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는 실재를 알 수 있다.
춤추는 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노래하는 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자는 실재를 계속해서 놓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생각하는 것은 멈추어야 하지만, 무의식이 되어 멈추는 게 아니다.
더욱 의식적으로, 좀 더 빈틈없이 의식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고에 흘러들어가 있는 에너지를 의식 속에 쏟아부어 자기 안에 '지켜보는 자'가 일어서도록.
그러므로 명심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은 영창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고과정을 '지켜보는 자'가 됨으로써 멈춰야 한다는 것을.
그대가 깊이 보고 언어를 꿰뚫는다면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틈이 생긴다.
구름이 갈라지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대는 빈틈없이 의식하고 느끼고 있다-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의식 속으로 끌어올려진다.
불꽃은 더 크고 요란하게 타오른다.
그리고 그대는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좀 더 많은 것을 만지고, 좀 더 많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대의 행위는 어떤 새로운 질(質)을-'신성한 것'의 질을 띤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
그러나 겉모습만 좇으면 바탕을 잃는다.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이 공허한 세계에 나타나는 겉모습의 변화를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지한 탓이다.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의견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무르지 말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모든 보완 관계는 절대의 하나에서 비롯됐다지만
그 하나에도 사로잡혀서는 아니 된다.
이 길 안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에 해입을 것은 없다.
세상사에 방해 받는 일 없으면
그것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사물을 분간하는 힘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전의 마음은 이미 없다.

#신심명 #승찬

그대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작은 세포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었다.
그런 다음 작은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꿈 많은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찢기고 실망으로 가득찬 한 실패자, 한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내면을 본다면 모든 게 변함없이 그대로다.
의식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인간은 놀란다.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
의식에는 나이가 없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열두 살인지 마흔 살인지 예순 살인지 모른다.
나이는 육신이나 껍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나이를 갖지 않는다.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일단 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절대에 중심이 잡히면 그대의 질은 변한다.
그러면 인간은 볼 수 있다.
인간은 거울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거울에 실재가 비친다.
하지만,먼저 자신이 거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눈을 감는 순간, 그대는 엄청난 부자일는지 모르지만, 내면은 한 가난한 거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위대한 대통령이나 수상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죽음은, 그 권력이 단순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권력은 죽음 가까이 다가서면 무기력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하는 것만이 힘이다.
다른 모든 것은 무기력하다.
인간은 한 순간 그것을 믿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 진실을 불러들이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늘 떠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바로 그 죽음이 판단기준이다.
무엇이든 죽음이 무효로 하는 것은 효력을 잃는다.
무엇이든 죽음이 승인하는 것이 인정을 받는다.
무엇이든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무엇이든 죽음보다 강력한 것이 실재다.
실재는 죽지 않는다.
비실재(非實在)는 수만 번 죽음을 맞이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허를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갑자기 인간은 겉모습과 공허를 초월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 하나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고 무엇 하나 공허가 아니다.
모든 것이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다.
모든 나무, 모든 강, 모든 바다가 '신성'으로 흘러넘친다.
그때 신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것을 진리라고 불러도 좋고, 또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표현으로 불러도 좋다.
그 실재는 어디에나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상념의 대상이 없어지면
생각하는 주체도 사라진다.
마음이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듯.
사물이 대상인 것은 생각하는 주체 탓
마음이 마음인 것은 사물 탓이다.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이해하는 게 좋다.
이 공 속에서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각자와 함께 전 세계를 포함한다.
만약 성기고 촘촘한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으면
편견에도 의견에도 유혹되는 일은 없다.

#신심명 #승찬

일단 꿈꾸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해했다면 대상 세계는 사라진다.
세상은 있어도 그것은 객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생명력을 지닌다.
모든 것이 주체가 된다.
종교인들이, 「모든 게 신이다」하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신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어딘가에 앉아서 제어하거나 조작하거나 공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신이란 비유에 불과하다.
그 비유는,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비슷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주체성이 있고 모든 것은 살아서 고동치고 있다-게다가 그 고동은 자잘한 과정이 아니다-그 고동은 전체의 맥동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깨닫는 게 좋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에워싸는 '사물'의 세상 탓이다.
자신이라는 경계가 존재하는 것은 자신 주위에 있는 '사물'의 경계 때문이다.
그 경계가 없어지면 자신이라는 경계도 사라진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의존하고 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바깥 세상의 '사물'은 서로 접합돼 있다.
다리가 놓여 있다.
한쪽 둑이 없어지면 다리는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 그 다리와 더불어 다른 한쪽의 둑도 사라진다.
둑은 한쪽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대성의 의미다.
그래서 그때 거기에 통일체가 있다.
공(空)의 통일체다.
인간은 공, 꽃도 공이다.
그 꽃에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중심이 있을 수 있겠나?
이것은 붓다의 가장 심오한 깨우침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것을 이토록 아름답게 주장해 온 사람들은 불교도들뿐이었다.
불교도는 말한다.
그곳에 아트만(atman)은 없다, 자기는 없다고.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빚어 왔다.
왜냐하면 힌두교들은 그 신앙의 대부분이 아트만과 자기와 초자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한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사고작용(mind)이 전면적으로 침묵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겠나?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소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전체인데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태와 배경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붓다의 공(空), 아나타(anatta : 에고가 없는 상태)다
이 말은 아름답다.
아나타, 무아(無我).
자신은 이제 없다.
그래도 자신은 존재한다.
사실 인간은 전체로써 존재한다.
인간은 개인으로가 아니라, 한정되고 분리되어 존재한다.
뭔가에 둘러싸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전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는, 구별되고 한정된 존재로는 이제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위대한 도(道)에 사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시야가 좁은 자는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수록 그 걸음걸이는 더디다.
그리고 집착은 멈출 곳을 모른다.
깨달음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엉뚱한 길이다.

사물에 대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케 하라.
그러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사물의 자연과 자신의 자연에 따르는 게 좋다.
그러면 가로막히는 일 없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생각이 울타리 속에 있으면 진리가 숨는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둡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잡한 판단작업은 성가심과 피로를 가져다 줄 뿐,
구별하고 차별하는 일에 무슨 득이 있는 걸까?

#신심명 #승찬 

오로지 이 한 길만을 걷고 싶다면
감각과 상념의 세상도 꺼려서는 안 된다.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광명의 징후다.
현명한 자는 목표를 갖지 않고
우둔한 자는 스스로 제 발을 묶는다.
존재하는 것은 유일, 법, 참됨뿐.
구별은 무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날 뿐이다.
분별력으로 큰 마음을 구하는 것이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크다

#신심명 #승찬

그럼 이 위대한 도(道)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대한 도(道)란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차 뭔가 된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데는 어떤 시간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지금까지 늘 그 안에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대 는 그 목적지에 있다.
그대는 그 목적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대는 그곳에서 나와서는 존재하지 못 한다.
그대가 그곳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그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어디로 가든 그대는 그대의 도(道)를 자신 속에 지니고 간다.
그것은 그대의 고유 본성이다.
그것은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 놓거나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대는 이미 그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 '그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미래를 볼 필요가 없다.
오로지 이곳에 있도록 하라.
그러면 그것은 그대의 눈에 뜨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안심도 불안도 망상 탓이다.
광명과 함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
모든 시비는 무지한 해석으로 일어난다.
꿈 같고 허공의 꽃 같은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얻음과 올바름, 그릇됨과 같은 생각들은
결국은 한 순간에 멈춰야만 한다.
한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멈춘다.
상념이 어떤 구별도 하지 않으면
만물은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단 하나의 정수(精髓)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정수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해탈이다.
모든 게 동등하게 보일 때
영원의 자아에 다다른다.
그곳은 비교도 비유도 불가능한
인과((因果)의 굴레가 벗겨진 곳이다.

#신심명 #승찬

오로지 보도록 하라.
그러면 문제는 그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뭔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투영하면 상대는 사랑스럽게 보인다.
미움을 투영하면 상대는 추하게 보인다.
상대는 없다.
그대는 참된 그 사람을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는 사고의 눈을 통해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경전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로 가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고 없이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것 뿐이다.
꽃을 볼 때도 머리가 뭐라고 말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그대는 오로지 그것을 보기만 하라.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지금의 그대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고에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념에 의해 무형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형의 실체가 보이게 되면 전 세계는 마치 하나의 바다와 같다.
그리고 모든 형태는 그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파도 속에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그 '하나인 것'이.
지금은 모든 것이 '여럿'이다.
그것은 사물이 '여럿'이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 갈라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물이 '여럿'으로 보인다.
마치 거울을 깨뜨린 것과 같다-많은 파편이 있다.
그 깨어진 거울조각마다 영상이 생기고 많은 얼굴이 보이게 된다.
그곳에 서 있는 그대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울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얼굴이 보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이원성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면
하나 자체도 머물 수 없다.
이런 궁극의 땅에는 
어떤 규칙이나 묘사도 적합치 않다.
도(道)와 조화를 이루면 하나가 된 마음에서
이기심의 모든 노력은 그친다.
의심과 망설임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
단 한 차례의 가격으로 멍에는 벗겨지고
모두 멈춤 없이 흐르고, 다시 기억하는 자도 없다.
모든 것은 텅 빈 채 명료하고
마음의 힘을 쓰는 일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제 사고도 감정도 지식도 상상력도
이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승찬은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그 곳에 뭔가 정지해 있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정지에 이른다.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인간은 달린다, 인간은 걷는다,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은 어디로 향한다는 것일까?
오로지 어디에선가 쉬기 위해서 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달리는 것은 휴식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움직임은 정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정적은 이미 그곳에 있다.
뜀박질해 보라.
자신 속에 있는 무엇인가는 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달리지 못한다.
자신의 의식은 정지한 채 그대로다.
인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무엇인가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그 부동(不動)의 중심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감정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 속의 무엇인가는 그것에 얽매임 없이 휩쓸리지 않는 그대로다.
이 연관성이 있는 모든 인생은, 결코 관련을 맺는 일 없는 그 요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자신이 사랑 속에 있을 때나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그것이 미움으로 바뀌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미움이 돼 가는지를.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자신이 한 발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대의 생명을 밝히고 있는 불이 순간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그대의 젊음이 어떤 식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지를 지켜 보는 것이다.
반대의 극단을 주시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부한 패턴은 보강되는 게 아니고 그것에 의해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사랑 속에서 미움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 모두를 초월한 정적을 달성하게 된다.
만약 삶과 죽음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와같이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이 실재와 바로 조화하기 위해서는
의심이 일어나면 그냥 '둘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좋다.
이 '불이(不二)' 속에서 무엇 하나 분리되는 것도 없고
또 배제되는 것도 없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광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 진실로 돌아감을 이른다.
이 진리는 시공의 크고 작음을 초월한다.
그곳에서는 한 순간의 생각도 만년의 영원과 다를 바 없다.

#신심명 #승찬

'진여'의 태도라는 것은 운명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나 운명이나 팔자와 같은 어떤 것도 끌어들이지 않는다.
단순하게 사실을 보라, 사태의 '사실성'을 그냥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하면 그것에 문이 있다.
문은 항상 있다.
그래서 인간은 초월한다.
'진여'란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와같은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그리고 일단 어우러지면 인간은 '진여' 속에, 타타타 속에, 이해 속에 어우러진다.
그곳에는 자신이라는 자도 없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없다.
자기도 없고 다른 자도 없다.
'진여' 속에서, 삼라만상 본성의 깊은 이해 속에서 경계는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육체는 좁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좁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광대한 하늘처럼 한없이 넓다.
이 육체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이 육체는 아주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에너지만 더 담겨도 이 그릇은 넘쳐 버린다.
인간의 섹스란 이 그릇, 이 좁은 육체가 넘친 것이다.
하지만 사하스라라가 열린다면,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천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한장 한장 하염없이 벌어져 결코 끝나는 일은 없다.
전체가 담긴다 해도 여전히 무한한 공간이 남아 있다.
붓다는 우주보다 크다고들 한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물론 그 육체가 우주보다 클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붓다는 연꽃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주보다 크다.
이제 이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백만이라는 우주가 그 속으로 떨어져 재흡수되어 연꽃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하면서도 여전히 성장을 계속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여기도 공(空), 저기도 공(空)
하지만 무한한 우주가 늘 눈 앞에 있다.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음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경계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심이나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이 실재와 아무 연관도 없다.
하나가 모두인 세상을 걷고
식별하는 일 없이 뒤섞여 가라.
이런 깨달음 속에 사는 게
미완성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길이다.
이 '믿음'속에 사는 게 '불이(不二)'로 향하는 길이다.
'불이'야 말로 '믿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다. 그곳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다.

#신심명 #승찬

실재를 보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별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바다는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 역시 그런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대가 죽으면 벌레가 그 육체를 먹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먹이가 된다.
그대는 나이가 들어 죽은 다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음식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로 많은 것을 자신의 식량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들의 먹을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식량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슬이다.
그런데 그대는 삶에 매달리려 한다.
그럼 사과는 어떻게 되는가?
사과 역시 삶에 집착하려 한다.
밀은 어떨까?
밀 역시 밀로만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삶은 끝나는 수밖에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옳다.
승찬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승찬은,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언어는 정신(mind)의 창조물이다.
시간 역시 정신의 창조물이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면 시간은 사라진다.
생각을 버리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해 간다.
시간은 없다.
시간이 없으면 그곳에 영원이 있다.
시간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있다.
진리는 영원하다.
그리고 인간이 손에 넣은 모든 것은, 그 진리가 극히 짧은 순간에 비친 투영에 불과하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모든 메시지는 마음과 말과 시간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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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란 기억의 반응이며, 기억은 종족·지역사회·집단·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개인에 의해서 축적되고 물려받고 획득되어온 배경이다.

이 배경은 마음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결과이며 그것이 축적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마음은 기억이며, 도전이나 요구를 받으면 언제나 반응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마치 연상작용을 통해서 움직이는 전자두뇌의 반응과 같다.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므로 본질적으로 시간의 산물인 동시에 시간의 창조자이기도 한다.

사실 죽음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다.

죽음은 그대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재미있게 즐기고 있을 때, 귀기울여 듣고 있을 때, 회사에 가고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 여기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가족을 잃어버릴까봐, 친구도 없이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워한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두렵고, 모아둔 경험과 재산이 없어질까봐 두렵다.

우리가 겁나서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집착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이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그때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을, 모든 지식·모든기억·모든 다툼을 버리고 그것들을 다음 날로 가져가지 않으면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나더라도 거기에는 새로 태어남이 있다.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죽음이라는 사실과 마주치면 우린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면 그 이름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느낌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며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죽음은 뭔가 새로운 것이며, 죽음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도전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것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마음은 새로운 사실·새로운 사건·새로운 감각을 만나면 언제가 즉시 거기에 라벨을 붙이고 '이건 다른 것들과 달라.'라고 하거나 '이것도 다른 것들과 같은 거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즉 새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아닌가?

삶과 사랑과 죽음은 함께 붙어 다닌다.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삶은 신선한 상태로 매일매일 살아있음 속에 있다.

그 투명함, 그 순수함을 갖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언제나 나가 있는 그런 마음 상태는 죽어야 한다.

사랑 없이는 덕도 없다.

사랑이 없이는 평화도 없고 관계도 없다.

진리만 홀로 존재하는 차원으로 마음이 끝없이 들어가는 토대가 바로 이 사랑이다.

마음은 완전히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이해한다.

따라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계속되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가 없다.

죽는 것만이 창조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삶이 곧 죽음일 때 거기에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사랑과 창조가 그런 것처럼.

내 자신에 대해서라면 영속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이걸 그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다-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생김새를 나타내는 이름, 이름인 말, 말인 생각, 생각에 의해 편집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 그러한 나라는 연속성이 있다면,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름, 이 몸 즉 유기체의 생김새, 그리고 영혼의 완전한 구조는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견해·믿음·애착·욕심·시기심을 버리는 것이 매일 매순간 죽는 것이다.

매순간 모든 야심에 끝을 낸다면, 그때 그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끝없는  움직임만 있는 심연에 이르게 되며 그러다가 느닷없이 끝에 서게 되는 이 놀라운 상태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죽음이 실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 살아서 움직이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아주 놀라운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 대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을 관찰하고, 제발 내 말로 인해 최면에 걸리지 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실천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다.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표현에 만족하지 말라.

그 표현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면, 삶이 얼마나 많은 도피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어떻게 사로잡혀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사실을 살펴보고 심사숙고하고 탐험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세히 조사하는 게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는 시간도 없고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는 영원하다.

그것은 삶이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사랑이며 거기에는 실현이나 좌절은 없다.

이것들은 사실들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단순히 슬픔 그 자체를 바라보기만 하면 절대 슬프지 않다.

자신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그저 인식하기만 한다면 거기에서는 절대로 슬픔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허망함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고 싶어하는 그 순간, 투쟁과 불안과 짜증나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이 결국에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대가 무언가를 사랑할 때면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본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아이를 바라볼 것이다.

섬세한 얼굴 표정, 동그랗게 뜬 눈, 놀랍도록 순진한 느낌을 관찰한다.

나무 한 그루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전 존재로 그것을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물들은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심함은 어떤 습관을 부인하고 부정할 때 생긴다.

추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추하다는 것을 알 때,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보면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때, 원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으며, 그것을 향한 문을 결코 닫지 않으면서 그렇게 완전하게 존재할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내면적으로 민감해질 때, 그때 그것으로부터 놀라운 힘을 지닌 무심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대가 지금, 오늘,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다음 생에(그런 것이 있다면) 다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중요한 건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씨앗이나 슬픔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것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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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요노千代能의 오도송悟道頌

텅 비워진 내 손
#치요노 #千代能 #텅_비워진_내_손 #오도송 #悟道頌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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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주제는 철학적 필연론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학설과 대립되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또는 사회적 자유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논문의 주제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그러므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지배자가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한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제한을 가하려고 했다.
첫 번째 방법은 정치적 자유, 또는 권리라고 불리는 일종의 면책조항을 지배자가 승인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면책조항을 침해하는 것은 지배자로서의 의무 불이행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가 실제로 침해할 경우 특수한 반항이나 일반적인 반란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두 번째 방법은 일반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에 나타나는 것으로 헌법에 의한 억제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입헌적 제약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중대한 통치권의 발동에는 사회의 동의, 혹은 사회의 이해를 대표한다고 간주되는 일종의 단체의 동의가 필수적인 조건으로 되었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행동이나 자제로나 법률이나 여론에 의해서 강제되어 온 인간 행위의 규칙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대 원리는 현세의 지배자들이나 그들이 믿는 여러 신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또는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영합하려는 인류의 노예 근성이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노예 근성은 위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혐오의 감정을 낳는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술사들과 이교도들을 불태워 죽이도록 했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실제로 정부의 간섭이 정당한가 부당한가를 관례에 의해서 식별해야 한다고 공인된 원리는 없다.
사람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어떤 이들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선한 일이나 교정되어야 할 악한 일을 발견하면 언제나 기꺼이 정부가 그러한 일을 수행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부의 통제에 복종해야 할 인간의 이해 부문에 또 다른 하나를 첨가하기보다는 아무리 커다란 사회적 해악이라도 이를 참고 견디어 나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와 같은 그들의 일반적인 감정에 따라 이 쪽을 편들지, 아니면 저 쪽을 편들지를 결정하게 된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이 글의 목적은 개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를 다루기 위해 정부에 전적으로 부여된 강압과 통제의 수단, 즉 법형이라는 육체적인 강압이든 여론이라는 정신적인 강압이든 간에, 그런 수단에 대한 매우 단순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타인의 행동의 자유에 대해 간섭할 경우 유일하게 정당한 근거는 자기 방어라는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통치형태가 어떻든 간에 이러한 자유가 존중되지 못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한,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타인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자유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인간에게는 통치자로 있을 때나 시민으로 있을 때나 자신의 의견이나 기호를 행위의 준칙으로서 타인에게 무리하게 강제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의 본성에 부수되는 일종의 최선과 최악의 감정에 의해서 강력하게 지탱되므로 아예 권력을 없애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수단도 이것을 억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다행히도 그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 있는 일반인들은 가끔씩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박을 듣기도 하고, 잘못된 의견이 정정되는 기회를 갖기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 중에서 오직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나 그들이 평소 존경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함께 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무조건 신뢰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서 자신을 갖지 못하면 못할수록 한층 더 세상의 일반적인 절대 무오류성, 즉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에게 세상은 그가 접촉하는 일부의 세계, 즉 그가 속해 있는 당, 종파, 교회, 사회계급 등을 의미한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따라서 인간의 판단력의 힘과 가치는 만약 판단이 잘못되더라도 시정이 가능하다는 유일한 특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이 항상 손 가까이에 갖추어져 있을 때만 그 판단은 믿을 수 있게 된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인간이 어떤 문제에 관한 완전한 지식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모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될 수 있는 대로 귀담아 들을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관찰방법을 연구하는 데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느껴왔기 때문이다.
어떤 현인도 이 이외의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적은 없었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진리가 가지는 참된 강점은 다음과 같은 것에 있다.
진리가 박해를 받아 한 번이나 두 번 또는 몇 차례 소멸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진리를 재발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침내 다시 나타나게 된 진리 중 하나가 운 좋게도 좋은 시기를 만나서 박해를 모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것을 억압하려는 그 이후의 모든 탄압에도 능히 저항해서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의견을 제창했다고 해서 그를 사형에 처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자기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주장에만 맹종하는 데 불과한 사람들의 진실된 주장보다는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다하여 스스로 사색할 줄 아는 사람들의 잘못이 진리에 더 많은 공헌을 한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나 그것에 관해서 세상의 일반 사람들이 분명히 일치된 의견을 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비록 세상 사람들의 편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이 침묵을 지킬 때 진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논쟁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이러한 부당 행위들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반대 의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악하고 부도덕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는 일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행복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절실히 느낀다면 그것이 문명이니 지도니 교육이니 교양이니 하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과 대등한 요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것의 필요한 요소이며 조건이라 느낀다면 자유가 경시될 위험은 없으며,
자유와 사회적 통제의 경계를 조성하는 일이 특별한 어려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개인의 자발성은 고유한 가치가 있으며,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이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어떤 의견의 근거가 자신의 이성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이성을 약화시키기 쉽다.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에 적합하지 않은 동기로부터 행위를 한다면(애정이나 다른 사람의 권리가 관계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그의 감정이나 성격을 활기 있고 열정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생기 없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자신의 생활설계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이 속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 사람들이 선택해 주도록 일임하는 사람은 원숭이와 같은 모방의 능력 이외에는 어떠한 능력도 필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설계를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은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배양되면 가장 강렬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충동을 생기 넘치는 것으로 만드는 강렬한 감수성은 덕에 대한 가장 열렬한 애착과 가장 엄격한 자제심을 낳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감수성을 개발함으로써 사회는 그 의무를 다하며 이익을 옹호하게 된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독창성은 독창성이 없는 사람들이 그 효용을 감지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독창성이 없는 사람들은 독창성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지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독창성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그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독창성이 아닐 것이다.
독창성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해 주어야 할 첫 번째의 봉사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충분히 수행된다면 그들은 스스로 독창적이 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나는 천재적 소질을 가진 강자가 세계의 정치를 힘으로 장악하여 세계의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자신의 명령을 강행케 하려는 데 박수갈채를 보내는 영웅 숭배를 장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강자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방향을 제시할 자유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로 그러한 길을 걷게 하는 권력은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자유나 발전과 양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자 자신도 타락시키는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불가불 일정한 행위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이러한 행위의 첫째는 상호간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법률의 명백한 조문이나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양해에 의해서 당연히 하나의 권리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사회 또는 그 성원을 위해 간섭으로부터 방어해 주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과 희생을 각자가 자기의 몫만큼(이러한 몫은 공평한 원칙에 의해서 정해져야 한다.) 부담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사회는 마땅히 이러한 조건의 수행을 억제해도 좋을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사회나 국가는 억압이나 처벌을 목적으로 오직 개인의 이해에만 관계되는 이러저러한 행위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고 권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나쁘다고 간주하는 경우에는 적어도 그것의 선악 여부는 한 번 논의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사회나 국가가 생각하여 판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그 두 공리들 중 첫째 것은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이해와도 관계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충고하는 것, 가르치는 것, 설득하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행위를 피하는 것,
이와 같은 것은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가 혐오감이나 비난을 표명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사용해도 좋은 유일한 수단이다.
둘째의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
사회가 방어를 위해서 사회적 징벌이나 법률적 형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개인은 그 중 어떤 처벌을 받아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일률적인 국가 교육은 국민을 일정한 틀에 넣어서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가 국민을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려는 틀은 정부를 지배하는 세력이 선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국가 교육이 효과를 거두어 성공하면 할수록 국민의 정신을 전제적으로 더 압박하게 될 것이며, 결국 국민의 신체에도 압박을 주게 될 것이다. 
 #자유론 #존_스튜어트_밀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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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성장이라는 관점에 서면, 철없는 유년 시절은 평화롭게 지내고 철들 나이가 되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기회가 많을수록 좋다.
설령 그것이 난세라 해도, 생각할 거리를 풍부히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절망은 사람을 과격하게 만든다.
특히 고지식하고 외곬으로 생각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과격해지기 쉽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여자는 무시당했을 때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 법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고령자라서 완고한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육체의 쇠약이 정신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훌륭한 업적을 쌓은 고령자에게 나타나는 완고함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거둠으로써 성공자가 되었기 때문에 완고해진 것이다.
나이가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사람을 완고하게 만든다.
성공자이기 때문에 완고한 사람은 변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도,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근본적인 개혁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성공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만이 달성할 수 있다.
흔히 젊은 세대가 근본적인 개혁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성공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뛰어난 지도자란 단지 뛰어난 재능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인간이 아니다.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반드시 상호관계다.
일방적인 관계에서는 지속적인 관계를 바랄 수 없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남보다 뛰어난 공적을 이룩하고 유력한 지위에 오른 사람 가운데, 남의 질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질투를 품더라도, 당장 탄핵이나 중상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표면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질투는 은밀히 숨어서 기회를 노린다.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였을 때가 바로 기회다.
추문은 절대로 강자를 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간은 먹고 살 수 없게 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땅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치 않는 현상이다.
이런 종류의 민족 이동을 고대에는 야만족의 침입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난민 발생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여서, 로마가 존속하는 동안은 한시도 이같은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존이 어려워진 사람들의 이동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든 별차이가 없다.
아무리 평화적으로 이동해 온다 해도 기존 사회를 뒤흔들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민족 이동은 다소간에 폭력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매사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게 마련이다.
좋은 면밖에 없는 제도는 신의 솜씨로도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개혁이란, 원래부터 나빴기 때문에 고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좋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빠진 면을 고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확고부동한 자부심만이 열등감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지나친 열등감만큼 상황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없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무력 충돌이 예상되는 상태에서 대립하면, 양쪽 다 상당한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그 최초의 행동은, 이때를 놓치면 두번 다시 좋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믿고 결단을 내리거나, 더 이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행동에 나서거나,둘 중 하나의 경우에 일어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로마 시민과 비시민이 둘로 나뉘어 싸운 '동맹시 전쟁'과는 달리, 이번은 적군과 아군이 모두 같은 로마 시민이었다.
또한 전쟁이란 오래 계속될수록 당초에는 품지 않았던 증오심까지 고개를 쳐들게 되는 법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게 된다.
오직 증오심만이 그들을 몰아세운다.
내전이 처참한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체제가 갖는 장점은 누가 실행자가 되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가 보장된다는 데 있다.
반대로 체제가 갖는 단점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의 성과밖에 거둘 수 없는 현실이 패배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 공동체가 입을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체제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뿐이고, 비상시에는 아무리 체제에 충실하고 싶어도 현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성을 갖는 체제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다.
예외는 또 다른 예외를 부르는 숙명을 갖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이 위정자들에게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요구하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없이 정치를 하면 정책은 전후좌우로 흔들리기 쉽고, 그 결과는 국력의 낭비로 이어진다.
통치를 받는 쪽으로 관점을 옮겨보면 어떨까.
통치자 쪽에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있든 없든, 결과가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여자운과 부하운은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신적인 측면에만 한정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의 정도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다고 느끼게 하면 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누군가에게 뒷일을 맡겨야 할 경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아주 자세한 지침을 주고 맡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임무는 주더라도 자세한 지침까지는 주지 않고 그 사람에게 일임해버리는 사람이 있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느냐의 여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전자는 자세한 지시를 받아야 일하기 쉬운 사람이고, 후자는 그 반대일 뿐이다.
카이사르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자를 택한 경우는 도박이니까, 잘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경우에는 일을 맡긴 사람이 뒤처리를 해야 한다.
잘되지 않은 경우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일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되었지만 다른 일은 잘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뒤처리도 당장 해야 하느냐, 아니면 당분간은 그대로 방치해두어도 되느냐를 판단해야 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간은 '소문의 노예이고, 게다가 그 소문을 제멋대로 분칠해서 자기네 편한 대로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정착생활은 전투보다 농경에 열의를 쏟게 되는 원인이고, 사유지를 인정하면 빈부격차가 생긴다.
빈부격차는 추위와 더위에 대해 쾌적한 집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낳게 된다.
그리고 빈부격차의 가장 큰 폐해는 금전에 대한 집착과 사회 불안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민계급도 불만을 느끼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허영심이란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심정이고 야심은 무언가를 이룩하고 싶어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필수불가결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이룩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해내는 데 필요한 힘이나 권력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허영심은 있지만 야심이 없는 사람은 욕심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간주된다.
추대되는 것은 항상 이런 부류의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또한 공적으로 이룩하고 싶은 무언가를 갖지 않은 사람은 실질적인 은둔 생활로 일관해야 인간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고대에는 이런 생활방식을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라고 불렀다.
이와는 반대로, 무언가를 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한 사람을 스토아파라고 불렀다.
폼페이우스의 불행은, 오리엔트 제패를 끝내고 귀국한 44세를 고비로 적극적인 스토아파에서 철저하지 못한 스토아파로 변해버린 데 있다.
그의 선배격인 루쿨루스나 키케로의 친구인 아티쿠스처럼 차라리 철저한 에피쿠로스파라도 되었다면 평온하고 우아한 여생을 보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진두지휘하는 사령관과 그 휘하에서 싸우는 정예 병사들은 고락을 함께 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친밀감도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것이 친밀감의 한계를 넘어 '어리광'으로 바뀐다.
어리광은 조금만 발전하면 '상대를 깔아 뭉개고 기어오르려 하는 태도'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는 단순한 파업이 반란으로 발전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는가.
술라와 카이사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양극단이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체제를 바꾸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우선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개혁, 특히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자기 개혁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게을리하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가 더욱 불가능해진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 
 
종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철학은 그것을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에게 소크라테스의 교묘한 논법으로 접근한다 해도, 철학이 그 사람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처형을 아테네 시민이 압도적으로 찬성한 사실은 이런 종류의 '바로잡기'가 지닌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법률은 다르다.
법률은 종교를 달리하거나 철학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여자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번은 부닥치는 문제에 그녀도 직면했을지 모른다.
뛰어난 남자는 여자 뜻대로 되지 않고, 여자 뜻대로 되는 남자는 그 아래에 있는 남자뿐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후의 생활방식이 결정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좋으니 뛰어난 남자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역량과 재능은 일급이 아니더라도 자기 뜻대로 되는 남자를 택할 것인가.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어디서든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민족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의욕이 부족해지기 쉽다.
또한 쇠퇴기에 접어든 지 오래인 민족이 다시 융성한 예는 역사상 한번도 없다.
그런 예가 있다면, 대수술을 가하여 국가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경우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런 대수술을 단행했지만,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후의 그리스인한테서는 더 이상 그런 종류의 활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고양이는 자기를 귀여워해줄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다고 한다.
여자도 고양이와 같다.
자기한테 마음이 쏠릴 만한 남자는 눈빛만 보아도 안다.
클레오파트라도 단정한 용모를 지닌 33세 젊은이의 차가운 눈길을 받은 순간, 그런 수법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시도하는 것은 일류라고 자부하는 승부사가 할 짓이 아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균형 감각이란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중간점에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 사이를 되풀이하여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한쪽 극단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면서,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한 점을 찾아내는 영원한 이동 행위가 아닐까.
자유와 질서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다.
자유를 지나치게 존중하면 질서가 파괴되고, 질서를 지키는 데 지나치게 전념하면 자유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양립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진보가 없고, 질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진보는커녕 오늘의 목숨조차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다음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첫번째 자질인 '지성'이다.
지성은 지식만도 아니고 교양만도 아니다.
지성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꿰뚫어보는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만, 꿰뚫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황을 통찰한 뒤에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인지도 이해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창조성이 결여된 현실인식은 백점 만점의 지성이 아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정복자에 대한 피정복자의 불만은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동안은 폭발까지 이르지 않는다.
그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지도자를 얻었을 때다.
미개한 야만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부족장을 비롯하여 이른바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정복자에게 피정복 민족의 지배층이 불만을 품는 것은 정복당하기 전에 자기네가 갖고 있던 권력이 정복자에게 침해되었다고 느꼈을 때다.
바꿔 말해서 정복자가 군사력으로 제압한 상태를 영속시키고 싶으면, 피정복 민족의 지배층이 갖고 있던 권력을 침해하지 않고 종래대로 보장해주면 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그렇긴 하지만 인간은 정말 불가사의한 생물이다.
싸움에 지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느라 분열하고, 싸움에 이기면 이번에는 논공행상에 따른 질시 때문에 분열한다.
따라서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보다, 분열로 말미암아 힘을 쓸데없이 소모했느냐 아니냐가 최종적인 승패를 결정하는 게 아닐까.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외교에 의한 해결이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평화적으로 대화한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군사력을 사용하여 위협한 뒤에 악수하는 것도 외교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유효한 외교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준다.
인간은 이치로 깨닫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칼을 들이대면 눈을 번쩍 뜨는 법이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로마인이 처음으로 가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도를 여러 줄기가 그물처럼 얽힌 도로망으로 구성하면 그 기능도 더욱 높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실행한 것은 로마인이다.
로마인이 처음으로 법률을 만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법률은 여러 갈래에 걸쳐 있는 법률체계로 만들어야만 법치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행한 최초의 민족은 로마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필요에 따라 '유지·보수'하지 않으면 기능 저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었다.
법률면에서의 유지·보수는 곧 현재 실정에 맞게 법률을 고치는 것이다.
법체계의 창시자로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로마인들은 일단 법률을 제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법률도 도로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경우에는 '수리·복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법률의 결과인 각종 체제에도 적용되었다.
어떤 체제든, 체제는 현재 실정에 맞도록 수리·복구되어야 하고, 그것을 게을리하면 체제 자체가 피로를 일으켜 결국에는 무너지기 때문에 긴 안목으로 보면 대단히 비경제적인 결과로 끝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인간은 외아들이 죽어도 슬픔에 굴복하지 않는다.
슬픔에 지는 것만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비탄에 잠겨 일을 내팽개치는 것은 보통사람이나 하는 일이고, 자신을 보통사람으로 생각지 않는 인간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큰 슬픔에 사로잡힌 시기에는 오히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사람이라면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일을 시작할 무렵,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비로소 깊고 무거운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까.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위선을 뜻하는 영어 낱말 'hypocrisy'와 이탈리아어의 'ipocrisia'는 둘 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어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어를 라틴어식으로 표기하면 'hypokrisia'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낱말의 창조자는 고대 그리스인인데, 창조자인 만큼 그들은 위선을 사전에 나오는 의미-겉치레로 보이는 선행-로만 생각지는 않았다.
그들은 위선을 상급과 하급으로 구분했다.
겉치레로 보이는 선행이라는 설명은 그리스인에게는 하급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스인이 생각한 상급 위선은 겉꾸밈이든 겉치레든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위선을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수단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필요악은 아니다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악'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원로원 의원이라면, 통치에는 정보 수집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쯤 이해해고 있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라고 불린 로마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보 수집의 중요성은 절대적인 속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속도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를 토대로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따른 지령을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보내는 데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정보의 속도는 절대성이 아니라 상대성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는 소심한 경우가 많다.
소심한 사람은 남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편이 확실한 사람들로 주위를 에워싸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자기편으로 생각하는 것은 같은 핏줄로 이어진 혈연이라는 게 특징이다.
누이동생들을 우대한 칼리굴라는 아내가 된 여자들한테는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의 창의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역사는 내가  창조한다'고 생각지 않고 '역사는 인간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상들이 보여준 선례를 참고하는 데에도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하지만 책에서 얻은 지식은 현실과의 대조를 거쳐야만 비로소 인식이 될 수 있다.
인식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통해 사물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만, 쉽게 말하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에 열을 올리는 것은 최고권력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측근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그들이 이런 유혹을 완전히 극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인간은 유혹에 약한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 해도 억누를 수는 있다.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남의 협력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통치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협력자는 늘상 있었다.
다만 이들은 수족으로 일해주는 부하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 경외심은 부하들에 대한 무언의 브레이크이기도 하다.
경외심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공경만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고대 로마의 노예제도를 논할 경우, 노예제도는 인권에 어긋나니까 폐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근대적 관점에 서면 논의조차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노예제도는 고대 로마가 붕괴하고 기독교 세계가 된 뒤에도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다.
기독교라는 신앙에 눈을 뜨지 못한 자는 기독교도와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교회의 묵인 아래, 비기독교인 노예는 계속 존재했다.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인권 존중을 제일의 가치로 내건 계몽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노예제도 폐지 선언은 18세기 말에 집중되어 있다.
고대에는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 사회에 의심조차 품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고대인은 노예가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믿지 않으니까 자기네와 동등해질 권리가 없는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대의 노예는 전쟁에 지거나, 해적한테 붙잡히거나, 빚을 갚지 못해 담보로 잡히거나, 아니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거나, 부모가 노예로 팔았거나 하는 따위의 '불운' 때문에 노예 신세로 전락한 사람을 가리켰다.
따라서 주인이 온정을 베풀거나 빚을 갚거나 몸값을 내고 노예에서 풀려나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도 몸값을 내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적한테 붙잡힌 사람이나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사람과 같은 처지였다.
자유민과 노예의 구별은 믿는 종교의 차이가 아니라 이런 '불운'을 당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불과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그러나 인간은 문제가 없으면 불만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문제라도 찾아내서 그것을 불만거리로 삼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인간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말도 나온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외국을 침공하여 약탈과 폭행을 저지른 뒤 물러나는 강도짓 같은 군사행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외국을 침공하여 그 땅을 점령할 뿐 아니라, 그 땅과 주민들을 자기네 세계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행동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우선 군사력을 이용한 제패는 되도록 짧은 기간에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쟁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정복당한 쪽의 적개심이 증폭되게 마련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대군을 일시에 투입하여 속전속결로 나가야 한다.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여 천천히 제패를 진행하는 것은 공격하는 쪽에도 당하는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나쁜 짓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단숨에 해치워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도 말했다.
타민족을 침략하는 못된 짓은 단기간에 끝내고 전후 처리를 충분히 하는 편이 정복자에게도 피정복자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침략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상주의는 물론 여기서 배제된다.
인류의 역사는 곧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저지를 악행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인간성의 현실이라면, 악행에 따른 폐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도 인간의 지혜를 발휘할 여지는 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류는 지금까지 온갖 형태의 정치체제-왕정, 귀족정, 민주정, 나아가서는 공산체제까지-를 생각해내고 실행했지만,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로 양분되는 체제를 해소하는 데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을 꿈꾼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 현실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체제가 어떻든 간에,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양분되는 체제는 존속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체제가 존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이상,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와 역량이 그것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피하는 법이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나 자질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기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아니겠지만.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우두머리는 승부가 걸려 있는 곳에 직접 나갈 필요가 있다.
외적과 싸울 경우에는 최고 사령관이 전쟁터에 나가느냐 마느냐가 전투원들의 사기에 영향을 준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 즉 동족끼리의 싸움에서는 우두머리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우선 동포끼리 싸우는 것이므로, 적군과 아군 병사들의 마음 속에는 동포에게 칼을 휘두르는 데 대한 망설임이 존재한다.
이기려면 그 망설임을 잘라버려야 한다.
병사들이 망설임을 떨쳐버리게 하려면,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적이 미워서가 아니라 우두머리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병사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두번째 이유는, 승리했을 때 부하 병사들이 지나치게 날뛰는 것을 통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동포에게 칼을  휘두르는 행위는 인간성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 결과가 아무리 좋게 끝난다 해도, 인간성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은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런 경우 인간은 이 불쾌한 감정에서 달아나고 싶은 나머지, 한 걸음 물러나 이성을 되찾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인 야수성에 몸을 맡기기 쉽다.
최고 사령관의 단호한 명령만이 병사들의 폭주를 저지할 수 있다.
승리한 아군을 통제하는 것 못지않게, 패배한 동포에 대한 처우도 중요하다.
이것도 최고 사령관의 단호한 조치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2천 년 뒤인 이제 와서 생각해도 흥미롭지만, 로마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를 구분하여 신뢰할 수 있는 쪽만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은 신뢰하지만, 그것도 신뢰할 수 있는 데까지만 신뢰한다.
'신뢰할 수 있는 데까지'의 선을 어디에 긋느냐.
로마 지도자들은 상대의 선의나 도덕성을 그 선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기준을 삼은 것은 자기 쪽의 군사적 방위력이었다.
평화조약을 맺은 상대와의 국경에도 전과 다름없는 규모의 군사력을 계속 배치했다.
그렇게 하여 상대가 우호조약을 계속 유지하게 만들고, 상대가 그것을 깨뜨리려 해도 상당히 생각한 끝에 깨뜨리게 했다.
이런 사고방식을 현대식을 말하면 '전쟁 억지력'이 아닐까 싶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하여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반석 위에 올려놓은 제정 로마의 전략은 바로 이 전쟁 억지에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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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 진행되는 사태에 대처하는 데에는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재능이 문제되는 것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처할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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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게르만족이 갈리아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말은 언제나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남을 지배하려는 민족치고 이 두 마디를 기치로 내걸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 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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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싫어하게 되면, 그들이 하는 짓이 모두 혐오 대상으로 바뀐다.
타키투스도 말했듯이 할례는 유대인과 타민족을 구별하기 위한 의식이고, 일신교는 다른 신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생겨난 신앙이며, 병역이나 공직을 거부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없음을 나타내고, 인구를 늘리는 데 열심인 것은 타민족을 앞지르려는 생각에서 나왔고, 인간의 형상을 본뜬 신상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르면서 거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경멸이고, 춤도 추지 않고 운동경기도 없는 유대교의 종요의식은 음침하고 음울해서 인생을 절망하게 한다는 식이다.
타종교를 믿는 자와 결혼을 금지하는 것도 유대인의 폐쇄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전투 상태가 오래 갈수록 적과 아군에 증오심이 증폭되게 마련이다.
단기간에 해결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전후 처리나 대책도 원한에 좌우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로마 장수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징은 무인다운 허영심과는 인연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군으로 소수의 적을 공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군으로 공격하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과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사회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면 오히려 외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당장 기존 구성원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기존 구성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난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순수 백인'의 인종차별 의식만 보아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로마처럼 사회 계급을 인정하되 계급간의 유동성을 인정하면, 외부인의 유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우선 하층 계급에 들어가게 하고, 그후의 신분 상승은 당사자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력을 보여준 사람은 당장 그 실력에 어울이는 계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역사가 기본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가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 로마는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다민족·다종교·다문화 사회인 로마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어려운 제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문제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로마인은 타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타민족까지도 로마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쇠퇴는 식민지들이 독립했기 때문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속주들의 독립이나 이반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기능적이고 공정한 세제는 선정의 근간이고, 이것을 안전보장이나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임무로 생각한 로마인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정치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적 인간'은 많지 않은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그러나 로마인은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킨 정책에 따라, 아무리 국경을 철벽으로 만들더라도 국경 안팎을 단절시키지 않고 교류를 허용했다.
아니, 사람과 물자의 교류는 오히려 장려했다.
방위선 밖의 부족들에게도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거나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로마와 우호관계가 성립되면, 우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는 국경 밖에도 우호적인 부족을 갖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이른바 '분리하여 지배하라'는 정책이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간은 왠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사람한테는 너그럽고, 고귀한 혈통도 아니고 고귀하게 자라지도 않은 사람이 강권을 휘두르면 신경질적으로 반발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라이벌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여자끼리의 문제지만, 한쪽이 죽으면 남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자가 라이벌이 된다.
교양 있고 성격도 드세고 자존심도 강한 여자에게, 남자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라이벌만큼 힘든 상대는 없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여자의 가슴 속에 솟아나는 증오는 라이벌의 그림자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에게 돌려지는 법이다.
게다가 율리아가 죽은 뒤로는 원래 내성적이었던 도미티아누스가 더욱 마음을 닫게 되었고, 별장에 갈 때에도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알바 산장에서는 호수를, 치르체오 별장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에 남은 아내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간은 재미있는 동물이라서,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던 사람도 죽고 나면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는 법이다.
도미티아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토록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이,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정책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로마인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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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대 충실한 종복이여,
어디서 나를 찾고 있는가?
나는 신전에도, 사원에도 없고,
카바(Kaaba) 신전에도, 카이라쉬(Kairash) 신전에도 없다.
의식과 제례에도 없으며, 요가 수행이나 출가에도 없다.
보라! 나는 바로 그대 곁에 있다.
그대가 진정 구도자라면
그대는 나를 볼 것이다.
그대는 매순간마다 나를 만날 것이다.
까비르는 말한다.
'오! 구도자여, 신은 모든 생명의 숨과 숨 사이에 있다.'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이 질그릇 안에 작은 숲과 쉴 그늘이 있으며
그 안에 창조자가 있다.
이 질그릇 안에 일곱 개의 대양과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있다.
시금석과 보석 감정인이 이 안에 있으며,
이 안에서 영원의 소리가 울려 나오고
맑은 샘물이 솟아오른다.
까비르가 말한다.
'나의 벗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내 사랑하는 님은 이 안에 있다.'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어떻게 저 언덕을 넘어 가는가?
거기에는 안내자도 길도 없나니,
그 언덕 어디에 머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거기에는 물도, 배도, 그리고 사공도 없는데.
거기에는 배를 묶는 줄도 묶을 사람도 없는데.
땅도 없고 하늘도 없고 시간도 없고 어떤 물체도 없다.
해변도 없으며 쪽배 한 척도 없다!
몸도 없고 마음도 없다.
어디에 목마른 영혼이 머물고 있는가?
이 모두가 없는 무한한 허공 속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강건하게 너의 몸을 가지고 그 무의 세계로 들어가라.
네 발자국을 깊숙이 남기며 깊이 생각하며 가라.
오! 내 사랑하는 감각이여, 늘 가까이 있어 다오.
까비르는 말한다.
'모든 이미지를 떠나 그대 자신 위에 굳건히 서라.'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어떻게 환영(幻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나의 형제여,
내 옷에서 리본을 떼어낸다 해도 옷은 남아 있고
옷을 벗어 보아도 몸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정열을 포기한다 해도 아직 탐욕은 남아 있으며
탐욕이 사라져도 오만과 자만은 남아 있다.
마음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도
환영이란 말은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까비르는 말한다.
'사랑하는 구도자여!
진정한 진리의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요기는 그의 마음을 사랑의 색깔로 물들이는 대신
그의 옷에 물감을 들인다.
그는 사원에 머물며 창조자에게 예배한다.
귀에 구멍을 뚫고, 긴 수염을 길러
광택 없는 문고리를 잠가놓은 듯 비틀어 꼬아 마치 염소 같다.
그는 거칠게 뛰어들어 모든 욕망을 죽이고
자신을 내시로 변화시킨다.
머리를 깎고, 옷을 물들이고,
기타(Gita)를 읽으며 거창한 설법자가 된다.
까비르가 말한다.
'그대는 손발을 옭아매고 죽음의 문으로 가라!'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나는 경건하지도 않으며 신적(神的)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율법에 의해 살지도 않으며 감성적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하는 자도 아니며 듣는 자도 아니다.
나는 하인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나는 속박된 것도 아니요 자유도 아니다.
나는 집착을 떠난 것도 아니며 집착에 매인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것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나는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일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모든 일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몇몇 무리들은 내 뜻을 이해한다.
그대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며, 그는 언제나 부동(不動)이다.
나는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찾는다.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나는 말고삐를 당기듯이
마음의 말고삐를 조이고 당긴다.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내면의 공간으로 전진해 나간다. 
 
참나의 실현은 말안장에 앉는 것이니
그대의 발이 자연스럽게 말 등자(鐙子)에 놓으면
나는 마음의 말고삐를 조이고 당긴다. 
 
오라, 나는 말고삐를 당겨 그대를
천상으로 여행하게 해주련다.
만약 말이 갑자기 멈추게 되면
나는 그대를 성스러운 사랑의 채찍으로 휘몰아 가리라.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사랑하는 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내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하고
온종일 평안치 못하며 잠을 청할 수도 없다.
그 누구에게 이 슬픔을 하소연하리?
밤은 어둡고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님은 부재중이고 불안은 시작되었다.
까비르는 말한다.
'들어라, 벗이여!
사랑하는 이와의 우연한 만남 외에는 어디에도 평안은 없다.'
#물속의_물고기가_목마르다_한다 #까비르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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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그림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한 훈련을 받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미국은 추축국樞軸國의 침략 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 세 나라가 부당한 정복 행위로 국제 평화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추축국이 권력을 쥔 곳이 만주국이든 에티오피아든 폴란드든, 그것은 그들이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사악한 길로 나아갔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공존공영', 또는 적어도 자유무역을 위한 '문호 개방'이라는 국제간 규약을 위반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전쟁의 원인을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된다.
일본은 계층제도(hierarchy)를 수립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또한 일본은 승리의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바탕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이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모든 것이 예기되고 충분히 계획된 일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일본인은, 모든 사태는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란 것이고 결코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그런 주장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공격당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적을 우리 손안에 끌어들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적이여, 올 테면 오라.
우리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 오히려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기가 왔다.
우리는 이 좋은 기회가 온 것을 기뻐한다'고 말할 것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그러나 천황의 뜻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양날의 칼이었다.
많은 포로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창 한 자루 외에 아무런 무기가 없더라도 주저 없이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천황의 명령이라면, 즉각 싸움을 멈출 것이다."
"만약 천황이 명령한다면, 일본은 내일이라도 무기를 버릴 것이다."
"만주의 관동군-가장 호전적이고 강경한-조차도 무기를 버릴 것이다."
천황의 말씀만이 일본 국민에게 패전을 인정하게 하고, 재건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가 있다."
이런 말에서 천황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천황에 대한 무조건·무제한적 충성은, 천황 이외의 다른 모든 인물과 집단에는 여러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은 보통 4대 1이다.
그런데 일본군이 가장 많이 항복한 홀란디아(Hollandia)에서도 그 비율은 1대 5였다.
이것도 북부 미얀마에서의 1대 120에 비하면 현저한 진보였다.
그러므로 일본인에게 포로가 된 미군은 단지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체면을 떨어뜨린 자가 된다.
그들은 포로가 부상당하거나 말라리아, 이질에 걸려 '완전한 인간'의 부류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폐물' 취급을 했다.
많은 미국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또 그 웃음이 교도관을 얼마나 자극하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포로란 치욕을 입은 자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계층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적당한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서로를 인식해야만 하는 계급의 차이-이런 것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는, 단순한 계급의 차이가 아니다.
성별이나 연령, 서로의 가족관계, 과거의 친분관계 등이 모두 고려사항이다.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처지가 바뀌면 그에 알맞은 존경을 표해야 한다.
가령 민간인이었을 때는 친분이 돈독해 따로 인사를 안 하는 사이였어도, 한 사람이 군복을 입으면 평복을 입은 친구가 경례를 한다.
계층제도를 지켜가려면 수많은 인자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특수한 경우가 생기면, 그 인자 중 어떤 것은 마이너스로 작용해서 힘을 잃기도 하고, 어떤 것은 플러스로 작용해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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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치 형태와 이와 유사한 서양의 사례의 차이는, 형식에 있지 않고 기능적인 점에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 정치 형태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윤리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낡은 복종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각하'들이 '알맞은 위치'에서 직분을 다하면 반드시 그의 특권을 존중해준다.
그것은 해당 정책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국가가 지방 행정의 범위까지 그 권한을 남용할 때에도, 그 지배권은 황송하게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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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바로 국가 신도神道이다.
국가신도國家神道는 미국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국가신도國家神道는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서양의 신앙의 자유 원칙에 조금도 저촉되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에서 성조기에 경례를 요구하는 것이, 조금도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단순한 충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종교가 아니기'때문에 서양의 비난을 받을 염려가 없었으므로, 일본인은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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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이자 최대의 채무인 '천왕의 은恩'을 일컫는 경우, 은恩은 항상 무한한 헌신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천왕에 대한 채무로서, 사람들은 왕은王恩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인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왕이다.
그러나 윗사람이 누구인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몇 세기에 걸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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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에게 뜻밖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일본인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일본인은 이웃 사람이나 예부터 정해진 계층적 관계에서는, 은恩을 받는 번거로움을 알면서도 기쁘게 그 번거로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상대가 단순히 아는 사람이거나, 자신과 대등한 사람인 경우에는 은恩을 받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은恩의 결과에 휩쓸리는 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거리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 제멋대로 참견하면, 그 사람에게 은恩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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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기리의 규칙은 엄밀히 말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다.
그것은 모세의 십계 같은 일련의 도덕규범이 아니다.
義理기리로 강요당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의감을 무시하기도 한다.
일본인은 가끔 "나는 義理기리 때문에 義기를 지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義理기리의 규칙은 이웃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義理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義理기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義理기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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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義理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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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골에서는 가족이 모두 잠들고 처녀가 침상에 든 깊은 밤에 동네 총각이 처녀를 방문하는 풍습이 있다.
처녀는 총각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때 총각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설사 거절을 당해도 다음날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 변장은 처녀에게 누구인지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처럼, 뒤에 치욕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궁지에 빠지지 않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어떠한 계획이건 성공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예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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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여 절망에 자포자기하여 굴복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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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처럼 생각된다.
전통적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은 뜻밖에도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五官의 쾌락을 허용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일본은 세계 유수의 불교 국가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는 이런 점에서 석가 및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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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두 영역은 모두 공공연히 인정된다.
양자의 구별은 미국인의 생활처럼, 한쪽은 사람들에게 공인받은 영역이고 다른 한쪽은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발을 들여놓는 영역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의 '알맞은 위치'를 정해두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나 한량도 마찬가지여서,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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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다투는 선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영혼(니기타마和魂)과 '거친'영혼(아라타마荒魂)이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은 지옥으로, 다른 한쪽의영혼은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영혼은 각각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모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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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영화는 분열식이나 군악대나 함대의 연습이나 거포의 자랑스러운 위용을 기세 좋게 그려내지 않는다.
러일露日전쟁을 다룬 것이든, 중일中日전쟁을 다룬 것이든,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장면은 여전히 단조로운 진흙탕 속의 행군, 비참한 전투의 고통, 승패가 나지 않는 작전이다.
마지막 장면은 승리도 아니고, '반자이萬歲'돌격도 아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 깊이 묻힌 중국 어느 도시에서의 숙영宿營의 정경이다.
또는 세 번에 걸친 전쟁의 생존자로 저마다 장애인, 절름발이, 장님이 된 일본인 부자3대를 비춰준다.
또는 병사가 전사한 후, 후방에 있는 가족이 남편이자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고, 용기를 내어 어떻게든 그 없이도 살아가는 모습을 비춰준다.
박진감 넘치는 영국과 미국의 '캐버케이드(Cavalcade)'식 영화 배경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상이군인의 갱생이라는 테마를 극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고사하고 그들이 싸우는 전쟁의 목적조차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 관중에게는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이 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군국주의자들의 선전도구가 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의 후원자들은 일본 관중이 그것을 보아도 결코 반전사상을 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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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인정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인생이 '충忠의 세계', '효孝의 세계', 의리義理의 세계', '인仁의 세계', 인정人情의 세계', 그밖의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하지 않고, '효를 모른다', '의리를 모른다' 등의 말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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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지상명령이나 황금률에 호소하지 않는다.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일본인은 '효孝를 위해' 행동할 때와, '단순히 의리義理를 위해', 혹은 인仁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 전혀 다른 사람처럼-서양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행동한다.
또한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그 '세계' 속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당연히 행동 기준이 변한다.
주군에 대한 의리는 주군이 부하를 모욕하지 않는 동안에는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지만, 일단 모욕을 받은 뒤에는 모반을 일으켜도 상관이 없다.
1945년 8월까지 충忠은 일본 국민에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과 싸울 것을 요구했다.
천왕이 라디오로 일본의 항복을 고하고 충의 요구 내용이 변경되자, 일본인은 그때까지와는 정반대로 외국인에게 협력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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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인용한 조지 샌섬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악의 문제와 정면에서 부딪히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악의 행위는 그와 같은 우주적 원리를 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각자의 영혼은 원래는 새 칼과 마찬가지로 덕으로 빛난다.
다만 그것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슨다.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갈아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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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든지, 어떤 개인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감정에 방해를 받아 자신의 의무義務 또는 의리義理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약자라고 비난한다.
서양인은 대개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인의 견해로는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의무義務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강인함은 반항이 아니라 복종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의 소설이나 영화의 줄거리는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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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이나 '일본 정신'에 의해 지도상에 그려진 '길(road)'을 따르는 열정을 말한다.
개개의 문맥에서 마코토-성실-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일본 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어떤 측면의 칭찬, 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어떤 행도의 칭찬이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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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인은 치욕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道標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발생할 우연을 예견할 수가 없는 것 등이 치욕(하지)이다.
그들은 수치는 덕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수치를 느끼기 쉬운 사람이야말로 선행의 모든 율법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virtuous man(유덕한 사람)'이나 'man of honor(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로 번역된다.
수치는 일본의 윤리에서 '양심의 결백', '신에게 의義로 여겨지는 것', 죄책감이 서양의 윤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사람은 사후세계에서 벌을 받는 일이 없다.
일본인은-인도 경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승려를 제외하고-이 세상에서 쌓은 공과功過에 따라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은 -충분히 교의를 이해한 뒤에 기독교로 귀의한 사람을 제외하면-사후의 상벌이나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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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심각하게 느끼는 부족 또는 국민이 모두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방침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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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의 밑바탕에 있는 철학이 '죽은 셈치고 산다'는 태도의 밑바탕에도 숨어 있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일체의 자기 감시, 일체의 공포심이나 경계심을 버린다.
그는 죽은 자, 즉 이미 올바른 행동방침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초월한 사람이 된다.
즉은 자는 이제는 恩을 갚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은 모순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력과 주의력은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목적의 실현을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여러 가지 불안의 무거운 짐을 가진 '보는 나'는, 나와 내 목표 사이에 가로막고 서 있지 않다.
'보는 나'와 더불어 지금까지 내 노력에 방해가 되어왔던 긴장과 노력의 의식 및 의기소침에 빠지는 경향 역시 없어졌다.
이제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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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인의 추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상급생이 하급생을 괴롭히는 관습이다.
중학교 상급생은 하급생을 여러 방법으로  괴롭힌다.
그들은 하급생에게 굴욕적인 일을 시킨다.
이런 일을 당한 하급생은 십중팔구 원한을 품는다.
일본의 소년은 이런 일을 결코 재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급생 앞에서 '엎드려 뻗쳐'를 당하거나 야비한 심부름을 당한 하급생은, 자신을 괴롭힌 상대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당장 보복할 수 없는 복수이기에 더욱 복수에 열중한다.
복수는 이름에 대한 의리를 실행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덕행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가족적 연고를 이용하여, 몇 년이 지난 후에 자기를 괴롭힌 상대가 어렵게 잡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도록 술책을 쓰는 경우도 있다.
또한 때로는 유도나 검도 실력을 닦아 졸업 후에 도시의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상대에게 창피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언젠가 갚지 않으면 '무언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일본인의 복수의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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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병이 군대 훈련을 받고 나오면 완전히 변해 '진짜 저돌적인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변화는 그들이 전체주의적 국가 이론을 배웠거나 천황에 대한 忠충이 주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굴욕적인 기합을 당한 경험이다.
일본식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자존심(amour-propre)'에 집착하는 청년은, 그런 사태에 직면하면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변하기 쉽다.
그들은 조롱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은 입장이 바뀌면 더욱 극렬한 고문자가 된다.
근대 일본의 중학교나 군대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이 옛날부터 일본에 내려오는 조소와 모욕의 습관에 기인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학교나 여러 상급 학교, 또는 군대에서 이런 관습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이름에 대한 의리의 법도는,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관습을 미국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주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집단은 뒤이어 다음 피해자의 무리에게 학대를 가한다.
#국화와_칼 #국화와_칼

일본에서는 개인에게 감정을 감추고 욕망을 버리며 가족, 단체 또는 국민의 대표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도록 요구한다.
일본인은 그런 방침이 요구하는 일체의 자기 훈련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대단히 무겁다.
그들은 과도하게 억제해야 하며, 따라서 도저히 개인의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들은 이런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군국주의자에게 이끌려 끊임없이 희생이 쌓이고 쌓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런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들은 독선적인 인간이 되었고, 비교적 관대한 윤리를 가진 사람들을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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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것이다.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할 것이다.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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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음이 관계 안에 있는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할 때 그런 무질서가 나타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마음이 아첨하는 말뿐만 아니라 모욕도 기록하지 않고, 모욕 받았다는 것을 알기만 할 수 있을까?
마음은 자기가 받은 것을 알면서도 기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관계에서 마음이 늘 그렇게 깨끗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해답은 사랑이다.
모욕 받은 것, 칭찬 받은 것을 기록하지 않는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은 내 것이라는 느낌· 내가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느낌 · 나는 덩치가 큰 사람이라는 느낌 · 작은 사람이라는 느낌 · 모욕을 받았다는 느낌 · 칭찬을 받았다는 느낌 · 나는 매우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야심만만한 사람이라는 느낌 · 나는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이라는 느낌의 중심이다.
나라는 느낌이 마음의 중심이고, 마음 그 자체다.
마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리고 '난 꽤 꽨찮은 사람이야.'라는 느낌 ·'난 훌륭한 사람인 게 분명해.'라는 느낌 · '난 정말 영리해.'라는 느낌 · '난 정말 어리석고 둔해.'라는 느낌들 주위에 벽을 쌓으면 쌓을수록, 마음이 패턴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마음은 더 갇히고 무뎌진다.
그러면 마음은 고통을 받는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비교하지 않는 바로 그 관심이 인간의 품위를 가져온다.
마음이 비교하고 있는 한 사랑은 없다.
마음은 늘 판단하고 비교하고, 저울에 달고, 어디 약점이 없나 찾는 데 혈안이 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비교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할 때 아이들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 다른 집 아이들과도 비교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자기들의 아이고, 그들은 자기 아이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대는 자기보다 좀 더 낫고 품위 있고 부유한 누구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사랑이 없어지게 만든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뭔가에 대해 알려면 이름 붙이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내 아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을 때 나는 무얼 할까?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가 노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그 아이를 관찰하고 연구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뭔가를 사랑할 땐 자연히 그것과 교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말이나 이름이나 생각이 아니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따라서 사랑은 마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이 정말로 고요할 때만, 마음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묻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고 탐색하지 않으며, 소유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을 때에만, 다시 말해 마음이 정말로 침묵할 때에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음이 더 이상 자기를 투사하지 않고 자기의 기분·욕구·충동·감춰진 두려움을 추구하지 않을 때, 더 이상 자아실현을 추구하지 않고 믿음의 노예에서 벗어날 때, 오직 그때에만 사랑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개 사랑에는 질투나 야망이 수반되고, 개인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추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존재할 때, 분명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랑은 우리가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우리 문제의 진짜 원인은 마음이다.
즉 밤낮으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는 마음이다.
마음은 몹시 피상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여러 세대를 낭비해 가면서 마음을 길러왔고, 점점 더 영리하고 치밀하고 교활하게, 점점 더 부정직하고 부정하게 만들어왔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활동을 보아도 그런 것들이 분명하게 보인다.
우리 마음의 본질이 부정직하고 속이고 실제를 직시할 수 없게 되어 있어,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음이 바로 문제 그 자체이다.
#사랑과_외로움에_대하여 #지두_크리슈나무르티

질문한 사람은 성적 욕구를 영원히 끝내면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히 끝내고 싶어 한다.
저 사람이 성적 욕구를 열심히 찾고 열심히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있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오히려 그가 마음의 작용을 자유롭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마음이 전혀 방해받지 않는 영원한 상태를 찾으려고 애쓰기만 하는 한, 마음은 갇히게 되며 따라서 결코 창조적일 수가 없다.
마음이 뭔가가 되고자 하고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래야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진다.
오직 그때에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그 창조적인 것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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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각인가?
사랑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인가?
그대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나?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머릿속 그림이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우리 관계에서 생기는 감각과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감각이나 추억인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건 단순히 생각 즉 마음이 반영된 것 아닌가?
생각이 사랑인가?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
우리에게 사랑이란 곧 감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머릿속 그림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다.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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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은 사방에서 좌절된다.
그리고 말한다.
'난 사랑할 때 행복해. 그러니 사랑해야 해.'라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생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소유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피아노든 재산의 일부든 사상이든 믿음이든 간에, 소유하고 있으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함으로 인해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그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뒤따라오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그것으로 가슴을 채운다.
가슴이 공허하기 때문에, 마음은 '난 그 사랑을 가져야 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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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직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에만 존재하고 또 자기 인식을 통해 존재하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모든 작용이 완전히 드러나고 이해되면 그때 그대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랑은 감각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 사랑은 뭔가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아무런 결과도 없는,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는 동일시하고 불안해하고 소유하려는 나가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가, 나가 활동하는 한 사랑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다.
그때문에 나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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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우리는 공허하고 외로우며,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로 위장하려고 애를 쓴다.
명상·신을 찾기·사회활동·라디오 듣기·술 마시기·그 밖에 하고 싶은 것 하기.
외로움을 직시하고 그것과 함께 하고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무엇이든 다른 걸 하려고 할 것이다.
도망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든 술 마시는 것을 통해서든 간에 도망치기는 마찬가지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한, 신을 숭배하는 것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공허함으로부터 달아나는 사람은 그 도피가 신을 찾는 것이든 술고래가 되는 것이든 모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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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외로움과 홀로 있는 것은 다르다.
외로움은 궁극적인 자기고립 작용이다.
그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 수록 그대는 더 고립되며, 자의식은 고립되는 작용이다.
그러나 홀로있음은 고립이 아니다.
외로움이 끝날 때에만 홀로있음이 있다.
홀로있음은 모든 영향, 즉 밖으로부터의 영향과 기억이라는 내적인 영향 둘 다 완전히 멈춘 상태이다.
그리고 마음이 홀로있음이라는 그 상태에 있을 때에만 그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려면 외로움을 이해해야 하고, 이렇게 고립되는 작용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아와 자아의 활동이다.
따라서 자아를 이해하면 고립이 멈추기 시작하고, 따라서 외로움이 멈추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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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해 보니 거기 무슨 관계라도 있는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상대방을 통해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상대방을 통해 위안이나 우정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통해 위안을 찾고 의존하는 등등을 할 때, 거기에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비꼬려는 게 아니라 관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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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외로움이라는 이 느낌을 만들었다.
생각은 자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제한되어 있고 단편적이며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 공허함, 이 외로움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생각이 이것을 깨달을 때, 외로움은 없다.
그때 애착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나는 애착과 애착에 내포되어 있는 것-탐욕·두려움·외로움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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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쾌락인가?
그대가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알다시피 욕망은 감각의 결과다.
감각은 생각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감각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각으로부터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은 만족하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사랑인가?
애착이 사랑인가?
애착에는 갈등이 있고 불안감이 있으며 불안감이 많을수록,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많을수록, 그대는 더 많이 애착을 가지게 되고, 소유하게 되고, 지배하고, 주장하고, 요구하게 되며, 여기에서 관계 안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면 그대가 생각하는 이 갈등이 사랑의 일부인가?
우리는 묻고 있다.
그것이 사랑인가?
쾌락이 사랑인가?
쾌락은 추억의 움직임이다.
문장을 암기하지 마라, 다만 귀기울여 듣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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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 즐거움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대가 지난밤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산 위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커다란 기쁨 아닌가?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생각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그걸 간직해야 해, 그걸 기억해야 해, 그걸 숭배해야 해, 그걸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말썽이 시작된다.
그때 쾌락의 모든 움직임은 활동을 시작한다.
그 쾌락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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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나는 그 모든 작용을 객관적으로 보며,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보라.
전에는 이 공허함을 채우려고 에너지를 쓰며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으나, 지금은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걸 안다-마음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에너지를 탕진하지 않고 있다.
생각은 고요해졌고, 마음은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 침묵 속에는 외로움이 없다.
그 침묵이 있을 때, 그 완전한 마음의 침묵이 있을 때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고, 그것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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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거기에는 오직 지고의 행복만이 있으며, 사랑은 쾌락을 넘어서 있다.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것은 교활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이 완전히 침묵할 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비가 오고 있다.
그대는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귀로 들을 수도 있고, 그 깊은 침묵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완전히 침묵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다면 그때의 아름다움은 말로 옮기거나 화폭 위에 옮길 수 없을 정도다.
그 아름다움은 자기표현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지고의 행복이지, 쾌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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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더 이상은 행복인 덕 또는 저항 만들기 중 그 어느 것도 찾으려 애쓰지 않을 때,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인 홀로있음, 고립이 아닌 홀로있음, 창조적인 것인 홀로있음을 알기 위해 홀로 있을 필요가 있다.
홀로 있는 마음은 이미 더럽혀지고 타락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홀로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안다면, 우리 모두 자각하고 있는 외로움이 아마도 실체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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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정지한 채 매우 고요하고 만족과 도피를 추구하는 데에서 자유로울 때, 그대는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이 완전히 끝나야 한다.
마음은 생각의 결과이고, 생각은 단지 끝을 향해 가는 통로이자 수단일 뿐이다.
삶이 단순히 어떤 것으로 가는 통로일 때, 거기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고요할 때,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참을 참으로 볼 때 사랑이 생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사랑의 행위이며, 지식의 행위가 아니다.
지식은 단순한 경험이며, 경험은 사랑이 아니다.
경험은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작용을 이해할 때 생겨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는 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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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추도 연설문 中 / 페리클레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절도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지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유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의 추구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기 위함이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테네에서는 가난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은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익 추구가 목적인 사업에서 발휘된 능력은 공적 사업에서도 훌륭하게 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서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국가를 떠받치는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매일 눈으로 보고 있는, 그리스인 모두의 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아테네라는 나라입니다.
#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전쟁_추도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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