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 모든 사람에게는 자긍심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늘 있었다.
글자들은 다를지라도 그 의미는 모두 같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 또는 의견'이라고 기본 정의를 내리면서, 1600년대부터 '자긍심'이 사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북미 사전들은 그 뜻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자아 존경'으로 축약한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동의어로는 '자아 의존', '자아 귀결', '평정', '자신감', '확신', '자만' 또는 '자기 충족'도 있다.
반의어로는 '자아 의심'과 '자아 결여'에서부터 '자기 증오'와 '수치'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정적 단어들이 있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자긍심

오래된 가르침일수록 자아지혜와 자기 존경을 힘과 저항, 그리고 메타 민주주의(모든 살아 있는 것들, 그리고 우주와의 하나 됨)의 원천으로 표현한다.
가부장제도·인종주의·계급제도나 다른 위계질서들은 자긍심을 제한하고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부의 지혜를 약화시켜서 외부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이끈다.
자긍심을 깨닫는 일은 그 잘못된 모든 것들을 안으로부터 바꾸는 하나의 참된 혁명이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안으로부터_바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패턴들을 돌아보게 되어서야,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변화가 더 좋은지 어떤지에 관계없이, 처음에는 좀 춥고 외롭다.
우주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도 하다.
아무래도 익숙한 집 같은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패턴들은 아무리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마법같이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집이기 때문이다.
패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직시하게 되면 패턴의 반복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를 치유할수록 우리는 현재에 응답하게 된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는 각자 우리 안에 과거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와 아무런 벽도 만들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그 아이의 창조력과 자발성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이 중요한 것들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그 벽을 허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그 아이가 필요한데도 갖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지금이라도 그걸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언제나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가 누구이든 천부적 권리인 자긍심을 재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비슷한 단계를 밟는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경험이다.
예를 들면, 한 식민지인이 처음으로 지배국 군인을 쏘아보는 순간이라든가, 한 여인이 남성의 눈초리에 의해서 평가받기를 거부하는 순간 따위가 그것이다.
두 번째는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보이는 것을 당당히 말함으로써, 그것이 수치스럽지도 않고 비밀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년기에 당한 성폭행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여자로부터, 끝없는 권력욕 뒤에 숨겨진 한 남자의 유악함까지도 말이다.
세 번째로 내내 정상적인 것처럼 취급되어 이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도 있다.
동성애 혐오증이나 매 맞는 여성, 유럽 중심주의 등의 신조어를 생각해 보라.
네 번째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결속하는 것이다.
갖가지 능력이 있는 사람득ㄹ의 모임으로부터 토착주민들의 화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섯 번째 단계로,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자치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일 역시 자신의 집과 소득이 있는 여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국가들에게까지 폭넓다.
여섯 번째로, 힘이 분배된 구조 안에서 결속하게 된다.
민주적 가정, 레인보우 연합을 떠올리거나 국제 연합의 원칙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고 나면 마침내, 독립과 상호의존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면서 참된 자아의 동심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자긍심_재발견_여행

요컨대,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여성들은 그 누구건, 어느 곳에서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서 분출되는 열등감이 생활과 몸 속 깊숙이 흐르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자긍심을 발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인종이나 나이, 외모와 능력 그리고 그 밖의 어떤 것에도 구애됨 없이, 자신이 가치 있는 낱개의 인간이라는 확신이 우리 몸 안에 뿌리를 내릴 때, 바로 그때 자긍심이 내 것이 된다.
확실하게 거머잡고 내 안에 단단하게 뿌리를 심게 된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과학 철학자 알렌 와츠A. Watts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마법 같은 질문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神"섬세한 보석 같은 눈과 황홀한 악기 같은 귀,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신경 조직의 뇌, 이 모두를 갖춘 존재가 어떻게 자신을 신神보다 못하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우리 자매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능히 사랑을 받을 만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고 또 그럴만한 존재라는 확신.
그 확신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출발이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게 '총체적·기질적·핵심적'자긍심이다.
내게는 '핵심적'이란 말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우선순위에서 가장 먼저니까.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어린 시절을 좀 더 지나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상황적'이라고 표현하는 제2의 자긍심 개발에 나서게 된다.
바깥으로 점차 커나가는 자긍심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하며,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도전적인 일들을 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짜릿한 기쁨들을 맛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능력에 만족하고 타인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상호 공감을 느끼며, 세상에 대한 자라나는 호기심이 우리의 감각 하나하나를 통해 충족된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앨리스 밀러는 말한다.
자력구제가 가능하려면 그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우리가 가진 진정한 감정을 확인해주고 긍정해 주는 사람, 그럼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 그걸 실제로 남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최소한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희망적인 '한 사람'이론이 진실임을 믿는다.
믿게 되었다.
나아가 덧붙이고 싶다.
비록 그런 한 사람이 없더라도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잃어버린 아이에게로 돌아가서 그 아이가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기억해 내고 그것을 경험하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한_사람_이론ㅜ 

불의에 대한 자각은 정의와 자긍심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불의에_대한_자각

한 가지 사실만은 명백하다.
인간의 마음은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방법과 그것을 키우는 방법 양쪽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상상은 창조의 첫단계가 된다.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의 탄생을 허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진정한_자아의_존재

당신이 무엇을 창작하든 그건 인류의 손만큼이나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지문만큼이나 독특한 것들이다.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할수록 하나의 이미지가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더 자주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그것이 눈에 드러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창조적_이미지 #진정한_자아 

예수의 산상수훈의 교훈은 '남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당신도 남에게 하라'다.
자신들의 자긍심이 억압받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당신이 남에게 해주는 것처럼 당신 자신에게 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뒤집어야만 혁명이 이뤄진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당신이_남에게_해주는_것처럼_당신_자신에게_하라

미의 기준은 역사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객관적 미학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그걸 만들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은 변덕이 심하고 사라지기도 쉽다.
우리들은 그걸 안 만들 수도 있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미_기준의_가변성  

그러니, 남녀 불문하고 미의 기준이라는 것도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행동과 원하지 않는 행동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다.
그러면 우리는 힘을 모아 우리의 행동 양식을 바꾸어 미의 기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실 미의 개념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정기적을 바뀌며 변화한다.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에는 항상 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미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는 정말로 그 기준이 상징하는 행동을 좋아하는가?'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미_기준에_영향력_행사

그러나 낮은 자긍심을 갖고서는 남녀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성 역할을 과장하여 인정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피난처를 찾으며, 성장하면서 오히려 더 불완전하게 된다.
남성의 경우는 융통성 부족, 독단성, 경쟁심, 공격성, 여성적인 것과의 거리, 동성애 혐오증, 심지어는 잔인성과 폭력 등이 저조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고전적 표본이 된다.
그 반면 복종, 의존성, 남성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심리, 갈등에 대한 두려움, 자기 비난, 그리고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무능 등은 여성의 낮은 자긍심을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낮은_자긍심의_예

불완전한 자아로서 출발한 로맨스는 사랑으로 변화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연인들 간에 낮은 자긍심과 필요성의 결여는 깊고 지속적인 관계에서 가장 심각한 적이다.
린다 샌포드와 메리 엘렌 도노반은 낮은 자긍심이 친밀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라고 보고 있다.
자긍심이 낮으면 여자는 누군가가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그럼으로써 그녀를 거부하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남자도 똑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거기에 여성에 대한 의존과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여성적'느낌이 발견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그들의 남성다움이 소멸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얹히게 된다.
때로 낮은 자긍심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질투는 자신이 부적합하고 불완전하다는 확실한 느낌에서 나온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에게 결여된 품성을 투영해온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더욱 강해지며, 그에 따라 우리의 시기심도 높아 간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자긍심은 로맨스를 시들게 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단지 현재의 형태에서만 그렇다.
결국 로맨스는 중요하기는 해도 부가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로맨스는 아주 깊이 친밀하며, 감각적으로 공감하는 배움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눈을 통해서 보고 느끼며, 또 다른 문화를 흡수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더 넓게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데리고 올 수 있게 된다.
로맨스가 끝났을 때도 부족하거나 화가 나거나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는 그처럼 자신의 모습을 여럿 갖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 부드러움과 포용을 바라는 아이는 그렇게 오래된 아이가 아니다.
바로 작년의 우리 모습이기도 하고, 어제 되고 싶었던 우리이자, 어떤 직장에서의 모습 또는 어느 겨울의 모습이거나,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자신의 실체들을 아우르는 것,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목소리다.
우리 내부에는 진정한 목소리가 늘 있게 마련이다. 
 
믿으라. 그 목소리를!
#셀프_혁명 #글로리아_스타이넘

Posted by 㗢동죽竹
,

나친 금욕은 흔히 광신의 온상이 된다.

금욕생활로 몸은 수척해지지만, 상상력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정의라고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은 모두 신의 계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 그 계시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십자군을 일으킨 중세 유럽인의 열광에 불을 붙인 것도 당시 기독교회의 타락을 가장 준엄하게 고발했으며 계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두 수도사였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량한 사람들이 지은 죄를 낱낱이 파헤쳐 그들을 지옥의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기독교회가 가장 장기로 삼는 방식이다.

지옥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면서 한편으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계속 눈 앞에 러른거리게 하니까, 더욱 효과적이다.

중세에 기독교회가 그렇게 엄격한 계율로 사람들을 잡도리한 것은 기독교도의 풍속과 관습이 퇴폐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성직자들의 변명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죄라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를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이런 죄를 고발한 사람도 역시 수도원에서 나왔다.

모든 죄와 그것을 속죄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 계율이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래도 조금은 논리적이었겠지만,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주무른 계율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로 변해 있었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인간의 마음은 약한 거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 저도 모르게 그만 우쭐해지거나 변명을 늘어놓게 되지.

우쭐해지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돼.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기 행위를 변명하기 시작한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세 판단에 뛰어난 현실주의자가 곧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상대도 역시 정세 판단에 뛰어날 테니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통찰력과 결단력은 윗사람에게는 첫째가는 조건이다.

율리우스 2세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적이나 무능력자를 과감하게 조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 편이나 아까운 재능을 가진 사람을 자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필요성을 알면서도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독으로 독을 없애는 방식은 효과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독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 독이 어느새 몸 전체를 침범하게 된다.

이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되도록 빨리 항체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 갖는 위험과 과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좁은 의미에서의 이기심은 갖고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숭고한 소명을 위해 한몸을 바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망설임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따라서 독선적이고 광신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방식은 대담하지만, 하는 일에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당연히 결과는 실패로 끝난다.

반면에 이기적인 야망에서 출발한 경우에는 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한창 행동하고 있을 때에도 늘 의심을 품게 되고, 독선적이거나 광신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다.

방식은 역시 대담무쌍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유효성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일관적 정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경우,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운이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그러나 공모자가 많을수록 계획이 누설될 위험도 많을 터였다.

#신의_대리인 #시오노_나나미

 

Posted by 㗢동죽竹
,

질을 확보한다는 것은 적을 견제하는 것이 된다.

보통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적이 공격해왔을 때 인질을 죽이겠다며 적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는 인질 젬 왕자를 그렇게 써먹지 않았다.

그는, 만약 터키가 이 이상 기독교국을 침략할 움직임을 보인다면, 젬 왕자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터키 궁정 안에는 속으로 전 술탄의 아들 젬을 따르는 가신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체사레_보르자_혹은_우아한_냉혹 #시오노_나나미 

을 갖지 못했을 때 힘에 대항하는 수단은 기(技) 또는 술(術), 즉  '아르테'로서의 정치밖에 없다.

아르테로서의 정치는 이런 경우에, 즉 힘이 없는 자가 다른 의미의 힘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체사레_보르자_혹은_우아한_냉혹 #시오노_나나미 

이기주의에 철저한 사나이들끼리는 언제나 타협이 가능한 법이다.

#체사레_보르자_혹은_우아한_냉혹 #시오노_나나미 

언가를 이루려하는 자는 결코 금전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사레_보르자_혹은_우아한_냉혹 #시오노_나나미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엄격함이 민중으로 하여금 다소나마 증오를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 그는, 민중의 그런 기분을 불식하고 민심을 완전히 장악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잔혹하리만큼 엄격했던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행정장관의 가혹한 성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공작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어느 날 아침 체세나의 광장에 두 동강난 데 로르카의 시체를, 한 장의 널빤지와 피에 젖은 칼과 함께 널어놓았다.

이 처참한 구경거리에 민중은 만족해하는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

체사레식 정치 기술의 정수(精粹).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다.

#체사레_보르자_혹은_우아한_냉혹 #시오노_나나미

Posted by 㗢동죽竹
,

내면의 통찰력을 가져라 
 
창조자는 창조물에
분명한 형상을 부여했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씨앗은 식물 안에 있고
잎은 나무 안에 있듯이
허공은 하늘 안에 있고
무한의 형체는
텅 빔 속에 있다. 
 
유한을 넘어서 무한함이 오고
무한함에서 유한함이 나온다. 
 
창조물은 창조자 안에 있고
창조자는 창조물 안에 있다. 
 
그들은 언제나 구분되지만
언제나 하나다. 
 
님은 나무며 씨며
발아되지 않는 싹이다.
님은 꽃이며 열매며 잎이다.
님은 태양이며 빛이며 광선이다.
님은 창조자이며 창조물이며 
또한 환영이다. 
 
님은 수많은 형상이며
무한한 공간이다.
님은 호흡이며 언어이며
의미이다. 
 
님은 유한하고 무한하며
유한과 무한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이다.
님은 창조자와 창조물 안에
내재하는 영혼이다. 
 
가장 고귀한 영혼은
그 영혼 안에서만 보이며
최고의 경지는
가장 고귀한 영혼 안에서만
보이나니. 
 
그 경지 안에서
다시 반영이 보인다. 
 
카비르는 축복 받은 존재다.
이러한 영혼의 최고의
통찰력을 지녔으니!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행운을 결코 지나치지 말라 
 
어리석음으로 잠긴 문은
사랑의 열쇠로 열린다.
문이 열리면 그대는
가장 사랑하는 이의 도움으로
다시 깨어난다. 
 
카비르는 말한다.
'오! 형제여, 이런 행운을
결코 지나치지 말라.'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창조자만이 창조의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오 벗이여!
이 몸은 님의 현악기이니
나는 현을 팽팽히 당기며
창조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만약 당김이 느슨해지면
다시 이 몸은
먼지에서 먼지로
돌아가게 되리라.
카비르는 말한다.
'창조자만이 창조의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 한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목마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그대는 집안에 있는
진실을 보지 않고
어찌하여
이 숲에서 저 숲으로
방황하는가! 
 
여기에 진리가 있다!
베나레스나 마투라로 가보라.
만약 그대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그대에게
실체가 아니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진정한 진리의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나의 형제여,
어떻게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옷에서
리본을 떼어낸다 해도
옷은 그대로 남아 있고
옷을 벗어버린다 해도
몸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정열을 포기한다 해도
탐욕은 아직 남아 있으며
탐욕이 사라진다 해도
오만과 자만은 남아 있다. 
 
마음이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도
환영이란 말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카비르는 말한다.
'사랑하는 구도자여!
진정한 진리의 길은
참으로 험난하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영혼의 감로 
 
잔을 비우라! 그리고 마시라!
님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감로를 마시라! 
 
카비르는 말한다.
'내 말을 들어보라,
수행자여!
발바닥으로부터
머리의 왕관에 이르기까지
마음은 독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님의 부재 
 
사랑하는 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내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하고
온종일 평안치 못하며
잠을 청할 수도 없다. 
 
그 누구에게
이 슬픔을 하소연하리.
밤은 어둡고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님은 안 계시고
나의 불안은 시작되었다. 
 
카비르는 말한다.
'들어라, 벗이여!
사랑하는 이와의
우연한 만남 외에는
어디에도 평안은 없도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가슴 속 가장 끝부분 
 
진흙 속에 빠진 보석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동쪽으로
어떤 이는 서쪽으로
또 어떤 이는 물 속을
또 어떤 이는 깊숙한 바위 사이를
헤맨다. 
 
그러나 하인 카비르는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나니
그것은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고이고이 싸여져 있도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내 눈은
님이 오시는 길을 보다가
검은 점이 되었다.
 
내 혀는 님을 찬미하다
부풀어 올랐고
내 빈 그릇은
님과 분리된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오직 옅은 희열의 열망으로 
밤낮을 인내하며
님을 기다리나니
내 두 눈에는 공허함뿐이라.
모든 색은 바래고
비통함에 젖는다. 
 
나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괴로움의 노래를 부르나니
그것을 알아줄 이는
내 님뿐이리.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 #카비르



Posted by 㗢동죽竹
,

동생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재산이나 권력에서는 만토바가 도저히 밀라노를 따라갈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이사벨라 자신뿐이었다.

높은 교양으로 조금은 이름나 있던 그녀 자신의 이름을 더욱 높이는 것이었다.

훗날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가지 널리 알려진 '교양있는 만토바 후작부인'은 이 무렵부터 본바탕이 만들어져갔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이사벨라_데스테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조화란 정신과 육체, 선과 악이 명쾌하면서도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즉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갈등'이라는 혼탁하고 달콤한 관계는 없었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이사벨라_데스테

탈리아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인간 속에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이사벨라_데스테

이사벨의 좌우명-"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에 나타나 있듯이, 비토리아 콜론나의 '종교적이고 청결한 정신적 결합' 따위는 이사벨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이사벨라에게는 눈앞에 있는 현실이 곧 인생이었다.

설령 그 현실이 청결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해도, 그게 바로 인생이었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이사벨라_데스테

"자를 아는 것은 곧 역사의 진실을 아는 것이다.

어떤 시대를 잘 알고 싶으면 그 시대의 여자들을 잘 조사해보라"고 말한 사람은 괴테였다.

그녀에 관해서 쓴 사람들도 루크레치아의 성격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필연적으로 주변 상황이나 주위 사람들을 써넣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즉 남자에 대해 쓸 때는 주위 여자에 대해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여자에 대해 쓰면, 결과적으로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루크레치아_보르자

용병은 돈으로 고용된 군인이고, 따라서 용병대장들은 승산이 있는 싸움일 때는 용기를 내지만 대세가 기울면 부하 병사들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중은 언제나 무책임한 법이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렇다 해도, 피를 흘리지 않는 이사벨라의 정치에서는 "사자와 여우가 결합한"(마키아벨리) 성숙함을 볼 수 있지만, 카테리나에게는 이것이 없다.

그녀는 여우라기보다는 사자였다.

이 점에서도, 그리고 생애의 비극적인 종말에서도 카테리나는 그녀의 가장 큰 적이된 체사레 보르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체사레도 그러했듯이, 이런 유형의 인간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법이다.

사람들은 그들한테서 영원한 '청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청춘은 아름답다. 

특히 그 청춘이 감상적으로 낭비되지 않고 현실에 발을 디딘 냉정한 정신과 함께 대담하게 발휘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군주에 대한 암살은 결코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실례가 되었을 뿐이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튿날 음모자들은 카테리나의 아이들 가운데 맏아들과 둘째아들을 성채 앞으로 끌고 갔다.

아이를 이용하여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것이다.

칼로 위협당한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카테리나가 성벽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맨발에 머리도 묶지 않고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오로시는 성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여기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가 후세에 전한 그 유명한 말이다.

카테리나는 유유히 치맛자락을 홱 걷어올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멍청한 놈들아,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단 말이다."

여기에는 한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스포르차

지 높은 정신을 가진 사람은 굴욕을 당하게 되면, 그 자존심 때문에 남보다 훨씬 깊은 고뇌에 빠지는 법이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스포르차

카테리나에게 상냥한 것은 신의 은총 따위가 아니라 돈과 권력과 사랑이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잃고, 그것들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 가능성마저 모두 사라져버렸을 때, 그녀는 비로소 신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행운을 타고난 아름다운 여자들이 대개 젊은 시절에는 그 육체를 악마에게 내주고, 그 젊음과 미모와 행운도 모두 시들어버린 만년에 이르러서야 남은 뼈를 신에게 바치듯.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스포르차

네치아공화국은 자국의 양녀인 카네리나 왕비의 통치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키프로스왕국의 내정에 간섭했지만, 그 냉혹함과 현실주의적 치밀함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강국인 베네치아의 정치와 외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무력의 절묘한 균형.

정치와 무력을 효율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방식.

무언가 변고가 일어날 기미를 눈치채자마자 대함대를 보내, 그 위력으로 난관을 헤쳐나가는 베네치아.

그리고 그 위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베네치아의 정치와 외교는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정치를 보여주는 예로 손색이 없다.

역사상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되는 예술(아르테), 강대국이 무력을 이용하여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예술의 실례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는 법적인 정당성도, 인간성에 대한 배려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신속하고 과감한 군사행동과 정치의 노련한 조화가 있을 뿐이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이 '지혜'라고 불러온 것, 모든 시대를 통하여 역사의 현실을 움직여온 것은 바로 그것이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코르나로

자들 중에는 어떤 고통이나 비애를 겪어도 그것이 조금도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애써 그것을 극복하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과 비애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나 비애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녀들한테서 떠나간다.

마치 운명의 여신이 그녀들한테는 평소의 전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이런 여자는 가장 행복한 여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여자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코르나로

위선은 그 위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저지르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고약한 악취로 사람들을 해친다.

그러나 자신의 위선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위선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아름다움마저 지닌다.

#르네상스의_여인들 #시오노_나나미 #카테리나_코르나로

Posted by 㗢동죽竹
,

르네상스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군요. 

그렇다면 나도 역사적·종교적·정치적·경제적 요인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루고, 본질적인 대답으로 응수하겠습니다.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 바로 그것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 정신운동의 본질이었습니다."

"하지만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은 분출만 한 것이 아니라, 미술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작품'으로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프리드리히 2세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8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럽에는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는 사고방식이 살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로는 '아테오'(ateo)와 '크레덴테'(credente)와 '라이코'(laico)라고 부르는데, 

'아테오'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를 가리킵니다.

'크레덴테'는 신앙을 가진 자인데, 특히 '프라티칸테'(praticante)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계율을 충실히 지키고 일요일에는 반드시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라이코'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종교가 관여하는 분야와 관여해서는 안되는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계몽군주는 개혁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을 말하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지도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려면, 모든 사람이 그 필요성을 깨닫고 납득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목표를 실현하려면 강권을 행사하는 것은 피하기 어렵고, 따라서 전제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은 계몽군주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지만 육신은 부모한테 물려받아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하지만 피부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개인의 지식이 되기는 할망정 모든 사람의 공유재산이 되지는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그 결과를 언어로 공표해야만 비로소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도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되지요.

또한 과학적으로 냉철하게 탐구하는 정신은 편견을 뒤엎는 데에는 가장 좋은 무기이기도 합니다.

탐구벌레라 해도 좋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끌어댈 필요도 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탐구심이야말로 르네상스 정신의 기본입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렇기는 하지만 정신운동은-르네상스든 뭐든-세상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격동기에 태어나는 법입니다.

정치의 성숙은 이것과는 반대로 세상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제의 본질은 이윤 추구에 있으니까, 자발적이고 경쟁적이 아니면 융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스스로 파멸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정치는 도가 지나친 행위를 시정하여 경제 번영을 오래 지속시키는 지혜라고 바꿔 말해도 좋습니다.

그러려면 정치의 성숙을 통한 정국 안정이 필수조건입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종교는 믿는 것이고, 철학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철학은 유일한 원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전혀 다릅니다.

철학에서는 원리를 세웠다가 파괴하는 작업을 되풀이합니다.

일단 세운 원리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고수해서는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사치가 칭찬을 받은 예는 없으니까 좋은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겠지요.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서민들은 자기가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사치를 좋아합니다.

동경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왕족이나 영화배우나 가수들이 인기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을 터인 서민들이 그들을 좋아하고 지지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화려한 차림의 교황이나 추기경들 옆에는 검정색이나 갈색이나 흰색의 초라하고 수수한 옷을 걸친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바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기독교회 조직의 강점이지요.

기독교회가 화려함과 청빈을 양쪽 다 만족시키는 것은 그 양쪽을 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를 비롯하여 육지를 탐험한 선조들의 영향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풍요로운 나라로 믿었습니다.

대항해도 거기에 도달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으니까, 이권을 바란 탐험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이익이든 창조의 기쁨이든,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무언가가 인간을 행동으로 내모는 법이지요.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나 티치아노의 작품 앞에 섰을 대는 이런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해설한 연구서 따위는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안내원의 설명도 흘려들으면 됩니다.

그보다는 당신 자신이 '젊은 천재'가 된 셈치고 '거침없이' 그들과 마주하는 겁니다.

자기도 천재라고 생각지 않으면, 천재한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르네상스를_만든_사람들 #시오노_나나미

Posted by 㗢동죽竹
,

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자란 결혼상대를 고를 때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있고 신뢰할 수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험에 나서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이런 유의 남자는 여자에게 나이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그저 '남자'로만 보이는 존재다.

성도 예루살렘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 것쯤은 여자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이기주의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타인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방이든 서방이든 당시 사람들의 바람은 몸의 안전을 보장하고 세금을 적게 걷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만 보장해준다면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십자군을 단순한 침략자 집단으로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지배자가 가톨릭교도라 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위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도시를 공략하기는 무척 어렵다.

집 안에서 버티는 상대를 계속 집 밖에서 공격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병력과 군량이 충분하다 해도 무더위와 혹한, 비와 눈과 바람을 고스란히 감수하면서 공격해야 한다.

더군다나 배후에서 적의 원군이 나타나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는 역병도 발생하기 쉽다.

적과의 전투에서 죽는 자보다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위생상태가 나빠 죽는 자가 더 많은 것이 공격하는 측의 고민 중 하나였다.

더구나 공격하는 내내 병사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역사상 명장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성전(攻城戰)을 싫어했다.

그들은 어떤 책략을 이용해서든 성벽 안에 웅크린 적을 성벽 밖으로 끌어내어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부를 가르기를 원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ㅇ낳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역사에서 종종 '정치적 정복'이라는 말이 나온다.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거나 위협하면 상대는 이를 강자로 인정하고 연공을 바침으로써 복종의 뜻을 표하는 방식이다.

지배란 곧 징세권을 뜻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인데, 이 경우 세금만 내면 공략을 피할 수 있고 약탈도 당하지 않기 때문에 도시의 지배자나 통치 조직은 예전 그대로 남는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러나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 평범함을 돌파하는 길이 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냉철하게 따져보고, 자기 혼자 모든 일을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 길이 열린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리 인간세계에 눈을 돌리면 인재가 마치 분수처럼 한 시대에 한꺼번에 배출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분수처럼 많은 물을 기세 좋게 뿜어올리고는 소리 없이 떨어지며 인재 고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국내에만 한정된다면 문제해결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전 시대에 축적해놓은 것을 갉아먹으며 차분히 앉아 다음 분수가 뿜어져오르기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계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제후나 병사들이 그 사람이라면 따르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훌륭한 '힘'이다.

지도자에게는 카리스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이러한 경우에는 중립을 선언하는 것이 최선책인데, 이것도 힘이 센 측이 중립을 선언했을 때는 효력이 있을지라도 힘이 약한 측이 중립을 선언하는 경우는 효력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해를 입는다는 단점이 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간의 야심이란 곧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하는 의욕이다.

한편 허영심은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세상을 버린 은둔자일 테니 여기서는 제외하고, 인간성이 풍부한 인간으로 이야기를 좁히기로 한다.

문제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야심과 허영심 중 어느 쪽이 더 큰가 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인간이 좋은 기회를 얻었을 때 야심으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허영심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네가 유복한 출신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네가 지력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또한 네가 미모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원인이 되어 네가 오만하고 건방져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오만과, 오만의 표현인 건방짐은 너 한 사람만이 아니라 네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해치고 더럽히며 비속화하기 때문이다."


낙서조차 '학식' 있는 사람의 것으로 여겨지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당시의 국제어이기도 한 라틴어로 이와 같이 기록한 남자들이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라고 외치는 '템플 기사단'과는 확실히 달랐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지들 간의 치열한 싸움도 쇠퇴기에 벌어지면 활력의 감퇴로 이어지지만, 융성기에 이루어질 경우에는 오히려 쌍방의 활력을 증진시키고 국력을 번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간세계에는 교활한 인간이 많다.

그런 자질이 그 인물이 이끄는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이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교활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에 인간은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감동하는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그리고 대중의 가슴을 뜨겁게만들지 못하는 한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그러나 그리스도교도든 이슬람교도든 그들이 제창한 '성전' 사상 자체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것을 지탱하는 열기는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어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어난 무장은 미리 생각한 전술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당한 파도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올라탈 줄 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상회담에서 통역을 이용할 때, 두 정상은 귀로는 통역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은 항상 상대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통역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아야 협상 상대의 됨됨이를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이란 이야기할 때의 시선이나 손짓에서도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는 법인데, 통역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리면 가장 중요한 이런 관찰을 소홀히 하게 된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인주의에는 자유로운 능력 발휘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장기적인 것보다 단기적인 관점이 득세하기 쉽고, 그러다보니 눈앞의 이권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그것을 놓고 대결의식이 폭발하기 쉽다는 점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여러 차례 반복하지만, 중세는 '역량'보다 '혈통'이 중요시되는 시대였다.

그랬기에 혈통보다 역량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 시대는 아직 중세의 한복판이었다.

게다가 '역량'은 실적을 보여주어야만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만, '혈통'은 말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처드의 시신은 영국에 없다.

죽은 후 곧장 머리는 푸아티에 지방의 수도원에, 심장은 노르망디 지방 루앙의 교회에, 그 외의 부분은 앙주 지방의 수도원에 나누어 매장했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 영지를 지닌 왕의 시신을 해체하는 목적은, 우선 죽은 후에도 영지의 소유권이 그에게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동시에 해당 영지의 백성들에게 자기 지역에 왕의 묘가 있다는 만족감을 안겨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사력이 없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문제뿐 아니라, 이 '태양'은 종종 수재들에게서 엿보이는 단점도 갖고 있었다.

좌절을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심을 품지 않는 탓에 자신과 다른 발상을 하는 사람의 진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단점은 어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거나 사후승낙의 상황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했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쟁은 인류 최대의 악업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도무지 이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전쟁이란 그 승패 여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른 후 얼마나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졌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

또한 인류가 전쟁이라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영원히 지속되는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때그때 단기간의 평화를 쌓아가는 식으로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내 정치는 성심성의껏 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가 나온다.

기득권 계급의 반대를 무시하고 어떤 일을 강행하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하기 마련이고,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사람들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외 정치의 대상인 다른 나라나 사람과는 당연히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경우 성심성의껏 했다고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종종 그 반대의 결과를 낳고 만다.

따라서 외정 담당자에게는 내정을 담당하는 자 이상의 현명함이 요구된다.

교활하거나 악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지적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신의다.

다시 말해 약속한 것을 지키는 자세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깨는 상대와는 협정을 맺어봐야 소용없지만, 달리 방책이 없으면 그것에라도 매달리게 마련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뒤에도 '옳은 전쟁'만은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고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내는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고드푸르아 #귀스타브_도레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살라딘 #귀스타브_도레

#십자군_이야기 #시오노_나나미 #사자심왕_리처드 #귀스타브_도레

Posted by 㗢동죽竹
,

런데 만백성의 아프로디테에게 속하는 에로스는 말 그대로 만백성의 것인지라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일을 해치운다네.

그래서 이것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에로스라네.

그런 사람들은 첫째, 소년들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여자들을 사랑하며,

둘째,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혼보다는 몸을 더 사랑하며,

셋째, 되도록 비지성적인 자들을 사랑한다네.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만 신경 쓰고 아름답게 달성하느냐의 여부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것이라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이 둘 가운데 훨씬 덜 성숙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까닭에 여성적인 요소와 남성적인 요소를 다 갖춘 여신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이지.

#향연 #플라톤

와 달리 우라니아 아프로디테에게 속하는 에로스는 첫째, 여성적인 요소는 없고 남성적인 요소만 갖추고 있는 여신에게 속한다네.

그래서 그런 에로스는 소년들에 대한 사랑이 되는 거지.

둘째, 그런 에로스는 나이가 더 많고 오만한 데가 없는 여신에게 속한다네.

그래서 그런 에로스에게 영감을 받은 자들은 본성상 더 강하고 더 지성적인 것을 좋아하여 남성적인 것을 지향한다네.

#향연 #플라톤

제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이나 그런 사랑으로 더 절제 있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은 권장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것은 우라니아 무사에게 속하는 아름다운 천상의 에로스라네.

반면 범속한 사랑은 폴륌니아 무사에 속하는 사랑으로, 누구에게든 그것을 적용할 때는 그것을 즐기다가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향연 #플라톤

리는 본래 완전한 전체였기 때문이네.

그리고 '사랑'이란 완전한 전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에 붙여진 이름이라네.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전에는 하나였지만 지금은 죄를 지어 신에 의해 흩어져 살고 있네.

마치 아르카디아인들이 라케다이몬인들에 의해 흩어져 살듯이 말일세.

그러니 우리가 신들에게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다시 반쪽으로 쪼개져 비석에 부조(浮彫)된 형상들처럼 코를 중심으로 잘려서는 부절로 쓰기 위해 반쪽으로 나뉜 주사위 꼴이 되어 돌아다니게 되지 않을까 두렵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신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모든 사람을 격려해야 하네.

#향연 #플라톤

'그런데 왜 사랑이 생식을 원하느냐고요?

필멸의 존재에게는 생식이 영속적이고 불사(不死)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앞서 합의한 바에 따라 사랑이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좋은 것과 더불어 불사를 원하게 마련이에요.

따라서 사랑은 불사도 원한다는 결론이 날 수밖에 없지요.'

#향연 #플라톤

육체적으로 임신한 자들은 여자들에게 끌리는데, 그렇게 사랑을 표출하는 자들은 아기 낳기를 통해 불사와 기억과 나름대로의 행복을 영원토록 확보하지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임신하는 자들도 있지요.

몸보다는 혼 안에 더 많이 임신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에, 이들은 혼이 임신하고 출산하기에 적합한 것을 임신하지요.

무엇이 적합하냐고요?

지혜와 그 밖의 다른 미덕이지요.

이런 것들을 낳은 이는 다름 아니라 모든 시인과 창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장인들이지요.

그러나 단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지혜는 국가와 가정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런 지혜는 절제와 정의라고 불리지요.

#향연 #플라톤

Posted by 㗢동죽竹
,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가를 우리는 세계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과 마리아 셰펄링의 아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인류(humanity)에 대한 범죄 및 나치스 통치 기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에 대한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유죄라고 생각했는가?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이 질문에 대답했다.
이 대답은 피고인 자신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피고 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 주장을 하게 한 이유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한 주권국가는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허풍은 아이히만을 파멸시킨 악덕이었다.
그가 전쟁이 끝날 무렵 휘하의 사람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즉, 그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 '제국의 적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는 무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인가 양심에 걸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나중에 그가 좋아하게 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인 빈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장 요제프 뢰벤헤르츠 박사의 따귀를 때린 점이다.
(당시 그는 그의 요원들 앞에서 사과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계속 그를 근심하게 했다.)
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 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외부로부터 온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히만의 주장 가운데 하나였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내면적 이주자'란 단지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대중들 한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의 민족들 중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반대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실상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냉대' 속에서 12년 동안 그렇게 산 독일인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수는 무의미할 정도였고 심지어 레지스탕스 요원들도 그 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근년에는 '내면적 이주'라는 구호는 (이 말 자체가 애매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한 사람의 영혼 속의 내면적 영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이 이주자처럼 행동하는 방식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종의 조크가 되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상부의 명령' 대 '국가적 행위'라는 낡아빠진 구절이 끝없이 오갔을 뿐이었다.

이 구절들은 뉘른베르크 재판 기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토론 전체를 지배했다.
이는 전례가 전혀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전례가 존재하며, 또 그 전례에 속한 기준에 따라 재판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온건한 성격을 지니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러한 견해들에 분명히 도전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안할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 바를 수행한 것 외에도 그는 명령에 따라 (항상 '보호받을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맹목적인 복종, 또는 그가 '시체들의 복종(Kadavergehorsam)이라고 불렀던 미덕과 악덕을 차례로 강조하면서 끝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자신의 나치 과거에 대해서는 대충 말해버리는 데 진정한 천재성을 발휘한 전후의 독일에서는 종종 좋지 않은(ungut)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마치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적 사랑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데 통탄스럽게도 실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정규 외교적 임무 또는 군사요원, 보안경찰대 지역사령관 등에 덧붙여)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무자비한_강인성

이제 나타난 것처럼, 최종 해결책에 대한 그의 역할은 과도하게 과장되어 왔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허풍 때문이기도 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뉘른베르크와 다른 전후 재판들에선 피고인들이 아이히만을 핑계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재판을 전혀 과장되지 않은 고통의 사실에 기초를 두려 한 검찰은 분별없이 그 과장된 내용을 과장해 댔다.
아니 항소심의 판결문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멍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화장을 통해,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불태움으로써, 폭약과 화염방사기와 뼈를 갈아버리는 기계들을 이용한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망각의_구멍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수색대가 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가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제 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 믿지 않았다.
법정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 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 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낸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말과_사고를_허용하지_않는_악의_평범성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그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무사유 #현실로부터_멀리_떨어져_있다는_것






'THE BOOK > 서가 속 영혼의 목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군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0) 2020.11.24
향연 / 플라톤  (0) 2020.11.17
파이돈 / 플라톤  (0) 2020.11.06
크리톤 / 플라톤  (0) 2020.11.04
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0) 2020.10.27
Posted by 㗢동죽竹
,

"여보게들, 사람들이 쾌감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참 이상하기도 하지!

쾌감은 그와 정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인 고통과 놀랍도록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말일세.

한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낄 수는 없어.

하지만 누가 둘 중 하나를 쫓아가 잡으면, 그는 거의 언제나 다른 것도 잡게 되어 있지.

그것들은 마치 같은 머리에 달려 있는 두 몸과도 같아.

그래서 만약 아이소포스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우화를 지어냈을 거야.

즉 신께서 늘 다투는 그 둘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자 둘의 머리를 함께 매었다고, 그래서 둘 중 하나가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다른 것도 뒤따라 나타난다고 말일세.

똑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네그려.

나는 족쇄 때문에 다리가 아팠는데, 그 결과 지금은 쾌감이 나를 찾아온 것 같으니 말일세."

#파이돈 #플라톤

에 관해서는 비교(秘敎) 쪽에서 설명한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일종의 감옥에 갇혀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 감옥에서 벗어나거나 탈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내게는 이런 교리가 거창해 보이지만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렇지만 케베스, 신들은 우리의 수호자들이고, 우리들 인간은 신들의 소유물 가운데 하나라는 말은 옳은 것 같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케베스가 말했소.

"그렇다면"하고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소유물이 죽기를 원한다는 신호를 자네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자네의 소유물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죽인다면 자네는 화나지 않을까?

그래서 자네에게 벌줄 방도가 있다면 그것을 벌주지 않을까?"

"물론 벌주겠지요" 하고 케베스가 말했소.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필연적인 상황을 신께서 내려보내시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을 듯 하네."

#파이돈 #플라톤

들은 진정한 철학자가 어떤 의미에서 사실상 죽었는지, 어떤 의미에서 죽어 마땅한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죽어 마땅한지 모르기 때문이지.

아무튼 그들에게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논의해보세.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가?" 하고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물론이지요" 하고 심미아스가 끼어들었소.

"죽음은 다름 아니라 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이겠지?

또한 죽었다는 것은 몸이 혼에서 분리되어 혼자 있고, 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혼자 있는 상태겠지?

죽음이 그거 말고 다른 것일 수 있을까?"

#파이돈 #플라톤

"어떤 실재가 어디에선가 혼에게 명확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사유(思惟) 속에서가 아닐까?"

"그렇지요."

"그리고 혼이 가장 잘 사유하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이나 고통이나 쾌감 등으로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을 때일세.

혼이 몸과 헤어져 되도록 혼자 있고, 몸과의 접촉이나 공존을 최소화하며 실재를 추구할 때란 말일세."

"그야 그렇지요."

"그렇다면 철학자의 혼이야말로 몸을 가장 무시하고 몸에서 달아나 혼자 있으려 하지 않을까?"

"그런 것 같아요."

#파이돈 #플라톤

"그렇다면 사유할 때 시각을 이용하거나 그 밖의 다른 감각을 사유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되도록 사유만으로 개별 대상에 접근하는 사람이 가장 완벽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네.

자신을 눈과 귀는 물론이요 사실상 몸 전체와 가능한 한 분리시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대상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유를 사용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말일세.

몸이 혼과 함께 하면 혼을 혼란에 빠뜨려 혼이 진리와 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일세.

심미아스, 누군가 실재에 도달한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파이돈 #플라톤

"혼이 그렇게 몸에서 풀려나고 분리되는 것, 바로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고말고요"하고 심미아스가 말했소.

"그리고 혼을 해방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주로 또는 전적으로 진정한 철학자들이며,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혼이 몸에서 풀려나고 분리되는 것, 바로 그것일세. 그렇지 않은가?"

#파이돈 #플라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얻었다가 태어나는 순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적절한 감각 훈련을 통해서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을 되찾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을 되찾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배움은 '상기'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물론이지요."

"그렇지. 우리는 시각이나 청각이나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 어떤 사물을 지각할 경우 유사한가의 여부를 떠나 잊어버렸던 다른 사물을 생각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으니 말일세.

그래서 나는 둘 중 하나라고 주장하네.

즉 우리는 모든 이런 기준들을 알고 태어나 평새 그런 지식을 간직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배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에 알고 있던 것을 단순히 상기하는 것이어서 배움은 상기라고 말일세."

#파이돈 #플라톤

"지금까지 의 모든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지.

혼은 신적이고 불멸하고 지성으로 알 수 있고 형상이 하나뿐이고, 해체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항상 같은 것을 가장 닮았지만, 몸은 인간적이고 죽게 되어 있고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형상이 다양하고 해체되고 자기 자신과 같은 적이 결코 없는 것을 가장 닮았는지 말일세.

여보게 케베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제기할 수 없어요."

"어떤가? 그럴 경우 몸은 당연히 빨리 해체되지만, 혼은 당연히 전혀 해체되지 않거나 그에 가까운 것이겠지?"

#파이돈 #플라톤

약 죽음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라면 죽음은 악인들에게는 횡재겠지.

그들은 죽음으로써 혼과 함께 몸과 자신들의 악행에서도 해방될 테니까.

그러나 혼이 죽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지금, 혼이 악행에서 도피하거나 구원받을 길을 달리 아무것도 없네.

최대한 선량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 말고는.

혼은 저승에 갈 때 교육과 훈련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데, 교육과 훈련이야말로 저승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죽은 사람을 가장 이롭게 하거나 가장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니 말일세.

#파이돈 #플라톤

지만 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만큼, 우리의 혼과 그 거처가 실제로 그와 같거나 비슷하리라고 믿는 것은 적절하고도 가치 있는 모험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것은 고상한 모험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문(呪文)처럼 되풀이해서 외어야 하네.

내가 이야기를 그렇게 늘인 것도 그 때문일세.

또한 그렇기 때문에 생전에 몸의 쾌락과 장식은 이롭기보다는 해롭다 여겨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거부하고는 배우는 즐거움에 열중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남에게서 빌려온 장식물이 아니라 절제, 정의, 용기, 자유, 진리 같은 혼 자체의 장식물로 장식한 다음 운명이 부르면 언제든 저승으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혼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네.

#파이돈 #플라톤

크리톤은 내가 머물 것이라고 보증을 섰지만, 자네들은 내가 죽고 나면 머물지 않고 떠나갈 것이라고 보증을 서주게.

그가 내 죽음을 더 쉽게 견뎌낼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내 몸이 불타거나 묻히는 것을 보고는 마치 내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나 한 것처럼 나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장례식 때 그가 입관 준비를 하거나 운구하거나 매장하는 것이 소크라테스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말일세.

친애하는 크리톤, 잘 알아두게.

잘못된 표현은 그 자체도 귀에 거슬리지만 혼에 나쁜 영향을 준다네.

그러니 자네는 기운을 차리고 자네가 화장하는 것은 내 몸일 뿐이라고 말하게.

그리고 그것은 자네 좋을 대로, 자네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묻어주게.

#파이돈 #플라톤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니까요-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

그분께서는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으나, 잠시 뒤 몸을 부르르 떠셨소.

그래서 그 사람이 그분을 가린 것을 벗기자 그분의 두 눈이 멈추어 있었소.

그래서 그것을 본 크리톤이 그분께서 입을 다물게 해주고는 두 눈을 감겨드렸소.

#파이돈 #플라톤

Posted by 㗢동죽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