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곧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깨우치고 나면 반대로 죽음에 속절없이 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잊게 된다. 


죽음이 뭔지를 알면 모든 굴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을 박탈당하는 것이 해악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오래 살건 잠시 살건 죽음 앞에서는 매한가지다. 


사라지고 난 후에는 길고 짧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히파니스 강(쿠반 강의 옛 이름)에는 단 하루를 사는 작은 벌레가 있다고 한다. 


아침 8시에 죽으면 요절한 것이고, 저녁 5시에 죽으면 장수한 셈이다. 


이렇게나 짧은 생애를 놓고 행복과 불행을 따진다면 우리 중에 비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네 길고 짧음도 영원이나 자연, 어떤 동물들의 시간에 대보면 가소롭긴 마찬가지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내가 아무리 방어한다 할지라도 늙음은 조금씩 나를 덮쳐올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저항하겠지만 늙음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어디서 쓰러질지 알면 과연 더 행복해질까.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그러나 나는 죽음이 결론일지언정 삶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의 끝이자 극단에 죽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삶의 목적은 아니다. 


삶이 삶 자체의 목적이자 목표여야 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처신하도록 용인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염려에 무게를 실어주지만 않는다면 이는 가벼운 삶의 요소일 수 있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어떤 기억을 남길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잊고자 하는 열망만큼 기억을 선명하게 새겨놓는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에 담아두고 새기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는 기억에게 그것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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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함과 궁핍함은 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부든, 명예든, 건강이든, 그것을 소유한 이가 부여한 의미 이상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지니지 못 한다.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 


스스로의 확신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진실한 것이다.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지 못 한다. 


단지 우리의 영혼에 재료와 씨앗을 주어 더욱 강해진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향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자의만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유일한 근거이자 주권자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게으름뱅이에게는 공부가 고역이고 술주정뱅이에게는 금주가 고문이다. 


음욕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수수한 삶이 형벌이고 허약하고 태만한 사람에게는 훈련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괴롭거나 힘들지 않다. 


우리의 약함과 비겁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일을 판단하려면 크고 위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약함이 그 판단에 영향을 준다. 


곧은 노櫓도 물 안에서는 굽어져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사람들은 항상 자기 앞을 보지만 나는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스스로를 평가한다. 


저마다 자기 앞을 바라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만 돌보며 나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분석하며 음미한다.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의 시선은 늘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앞으로 가기만 한다. 


“아무도 자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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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영혼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되찾아 자기 안에 가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도시 한가운데서나 궁정에서도 누릴 수 있는 고독이지만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더 만끽할 수 있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고독 한복판에서 스스로 군중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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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잘 알지 못 하는 사람이야 거짓 찬사를 즐기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잘 알고 가장 깊은 곳까지 탐색해 나의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덜 받아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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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사가 딱딱하다고 불평하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히페레이데스Hypereides가 했던 말을 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여러분, 제가 자유로운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만 제가 자유로움 속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는 않는지, 자유로움에서 제 유익을 추구하지는 않는지를 보십시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가장 나쁜 버릇이 드는 때는 바로 우리가 가장 미숙한 어린 시절이며 기본 성품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는 보모의 손에 달렸다. 


아이가 병아리 목을 비틀거나, 뛰놀다가 개나 고양이를 다치게 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소일거리로 삼는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 힘없는 농부나 하인을 모욕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보고 남자답다 여기거나, 친구를 악랄하게 배신하고 기만하는 것을 보고 명망 있다고 여기는 아버지는 정말이지 어리석다. 


이것들이야말로 잔인함, 폭정, 반역의 씨앗이요 뿌리다. 


여기에 싹이 터서 왕성하게 자라나면 마침내 습관이 된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플라톤의 말을 항상 되뇌자.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이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비난이 나에게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드러나는 결함은 차라리 덜 심각하다. 


정말 위험한 결함은 건강한 기색을 하고 숨어 있다.”

#몽테뉴의_수상록 #몽테뉴


우리는 다른 이의 의견과 학식을 무심코 받아들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이웃집에 불을 빌리러 갔다가 그곳에 머물며 뜨거운 불에 몸을 데운 뒤, 정작 불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 


배에 고기가 그득한들 소화를 안 시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고기가 우리의 뼈와 살이 되지 못 한다면? 


우리를 살찌우고 기력을 주지 못 한다면? 


우리처럼 했더라면 경험도 없던 루클루스Luclus가 지식만으로 그렇게 위대한 지휘관이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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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말할 때는 단순하고 기교 없이 말해야 한다. 


옷을 입을 때 특이하고 별난 복장으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것이 소심하기 때문이듯, 

언어를 사용할 때 새로운 문장과 생소한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학자인 체하고 싶어하는 유치한 욕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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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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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대는 죽음과 진실로 만날 수 없다. 


잘 기억해 두기를. 


‘죽음은 그대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라는 것을. 


사랑이 죽음 위에 더해진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발생한다. 


그대는 결코 동일한 존재로 남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이 없다면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어야만, 죽음은 그대에게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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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잠자리에서조차 편히 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잠은 매일매일 겪는 일종의 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랑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모든 오르가즘적 경험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모든 오르가즘에서 에고가 죽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모든 것을 놓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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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죽음을 인정할 때 그대는 균형이 맞는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인정된다.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빛이든 어둠이든 말이다. 


둘 다를 인정하고 삶의 양극성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균형이 맞는다. 


그대는 평정을 유지하고 전체로 남을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전체를 생각한다면, 죽음을 함께 안고 가야만 한다. 


삶은 아름답고 죽음도 삶만큼 아름답다. 


삶은 그것 자체의 축복을 가지고 있고 죽음도 자체의 축복을 가지고 있다. 


많은 꽃이 삶 안에 있듯이 죽음 안에도 많은 꽃이 있다. 


신이 그대에게 준 것을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는 죽음조차 말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대는 종교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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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죽을 때 그대 삶의 한 장(章)이 닫힌다. 


사람들은 당신의 온 삶이 닫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한 장을 가지고 있는 책의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장이 끝났다고 그 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페이지를 넘겨라. 


그러면 다른 장이 시작될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다음 생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삶이 끝나기 전에 그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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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이 끝나기 전에 그는 모든 경험과 채우지 못한 욕망과 기대,실망,좌절,고생,즐거움 등 이 모든 것을 회상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가 이 삶을 끝내기 전에 인생 전체를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식어 가는데 마음은 아직 그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뇌는 그의 육체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에서 풀려난 욕망은 영혼에 집착한다. 


이 욕망은 그의 미래 삶을 결정한다. 


채우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는 목표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당신이 하는 행위는 당신이 어떤 인생으로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착하면서 죽는다. 


그들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 그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의 순간에 그들은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삶은 꿈처럼 단순히 흘러가며 죽음의 순간은 온다. 


지금 더 이상 살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죽음이 문밖에서 노크를 하고 있다. 


살 시간이 있을 때 그대는 수 천 개의 어리석음을 저지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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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과거 죽음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어느 것, 어떤 경험이라도 아는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항시 움직일 준비를 하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라. 


그 새로움, 신선함은 너무 유혹적이다. 


거기에 용기가 있다. 


미지의 것이 알려진 것보다 나쁜 것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것이 요점이 아니다. 


그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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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에서 죽음은 축복된다. 


왜냐하면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형태만 변할 뿐이다. 


삶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환생한다. 


사람이 죽을 때 그것은 모든 이에게 기쁨의 순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는 외견상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 그는 죽는 것처럼 느껴지나, 다른 측면에서는 그는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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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죽음이란 커다란 경험 역시 놓치려 한다. 


죽음 안에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아름다운 잠이며, 꿈 없는 잠이며 다른 사람의 몸으로 소리 없이 평화로운 이동을 필요로 하는 잠이다. 


그것은 외과적 현상이며 마치 마취와도 같은 것이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죽음이 친구란 것을 이해하고 두려움 없이 살기 시작한다면, 그대의 관점이 그대 삶의 영원성으로 향한다면 모든 것은 천천히 흐를 것이고, 서두를 아무 이유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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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몸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을 안으로부터 그냥 관찰하라. 


육체를 관찰하라. 


그러면 갑자기 그대와 그대 육체 사이에 더 많은 간격이 벌어질 것이다. 


마음을 관찰하라. 


동일 현상이 마음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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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단순히 관찰자로 남는다. 


그대는 육체 밖으로, 마음 밖으로, 이 온 인성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통제 하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왔기 때문에 돌아갈 방법도 알게 된다. 


방법은 관찰하는 것이다. 


그대는 빠져 나왔다. 


이제 관찰을 멈추어라. 


‘나는 몸이다. 

나는 마음이다. 


나는 숨 쉬는 것이다. 


나는 맥박이 뛰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육체와 동일시하라. 


즉시 거리가 사라질 것이다. 


점차 거리를 줄일수록 그대는 육체로 되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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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에 그대의 신체적 몸과 정신적 몸은 분리되기 시작한다. 


보통 그것들은 서로 너무 깊게 얽혀 있어서 그들의 분리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죽음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그 두 몸은 서로 불확실하게 된다. 


이제 그들의 길은 서로 다르다. 


육체적 몸은 육체적 요소로 가고, 정신적 몸은 새로운 탄생으로,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자궁으로 성스런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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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끝이 아니라 한 생애의 정점이자 클라이맥스이다. 


그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른 몸으로의 이동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바퀴라 부른다. 


그것은 계속 움직인다. 


그렇다. 


그것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죽는다 해서 그것이 멈춰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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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서 사람이 죽을 때, 그들은 어떤 진언을 반복한다. 


그 진언을 바르도라 부른다. 


진언은 그에게 말한다. 



“진정하라. 


침묵 속에 있으라. 


그대의 중심으로 가, 거기 있으라.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곳을 떠나지 마라. 


단지 목격자가 되라. 


일이 그냥 일어나게 내버려 두어라. 


방해하지 마라.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가 기억하면서 죽는다면 그대의 바퀴는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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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 번 증가한 명상의 경험은 죽음의 경험이다.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여기에 그대의 형태를 단순히 남겨 놓는다. 


그는 절대적으로 온전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생리학, 생물학, 심리학의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장벽은 무너지고 그대는 자유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존재로 향하는 날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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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완전한 죽음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성취이다. 


그것보다 더 높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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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만일 그대가 슬픔을 바꿀 수 있다면, 그대는 죽음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무조건적으로 죽음을 축복할 수 있다면, 그대는 웃을 수 있고 축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축복할 수 있다면, 죽음은 그대를 죽이지 못 할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죽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작하라. 


노력하라.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죽음_가장_커다란_거짓말 #바그완_슈리_라즈니쉬 #오쇼_라즈니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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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모든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인과 노예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가족이나 친구가 보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노예이지, 어떻게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바쁜 족속들이 존중받는 시대도 없었다. 


바쁜 것을 큰 자랑이나 벼슬처럼 여기는 시대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바쁜 사람들이 경멸하는 한가한 사람들이다. 


몸과 마음이 변함없이 침착한 사람들은 좋은 기질을 갖추고 있어서 유익한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살던 사람들이 어느날, 한가한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이미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그러나 이런 타의적 선택에 의한 삶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현실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뒤집어 보기 바란다. 


예를 들어 오랜 인류의 관습 중 하나인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사람이 일부다처제를 반대할 경우, 그에게 일부일처제를 지탱하는 합리적 근거가 어디서 나왔고 그것을 지지하는 열정이 어떠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인지 따져 보라. 


그러면 자신의 현재 생활은 신념이나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 근거도 없는 원칙에 익숙해진 채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사람들은 행복이 늘 ‘산 너머 저쪽'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남겨진 유산이거나, 공상의 산물, 그릇된 추리의 결과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지금 행복을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세상의 온갖 글들 가운데, 나는 오로지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당신의 피로 써야 한다.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남의 글이나 읽는 게으른 사람들을 미워한다. 


남의 글이나 계속해서 읽고 있으면, 자신의 글은 물론이고 정신마저도 해를 입게 된다. 


정신은 원래 신이었다. 


이윽고 정신은 인간이 되었고, 지금은 하찮은 노예가 되었다. 


피로써 글을 쓰는 사람은, 남들이 자기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외우기를 원한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그러나 여자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여자를 두려워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것을 바치려 하고, 사랑 이외에는 모두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반면에 여자가 당신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도 역시 그 여자를 두려워해야 한다. 


남자의 속마음이 악하다면, 여자의 속마음은 비열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누구를 가장 증오하는지 아는가? 


쇠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를 끌어당기지만 나는 너를 끌어당길 힘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너를 가장 증오한다.” 


남자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당신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고 나는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당신은 젊다. 


그래서 자녀를 원하고, 결혼을 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가? 


당신은 승리자인가? 


자신을 극복한 사람인가? 


육욕을 지배하는 사람인가? 


자신이 지닌 미덕의 주인인가? 


그렇지 않다면, 결혼과 아이를 바라는 것은 당신 안에 숨어있는 동물적 본능과 이기심이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고독이, 혹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 몸부림치는 것 아닌가? 


나는 당신의 승리와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란다. 


당신은 자신의 승리와 해방을 위해 산 기념비를 세우되,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당신의 육체와 영혼이 바로 서야 한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빈약한 두 영혼의 결합, 두 육체의 천하고 가련한 향락, 이런 것을 결혼이라 부르고, 하늘에서 맺어 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 하찮은 사람들의 하늘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하늘나라의 그물에 걸린 이 짐승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짝지어 주지도 않은 한 쌍을 축복하려고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신도 나는 환영하지 않는다. 


이런 결혼을 누가 비웃지 않겠는가? 


자신의 부모가 치른 이런 결혼을 통탄하지 않을 자녀가 어디 있겠는가?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여기서 말하는 습관의 틀에는 네 가지의 기준이 있다. 


첫째, 영속되는 것은 모두 정당하다. 


둘째,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정당하다. 


셋째, 우리들에게 이득을 주는 것은 정당하다. 


넷째, 우리가 희생을 바친 것은 모두 정당하다. 


그래서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켜도 희생을 바치면 감격적으로 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얻은 정당성과 이러한 행위의 반복으로는 발전할 수가 없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우리가 말하는 사려 깊은 행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광범위한 통찰력에 기초를 둔 사려 깊은 판단과 행동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공정성 하나만은 갖추기로, 용기를 내서 실천해 보기로 작정했다. 


매우 오랫동안 혹독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을 지켜 준 것은 바로 냉정함뿐이었다. 


그토록 많은 일들에 대해, 그것도 너무 뒤늦게, 자기 반성과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나의 용기와 냉정함 덕분이었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은 바로, 자신에 대한 경멸을 체험할 때다. 


자신의 행복과 이성과 도덕에 구역질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말을 할 것이다. 


“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나의 행복은 나의 생존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이러한 말도 할 것이다. 


“도대체 이성이란 무엇인가? 


사자가 먹잇감을 추격하듯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일 뿐!”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말을 할 것이다. 


“도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도덕을 기꺼이 실행한 일이 없다. 


나는 그동안 선과 악을 구분하느라 얼마나 지쳐 있는가? 


도덕이란 것은 모두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내가 불꽃이나 이글이글 불타는 숯 덩어리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참다운 정의는 불꽃이며, 또 이글이글 불타는 숯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동정이란 무엇인가? 


동정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동정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문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이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뜨거운 불꽃의 혀로 여러분을 핥아 줄 번갯불과 여러분에게 필요한 열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진 밧줄이다. 


그것도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인 것이다.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그 위에 서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겁내는 것도, 또한 멈춰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목적이 아니라 지나가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는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며, 기존의 것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래의 자기 자신을 모조리 버릴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모독하고 경멸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피안의 절벽으로 날아가려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저 먼 별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초인의 땅이 될 이 지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이 지상의 주인인 초인을 위해 집을 짓고, 대지와 짐승과 식물을 가꾸려고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한 방울의 정신도 아끼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을 도덕으로 삼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신으로 심연의 다리를 건너간다. 


자신의 도덕으로 스스로 나아갈 방향과 운명을 창조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도덕 때문에 살고, 자신의 도덕 때문에 죽는다. 


지나치게 많은 미덕을 갖추지 않으려는 사람을 사랑한다. 


한 가지 미덕은 두 가지 미덕보다 더 커서, 인간의 운명이 매달릴 수 있는 한결 큰 매듭이 된다. 


영혼이 충만하여 남에게 감사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런 사람은 항상 남에게 주기만 할 뿐, 스스로를 위해서는 감춰 두려고 하지 않는다. 


주사위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때 수치심을 느끼며, ‘과연 나는 사기나 치는 도박꾼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을 사랑한다. 


또한 행동하기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을 던지고, 말보다 행동이 충실한 사람을 사랑한다. 


미래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과거를 구제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신을 사랑하기에 신을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또한 상처를 입어도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작은 일에도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어진 다리를 기꺼이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넘쳐흘러 자신을 잊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에 포용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마음을 구비한 사람을 사랑한다. 


이런 사람에게 두뇌는 단지 마음의 그릇일 뿐이다. 


나는 사랑한다. 


인류를 뒤덮은 먹구름에서 뚝뚝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이 모든 사람들을! 


그들은 잠시 후 번개가 칠 것이라고 알리는 예언자로서 멸망해 가고 있다. 


나 역시 번개가 칠 것이라고 예고하는 예언자이며,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리고 이 번개야말로 초인이 될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예로부터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위대한 것이 탄생했으며, 진리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고독으로 돌아가라. 


시장에서는 똥파리들에게 시달릴 뿐이다. 


거센 바람이 사정없이 부는 곳으로 가라. 


그동안 우리는 하찮은 무리를 너무 가까이하며 살아왔다. 


그들을 향하여 손을 들지 말라.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파리채가 되는 것은 우리 운명이 아니다. 


가련한 소인배들의 숫자는 한이 없다. 


빗방울과 잡초가 웅장한 궁전을 망치듯이, 우리도 수많은 빗방울 때문에 이미 구멍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는 부서지고 말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나는 숲을 사랑한다. 


그래서 도시 생활은 내게 끔찍한 일이다. 


도시에는 타락한 여자들이 너무 많다. 


타락한 여자의 품에 안기느니 차라리 살인마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런데 어떤 사내들은 “여자와 동침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자들의 영혼 밑바닥에는 진흙이 있다. 


그리고 그 진흙 속에 정신이 묻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짐승으로나마 대우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이 되려면 순수해야 한다. 


그런 사내들에게 욕정을 없애라고 충고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욕정을 정화하라고 충고할 수 있을 뿐이다. 


순결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악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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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에게 적이 있다면, 그가 행한 악을 선으로 갚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당신에게 선행을 한 것처럼 스스로 믿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싫다면,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화나게 만들라. 


저주를 받고도 상대를 축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차라리 당신도 똑같이 저주를 퍼부으라. 


또한 누군가가 당신에게 커다란 불의를 저지른다면, 당신도 작은 불의를 다섯 가지 저지르라. 


불의를 참고 견디기만 하는 사람은 보기에도 딱하다. 


불의의 절반은 정의라는 사실을 아는가?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 약간 복수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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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면서 내적 충동이 분산되면 그는 결과적으로 약한 의지를 드러낼 뿐이다. 


반면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이 흔들림 없이 하나로 집중되면 힘이 강해져서 결과적으로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약한 의지는 중심이 없어서 힘이 흔들리고 분산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강한 의지는 목표와 방향이 한 가지로 결정되어 모든 힘이 한 군데로 모일 수 있는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의지가 약한 사람 또는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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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작은 거미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주변에 점차 더 많은 거미줄을 쳐놓게 된다. 


그리고 그 습관의 거미줄에 자신이 결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계속 그물을 찢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크고 작은 많은 상처와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을 옭죄고 있는 육체와 영혼의 속박을 풀어 버리려는 본능적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속박을 풀어 버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미워한 것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사랑하던 것들을 미워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을 포기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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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끝없는 자유의지를 갈망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갇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유를 향한 끝없는 탈출의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감옥에 가두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극도로 자극하면 천재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치자. 


그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자유도 잃은 것이다. 


그는 숲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독창성을 천재라고 부른다. 


천재란 남들이 습관적으로 혹은 일률적으로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 또는 남들이 전혀 몰랐던 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찾아내는 사람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국가는 개인의 안정과 행복을 지켜 주는 조직과 제도지만, 그 목표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개인은 국가에 의해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국가의 본래 목표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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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자란 이 세상에서 아직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 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하고, 이미 도덕성에서 져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몸을 바쳐서 희생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영역과는 반대되는 세상에 마음을 둔 채 살고, 바깥세상의 권력에 저항하면서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어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 속에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다. 


허무주의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생존의 의미를 상실한 뒤에 비로소 세상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은 아니다. 


신이나 도덕, 희생이나 헌신 등의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단계에 이르면 허무주의가 오히려 치유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정신적 피로는 철학과 등을 지면서 절망적 회의에 이르게 되지만, 그 과정을 보면 허무주의자들은 결코 사회적으로 서민층이 아니라 지식층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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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지상의 삶보다 천상의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 심한 해독을 끼친다. 


그들이 외치는 ‘영원한 삶'으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오로지 자학만을 선택한 무서운 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도 자학에 불과하다. 


지상의 삶을 버리라고 남들에게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좋으련만! 


그들의 영혼은 병들었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기를 바라고, 삶을 포기하라는 설교를 듣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의 삶보다는 저 세상의 삶이 더 기치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뜻을 찬미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므로 이 시체들이 깨어나 소리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이 관들을 잘못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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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오직 고통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 말이 옳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스스로 삶을 끝내라. 


오직 고통일 뿐인 자신의 삶을 끝내라.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스스로 이 세상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 세상은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는 곳이니,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자들도 죽음의 선교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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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가장 의미 없는 여행을 하는 최하급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남에게 관찰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지나 여행의 대상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상 장님처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들이다. 


세 번째 부류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실제로 체험해 보는 여행자들이다. 


네 번째 부류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해 내는 사람들이다. 


다섯 번째 부류, 즉 최고 등급에 속하는 여행자들은 극소수이다. 


그들은 보고 듣고 체험하고 이해한 것들을 즉시 자신의 행동에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여로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다섯 등급으로 확실히 구별된다. 


최하급의 여행자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인간들이다. 


그러나 최고급의 여행자들은 내면으로 체득한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활용하며 살아가는 행동가이며, 인생의 진정한 여행자인 것이다.

#어떻게_살_것인가 #프리드리히_니체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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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재산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외적인 재산, 마음의 재산, 육체의 재산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 가지라는 숫자만을 그대로 이어받아 덧없는 인간의 운세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 세 가지 근본 규정에 귀착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인간의 모습,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품, 인격, 인물, 따라서 이 속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적 성격, 지성 및 그것의 완성이 포함된다. 


2.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 즉 모든 의미에서의 소유물 


3.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타인이 갖게 되는 인상에 비춰진 나의 모습, 즉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품게 하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타인들의 생각으로, 그것은 명예와 지위, 명성으로 나눌 수 있다.

#쇼펜하우어_인생론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지위나 부의 차별이 각자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하도록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이 역할에 비례해서 행복이나 즐거움의 내면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경우에도 한 껍질 벗기고 나면 모두가 똑같이 가엾이 여겨야 할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괴로움과 고뇌를 가진 어리석은 자이다.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 각각 다르지만 본연의 모습, 즉 본질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모두가 똑같이 어리석은 자이다. 


잠재되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신분과 부, 즉 역할에 따른 차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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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온갖 재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마음의 명랑함이다. 


왜냐하면 이 장점은 다른 그 무엇을 기다릴 것까지도 없이 이 장점 자체에 의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명랑하게 지낼 수 있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란, 다름 아닌 그가 명랑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어떠한 재산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점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성질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젊고, 미남이며, 부자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 남자가 행복한지를 판단하려면, 그 외에도 그가 명랑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반대로 이 사람이 명랑한 사람이라면, 젊은지 나이를 먹었는지, 몸이 곧게 펴져 있는지 꼽추인지, 가난한지 부자인지 등과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남자는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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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이 명랑한 기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명랑한 기분이 건강상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는 같은 외부적 사정 내지 내부적 일이 건강하고 원기왕성한 날에 주는 인상과 병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차분하지 못한 날에 일으키는 인상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객관적·현실적 모습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사물의 모습, 우리들의 견해에 비춰진 사물의 모습이 우리들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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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2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적수의 어느 한쪽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또 다른 한쪽 적수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생활은 현실적으로는,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두 적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그것은 양자가 이중의 상반관계, 외면적, 즉 객관적인 상반관계와 내면적, 즉 주관적인 상반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결과이다. 


외면적으로는 곤고와 결핍이 고통을 만들고, 이에 반해서 안전과 여유가 무료함을 만든다. 


따라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곤고, 즉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며 이와는 반대로 부귀한 사회는 무료함을 적으로 끊임없는, 때로는 절망적이기까지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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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통과 무료함의 내면적, 즉 주관적인 대립은 양자에 대한 감수성이 정신적 능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규정되며, 개개인의 경우에는 한편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편에 대한 감수성과 반비례한다는 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정신의 우둔함은 언제나 감각의 우둔함 및 자극 감성의 부족을 동반한다.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종류, 모든 정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도 둔감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정신의 우둔함 때문에 내면의 공허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내면의 공허이다. 


외부의 어떠한 일, 제 아무리 조그만 일에라도 끊임없이 활발하게 관심을 보이는 일에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그러한 내면의 공허이다. 


이것이야말로 무료함의 근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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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허가 끊임없이 외부적인 자극을 절실하게 요구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정신과 심정(心情)을 활동하게 하려고 한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이 선택하는 오락의 저급함, 그들의 사교와 대화의 질,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구경꾼들이 가장 큰 증거이다. 


주로 이 내면의 공허에서 발생하는 것이 온갖 종류의 사교와 오락, 여흥, 사치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낭비를 하며, 곧 빈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빈곤을 가장 안전하게 방지하는 길은 내면의 부, 정신의 부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부는, 그것이 우수함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료함이 만연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를 줄 모르는 사상의 활발한 움직임, 내면 세계, 외면 세계의 제 각기 다른 여러 현상에 접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는 사상의 유동,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상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충동과 같은 것들 때문에, 긴장이 이완된 몇 차례의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제외하면 뛰어난 두뇌는 전혀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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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도록, 상처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간의 여유와 안정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하고 은근한, 그리고 유혹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따라서 이른바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된 뒤부터는 은둔·한거를 즐기고 특히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차라리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크면 클수록 필요로 하는 외부의 것은 그만큼 적어지게 되며 자신 이외의 인간에는 그만큼 무게를 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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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가장 좋은 일, 가장 중요한 일을 해주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이 가장 좋고 중요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향락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얻을 수 있을수록 그만큼 행복해진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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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각각 세 가지 근본 능력 중 어느 것이 내면의 주류를 이루는가에 따라서 향락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재생력에 대한 향락이다. 


음식,소화,휴식,수면에 대한 향락이다. 


심지어는 어떤 나라의 국민 전체가 이런 종류의 향락을 이른바 국민적 쾌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국제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두 번째는 자극감성에 대한 향락이다. 


유력(遊歷),도약,격투,무용,격검(擊劍),승마 그 외의 모든 운동경기, 그리고 사냥, 심지어는 투쟁과 전쟁 등에 대한 향락이다. 


세 번째는 정신적 감수성에 대한 향락이다. 


고찰,사유,감상,시작,회화조각,음악,학습,독서,명상,발명,철학적 사색 등에 대한 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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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행복론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망을 세 부류로 나눴는데 이것은 참으로 정확하고 뛰어난 분류이다. 


첫 번째, 자연스럽고 없어서는 안 될 욕망. 


이것은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으로 이것에 속한 것은 식(食)과 의(衣)뿐이다. 


이것을 충족시키기란 매우 쉽다. 


두 번째,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 


이것은 성적 만족에 대한 욕망이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보고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설을 조금 정리하고 퇴고를 해서 기술하고 있음을 사전에 밝혀둔다.) 


두 번째 욕망은 첫 번째 욕망보다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세 번째,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이것은 사치, 탐닉, 영예, 영화에 대한 욕망이다. 


끝이 없으며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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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날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일이 실제로 행해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가장 중시하고,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며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보다도 오히려 타인의 생각을 문제삼고 따라서 원래의 자연스러운 순서를 뒤집어서 타인의 생각을 자기 현실생활의 한 부분이라 보고 자신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단순한 관념적인 부분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 때문에 파생적·제2차적인 것을 주요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본질 그 자체보다도 타인의 두뇌에 비친 자신의 본질의 영상에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처럼 직접적인 것으로서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예전부터 허영이라고 불려왔는데 ‘허영'이란 이러한 노력의 덧없음, 내용의 공허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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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게 검토해 보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온 배려나 걱정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들은 타인의 생각에 대한 배려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병적으로까지 민감한 까닭은 그렇게도 자주 상처를 받는 우리들의 자존심이라는 것의 기초에, 우리들의 모든 허영과 허세의 기초에, 모든 겉치레와 과장의 기초에 타인의 생각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배려, 이 편집이 없다면 사치라는 것은 지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자부심, 체면, 얼굴의 표정 등은 그 종류·방면의 여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배려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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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의 두뇌에 있는 대부분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잘못되고 불합리하고 도리에 어긋난 엉터리 같은 것인지, 따라서 이러한 의견 자체는 뒤돌아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미치는 현실적인 영향이 얼마나 적은 것인지, 또한 일반적으로 타인의 의견은 대부분이 매우 유해하며 타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귀담아 듣거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음색, 어떤말투로 하는가를 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열이면 열 모두가 화병에 걸려버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명예라는 것도 결국은 간접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직접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그 외의 여러 가지 이러한 종류의 사실들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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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과 자긍심의 구별은, 

자긍심은 어떠한 점에서 자신이 압도적인 가치를 가진 것에 대해서 이미 부동의 것이 되었다는 확신임에 반해서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타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소망이며,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마음속에 확신을 불러일으키면 그 결과 자기 스스로도 타인의 확신을 자신의 확신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기대가 수반된다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긍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부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평가인데 반해서 

허영심은 이러한 평가를 외부에서, 간접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영심은 사람을 능변가로 만들며 

자긍심은 과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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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저 자긍심을 펼쳐보여 자긍심을 가장하는 정도의 것인데 모든 억지로 짜 맞춘 역할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역할로부터는 곧 전락해 버리게 된다. 


자신이 매우 뛰어난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확신하고 이 확신이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것이어야만 참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잘못된 확신일 경우도 있을 것이며, 혹은 단순히 외면적·인습적인 장점에 바탕을 둔 확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이 현실적으로 진지한 확신으로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것은 자긍심의 자긍심다움에 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자긍심은 일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에 따라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긍심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그래봐야 그것은 최대의 장애물이라는 의미이지만, 바로 허영심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시인에 처음부터 완전히 안주하는 것이 자긍심이라는 것의 전제조건임에 반해서 허영심은 무엇보다 먼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호평을 얻도록 하며, 그런 다음 호평에 바탕을 두고 자신에 대한 시인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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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더 어렵고 귀찮은 것은 명예에 대한 논의이다. 


가장 먼저 명예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의를 내릴 생각으로 “명예란 외면적인 양심이며, 양심이란 내면적 명예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명료하고 근본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멋진 설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명예란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들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생각, 주관적으로 보면 이 생각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움이다."라고 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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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타인의 관계는 

주로 첫 번째로는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사법권의 관계, 

두 번째로는 책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간이 담당하는 일, 

마지막으로는 성적 관계이다. 


이 세 종류의 관계에 대응하는 것은 시민적 명예와 직무상의 명예와 성생활상의 명예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각각 또 다시 몇 개의 종류로 나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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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명예라는 명칭은 시민계급으로부터 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적용 범위는 모든 계급에 무차별적으로 미치고 있다. 


최고의 신분·계급도 예외는 아니다. 


그 누구도 시민적 명예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시민적 명예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모두들 이 중대한 것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을 배반하는 자는 무엇을 하든, 그 누구이든 성실과 신용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들의 상실에 수반되는 씁씁한 결과는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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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상의 명예란, 

어떤 직무를 관장하는 사람이 그것에 필요한 모든 성질을 실제로 갖추고 있다. 


실제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무상의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인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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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상의 명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살펴보아 거기서 볼 수 있는 원칙을 근원까지 환원시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동시에 명예라는 것이 결국은 공리적인 배려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도 있게 된다. 


성생활상의 명예는 성격상 여성의 명예와 남성의 명예로 나뉘어지며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말할 필요도 없는 동업자 기질을 가지고 있다. 


단결적 정신이다. 


여성의 생활에 있어서는 성적 관계가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명예 중에서는 여성의 명예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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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은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명성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따른다.'는 말은 오솔라우스가 자신의 저서 『명성에 대해서』에서 역설한 내용인데 이말의 정당함도 앞서 설명한 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동시대인들의 취향에 영합하며, 명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이것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은 얻기는 힘들지만 유지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명성은 명예와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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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가장 행복한 운세를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격렬한 고통을 모르고 평생을 보낸 사람이지, 최고로 격렬한 기쁨이나 커다란 향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기쁨이나 향락으로 일생의 행복을 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잣대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향락은 어디까지나 소극적·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향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은 질투하는 마음이 품는 미망이며 질투하는 마음이 이 미망을 품는 것은 질투하는 마음이 받는 당연한 천벌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고통은 적극적·긍정적으로 느껴지며 따라서 고통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행복을 재는 잣대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에 있으며 거기에 무료함이 없다면 대체적으로 지상의 행복을 달성한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가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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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한 철학적 가르침을 받아들여 인간의 모든 존재가 오히려 없는 것이 나은 것으로 이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최선의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에도, 어떤 사태에도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정열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하며 울지도 않게 된다. 


플라톤의 ‘게다가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중에 혈안이 되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고 한 말에도 철저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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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그네의 눈에는 모든 풍물이 멀리서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점점 다가감에 따라서 변화를 하게 되는 것인데 결국 인생도 그런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 인간의 소망이 바로 그렇다. 


처음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그것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곧잘 있는 법이다. 


또한 찾고 있던 것을 처음 더듬어가기 시작한 길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혀 다른 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향락이나 행복, 기쁨을 원했는데 그 대신에 계발이나 통찰, 인식, 즉 겉만 번지르르하고 덧없는 재물 대신에 언제나 진실된 재산이 주어지는 경우도 흔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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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희망에 의지하여 미래만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앞을 바라보며, 미래에 속한 일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둘러 이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맛보려 들지도 않고 지나쳐 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머리에 묶여 있는 봉에 매달려서 끊임없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지금 당장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여물에 끌려서 걸음을 재촉하는 이탈리아의 당나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당면한 일에만 국한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면서 일생을 비웃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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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대한 계획과 배려에만 모든 마음을 기울이거나, 과거에 대한 동경에 빠지지 말고 현재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 
이에 반해서 미래는 대부분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전개된다는 사실, 
심지어 과거조차도 우리들의 상상과는 달랐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미래와 과거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겉모습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육안에는 대상을 작게 보이게 하는 간격이 있지만 심안(心眼)은 대상을 크게 보이게 하는 법이다.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은 현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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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품었던 희망에 대한 좌절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씁쓸한 표정으로 이 한때를 숨막히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일에 화를 내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처럼 좋은 현재의 한때를 뒷전으로 밀쳐내거나, 경솔하게도 이것을 망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걱정을 하는 일은 물론, 회한에 잠기는 일에도 일정한 시간만을 할애하는 편이 좋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미 일어난 일은, ‘제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제는 지나버린 일로 치부하자. 

제 아무리 괴로워도 잠겨드는 마음을 진정시키자.'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일은 '그것은 신의 뜻에 달린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에 반해서 현재는 '하루 하루를 일생이라고 생각하라.’ 

(세네카)는 말에 따라서 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시간을 가능한 한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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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라는 것은 모두, 가장 먼저 필연적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순응하고 억제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교계는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운치가 없어지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홀로 있을 때뿐이다. 


따라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있을 때만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사교에 있어서 강제라는 것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교는 희생을 요구하는데 자신의 개성이 강하면 그만큼 희생이 커진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가치에 정확하게 비례하여 고독을 피하거나, 고독에 견디거나, 고독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독에 빠졌을 때 비참한 인간은 그 비참함을, 위대한 인간은 그 위대함을, 즉 각자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천성의 등급을 나타내는 표에서 우위에 서게 될수록 그만큼 고독해진다. 


그것도 본질적으로 불가피한 고독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 정신의 고독에 따라서 신체적으로도 고독하다면(처자가 없는 것) 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신체적으로 고독하지 않다면 자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리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몰려들어 방해를 하고, 적대시하기까지 하면서 그 사람의 자아를 앗아가 버리지만 이를 보상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건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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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간은 누구나 가장 완전하게 융화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상대할 때일 뿐이다. 


친구와도, 연인과도 완전히 융화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의 차이 때문에 반드시 다소나마 부조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근본적인 참된 평화와 기분의 완전한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 지상의 재산은 고독 속에서만 추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을 통해서만 지속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있을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인간의 자아가 뛰어나고 풍요로운 자아라면 틀림없이 가난한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를 향수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우정이나 사랑, 부부관계 등이 사람과 사람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켜주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완전히 정직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으로 그 외에는 기껏해야 자신의 자식들 정도일 것이다. 
객관적, 또는 주관적인 조건 덕분에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그 만큼 사정은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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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심함과 관용을 크게 발휘하기 바란다. 


세심함에 의해서 손해·손실을 면할 수 있으며, 관용에 의해서 분쟁을 면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상 그 어떠한 개성도, 제 아무리 열악하고 가엾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개성이라 할지라도, 배격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다. 


누가 뭐래도 개성은 자연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성은 영원한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출발, 현재 있는 모습 외의 모습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불변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 심한 개성이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이런 별종도 있는 법이군.’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를 침해하여 생사를 건 싸움에 도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의 참된 개성, 즉 그 도덕적 성격·인식능력·기질·인상 등과 같은 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그 사람의 본질적인 성격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부인한다면 상대는 우리들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싸움을 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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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물을 자신 이상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구나 타인을 봐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모습밖에는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자기 자신의 지식의 힘에 따라서 타인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의 힘이 가장 열등한 부류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타인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정신적 재능도, 비록 그것이 제 아무리 위대한 재능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작용해올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더라도 자신은 그 사람 개성의 가장 저급한 면,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약점, 기질과 성격의 결함밖에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러한 약점과 결함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고 비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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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에 있어서의 우월함은 무엇보다도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 그것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낸다고 하는 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상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러한 상대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게 해주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다. 


그렇게 하면 우정은 더욱 굳건해진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가끔 보여줘도 아무런 지장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는 그러는 만큼 더 그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타인을 중히 여기지 않는자는 타인들로부터 중히 여김을 받는다.’ 라는 적절한 이탈리아 속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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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면 믿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라. 


그렇게 하면 상대는 대담하게도 더욱 거짓말을 하게 되어 결국에는 들통이 나게 되는 법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대가 숨기고 싶어하는 진상의 일부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점은 믿을 수 없다는 모습을 보여 상대가 나의 반박에 열을 올리며 진상의 전부를 마치 후속부대처럼 차례 차례로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다.

#쇼펜하우어_인생론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시간의 작용과 사물의 덧없음을 언제나 잊지 말고, 

현재의 일을 보고는 곧 그 반대를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행복에 있어서는 불행을, 

우정에 있어서는 적의를, 

맑은 날에는 흐린 날을, 

사랑에 있어서는 미움을, 

신뢰를 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는 배신을 당해 후회하는 장면을 각각 선명하게 그려보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에도 각각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깊은 사려를 잃지 않고, 쉽게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참된 처세술의 끊임없는 원천이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_인생론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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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지 한동안은 남들에게 감추어 두는 것이 좋다. 


당신의 새로운 업적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알아보고 감탄할 때, 그 업적의 가치는 한층 더 커지는 법이다. 


당신의 트럼프 카드를 상대방에게 모두 보여주고 나서 게임을 하는 것처럼 무익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다. 


당신이 분명한 입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잔뜩 기대를 건다. 


특히 당신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경우에는 그들이 거는 기대가 한층 더 커지는 법이다. 


무슨 일이든 약간의 신비감으로 포장하라. 


그러면 바로 그 신비감이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설명을 해 주는 경우에도 모든 것을 너무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말라. 


일상의 대화에서 당신의 속생각을 상대방에게 모조리 드러내지는 않는 것처럼, 설명도 그런 식으로 해야 한다. 


신중한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거룩한 신전이다. 


당신이 어떤 계획을 공개해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비난할 기회를 노릴 뿐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라. 


신의 석상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석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석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기보다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더 원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희망을 잔뜩 걸도록 만드는 것은 대단히 세련된 솜씨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에게 감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졸렬한 짓이다. 


희망은 오랫동안 지속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얼마 못 가서 사라진다. 


예의를 차릴 때보다는 남에게 의존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이익을 기대하는 법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때로는 두 번 생각해 보고나서 행동하고, 때로는 최초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라. 


삶이란 날카로운 지성과 감각적 충동이 대립해서 싸우는 전쟁이다. 


예민한 감각은 싸움에서 자기가 노리는 것을 수시로 바꾸는 전략을 쓴다. 


위협을 하면서도 그 위협에 따라 그대로 공격하는 일은 절대로 없고, 다만 적이 위협을 눈치채지 못 하기를 바랄 뿐이다. 


감각은 자신의 전략을 항상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공중에서 잘 겨냥하고 있다가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정확하게 내려친다. 


적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 목적을 드러낸 다음에는 우회해서 기습하여 적을 제압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지성은 이러한 기습을 미리 예견하여 경계하고 오히려 그런 공격을 숨어서 기다린다. 


지성은 적이 일부러 흘려서 알려 주는 정보를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내용으로 파악하고 위장된 속임수를 모두 알아차린다.

그래서 최초의 충동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두 번째 충동이 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세 번째 충동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때도 있다. 


그러면 감각은 적이 자신의 전략을 미리 간파했다고 깨닫고는 공중으로 더 높이 날아 올라간다. 


그리고 전략을 바꾸어서 다른 속임수를 쓴다. 


진리를 내세워서 속이려 드는가 하면, 속임수를 쓰지 않는 척하면서 속이려고 하고, 가장 솔직한 자세를 솜임수의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와 대립하는 적인 지성은 경계를 한층 강화해서 자신을 방어하고, 빛으로 겉을 싸서 위장한 암흑을 알아채는 것은 물론이고, 단순하게 보일수록 더욱 교묘하게 마련인 속임수를 모두 간파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거대한 뱀 파이톤의 속임수가 온 누리에 파고드는 태양신 아폴로의 햇살과 싸우는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남을 조종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내라.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움직여서 행동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남을 조종하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보다도 기술이 더 필요하다. 


당신은 어디서부터 그들에게 손을 대어야 좋을지 알아야 한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각각 특수한 동기가 있는데, 그 동기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우상으로 삼아 떠받드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명성을, 어떤 사람은 사리사욕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쾌락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는다.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란 바로 이러한 우상을 알아내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주로 어디 있는지 알아내라. 


그러면 당신은 그의 의지를 조종하는 열쇠를 쥐게 된다. 


상대가 행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동기를 이용하라. 


이러한 동기는 가장 고상한 천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대개는 가장 저열한 천성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사람의 천성이란 통제가 잘 된 경우보다 무질서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우선은 어떤 욕심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지 추측해 보라. 


그런 다음에 그럴듯한 말로 그 욕심을 부추기고, 이어서 그를 유혹하여 행동하게 만들라. 


그러면 그의 자유의지가 언제나 당신 손아귀에 들어있을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라. 


그들을 알아보고 동조하는 것도 위대한 능력이다. 


그 시대의 위대한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기적처럼 매우 귀한 것이다. 


위대한 사상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일치시키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천박하고 무지한 군중이 뭔가에 홀렸다고 느낄 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대한 사상가를 존경하고 따르며 숭배한다. 


위대한 사상은 말이 없어도 설득하고, 애쓰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는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큰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 결실인 행복이 커질수록 더욱 고귀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상을 식별할 줄 알고 지지하며 활용하는 것은 뛰어난 기술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정신적 용기가 육체적 용기보다 훨씬 우월하다. 


정신적 용기는 언제든지 빼어서 휘두를 태세가 갖추어진 칼이 신중함의 칼집에 꽂혀있는 것과 같아야만 한다. 


그것은 당신을 보호하는 방패이다. 


육체적 허약함보다도 정신적 비겁함이 사람을 한층 더 저열하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우수한 능력은 구비했지만, 강인한 의지력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살다가 게으름 속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지혜로운 대자연은 꿀의 단맛과 침의 따금한 맛을 결합하여 꿀벌에게 주었다. 


이것은 매우 사려 깊은 조치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능력을 숨겨두라. 


주위 사람들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라. 


당신의 능력을 누구에게나 드러낼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사용하지는 말라. 


지식이든 힘이든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말라. 


매를 이용해서 새를 잡는 능숙한 사냥꾼은 새를 추격하는 데 꼭 필요한 숫자의 매만 공중으로 날려보낸다.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면, 내일은 드러내 보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언제나 숨겨 두고 있다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게 하라. 


날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당신에게 기대감을 품게 되고, 당신의 능력의 한계도 감추어진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어떤 요구를 거절해야 할 때, 가장 점잖게 거절하는 방법은 화제를 슬그머니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요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 척해서 거절할 수도 있다. 


이런 행동은 상대방의 요구를 당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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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할 때는 딱 잘라서 거절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상대방이 점차 실망을 느끼도록 하라. 


또한 재고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거절하지도 말라.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당신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거절당하는 상대방이 맛보는 쓴맛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가 당신에게 희망을 걸 여지를 남겨 두라. 


정중한 태도로 상대방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수락해 주지 않는 대신에 말이라도 친절하고 그럴듯하게 해 주라.


남의 요구를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말을 하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본 뒤에 그런 말을 하라.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어떤 일이든 제일 먼저 착수하는 사람은 훌륭하다. 


게다가 그 일을 성공시킨다면 두 배로 훌륭하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다면, 먼저 선수를 치는 사람이 유리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어떤 일을 시작했더라면 불사조와 같이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어떤 일을 시작한 사람만이 명성이라는 유산을 차지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장남에게 상속되고 남은 부스러기나 받는 동생들과 같다. 


먼저 시작한 사람을 모방하는 앵무새가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세상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는다. 


비범한 사람들은 남보다 뛰어나게 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항상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이유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영웅들의 이름이 열거된 황금의 책에 그들의 이름을 기입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창한 일을 두 번째 시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이 되기를 더 원한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떠한 것도 극단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중용에 모든 가치를 부여했다. 


옳은 것이라해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그것은 그른 것이 된다. 


오렌지에서 즙을 모조리 짜내고 나면, 그 오렌지는 맛이 써진다. 


어떤 것을 즐길 때에도 결코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 


지나치게 약삭빠른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암소의 젖을 지나치게 쥐어짜면 우유가 아니라 피가 나온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반성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자신을 알라. 


판단과 성향 면에서 당신의 소질과 능력을 파악하라. 


자신을 알지 못 하면 당신은 자신을 지배할 수 없다. 


얼굴을 보여 주는 거울은 있지만, 마음을 보여 주는 거울은 없다. 


그러므로 자신에 관한 주의 깊은 성찰을 마음을 보여 주는 거울로 삼으라. 


외모는 잊어버리고, 내면의 자질을 간직한 채 그것을 개선하고 완성시키라. 


일을 처리하기 위한 당신의 지식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용기를 발휘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 용기를 시험하라. 


당신의 발판은 튼튼하게 유지하고, 모든 일에 관해서 항상 명석하게 생각하라.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망상을 품지 않는 사람,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 그리고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라. 


실제로 그러한 인물이 되라. 


단순히 남의 눈에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데 그치지 말라. 


하물며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철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철학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중요시해 온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을 두려워하고, 
악의를 품은 사람을 혐오하며, 
오만한 사람을 경멸하고, 
바보를 모욕하며, 
괴짜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남의 존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중하라. 


그리고 남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도 남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당신을 도와주는 사물과 힘을 각각 두 가지씩 준비하라. 


그렇게 해서 당신의 삶을 이중으로 보호하라. 


사물이나 힘이 아무리 탁월한 것이라 해도 한 가지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두 가지씩 마련해 두어야 한다. 


특히 성공, 호의 또는 존경을 얻는데 필요한 바탕이나 수단은 반드시 두 가지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유한하고 세월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이러한 마음에 좌우되는 사물은 특히 변화가 심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변화와 유한성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인생의 법칙은 크게 도움이 되는 우수한 사물과 힘을 두 가지씩 비축해 두라는 것이다. 


대자연이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을 각각 두 개씩 마련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사물과 힘을 각각 두 가지씩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을 참아 주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크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참아 주어야 할 때가 많은데, 이것은 자제력을 기르기에 좋은 훈련이다. 


인내에서 평화가 나온다. 


인내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가장 값진 혜택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 세계로 도피하라. 


그 속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신에 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해도, 남들과 담을 쌓고 자아의 껍질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좋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상대방의 사람됨을 판단할 때 외모를 보고 판단을 그르치지 말라. 


이것은 가장 큰 잘못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가장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어떤 물건을 살 때도 그 품질보다 값에 속는 편이 더 낫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데, 이럴 때는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됨을 파악해야 한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물건에 관해서 아는 것과는 다르다.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아내는 일은 심오한 철학처럼 어렵다. 


책의 내용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관해서도 아주 깊이 연구해야만 한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는 절대로 경쟁하지 말라. 


그런 경쟁을 한다면 당신은 대등하지 못 한 조건에서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경쟁에 나선다. 


그는 수치감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례한 말과 행동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지 모두 동원한다. 


이처럼 위험 부담이 엄청난 경쟁에 당신의 소중한 명성을 내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얻었지만, 순식간에 잃을지도 모르는 명성이라면 더욱이나 안 된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십 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명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상대방의 명성이 동등한 것인지를 미리 저울질해 본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조심하면서 경쟁에 나선다. 


그런 다음에는 적절한 시기에 물러설 기회를 잡는 현명함이 발휘되도록, 또한 자신의 명성도 보호될 수 있도록 신중한 태도로 일에 착수한다. 


비록 그가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로는 스스로 위험에 몸을 던졌다가 잃은 명성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사람들을 너무 허물없이 대하지 말라. 


또한 사람들도 당신을 너무 친밀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라. 


지나치게 친밀한 사이가 되면 상대방에 대한 영향력도 줄어들고 따라서 존경도 받지 못하고 만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천박한 일반 대중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권위의 광채를 유지한다. 


신성한 것일수록 엄숙한 예식이 더욱 필요하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언제나 경멸감이 싹트게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자기 것을 많이 드러낼수록 더욱 불리해진다. 


웬만한 결점들은 감추어 두는 것이 현명한데, 그런 것마저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허물없이 친밀한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윗사람과의 경우는 위험하기 때문이고, 아랫사람과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천박한 일반 대중과 허물없이 지내는 관계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무례해진다. 


당신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자기들이 당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허물없이 친밀한 관계는 천박한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적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적에게 가르쳐 주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내리는 올바른 판단을 따르는 일이 절대로 없다. 


그렇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남들이 권하는 방법, 심지어 이미 사용해 본 방법도 맹종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다. 


무슨 일이든지 반대되는 두 가지 관점에서 검토해야만 한다. 


즉, 양쪽의 견지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할지 결단을 내리기가 힘든 경우에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성공의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하라.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유쾌한 일은 당신이 직접 하고, 불쾌한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라. 


전자는 남의 호감을 사는 방법이고, 후자는 남의 미움을 피하는 방법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남의 호의를 받기보다 자신이 남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그의 관대한 천성을 드러내는 특징이다. 


남에게 고통을 줄 때는 누구나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 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신도 고통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고통을 주지 않고 포상 또는 처벌의 수단만 동원하면 많은 사람들을 다스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상을 줄 때는 당신이 직접 주고, 처벌할 때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라. 


당신을 대신해서 불만,증오,비방의 표적이 될 다른 사람을 내세우라. 


군중의 격노는 개의 분노와 같기 때문이다. 


개는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채찍 자체가 자기에게 고통을 준다고 착각해서 그 채찍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것이다. 


채찍은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수단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사람 대신에 보복을 당해야 한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외국 제품은 무조건 좋게 보인다. 


언제,어떻게 외국으로 이주해야 좋을지 잘 판단하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경우에, 자기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에게 조국이란 언제나 계모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는 시기나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해주기는커녕 보잘것없는 초기 활동만 기억하고 있다. 


바늘이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갔을 때야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고, 채색된 유리 한 조각도 아주 먼 나라에서 건너온 경우에는 다이아몬드보다 비싸게 팔릴 수 있다. 


외국 물건은 무엇이든지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또는 성능이 우수한 완제품이기 때문에 한층 고급품으로 친다. 


고향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사람이 온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는 인물들이 된 경우를 본다. 


외국인들은 물론이고, 그의 조국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그를 존경한다. 


전자는 그들이 멀리서 왔기 때문에, 후자는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다. 


제대 위에 놓은 나무 조각상도 그것이 원래 정원에서 뒹굴던 나무토막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존경받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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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진 기술의 마지막 비법은 남에게 전수하지 말고 혼자만 간직하라. 


이것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위대한 스승들의 격언이다. 


스승은 제자들보다 항상 더 뛰어나야 하고, 스승의 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술은 교묘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가르칠 때는 자신의 지식의 샘에서 조금씩만 퍼서 나누어주어야지, 그 샘을 통째 내주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을 써야만 계속해서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계속 의존하는 것이다. 


남을 즐겁게 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은 상대방의 기대감을 더욱 부추기고 그들을 항상 능가하라는 것이다. 


밑천이 떨어지는 법이 없이 무엇인가 내줄 것이 항상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 


그것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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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털가죽으로 당신의 온몸을 쌀 수 없다면, 최소한 여우의 털가죽이라도 이용하라.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은 결코 명성을 잃지 않는다.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으면 영리한 꾀를 이용하라. 


용기라고 하는 군주의 큰길과 교활함이라는 샛길 가운데서 그 어느 쪽이든 선택하라. 


힘보다는 술수가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교활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이 싸울 때도 교활한 쪽이 이긴 경우가 더 많다. 


어떤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는 그것을 무시해 버리면 된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당신의 삶을 지혜롭게 설계하라. 


우연에 맡기지 말고, 현명함과 예견의 힘을 동원해서 하라. 


도중에 쉴 여관이 하나도 없는 긴 여행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이 없는 인생은 지루하기만 하다. 


이런 인생에 다양한 지식은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고상한 삶의 여로에서 첫날은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얻고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리를 담은 좋은 책들을 읽으라. 


좋은 책은 우리를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둘쨋날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 세상의 좋은 것을 모두 보고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을 어느 한 나라에서만 찾아볼 수는 없다. 


우주의 아버지는 모두에게 선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으며, 때로는 가장 풍부한 유산을 가장 추하게 생긴 사람에게 주었다. 


셋쨋날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보내야 한다. 


가장 큰 행복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비둘기처럼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비둘기처럼 정직하게, 때로는 뱀처럼 교활하게 행동하라. 


정직한 사람을 속이기는 누워서 떡 먹기처럼 아주 쉬운 일이다.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쉽게 믿고, 속임수를 쓰지 않는 사람은 남에 대한 신뢰가 강한 법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속기도 하지만, 사람이 너무 착하기만 해서 속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속지 않고 속임수의 피해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에게 속는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비싼 대가를 치르고 그 방법을 체득한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을 관찰하면서 그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교활한 사람들이 함정을 많이 팔수록 현명한 사람들은 그만큼 더 의심을 많이 품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속을 만큼 착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뱀의 교활함과 비둘기의 선량함을 동시에 갖추라. 


그러나 괴물이 되지는 말고, 천재가 되라.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영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찾을 때, 그들이 찾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를 통해서 그들이 얻을 이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당신의 기질을 쇄신할 줄 알라. 


사람의 기질은 7년마다 바뀐다고 한다. 


당신의 취향이 더 좋게, 더 고상하게 향상되도록 기질을 바꾸라. 
태어난 지 7년이 지나면 사람은 이성을 갖춘다. 


그 후 5년마다 탁월한 재능을 새로 추가시키라. 


이렇게 추가되는 재능들이 이성을 돕도록 감시하고, 또한 다른 재능들도 발전시키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지위나 직업이 바뀌면 그의 행동양식도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양식이 완전히 변하기 전까지는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사람은 20세에 공작, 30세에 사자, 40세에 낙타, 50세에 뱀, 60세에 개, 70세에 원숭이가 되고, 80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천재는 풍부한 창의력, 심원한 지성, 그리고 유쾌하고 세련된 취향이라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이것들은 하늘이 천재에게 내려 준 가장 탁월한 선물이다. 


생각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즉 좋은 것에 대한 이해는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올바른 생각은 건전한 판단력을 외면하지 않는다. 


판단력을 외면하면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다. 


올바른 생각은 합리적인 본성에서 나온다. 


20세에는 의지가, 30세에는 지성이, 40세에는 판단력이 사람을 지배한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찬란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다. 


그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을 항상 고안해 낸다. 


어떤 능력은 좋은 결과를 많이 거둔다. 


풍성한 행복을 거두는 것이다. 


한편, 좋은 취향은 인생 전체를 멋지고 풍요롭게 만든다.

#세상의_지혜 #발타사르_그라시안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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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_노래 #라마나_마하리쉬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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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의 모든 남녀의 사랑은 아무리 별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남녀간의 사랑은 예외 없이 이 본능이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뿐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소설이나 희곡 작품에도 남녀간의 사랑은 자기 보존의 본능이 성욕 속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욕은 모든 행위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성욕은 젊은 시기에 가장 활발하며 정력과 생각의 대부분을 강제로 동원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 힘은 모든 노력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도 한다. 


성욕은 자기가 하는 일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쇼펜하우어_인생론_에세이_사랑은_없다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그렇다면 성욕은 왜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가? 


그 해답은 너무 간단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꽃을 찾기 때문이다. 


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사랑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장 엄숙한 것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 최대의 이슈이다. 


그 이유는 사랑을 통해 자신들의 후계 세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가 가진 종족 보존 본능의 행위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은_없다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따라서 자신의 연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찬미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 해도 그 최종 목적은 오직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사명감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정신적 사랑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육체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과, 아무리 둘이 사랑을 확신하고 있어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_없다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랑에서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이 없다면 어느 남녀가 그토록 서로 만나려고 애쓰겠는가? 


남녀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멋진 옷을 차려입고, 수없이 거울을 보는 그 처절한 노력이 성 충동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하겠는가? 


인간 개체가 이제 이 에로스적 환상의 묘약에 속아서 그것을 행복과 만족으로 여기고 열심히 이기적인 집착에 매달리는 동안, 신이 혹은 자연이 이루려는 인류 종족 유지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만 사실상 인간은 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은_없다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만일 인간에게 성욕이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과 만족에만 있다면 왜 인간은 상대방 이성을 구하는데 그렇게 까다롭겠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키가 커야 하고 성격은 어떻고 용모는 어떻고 건강과 가문과 재산을 따지는가? 


성적 욕구가 쾌락에 그친다면 상대가 아무 여자나 아무 남자라도 그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들은 어떤가? 


그들도 성적 만족을 위해 그렇게 까다롭게 짝을 고르는가? 


우리가 동물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내면에 이성 선택에 어떤 기준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만큼 짝을 고르는 데 그토록 진지한 선택과 노력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없이 닥치는 위험과 재난에서도 불구가 되지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_없다 #아르투어_쇼펜하우어


인간의 본성은 인간을 만든 신의 뿌리 속에 있으므로 개인의 고통이란 이 지상에 인류의 존속을 원하는 신의 의지보다 중요하지 않다. 


옛 선인들도 이 같은 진리를 이미 알고 인간을 지배하는 신을 잔인하고 사나운 폭군처럼 그렸다. 


이제 인간은 신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상적인 여인 아리아드네를 손에 넣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욕정을 만족시킨 다음 곧 그녀를 버린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일 페트라르카가 사랑에 만족했던들 그는 마치 둥지에 알을 깐 새가 울지 않는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내 글을 읽고 현재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실망하거나 반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사랑을 하는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되면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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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또 다른 어떤 불행한 사람이 똑같은 꽃을 보고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은 꽃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무관심한 사람은 그 꽃을 그저 무미건조학 바라볼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라는 외적 조건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의 눈으로 꽃을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며 행복이나 불행 역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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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자기를 때리면 금세 적의를 품는다. 


사람도 똑같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멸시를 받으면 불쾌해지고 적의를 품는다. 


이렇게 인간의 명예욕은 항상 제3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칭찬이나 찬사를 받거나 모욕과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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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에서 떠나 현재의 물질적·정신적 가치의 10분의 1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예을 들면 자기 능력에 버거운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남의 눈 때문이며, 지나치게 큰 집에서 사는 것도 남들이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려고 힘들게 사는 것이다. 


자기 수입에 비해 너무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차를 타면서 매달 할부금에 시달리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 능력에 과분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처분한다면 훨씬 만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불행은 대부분 남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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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고뇌와 번민,불안과 초조의 80~90%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다. 


또한 우리들의 질투나 증오심도 대체로 같은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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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은 주로 안정된 기분과 흐뭇한 만족감을 뜻한다. 


지금의 기분이나 상태가 좀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가 행복이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순간 안정된 기분은 흐트러지고 불만감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 본위의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 허영심을 줄이면 현재의 불행은 50분의 1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 허영심을 없애는 것은 우리들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뽑아버리는 셈이지만 그것은 선천적인 고질병이어서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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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 가지 유전병은 명예욕과 허영심과 자부심이다. 


그 중 허영심과 자부심은 차이가 있다. 


자부심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에 대해 그런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부심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은 말이 적지만 허영심은 말이 많다. 


자부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남이 자기를 존중케 하기 위해 많은 설득과 위장이 필요하고 때로는 위압도 필요하게 된다. 


참된 자부심은 자신의 우수한 가치에 대한 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만 허영심은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과대 평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결국은 밑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입이 가벼운 사람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은 말이 적은 사람이 말이 많은 사람보다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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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잃은 재물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한 번 잃은 명예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명예란 개인이 지닌 뛰어난 특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성품, 즉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품을 통해서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명예는 소극적이고, 명성은 적극적이다. 


명예는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명성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특질이나 재질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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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생존을 포기하려면,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커다란 고뇌에 의해 절망적인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치며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절망의 절벽에 섰을 때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제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높은 영혼의 정신적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만이 우리가 말하는 해탈,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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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철학을 연구하고 신앙을 가지려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고 고통이 없다면 아무도 이 세상이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불멸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만일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입증된다면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곧 식어버릴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영원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도 신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유물론이나 회의적인 세계관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화를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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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국가 발전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정치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의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통치자가 전제 정치를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명하고 청렴한 통치자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려있다. 


더럽고 추한 정치 지도자가 다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인물을 골라 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탁월한 통치자를 배출하려면 성품이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의 결합보다 더 실질적인 해결책은 없다. 


이 제안이 나의 유토피아,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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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질병과 재난과 전쟁의 재앙이나 슬픔과 고통이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평화나 행복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불과하다. 


이제 곧 고통과의 투쟁과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날 때까지는 끝없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고통과의 끝없는 전쟁의 계속이며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극히 순식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통과 맞설 무기를 든 채 끝내는 죽어간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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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애의 초반이나 전반부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에 대한 큰 갈망과 희망과 포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사랑이나 행복이나 야망이 한낱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의 후반부에서도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 했다면 그는 여전히 생의 전반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살기는 바라지도 않아.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이미 생의 후반부에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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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육체의 생리적인 현상은 물리학적으로는 유예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들의 정신 활동은 밤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물리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육체나 정신이나 죽음에게 승리를 안겨줄 뿐이다. 


삶의 주인은 결국 죽음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우리를 삼켜버리기 전에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한 순간이다. 


우리는 늘 삶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의지와 욕구를 불어넣고 투지를 불태우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비누 방울을 갖고 노는 것과 같다. 


비누 방울이 끝내는 터질 줄 뻔히 알면서도 숨을 불어넣어 크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애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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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내일은 좀더 나아지겠지, 아니면 내년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겠지’ 하는 기대 속에 살다가 별 소득 없이 세월을 다 보낸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 후회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생존 자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인간은 늘 희망에 속아서 죽음과 씨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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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미궁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울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죽음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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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 때 성욕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충동과 격정, 무서운 광기 등 저 악마적 사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물론 청년기에는 그런 폭풍 같은 긴장의 시간들이며 우울함이나 비애가 깃들어 있어야 하고 노년기에는 평온하고 쾌활한 기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청년기에는 악마의 지배 밑에서 강제 노동을 감수해야 하므로 자유로운 시간이 쉽게 허락되지 않지만, 성욕이 소멸된 후에는 생명의 핵이 소진되고 인간은 껍질만 남은 인형처럼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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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의 우파니샤드 경전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수명이 100세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이전에 병으로 죽게 된다. 


따라서 나이 90이 되어 아무 질병도 없이 졸도나 경련도 없이 숨도 헐떡이지 않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잠자는 듯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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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를 느끼지만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위대성을 더 뚜렷이 느끼게 된다. 


따라서 뛰어난 사람들은 고독해지거나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자기를 깨닫게 된다. 


또한 정신적 고독과 함께 육체적인 고독을 동시에 갖추었을 때 비로소 행복도 충만해진다. 


정신적인 고독만 있고, 육체적인 고독이 없을 경우에는 늘 자기와는 동떨어진 어중이떠중이들과 만나 자유와 마음의 안정을 빼앗기고 그 대가는 전혀 얻지 못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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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 한 것을 보면 ‘저것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갖지 못 한 데서 오는 괴로움’, 즉 갖고 싶은 소유욕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라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물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해 보라는 뜻이다. 


남의 좋은 집을 보고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런 집도 없다면 어디서 살았을까.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상실을 가정해 보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까 본 멋진 집보다 내가 사는 초라한 집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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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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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주로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주로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공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최대한의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주로 여자들이 선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매를 가꾸고 맵시 있는 옷으로 치장하여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매력적을 만드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남녀가 모두 사용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예절이나 대화를 유쾌하게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계발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며,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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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배후에 있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가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할 만한-또는 사랑 받을 만한-적당한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할 대상'의 선택과 관련하여 20세기에 일어난 큰 변화를 들 수 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많은 전통적인 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자발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결혼은 쌍방의 가문에 의해서든 혹은 결혼 중매인을 통해서든, 또는 그런 중매자가 없어도 관습에 의해 성립되었다. 


결혼은 사회적 고려의 토대 위에서 결정되었으며, 사랑은 결혼을 한 후에야 발전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구세계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최근 몇 세대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에서도 이런 관습적인 사고방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자유라는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기능'의 중요성보다 '대상'의 중요성을 과장하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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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과 상호 유리한 교환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의 진열장을 바라보고 스릴을 느낀다든지 현금이나 할부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또는 그녀)는 사람까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여자-또는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남자-는 바로 그들이 구하고 있는 상품인 것이다. 


‘매력적'이라는 것은 보통 개성의 시장에서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멋진 상품을 의미한다.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 시대의 유행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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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상품처럼 대하는 것뿐이다. 


가령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갔다고 하자. 


대상은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이어야 하고, 또 동시에 대상자도 나의 공개된, 또는 숨겨진 자산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나를 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흔히 부동산을 구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는 숨겨져 있는 잠재력이 이러한 매매계약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이 만연되어서 물질적 성공이 높게 평가되는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교환방식과 동일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해도 그다지 놀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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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가정으로 이끄는 세 번째 잘못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최초의 경험을,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 

또는 보다 적절히 표현하면 사랑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혼돈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우리 모두가 흔히 그러하듯이, 지금까지 서로 모르고 지내던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가깝게 느낀다든지 서로 일체감을 느낀다면, 이 합일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흥분된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소외되고 고독하게 지내오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기적과 같은 경험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친밀의 기적은 흔히 성적인 매력과 성의 성취에 의해 시작될 때 더욱 촉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그것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두 사람이 점차 서로를 잘 알게 될수록 친밀감은 그 기적적이었던 감정을 점차 잃어가고 마침내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실망과 권태를 느끼게 되어 최초의 흥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알지 못 한다. 


실제로 그들은 이렇게 정신나간 상태-즉 서로에게 '미쳐버린’ 상태-를 그들의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는 얼마나 고독했던가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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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여 고독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 하고 끝내 실패할 때 정신이상이 생긴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심은 분리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철수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세계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나 모든 문화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이 분리 상태를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개체적인 생명을 초월하여 합일 상태를 발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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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감을 해결하지 못 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의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것은 분리감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결과적으로 전보다 더 강한 분리감을 자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 외에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전혀 좁혀주지 못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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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적인 결합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의 능동적인 힘이며, 


그 힘은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파괴시키는 힘이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그에게 고립과 고독감을 극복하게 하며, 


그를 그 자신이게 하며, 


그의 통합성을 보유하게 한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또 둘로 남는다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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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성격의 사람에게 준다는 것의 의미는 이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주는 행동 바로 그것에서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부와, 자신의 역량을 경험한다. 


이렇게 과시된 생명력과 잠재력의 경험은 스스로를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 


그는 그 자신이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며 살아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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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성적인 기능의 최고 절정은 준다는 행동에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성기를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그는 여성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그가 성적인 능력이 있는 한 그것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줄 수 없다면 그는 성불구자이다. 



여성의 경우도 약간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여성도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성은 자신의 여성의 중심의 문을 열며, 받는 행위 속에서 주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주는 행위를 못 하고 오직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 환자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준다는 행동은 애인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능으로 다시 발생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주며, 

또 유아에게 자신의 모유를 주며,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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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의 영역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는 자기 자신을 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신 안에 살아있는 것을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이다. 


그는 타인에게 그의 기쁨을, 그의 흥미를, 그의 이해를, 그의 지식을, 그의 유머를, 그의 슬픔을, 즉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풍족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생명감을 고양시킴으로써 타인의 생명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타인의 삶에 어떤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지 않을 수 없으며, 상대방의 삶에 준 이것은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다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두 사람이 생에 대하여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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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의 경우에만 준다는 것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배우는 점이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서 자극되며,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하여 자신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서로 관계되고 있다면,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은 주로 생산적인 오리엔테이션의 달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사람은 의존성과 나르시시즘적(자기도취적)인 전능(全能), 타인을 착취하고 싶은 욕구 혹은 저장하고 싶은 욕구 등을 극복한다. 


또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며, 자신의 목표 달성에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그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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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랑의 제3 구성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어쩌면 책임은 지배 또는 소유욕으로 쉽게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아니라 그 어원(語源)을 따른다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존경이란 타인이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은 착취의 부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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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이라는 것은 


오직 내가 독립을 성취했을 때만, 


또한 내가 똑바로 서서 부축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을 때만, 


또 어떤 사람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의 기본 위에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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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고 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합이라는 체험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에서의 지식은 그것이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는 완전한 지식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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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책임·존경, 그리고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것들은 성숙한 사람, 즉 그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노력한 것만큼만 기대하는, 또 전지전능한 자아도취적인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하게 생산적인 활동만이 줄 수 있는 내적인 힘에 근거한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태도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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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사랑은 ‘나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고, 


미성숙의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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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특정한 인간과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한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세계에 대한 한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이나 확대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동일한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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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활동이며 정신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이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 스스로 뒤따라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지만 그 기술을 배우는 대신 알맞은 대상을 기다리며, 

그 대상을 발견하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와 비교될 수 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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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의 태도는 여성은 물론 동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본능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본능적 요인이 아무리 크게 작용하더라도 이 모성애의 원인에는 각별히 인간적, 심리학적 요인들이 있다. 


이 요인들 중의 하나는 모성애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갓난아이를 아직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한 그녀의 사랑과 행복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일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어머니의 권력욕 혹은 소유욕에서 발견된다. 


완전히 어머니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어린아이는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어머니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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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사랑에 있어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분리를 허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심, 즉 모든 것을 주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된다.


많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모성애라는 과업에 실패하는 것도 역시 이 단계에서이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라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애정’ 깊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여성,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을 느끼는 여성, 

그녀 자신의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만이 

분리의 과정에서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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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망은 융합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긴장의 제거가 아니다. 


성적 욕망은 고독감의 불안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또한 정복욕이나 정복당하려는 욕구에 의해, 

공허함에 의해, 

해치거나 파괴하려는 욕구에 의해 자극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랑에 의해서도 자극될 수 있다. 


성적 욕망은, 사랑은 하나뿐이라는 열정적인 감정과도 쉽게 융합되며, 또 그것에 의해 자극받는 것으로 보인다. 


성적 욕망은 사랑의 관념과 결합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서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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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적 결합의 욕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는 탐욕을 동반하지 않으며,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나 정복당하려는 욕망 또한 없다. 


오직 부드러운 애정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육체적 결합의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신제적(酒神祭的)인 일시적인 의미 이상으로 결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는 결합의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사랑 없는 결합은 이방인들을 이전과 같이 남남으로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 그것은 그들을 서로 부끄럽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남남임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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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호,존경,책임,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뿌리박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향한 능동적인 갈망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힘을 실현하고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 포함된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질의 구현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지향되고 있다.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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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역시 그 자신을 사랑한다. 


그가 오직 타인들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명확히 배제하고 있는 이기심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기적인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원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 의해서만 기쁨을 느낀다. 


외부세계는 그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점에서만 관찰된다. 


즉 그는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들의 존엄과 통합성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오직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유용성에 따라 판단한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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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나 라디오 청취, 흡연, 혹은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능력은 바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만약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 혹은 그녀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홀로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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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객관적이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겸손의 태도를 몸에 지니고, 또 그가 어린아이로서 갖는 전지전능의 꿈속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적인 상대적 부재에 의존하며, 또 겸손과 객관성, 그리고 이성의 발전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몰두되어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낯선 사람에게 객관적일 수 없다면 내 가족에게도 진실하게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 역(逆)도 성립한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민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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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용기의 실천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언제 어디서 신념을 잃게 되는가에 주의하며, 


이 신념의 상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하게 행동하고 또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신념의 배반이 사람을 얼마나 약화시키며, 

또 약화될수록 새로운 배반이 더욱 많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의식적으로는 사랑받지 못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의_기술 #에리히_프롬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라는 희망을 갖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념의 행동이다. 


신념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없다. 


신념의 실천에 관해 더이상 말할 것이 있을까?

#사랑의_기술 #에리히_프롬


우리 사회는 경영 관료들에 의해,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즉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그들 스스로의 목적으로서 더 많이 소비하는 데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표에 예속되며, 수단은 목적으로 되어버렸다. 


즉 인간은 자신의 특수한 인간적 자질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잘 먹고 잘 입는 기계적인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최고의 자리에 놓여져야 한다. 


경제적 기계는 인간을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인간이 기계를 돕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갖기 보다는 오히려 경험을 공유하고, 일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인, 사랑하는 본성이 인간의 사회적 실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것과 일체가 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사랑의_기술 #에리히_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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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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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왕조들은 정교政敎가 같지 않으니 어느 조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까? 


제왕은 과거의 것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예를 따라야 합니까? 


복희씨와 신농씨는 백성들을 교화하되 벌하여 죽이지 않았고, 

황제와 요순은 벌하여 죽이는 일은 했으되 과도하게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에 이르러 각기 시세에 맞춰 법을 만들고, 사리에 근거해 예를 정했습니다. 


예와 법은 시세에 맞춰 확정하고, 
제도와 명령은 각기 관련 사안에 부합하고, 
무기와 정비는 각기 쓰기에 편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데는 반드시 옛날을 본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왕업은 옛 법을 준수하지 않았기에 흥성할 수 있었고, 


하나라와 은나라의 패망은 예제를 바꾸지 않았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옛 법을 반대하는 자를 반드시 비난할 것도 없고, 


옛 예제를 준수하는 자를 크게 잘 한다고 칭찬할 것도 없습니다.

#상군서 #상앙


고관은 녹봉이 많은 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빈둥대며 놀고먹는 자가 많으면 농사를 해치게 된다. 


놀고먹는 자의 숫자에 따라 부세를 징수하고, 부역을 가중시킨다. 


그러면 고관세족은 식객을 많이 거둘 수 없고, 간사한 재주로 이리저리 유세하면서 게으름 피는 자는 먹고살 길이 없게 된다. 


백성이 먹고살 길이 없게 되면 반드시 농사를 짓는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면 황무지는 반드시 개간된다.

#상군서 #상앙


무릇 군주가 백성을 격려하는 수단은 관작官爵이고, 


나라가 흥성하는 길은 농사를 지으며 싸우는 농전農戰이다. 


지금 백성들이 관직과 작위를 얻는 것이 모두 농전의 실적에 근거하지 않고 간교한 언변인 교언巧言과 유가 학설처럼 공허한 도리인 허도虛道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백성에 교언허도를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백성에게 교언허도를 권하면 나라는 반드시 힘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지면 나라는 반드시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치국의 요체를 알고 있다.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농사짓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마음이 농사짓는 쪽으로 되돌아 오면 백성은 순박해져 바로잡을 수 있다. 


성실한 까닭에 부리기 쉽고, 유사시 그들을 앞세워 적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 


백성이 농전에 전적으로 매진하면 상벌을 이용해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와 싸울 때 활용할 수 있다. 


백성이 군주를 친근하게 여기고 법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사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쓰일 수 없는 것은 

간교한 언변으로 유세하는 자들이 군주를 모시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고, 


상인이 집안을 부유하게 할 수 있고, 


수공업자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이들 3가지 직업의 쉽고도 유익한 점을 보면 반드시 농사를 피한다.

#상군서 #상앙


나라가 1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0년 동안 강성하고, 


10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백 년 동안 강성하고, 


1백 년 동안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면 1천 년 동안 강성한다. 


1천 년 동안 강성한 나라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국王國이 된다. 


군주는 상벌을 제정해 백성들이 농전 한 가지만 전념하도록 하는 가르침을 널리 펴야 한다. 


군주의 가르침에 일관성이 있고 정사 또한 커다란 성과를 거두는 배경이다.

#상군서 #상앙


나라가 부유한데도 국고를 계속 채우면서 부유한 백성의 부를 덜어내는 이른바 빈치貧治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이는 기존의 부에 새로운 부를 보태는 중부重富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부'를 실현하는 나라는 강해진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한데도 국고를 비우면서 부유한 백성을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부치富治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이는 빈궁에 빈궁을 보태는 중빈重貧을 자초하는 것이다. 


'중빈'을 자초하는 나라는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이들 3가지 직종이 만들어내는 일 가운데 나라를 좀먹는 6가지 일인 이른바 6슬六蝨이 있다. 


농업을 해치는 것은 연말에 여분의 양식을 마련한 후 손님을 초대하는 세찬歲饌과 

둘째 진탕 먹고 마시는 식탐食貪이다. 


상업을 해치는 것은 화려하게 치장하는 미장美裝과 

진기한 물건을 추구하는 호기好奇이다. 


관직을 해치는 것은 소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약지弱志와 

복지부동의 자세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관행慣行이 그것이다. 


나라를 좀먹는 이들 ‘6슬'이 3가지 직종에 달라붙어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쇠약해진다.

#상군서 #상앙


벌을 무겁게 하고 상을 가볍게 하는 중벌경상重罰輕賞은 군주가 백성을 아끼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상을 남발하고 법을 가볍게 하는 다상경벌多賞輕罰은 군주가 백성을 아끼는게 아니다. 


그리하면 백성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흥성한 나라가 형벌을 시행하면 백성은 군주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군주를 경외하고, 포상을 시행하면 군주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군주를 경애한다. 


그러나 나라가 실력도 없으면서 교지巧智를 즐겨 사용하면 반드시 멸망한다. 


겁이 많은 백성을 형벌로 부리면 반드시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을 포상으로 부리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겁이 많은 백성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이 목숨을 바쳐 나라에 적수가 없게 되면 그 나라는 강해진다. 


강하면 반드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자가 된다. 


가난한 자를 형벌로 부리면 부유해지고, 부유한 자를 포상으로 부리면 부가 덜어진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고 부유한 자의 부를 덜어낼 수 있으면 나라는 국력이 쌓이고, 국력이 쌓인 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는 왕자가 된다. 



왕자가 다스리는 왕국王國은 형벌이 9할이고 포상이 1할이다. 


강자가 다스리는 강국彊國은 형벌이 7할이고 포상이 3할이다.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자가 다스리는 삭국削國은 형벌이 5할이고 포상이 5할이다.

#상군서 #상앙


형벌을 사용해 형벌을 없애는 이른바 이형거형以刑去刑을 행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형벌을 사용해 형벌을 자초하는 이형치형以刑致刑을 행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말하기를, 

“형벌을 시행할 때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면 형벌이 사라지고, 일이 이뤄지고, 나라는 강해진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면 형벌이 계속 사용되고, 사달이 나고, 나라는 쇠약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형벌은 국력은 낳고, 

국력은 강대함을 낳고, 

강대함은 위세를 낳고, 

위세는 은혜를 낳는다. 


은혜는 국력에서 나오는 셈이다. 


국력을 숭상해야 전쟁에서 용감하게 적과 싸울 수 있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지혜와 책략이 백출하게 된다.

#상군서 #상앙


강한 나라는 13가지 종류의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나라 안에 있는 식량창고의 수, 

총인구의 수, 

장년의 남자 수, 

장년의 여자 수, 

노인의 수, 

신체 허약한 사람의 수, 

관원의 수, 

선비의 수, 

언변으로 먹고사는 자의 수, 

본업인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의 수, 

말의 수, 

소의 수, 

꼴의 수가 그것이다. 


강국을 만들고자 하면서 자기 나라의 이들 13가지 숫자를 알지 못 하면 설령 국토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을지라도 나라는 갈수록 쇠약해지고, 영토 또한 깎인다.

#상군서 #상앙


백성이 용감하면 그들이 바라는 작록으로 그 용기를 포상하고, 


백성이 겁을 내면 그들이 꺼리는 형벌로 그것을 제거한다. 


겁 많은 백성은 형벌을 사용해 부리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은 상을 이용해 부리면 목숨을 바친다. 


겁 많은 백성이 용감해지고 용감한 백성이 목숨을 바치면 국가는 적수가 없어지고 반드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국이 된다.

#상군서 #상앙


『시』와 『서』를 익히고 담론하는 선비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외지로 나가고, 군주를 가벼이 여긴다. 


숨어사는 선비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조정에서 멀어지고, 군주를 비방한다. 


용맹을 떨치는 무사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심지가 강해지고, 금령을 가벼이 여긴다. 


수공업자를 발탁하면 백성들은 경솔해지고, 이주하는 것을 쉽게 여긴다. 


상인이 손쉬운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지하며, 군주를 비난한다. 


이들 5부류의 사람들이 나라의 등용 대상이 되면 농지는 황폐해지고, 병력은 쇠약해진다. 


명리를 얻는 자들을 보면 


담론을 즐기는 선비는 입, 


숨어 사는 선비는 지조, 


용감한 무사는 용기, 


수공업자는 손, 


상인은 몸뚱이에 기본 자산이 있다. 


이들에게 천하는 바로 자신의 집과 같다. 


몸에 기본 자산을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몸 자체가 기본 자산인 까닭에 외지의 그 어떤 곳에 갈지라도 세력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 


이처럼 몸에 기본 자산을 달고 다니며 천하를 집으로 삼는 자는 요순도 다루기 힘들어 했다. 


탕왕과 무왕은 그런 행위를 금한 까닭에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성인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여기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는 것을 이긴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으로 쉽게 여기는 것을 이겼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옛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오늘의 것을 고수하지 않는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오늘의 것을 고수하면 면면히 흘러가는 시대의 추세와 단절된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모범으로 삼지 않았고, 


하나라는 순임금이 다스린 우虞나라를 좇지 않았다.

#상군서 #상앙


무릇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군주가 비열한 행위를 방임하기 때문이다. 


법령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군주가 혼란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명군은 비열한 행위를 방임하지 않고 혼란을 조장하지 않는다. 


권력과 위엄을 장악해 보위를 지키고 법령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는 까닭에 간사한 짓을 잘 알 수 있고, 
관원들 내에도 간사한 짓이 빚어지지 않는다. 


또한 상벌이 엄정히 시행되고, 
생산되는 기물과 용구 또한 정해진 법도에 맞는다. 


나라의 제도가 분명하고, 
민력이 충분히 사용되고, 
군주가 내리는 작위가 존귀하고, 
여러 부류의 인재가 두루 활용되는 배경이다. 


#상군서 #상앙


군사를 일으켜 재능있는 사람이 절로 용맹하게 만든다는 것은 논공論功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논공이 분명하면 백성들이 전력을 다하고, 백성이 전력을 다하면 재능 있는 사람이 절로 용맹해진다. 


행상行賞을 통해 군사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은 작록의 수여를 뜻한다. 


작록은 군사 운용에서 매우 실효적인 것이다. 


군주가 작록을 수여할 때는 공정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면 나라는 날로 강해지고, 그렇지 못 하면 나라는 날로 쇠약해진다. 


작록을 수여할 때 적용하는 이 원칙은 국가존망의 계기인 존망지기存亡之機에 해당한다. 


대개 영토가 깎이는 나라와 망국의 군주는 작록을 포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작록을 수여하는 원칙이 크게 잘못됐다. 


3왕과 춘추오패는 군가존망의 계기로 오직 작록만 사용했지만 다른 군주들보다 1만 배의 공적을 이뤘다. 


작록을 포상하는 원칙이 공정했기 때문이다. 


명군이 신하를 부릴 때는 반드시 그들의 노고에 따라 임용하고 전공戰功에 따라 포상한다. 


전공에 따라 포상하는 원칙이 명확하면 백성들은 다퉈 전공을 세우고자 한다.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이 전심전력으로 다퉈 전공을 세우고자 하면 그 군대는 반드시 강해진다.

#상군서 #상앙


당초 지위가 같던 사람이 상대를 노비로 부리게 되는 것은 빈부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당초 재력이 같던 나라가 상대국을 합병하는 것은 강약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똑같이 영토를 보유해 군주 노릇을 하지만 어떤 자는 강하고 어떤 자는 약하다. 


이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차이로 인한 것이다. 


만일 치국과 처세의 도를 터득하면 사방 1리의 좁은 땅일지라도 몸을 맡길 수 있고, 재능 있는 선비와 일반 백성을 불러올 수 있다. 


심지어 구차하게 저잣거리에서 몸을 맡길지라도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상군서 #상앙


명군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것이다.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 작위를 수여하면 그들을 영예롭게 만들고 높은 지위에 앉히는 셈이 된다. 


백성들은 작위가 영예롭지 않으면 백성들은 작위 수여를 간절히 바라지 않고, 작위가 높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게 된다. 


작위가 쉽게 얻어지면 백성들은 군주가 내리는 작위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작록의 포상이 정당한 경로를 거치지 않으면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작위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좋아하고 싫어하는 호오好惡가 있다. 


백성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이유다. 


군주는 백성들의 ‘호오'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들의 '호오'는 상벌의 기초가 된다. 


무릇 인정人情이란 작록을 좋아하고 형벌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군주는 작록과 형벌 두 가지를 설치한 뒤 민지民志를 통제하고 민원民願을 이루도록 격려해야 한다. 


백성들이 힘을 다하면 작위가 따르고, 전공을 세우면 포상이 따드도록 한다.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런 포상의 원칙을 마치 밝은 해와 달처럼 신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 군사는 곧 천하무적이 된다.

#상군서 #상앙


3군의 각 부대가 서로 왕래하지 못 하도록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 


장년의 남자가 장년의 여자 부대를 왕래하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이내 간사한 자가 함부로 음란한 짓을 꾀하게 된다. 


이러면 나라가 패망한다. 


남녀가 같이 있기를 좋아하면 그들은 이른 시일 내에 전투가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용감한 병사조차 싸우지 않게 된다. 


장년의 남자와 장년의 여자가 노약자 부대를 왕래하면 늙은 병사는 장년의 남녀를 슬프게 하고, 
허약한 병사는 건장한 병사를 연민에 빠지게 만든다. 


슬퍼하고 연민하는 비련지심悲憐之心이 있으면 용감한 병사조차 싸우려던 생각을 바꾸고, 
겁이 많은 병사는 아예 싸우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3군이 서로 다른 부대를 왕래하지 못 하도록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어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상군서 #상앙


무릇 포상은 격려를 위한 문치文治의 수단이고, 


형벌은 간사한 짓을 금하기 위한 무치武治의 수단이다. 


문치와 무치는 법치法治의 요체이다. 


명군은 법을 믿고 사용한다. 


명군이 남에게 가려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명明, 


기만을 당하지 않는 것을 찰察이라고 한다. 


그래서 상은 후하면서 신뢰성이 있어야 하고, 

형벌은 엄중하면서도 반드시 실시되어야 한다. 


포상할 때 관계가 소원한 사람들을 빠뜨리지 않는 부실소원不失疏遠을 행하고, 


형벌을 내릴 때 친근한 사람을 피하지 않는 불위친근不違親近을 행해야 한다. 


신하가 군주를 덮어 가리지 않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속이지 않는 이유다.

#상군서 #상앙


세상의 위정자는 대부분 법을 버리고 사사로운 의론을 신임한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이유다. 


옛 제왕이 무게를 재는 저울을 제정하고, 길이를 재는 자를 확립했다. 


오늘날에도 이를 본받는 것은 그 표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저울을 버려둔 채 무게를 가늠하고 자를 버려둔 채 길이을 추측하는 것은 설령 정확히 알아맞힐지라도 상인이 취하지 않는다. 


늘 정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나라의 저울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도를 어기고 사사로운 의론을 신임하는 것은 일의 유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을 판단기준으로 사용치 않고도 능히 지혜롭고, 유능하고, 현명하고, 불초한 자를 정확히 구분해 평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요임금뿐이다. 


세상의 군주가 모두 요임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상군서 #상앙


속담에 이르기를, “좀벌레가 많으면 나무가 꺾이고, 틈이 크면 담이 무너진다"고 했다. 


대신들이 사리를 다투고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백성은 군주로부터 떠나게 된다. 


백성이 군주를 떠나는 것이 나라의 ‘틈'이다. 


녹을 받아먹는 관원이 아랫사람들의 사정은 덮어두고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 백성들의 '좀벌레'이다. 


'틈'과 '좀벌레'가 생기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는 천하에 극히 드물다. 


명군은 법을 믿고 사용하며 사익을 제거하는 까닭에 그 나라에는 '틈'과 '좀벌레'가 없다.

#상군서 #상앙


성인은 나라를 다스릴 때 포상을 통일시키고, 형벌을 통일시키고, 교화를 통일시켰다. 


포상을 전공 한 가지에서만 나오도록 통일하면 군대는 천하무적이 된다. 


형벌을 통일하면 군주의 명령이 철저히 시행된다. 


교화를 통일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믿고 따른다. 


공명公明한 포상은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엄명嚴明한 형벌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간명簡明한 교화는 백성들의 풍속을 억지로 바꾸지 않는다. 


백성들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까닭에 나라에는 기이한 풍속이 없다. 


공명한 포상이 더욱 발전하면 포상이 아예 필요없게 된다. 


엄명한 형벌이 더욱 발전하면 형벌이 아예 필요없게 된다. 


간명한 교화가 더욱 발전하면 교화가 아예 필요없게 된다.

#상군서 #상앙


전쟁을 통해 전쟁을 제거하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이 가능하면 전쟁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살인으로 살인을 제거하는 이살거살以殺去殺이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형벌로 형벌을 제거하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가능하면 형벌을 가중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군서 #상앙


옛날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던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백성부터 제압했고, 
강적을 이길 수 있었던 자 역시 반드시 먼저 자신의 백성부터 이겼다. 


자신의 백성을 이기는 근본은 백성을 의도한 바대로 통제하는 데 있다. 


이는 마치 제련공이 쇠를 다루고 도공이 흙을 다루는 것과 같다. 


근본이 견고하지 못 하면 백성은 새나 짐승과 같게 된다. 


그 누가 이들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통제하는 근본은 법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법으로 백성을 단속한다. 


명성이 높아지고 영토가 넓어지는 이유다.

#상군서 #상앙


첫째,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현란한 언변을 구사하는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오랜 세월 권문세족을 위해 일한 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군주가 이들 3부류의 인간을 존중해 전공이 없는데도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면 백성들은 농전을 버리고 이런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 


혹자는 공리공담으로 이익을 추구하고, 


혹자는 아첨을 무기로 군주의 총애를 받는 고관을 섬기면서 사리를 추구하고, 


혹자는 용맹을 내세워 사리를 다투게 된다. 


결국 농전에 종사하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고, 외지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먹고사는 자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상군서 #상앙


군주가 붕당의 무리 가운데 1명을 발탁하면 백성들은 군주를 외면한 채 권세가와 사적인 교제를 맺으려든다. 


백성들이 군주를 외면하고 권세가와 사적인 교체를 맺으면 이내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상황이 빚어진다. 


군주가 ‘군약신강'의 배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 하면 설령 열국 제후들의 침공을 받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백성들의 겁박劫迫을 받게 된다.

#상군서 #상앙


선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적이 휘두르는 창검의 날을 밟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게 했다. 


그 백성들이 진심으로 원해 그러했겠는가? 


아니다. 


백성들이 계속 서로 본받아가며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함으로써 참전하지 않은 데 따른 형벌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건대 신민을 향한 교령敎令은 

‘백성들 가운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경작을 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길이 없고, 


형벌을 피하고자 하는 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형벌을 면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상군서 #상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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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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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의 현명함{賢}, 부족함{不肖}, 지혜{智}, 우둔함{愚}, 용기{勇}, 비겁{怯), 인{仁}, 의{義}에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며, 천해지기도 하고 귀해지기고 한다. 


이 모두를 조용히{無爲} 판단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유무(有無)를 자세히 살펴서 그 사람의 실과 허를 판정하고, 


상대방의 기호와 욕망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검토하고, 


상대방의 말을 상세히 배열한 후 그것을 다시 검토하여 실질적 정황을 알아내어야 한다. 


이처럼 상대방의 중심 생각{指}을 알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열거나 닫으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혹은 열어 보여주기고 하고 혹은 닫아 감추기도 하는데, 


열어 보여주는 것은 상대방과 정세에 대한 판단을 같이할 때이고, 


닫아 감추는 것은 상대방과 생각을 달리할 때이므로, 


상대방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함께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책략을 자세히 검토하여 먼저 그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여야 하며, 


이리하면 떠나거나 합류해도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판단에 따른 대세를 따를 수 있다.

#귀곡자


입이란 

마음의 문호이고 
마음이란 정신의 주인으로서, 


사람의 의지,욕망,사려,지혜 모두가 이 문호를 통하여 출입하므로, 


그것의 열리고 닫힘을 관리하여 그 출입을 통제하여야 한다.

#귀곡자


옛날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 중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지난 날을 다시 관찰하고 지금을 다시 검증하여야 하고, 


옛날을 다시 알고 지금을 다시 알아야 하며, 


상대방을 다시 이해하고 자기를 다시 이해하여야 한다. 


상대방의 동정(動靜)과 허실(虛實)의 이유가 현재와 합치하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 그 이유를 탐구하여야 하며, 


모든 일은 반복된다는 것이 성인의 뜻이니, 


모든 일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귀곡자


따라서 남을 아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기를 알아야 비로소 남을 알 수 있다. 


만약 자기와 남을 모두 안다면, 

두 눈이 나란히 있는 물고기(比目魚)가 형상을 보는 것 같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며, 


상대방의 말을 관찰하는데 실수가 없어서 마치 자석이 작은 바늘을 끌어 당기는 것 같이 분명하고, 


혓바닥이 불에 잘 익힌 갈비살을 섭취하는 것 같이 절실하여, 


남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적으나 그 정세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신속하여 음과 양을 함께 보고, 원(圓)과 사각(方)을 함께 볼 수 있다.

#귀곡자


내건이란 『귀곡자』에서 주로 신하와 군주 사이의 관계에서 내부에 있는 자기 편을 말하며, 


반드시 내부에 자기 편을 만들어 두어야 자유자재로 나아가고 물러설 수 있으며, 


이것이 안되면 물러서라고 권하고 있다. 


내건을 통하여 일단 의기투합하면 멀리 있어도 가깝게 되고, 


멀리서 소리만 들려도 서로 생각하는 관계가 되고, 


일단 의기가 투합하지 않게 되면 가까이 있어도 멀어지고, 


매일 앞에 나아가도 채용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귀곡자


천하가 뿔뿔이 흩어져 위에 현명한 군주가 없게 되고 제후들에게 도덕이 없어지면, 


소인들은 도적이 되고, 


현인들이 쓰이지 못 하게 되며, 


성인은 도피하여 숨어 버리고, 


이익을 탐하는 사기꾼들이 날뛰게 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의심하고 국가조직이 와해되어 서로간에 활을 쏘고, 


부자가 이산하여 서로간에 반목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틈새의 싹'이라고 한다. 


성인은 이런 '틈새의 싹'을 보면 미리 그것을 법으로 막아내는데, 


세상이 아직 다스려 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봉쇄하고, 


세상이 다스려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미리 막아 세상을 획득한다.

#귀곡자


무엇으로 천하의 권세를 판단한다고 하는가? 


답은 이것이다. 


국가의 대소를 판단하고, 


인구의 다소를 고려하고, 


재화의 유무를 측량하고, 


백성의 다소를 고려하여 여유롭고 부족한 정도가 어떠한지를 판단하며, 


지형의 험준함을 보아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지를 판단하고, 


모략의 면에서는 누가 뛰어나고 누가 떨어지는지를 판단하며, 


군신지간의 친소관계와 누가 현명하고 누가 모자라는지를 판단하고, 


빈객의 지혜와 누가 빈객이 더 많고 누가 적은지를 판단하며, 


천시(天時)의 화와 복을 보아 누가 길하고 누가 흉한지를 알아내고, 


제후의 친척 중에서는 누구를 쓰고 누구를 안 쓰는지를 알아내며, 


백성들의 민심의 방향을 보아 누가 안정되었고 누가 위험한지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증오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사람이 바뀌면 누가 편해지는지 등을 알아내는 것이니, 


이런 것을 알아낸다는 것을 곧 천하의 권력을 계량한다고 하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제후들의 정세를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대단히 기뻐할 때 찾아가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하여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욕망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며, 


또한 그들이 매우 두려워할 때 찾아가 그들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정세를 숨길 수 없게 되므로 이런 방법으로 제후들의 정세를 알아낼 수 있다. 


이때 그들은 반드시 그 격한 감정과 욕망 때문에 자기의 감정이 변화한 줄을 모르게 되어 사람을 잘못 보고 말도 하지 않으니, 

다시 자기에게 안정책을 묻게 된다.

#귀곡자


자세히 탐구할 때는 


평화(平)롭게 하거나, 


정직(正)하게 하거나, 


기쁨(喜)으로 하거나, 


분노(怒)로 하거나, 


명성(名)으로 하거나, 


행위(行)로서 하거나, 


청렴(廉)으로 하거나, 


믿음(信)으로서 하거나, 


이해(利)로서 하거나, 


비겁(卑)하게 할 수가 있는데, 



평화롭게 한다는 것은 조용히 한다는 것이고, 


정직하게 한다는 것은 곧게 한다는 것이며, 


기쁨으로 한다는 것은 즐겁게 한다는 것이고, 


분노로 한다는 것은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고, 


명성으로 한다는 것은 그 상대를 발동시킨다는 것이며, 


행위로 한다는 것은 성공토록 한다는 것이고, 


청렴으로 한다는 것은 깨끗이 한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이며, 


이익으로 한다는 것은 구하도록 한다는 것이고, 


비겁하게 한다는 것은 아첨한다는 것이다.

#귀곡자


또한 지혜로운 사람과의 대화는 박식함에 의지해야 하고, 


모자란 사람과의 대화는 명확한 판단에 의지해야 하며, 


판단을 잘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요점을 집어서 말해야 하고, 


높은 사람과의 대화는 권세에 의지해야 하며, 


부유한 사람과의 대화는 높은 지위에 의지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과의 대화는 이익에 의지해야 하며, 


천한 사람과의 대화는 겸손함에 의지해야 하고, 


용감한 사람과의 대화는 용감함에 의존해야 하며, 


지나친 사람과의 대화는 결연함에 의지해야 한다.

#귀곡자


몸은 안에 있으면서 바깥 일을 말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몸은 바깥에 있으면서 안의 깊은 이야기기를 하면 위험해 진다. 


남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남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며, 


남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면서 따르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멀리해야 어두운(陰) 곳에서 나아가 밝은(陽) 곳에서 그것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떠나는 자는 조용히 놓아주고 놓아주는 자는 직급을 올려주며,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지극히 정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아는 자는 모략을 계획하게 하는 자로서 쓸 수 있으나, 


이것을 알지 못 하는 자는 쓸 수 없다.

#귀곡자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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