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만 논하고, 실제 인간이 사는 양상을 직시하지 않는 자는 현재 가진 것을 보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상실하여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선(善)을 행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는 나쁜 인간들 속에서는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지도자)는 나쁜 자가 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더욱이 그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군주는 야수의 성질도 아울러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데 그 야수를 들자면, 나는 야수 가운데서도 여우와 사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자만으로는 덫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고, 여우만으로는 이리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으나, 여우이니까 덫을 피할 수 있고, 사자이니까 이리를 쫓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덫을 간파하려면 여우여야 하고, 이리를 쫓아버리려면 사자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자인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군주는 이 점을 잘 모르는 것이고, 여우인 것으로 만족해하는 지도자에 대해서도 물론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나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무섭게 여겨지는 편이 군주로서 안전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서운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사정없이 해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은의(恩義)의 끈에 묶인 애정 따위는 이해가 상반되면 예사로 끊어버린다. 한편 공포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복수가 무서워서 쉽게 끊지 못하는 법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군주로서 최대의 악덕은 미움을 사는 것과 경멸당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악덕만 피할 수 있다면, 군주는 임무를 상당히 완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밖에 악평이 나더라도 하등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증오는 국민의 소유물에 손을 댔을 때 생기는 것이므로, 그것을 하지 않으면 피하기는 쉽다. 동서고금에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물건과 명예만 빼앗기지 않으면 의외로 불만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한편 경멸은 군주가 변덕스럽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소심하며 결단력이 없을 때 국민의 마음속에 싹튼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큰일을 할 때는 아무래도 한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람들의 질투심이다. 이 질투심을 눌러두는 방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직면하게 될 곤란한 사태를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난국을 자각하면 거기서 탈출하고 싶어서, 개인의 생각을 잊고 탈출시켜줄 만한 사람을 자진하여 따르게 된다. 또 하나의 방책은 강압적으로든 다른 방법으로든 질투심을 가진 자들이 옹립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모세도 자기 생각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인간의 두뇌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외워두면 좋다. 첫째 두뇌는 자기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둘째 두뇌는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것. 셋째 것은 자기 힘으로 이해도 못하고,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도 못하는 것. 첫째 두뇌가 가장 좋고, 둘째 것이 그 뒤에 오며, 제3의 것은 '뇌'를 무능의 '능'(能)자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단언해도 좋지만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가상이건 현실이건 적이 존재하고, 이쪽이 적보다 약체인 경우에 중립이란 효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해롭다. 중립으로 있으면 승자가 적으로 볼 뿐 아니라 패자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여 적대시하는 것이 고작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옛 장군들은 인간의 의욕이라는 것이 필요에 쫓겨야 비로소 충분히 발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장병들이 부득불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온갖 방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동시에 적군에 대해서는 그들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획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돈으로 고용함으로써 성립되는 용병제도가 왜 소용이 없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런 병사들을 장악할 수 있는 바탕이란 지불되는 급료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급료만으로 그들의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부족하다. 그들이 고용주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일해주기를 기대하는 쪽이 순진하다. 따라서 심취할 수 있는 지휘관 밑에서 적과 용감하게 싸워줄 감투 정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국 군대뿐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그에 맞게 탈피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극히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사람은 타고난 성격에 어긋나는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는 것. 둘째는, 그때까지의 방법으로 내내 잘해온 사람에게 지금부터는 그것과 다른 방법이 적합하다고 납득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대는 자꾸만 변하는데, 인간의 방식은 여전하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군주는 어떤 이유로 민중의 미움을 살까? 가장 큰 이유는 민중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군주가 빼앗아가는 데 있다. 인간은 자기가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빼앗겼을 때의 원한을 절대로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에 필요한 것일 때 더욱 그렇다. 필요를 느끼는 것은 매일이므로 날마다 빼앗긴 원한을 되씹게 되는 셈이다. 이유의 둘째는 군주의 거들먹거리는 거만한 태도에 있다. 그런 서툰 행위는 억압된 백성보다 자유로운 백성을 상대로 했을 때 특히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정신적인 피해만으로 민중의 미움을 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조국의 존망이 걸렸을 때는 그 목적에 유효하다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 이 한 가지는 위정자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조국의 존망이 걸려 있을 경우, 그 수단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너그럽다든가 가혹하다든가, 칭찬받을 만하다든가 창피하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일절 고려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목적은 조국의 안전과 자유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종교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몇 번이고 본래 모습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혁이 요구되는 것인데, 자연스럽게 제도가 개혁되면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어떤 계기로 개혁의 필요에 눈을 떠서 그것에 손을 대는 경우도 그것은 오래 간다. 다시 말해 분명한 것은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방치해두는 나라는 단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혁의 필요성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인데,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익한 까닭은 어떤 형태든 공동체인 이상 초창기에는 반드시 무언가 우수한 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장점이 있었기에 오늘의 융성을 이룰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월은 당초에 있었던 장점도 마멸시켜버리게 마련이다. 마멸되는 대로 방치해두면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른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는 권력의 존재는 그것이 아무리 성인(聖人)의 손에 맡겨져 있더라도 나라에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절대권력이란 어떤 사람이고 간에 단시간에 좀먹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그 사람이 가난을 개의치 않거나 돌봐줘야 할 일가 친척이 없는 몸이라도 안심할 수 없다. 부를 포함한 온갖 이권 쪽에서 권력을 쫓아다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을 관직에 앉히고 싶지 않거든 최고로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과 고결하고 평편이 좋은 인물을 나란히 출마시키도록 조처해야 한다. 그러면 유권자들은 양자의 너무나 뚜렷한 차이 때문에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으로도 앞에서 말한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은 뚜렷한 형태로 보여주면 정당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으나, 이론적으로 제시하면 그르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다음 두 가지는 절대로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인내와 관용으로 대한다고 사람의 적의도 용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보수나 원조를 준다고 적대관계도 호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어떤 인물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그가 설혹 말뿐이라도 남을 협박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행동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행위는 상대편을 해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협박은 상대편의 경계심을 눈뜨게 할 뿐이고, 모욕은 지금까지보다도 더한 적의를 북돋울 뿐이다. 그 결과 상대편은 그때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강한 집념으로 당신을 파멸시킬 결의를 굳힐 것이다. 고대 로마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키아벨리_어록#시오노_나나미#니콜로_마키아벨리
지구 위 모든 사람에게는 자긍심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늘 있었다. 글자들은 다를지라도 그 의미는 모두 같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 또는 의견'이라고 기본 정의를 내리면서, 1600년대부터 '자긍심'이 사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북미 사전들은 그 뜻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자아 존경'으로 축약한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동의어로는 '자아 의존', '자아 귀결', '평정', '자신감', '확신', '자만' 또는 '자기 충족'도 있다. 반의어로는 '자아 의심'과 '자아 결여'에서부터 '자기 증오'와 '수치'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정적 단어들이 있다.
오래된 가르침일수록 자아지혜와 자기 존경을 힘과 저항, 그리고 메타 민주주의(모든 살아 있는 것들, 그리고 우주와의 하나 됨)의 원천으로 표현한다. 가부장제도·인종주의·계급제도나 다른 위계질서들은 자긍심을 제한하고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부의 지혜를 약화시켜서 외부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이끈다. 자긍심을 깨닫는 일은 그 잘못된 모든 것들을 안으로부터 바꾸는 하나의 참된 혁명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패턴들을 돌아보게 되어서야,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변화가 더 좋은지 어떤지에 관계없이, 처음에는 좀 춥고 외롭다. 우주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도 하다. 아무래도 익숙한 집 같은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패턴들은 아무리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마법같이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집이기 때문이다. 패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직시하게 되면 패턴의 반복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를 치유할수록 우리는 현재에 응답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 우리 안에 과거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와 아무런 벽도 만들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그 아이의 창조력과 자발성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이 중요한 것들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그 벽을 허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그 아이가 필요한데도 갖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지금이라도 그걸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언제나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가 누구이든 천부적 권리인 자긍심을 재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비슷한 단계를 밟는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경험이다. 예를 들면, 한 식민지인이 처음으로 지배국 군인을 쏘아보는 순간이라든가, 한 여인이 남성의 눈초리에 의해서 평가받기를 거부하는 순간 따위가 그것이다. 두 번째는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보이는 것을 당당히 말함으로써, 그것이 수치스럽지도 않고 비밀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년기에 당한 성폭행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여자로부터, 끝없는 권력욕 뒤에 숨겨진 한 남자의 유악함까지도 말이다. 세 번째로 내내 정상적인 것처럼 취급되어 이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도 있다. 동성애 혐오증이나 매 맞는 여성, 유럽 중심주의 등의 신조어를 생각해 보라. 네 번째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결속하는 것이다. 갖가지 능력이 있는 사람득ㄹ의 모임으로부터 토착주민들의 화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섯 번째 단계로,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자치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일 역시 자신의 집과 소득이 있는 여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국가들에게까지 폭넓다. 여섯 번째로, 힘이 분배된 구조 안에서 결속하게 된다. 민주적 가정, 레인보우 연합을 떠올리거나 국제 연합의 원칙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고 나면 마침내, 독립과 상호의존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면서 참된 자아의 동심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자긍심_재발견_여행
요컨대,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여성들은 그 누구건, 어느 곳에서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서 분출되는 열등감이 생활과 몸 속 깊숙이 흐르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자긍심을 발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인종이나 나이, 외모와 능력 그리고 그 밖의 어떤 것에도 구애됨 없이, 자신이 가치 있는 낱개의 인간이라는 확신이 우리 몸 안에 뿌리를 내릴 때, 바로 그때 자긍심이 내 것이 된다. 확실하게 거머잡고 내 안에 단단하게 뿌리를 심게 된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과학 철학자 알렌 와츠A. Watts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마법 같은 질문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神"섬세한 보석 같은 눈과 황홀한 악기 같은 귀,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신경 조직의 뇌, 이 모두를 갖춘 존재가 어떻게 자신을 신神보다 못하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우리 자매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능히 사랑을 받을 만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고 또 그럴만한 존재라는 확신. 그 확신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출발이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게 '총체적·기질적·핵심적'자긍심이다. 내게는 '핵심적'이란 말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우선순위에서 가장 먼저니까.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어린 시절을 좀 더 지나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상황적'이라고 표현하는 제2의 자긍심 개발에 나서게 된다. 바깥으로 점차 커나가는 자긍심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하며,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도전적인 일들을 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짜릿한 기쁨들을 맛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능력에 만족하고 타인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상호 공감을 느끼며, 세상에 대한 자라나는 호기심이 우리의 감각 하나하나를 통해 충족된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앨리스 밀러는 말한다. 자력구제가 가능하려면 그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우리가 가진 진정한 감정을 확인해주고 긍정해 주는 사람, 그럼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 그걸 실제로 남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최소한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희망적인 '한 사람'이론이 진실임을 믿는다. 믿게 되었다. 나아가 덧붙이고 싶다. 비록 그런 한 사람이 없더라도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잃어버린 아이에게로 돌아가서 그 아이가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기억해 내고 그것을 경험하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한_사람_이론ㅜ
한 가지 사실만은 명백하다. 인간의 마음은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방법과 그것을 키우는 방법 양쪽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상상은 창조의 첫단계가 된다.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의 탄생을 허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진정한_자아의_존재
당신이 무엇을 창작하든 그건 인류의 손만큼이나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지문만큼이나 독특한 것들이다.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할수록 하나의 이미지가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더 자주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그것이 눈에 드러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창조적_이미지#진정한_자아
예수의 산상수훈의 교훈은 '남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당신도 남에게 하라'다. 자신들의 자긍심이 억압받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당신이 남에게 해주는 것처럼 당신 자신에게 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뒤집어야만 혁명이 이뤄진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당신이_남에게_해주는_것처럼_당신_자신에게_하라
미의 기준은 역사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객관적 미학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그걸 만들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은 변덕이 심하고 사라지기도 쉽다. 우리들은 그걸 안 만들 수도 있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미_기준의_가변성
그러니, 남녀 불문하고 미의 기준이라는 것도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행동과 원하지 않는 행동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다. 그러면 우리는 힘을 모아 우리의 행동 양식을 바꾸어 미의 기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실 미의 개념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정기적을 바뀌며 변화한다.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에는 항상 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미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는 정말로 그 기준이 상징하는 행동을 좋아하는가?'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미_기준에_영향력_행사
그러나 낮은 자긍심을 갖고서는 남녀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성 역할을 과장하여 인정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피난처를 찾으며, 성장하면서 오히려 더 불완전하게 된다. 남성의 경우는 융통성 부족, 독단성, 경쟁심, 공격성, 여성적인 것과의 거리, 동성애 혐오증, 심지어는 잔인성과 폭력 등이 저조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고전적 표본이 된다. 그 반면 복종, 의존성, 남성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심리, 갈등에 대한 두려움, 자기 비난, 그리고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무능 등은 여성의 낮은 자긍심을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낮은_자긍심의_예
불완전한 자아로서 출발한 로맨스는 사랑으로 변화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연인들 간에 낮은 자긍심과 필요성의 결여는 깊고 지속적인 관계에서 가장 심각한 적이다. 린다 샌포드와 메리 엘렌 도노반은 낮은 자긍심이 친밀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라고 보고 있다. 자긍심이 낮으면 여자는 누군가가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그럼으로써 그녀를 거부하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남자도 똑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거기에 여성에 대한 의존과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여성적'느낌이 발견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그들의 남성다움이 소멸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얹히게 된다. 때로 낮은 자긍심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질투는 자신이 부적합하고 불완전하다는 확실한 느낌에서 나온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에게 결여된 품성을 투영해온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더욱 강해지며, 그에 따라 우리의 시기심도 높아 간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자긍심은 로맨스를 시들게 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단지 현재의 형태에서만 그렇다. 결국 로맨스는 중요하기는 해도 부가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로맨스는 아주 깊이 친밀하며, 감각적으로 공감하는 배움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눈을 통해서 보고 느끼며, 또 다른 문화를 흡수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더 넓게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데리고 올 수 있게 된다. 로맨스가 끝났을 때도 부족하거나 화가 나거나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우리는 그처럼 자신의 모습을 여럿 갖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 부드러움과 포용을 바라는 아이는 그렇게 오래된 아이가 아니다. 바로 작년의 우리 모습이기도 하고, 어제 되고 싶었던 우리이자, 어떤 직장에서의 모습 또는 어느 겨울의 모습이거나,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자신의 실체들을 아우르는 것,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목소리다. 우리 내부에는 진정한 목소리가 늘 있게 마련이다. 믿으라. 그 목소리를! #셀프_혁명#글로리아_스타이넘
내면의 통찰력을 가져라 창조자는 창조물에 분명한 형상을 부여했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씨앗은 식물 안에 있고 잎은 나무 안에 있듯이 허공은 하늘 안에 있고 무한의 형체는 텅 빔 속에 있다. 유한을 넘어서 무한함이 오고 무한함에서 유한함이 나온다. 창조물은 창조자 안에 있고 창조자는 창조물 안에 있다. 그들은 언제나 구분되지만 언제나 하나다. 님은 나무며 씨며 발아되지 않는 싹이다. 님은 꽃이며 열매며 잎이다. 님은 태양이며 빛이며 광선이다. 님은 창조자이며 창조물이며 또한 환영이다. 님은 수많은 형상이며 무한한 공간이다. 님은 호흡이며 언어이며 의미이다. 님은 유한하고 무한하며 유한과 무한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이다. 님은 창조자와 창조물 안에 내재하는 영혼이다. 가장 고귀한 영혼은 그 영혼 안에서만 보이며 최고의 경지는 가장 고귀한 영혼 안에서만 보이나니. 그 경지 안에서 다시 반영이 보인다. 카비르는 축복 받은 존재다. 이러한 영혼의 최고의 통찰력을 지녔으니!
창조자만이 창조의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오 벗이여! 이 몸은 님의 현악기이니 나는 현을 팽팽히 당기며 창조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만약 당김이 느슨해지면 다시 이 몸은 먼지에서 먼지로 돌아가게 되리라. 카비르는 말한다. '창조자만이 창조의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모든_것은_내_안에_있다#카비르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 한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목마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그대는 집안에 있는 진실을 보지 않고 어찌하여 이 숲에서 저 숲으로 방황하는가! 여기에 진리가 있다! 베나레스나 마투라로 가보라. 만약 그대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그대에게 실체가 아니다.
진정한 진리의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나의 형제여, 어떻게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옷에서 리본을 떼어낸다 해도 옷은 그대로 남아 있고 옷을 벗어버린다 해도 몸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정열을 포기한다 해도 탐욕은 아직 남아 있으며 탐욕이 사라진다 해도 오만과 자만은 남아 있다. 마음이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도 환영이란 말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카비르는 말한다. '사랑하는 구도자여! 진정한 진리의 길은 참으로 험난하다.'
님의 부재 사랑하는 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내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하고 온종일 평안치 못하며 잠을 청할 수도 없다. 그 누구에게 이 슬픔을 하소연하리. 밤은 어둡고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님은 안 계시고 나의 불안은 시작되었다. 카비르는 말한다. '들어라, 벗이여! 사랑하는 이와의 우연한 만남 외에는 어디에도 평안은 없도다.'
가슴 속 가장 끝부분 진흙 속에 빠진 보석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동쪽으로 어떤 이는 서쪽으로 또 어떤 이는 물 속을 또 어떤 이는 깊숙한 바위 사이를 헤맨다. 그러나 하인 카비르는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나니 그것은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고이고이 싸여져 있도다!
내 눈은 님이 오시는 길을 보다가 검은 점이 되었다. 내 혀는 님을 찬미하다 부풀어 올랐고 내 빈 그릇은 님과 분리된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오직 옅은 희열의 열망으로 밤낮을 인내하며 님을 기다리나니 내 두 눈에는 공허함뿐이라. 모든 색은 바래고 비통함에 젖는다. 나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괴로움의 노래를 부르나니 그것을 알아줄 이는 내 님뿐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