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18.09.21 과지초당
  2. 2018.09.12 추사 박물관
  3. 2018.09.09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국보 3호
  4. 2018.09.08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5. 2018.09.08 인릉
  6. 2018.09.04 헌릉
  7. 2018.09.04 법흥사지 칠층전탑
  8. 2018.08.30 헌인릉 재실
  9. 2018.08.28 추강 김지섭 선생 기념비
  10. 2018.08.26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

과지초당

세상/痕跡 2018. 9. 21. 00:20


과지초당
추사 김정희는 이 곳에서 늙은 몸 이끌고 봉은사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봉은사 판전에서 마지막 혼을 다 짜내고 여기서 죽은 듯 하다.
해남 대흥사에서의 추사와 이곳 과지초당에서의 추사를 생각하며 조심히 겸손을 생각해 본다.
#추사_김정희 #과지초당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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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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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박물관
이 곳 추사 박물관에 들러 유심히 둘러보면 조금씩 알게 된다.
간송미술관에 가야만 진짜 추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아니면 봉은사 판전의 현판이라도...
#추사박물관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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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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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제 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점령한 기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도 이 비가 있다.
하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이 곳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이 진품이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국보제3호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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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명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북한산, 즉 경상도를 근간으로 삼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기에 이 비석의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한강 유역, 이 지역의 의미성은 삼국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열에 대한 측정계와 같다.

예를 들면 4세기 한강 유역 지배자는 근초고왕의 백제였다.

5세기 한강 유역의 지배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였다.

이렇게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북한산에 설치된 진흥왕 순수비이다.

그 다음, 신라 진흥왕은 유명하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사실 진흥왕보다 매력적인 단어는 순수비( 巡狩碑)이다.

순수(巡狩)는 중국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순수를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진시황이었다.

즉, 강한 왕만이 자신이 경영하는 왕토를 돌아다니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왕궁에 갇혀 죽을 때까지 왕궁 밖을 벗어나지 못 하는 유약한 인간들이 많았던가.

따라서 이 순수(巡狩)의 반대는 적에게 쫓겨 도망가는 몽진(蒙塵) 아닐까?

몽진의 대표적인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선조이다.

그리고 가까운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 고려시대의 현종 또한 몽진을 했는데, 전라도 삼례에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도망간 현종에 대한 삼례 주민들의 무례함-왕의 입장에서는 무례했겠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무례한 일이었을까?-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영향-훈요십조 조작설-을 끼쳤다는 가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경상도로 한정된 영토를 한강 유력으로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순수를 기념해서 세운 비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이 북한산 순수비만이 아니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만이 각광받는 비석은 아니다.

이 비석에 연관된 사람이 있으니, 그 분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리고 추사를 금석학자로 인식할 수 있던 계기가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일이었다.

발견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으니 어쩌면 이 비석의 중요성 공헌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 아닐까?

여담이지만,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추사의 고향인 예산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가보면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하지만 그 비는 모조품이다.

따라서 진짜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것이 좋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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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

세상/墓地 2018. 9. 8. 17:52


인릉
순조는 정조의 아들.
그리고 세도정치의 희생자.
공교롭게 왕권이 강했던 태종의 묘와 왕권 약화의 순조가 같이 있는 게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인릉은 태종 이방원이 묻힌 헌릉의 꼽사리 정도.
#인릉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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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세상/墓地 2018. 9. 4. 19:32


헌릉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묘이다.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 성군인 세종대왕의 부모이다.
하지만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핏물 위로 올라선 왕과 왕후 아닌가?
그들의 묘에서 선과 악에 대해서 비교•분석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부질없어서 더 모르겠다.
#헌릉 #태종 #원경왕후_민씨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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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을 구경하고 나오면 커다란 탑이 보인다.

그럼 첫 번째 생각이 든다.

"저건 뭘까?"

호기심에 이끌려 탑쪽으로 걸어가 구경하다 보면 두 번째 생각이 든다.

"국보가 왜 여기에 있지?"

따라서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답해보려 한다.

의문의 탑 명칭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그렇다면 전탑은 무엇인가?

전탑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을 탑이다.

이제 두 번째 의문인 국보 제 16호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이다.

먼저 국보 제 16호-국보의 번호 중에서 앞순위의 문화재라면 문화재로써의 의미가 클 것이다-라는 중요도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이란 사실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국보로써의 이 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탑이 있는 곳이 안동 법흥동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는 이 동네에 법흥사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법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절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나하나 추측하고 알아가다 보면 전탑만 남고 절터는 사라졌고, 이 터를 기반으로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가문이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또한, 다시 안동으로 여행 온다면 법흥사지 칠층전탑보다는 임청각을 구경할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문화재를 발견하고, 보고, 배우는 이 경험으로써의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임청각보다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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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 재실

세상/痕跡 2018. 8. 30. 21:58


헌인릉 재실

제관들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했다.
하지만 나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이방원을 보러갈 준비를 했다.
아! 보고싶다. 태종 이방원
#재실 #헌릉 #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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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김지섭 선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의열단의 단원이며, 일본 왕궁의 이중교(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투사이시다.

그렇다면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의열투쟁하신 니주바시 의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으로 인한 일본내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의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터트렸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를 통한 계엄령 선포로 조선인 약 6,000여명을 학살했다.

이러한 관동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배경으로 의열단원인 추강 김지섭 선생은 폭탄 3발을 숨기고 일본에 잠입했다.

원래 목표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총리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 하에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왕궁으로의 폭탄 투척을 변경하였다.

왕궁으로 진입하려는 김지섭 선생을 불심검문하려는 호위경관에게 폭탄 1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이중교(니주바시)에 나머지 2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건이 니주바시 의거이다.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일으킨 니주바시 의거는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행동으로 옮긴 첫 번째 사례이다.

여담이지만 시기가 좀 더 앞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거사 계획 또한 왕과 황태자 그리고 고위대작을 처단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계획 도중 체포되었기에 의열투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왕을 목표로 삼고 실천으로 옮긴 사례는 추강 김지섭 선생이 처음이다.

그 이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도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의열투쟁을 한다.

그러나 추강 김지섭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첫째, 유연성이다. 

제국의회의 목표가 상실되자, 바로 일왕에 대한 목표 변경이라는 유연성.

둘째, 패기감이다.

의열투쟁의 목표 대상을 적들의 최고 높은 사람을 삼는 패기감.

셋째, 의연함이다.

그는 체포된 후,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선고하라"라고 말한 의연함 때문이다.

 

 

 

이러한 니주바시 의거의 주인공 기념비는 경상북도 안동시 낙동강가에 있는 영호루 근처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호루에 갔다가 추강 선생의 기념비를 찾게 될 것이다.

반면에, 추강 선생 기념비에 갔다가 영호루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지 못한 투사가 추강 김지섭 선생이다.

그래서 김지섭 선생의 기념비를 찾아가려면 안동 영호루로 가는 것이 쉬운 방법이다.

안동 영호루의 주소는 경북 안동시 강남로 187-5이다.

마지막으로 추강 김지섭 선생의 약력을 정리하겠다.

1884년 경북 안동 출생

1908년 교남교육회 참여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1922년 의열단 가입. 국내로 잠입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1923년 일명 김시현·황옥 사건-영화 '밀정'-에 참여, 탈출 성공

1924년 이중교(니주바시)의거

1928년 복역 중 의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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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白民) 황상규는 누구일까?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첫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다.

둘째, 을강 전홍표 선생과 더불어 약산 김원봉 그리고 석정 윤세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셋째, 초기 의열단 결성 시, 의열단원들에게 많은 지도를 하였다고 하지만, 어느 책에

        의하면 백민 황상규가 의열단 초기의 의백 역할-의열단 결성 시,

        의백인  약산 김원봉은 약관의 나이였다. 따라서 연세가 있는 분의 지도자가

        필요했다는 설-을 했다고 한다.

결론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의열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의열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분이다.

그러나 백민 황상규를 많은 분들이 잘 몰라해서 그의 약력을 정리해 본다.

189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1908년 상동고명학교, 마산창신학교 설립 

           밀양동화학원 인수

           <동국사감>이라는 국사책 저술.

1913년 대한광복단 참여

1918년 중국 길림으로 망명

          북로군정서에서 재정 담당에 임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

1919년 의열단 창설

1920년 의열단 1차 암살·파괴계획 즉 밀양폭탄의거로 검거

1921년 징역 7년 선고와 복역

1926년 출소

1927년 신간회 참여

1931년 사망

백야 김좌진이 계시던 북로군정서에서 있었으며, 약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에

   있었으며, 좌우합작의 신간회에 있었던 백민 황상규 선생의 업적을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가리는 듯 했고, 여기저기 누군가의 논밭들이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직이 물어봤다.

"백민 황상규 선생이 없었다면 의열단이 있었을까?"

화려한 독립운동의 이력을 가진 선생을 무엇이 이렇게도 무명의 혁명가로 만든 것일까?

 

만약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 혹은 의열단에 열광하시는 분들이 밀양에 오신다면

  여기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도 와주셨으면 좋겠다.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는 밀양시청 좌측으로 들어가는  지동마을에 있다.

지동마을의 작은 길을 걸어가다 그 마을 주민에게 선생의 묘를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의 묘로 가는 표지판으로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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