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은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의열단은 뭘까?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의미의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에서 결성되었다.

그래서 그 단체명의 의미처럼 의열단은 급진적인 폭력혁명-그러나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의열투쟁'이라 규정한다-을 지향했다.

그렇다면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육군대장 田中義一(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를 벌인다.

이것이 황포탄의거 혹은 다나카 암살저격의거라 한다.

이 의거에는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다나카 기이치의 암살은 성공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한 영국인 부인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러한 민간인 사망으로 의열단은 비난-어떤 책을 보면 임시정부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을 받게 된다.

 

1922년 12월,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의 부탁을 받게 된다.

그 부탁은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을 작성해-단재는 상해에 있는 의열단 소유의 폭탄제조소를 방문한 후 작성했다고 한다-달라는 것이었다.

그무렵 아나키스트-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자신을 '자유연합주의'라 칭한다-로 변신한 단채 신채호 선생은 약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단재와 약산의 만남은 흥미를 떠나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신의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쳐야만 했던 실천가인 약산 김원봉과 그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치기까지 의지와 신념 그리고 명분을 갖게해야만 했던 문장가인 단재 신채호의 만남인 것이다.

이 만남이 의열단과 더 나아가 의열투쟁을 게으르지 않게, 지치지 않게, 끊임없는 독립운동의 자극제를 탄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을지로 입구역에 있는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의 동상을 보라.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종이는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일 것이다.

그래서 그와 의열단원들은 독립을 향한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이 담긴 선언서를 두 손에 혹은 가슴에 품고 한줌 두려움과 미련 없이 일제를 향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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