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명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북한산, 즉 경상도를 근간으로 삼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기에 이 비석의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한강 유역, 이 지역의 의미성은 삼국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열에 대한 측정계와 같다.
예를 들면 4세기 한강 유역 지배자는 근초고왕의 백제였다.
5세기 한강 유역의 지배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였다.
이렇게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북한산에 설치된 진흥왕 순수비이다.
그 다음, 신라 진흥왕은 유명하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사실 진흥왕보다 매력적인 단어는 순수비( 巡狩碑)이다.
순수(巡狩)는 중국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순수를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진시황이었다.
즉, 강한 왕만이 자신이 경영하는 왕토를 돌아다니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왕궁에 갇혀 죽을 때까지 왕궁 밖을 벗어나지 못 하는 유약한 인간들이 많았던가.
따라서 이 순수(巡狩)의 반대는 적에게 쫓겨 도망가는 몽진(蒙塵) 아닐까?
몽진의 대표적인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선조이다.
그리고 가까운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 고려시대의 현종 또한 몽진을 했는데, 전라도 삼례에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도망간 현종에 대한 삼례 주민들의 무례함-왕의 입장에서는 무례했겠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무례한 일이었을까?-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영향-훈요십조 조작설-을 끼쳤다는 가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경상도로 한정된 영토를 한강 유력으로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순수를 기념해서 세운 비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이 북한산 순수비만이 아니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만이 각광받는 비석은 아니다.
이 비석에 연관된 사람이 있으니, 그 분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리고 추사를 금석학자로 인식할 수 있던 계기가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일이었다.
발견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으니 어쩌면 이 비석의 중요성 공헌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 아닐까?
여담이지만,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추사의 고향인 예산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가보면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하지만 그 비는 모조품이다.
따라서 진짜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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