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이며, 1519년 중종 14년 형조좌랑 이명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임청각이 유명한 것은 단연코 석주 이상룡 선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쉽게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점과,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와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같이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신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약력을 서술해 보겠다.

1858년 철종 9년 안동에서 출생.

1895년 을미사변,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 시도.

의병장 권세연-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숙부-을 지원.

그러나 의병 항쟁의 한계로 인해 유인석, 김동삼 선생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 설립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회장 역임.

1910년 주진수,황만영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듣게 됨.

1911년 양기탁 선생과 협의 후, 서간도 망명.

           경학사 조직, 경학사장에 추대.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 설치.

1912년 부민단 설립, 단장으로 추대

1913년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 발표.

1919년 한족회와 임시군정부 조직,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서로군정서로 개칭.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취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1년 대한통군부 조직.

1922년 대한통의부 수립.

1924년 정의부에 참여.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2년 길림성에서 병으로 돌아가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중 우당 이회영 가문과 왕산 허위 가문 그리고 석주 이상룡 가문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석주 이상룡 선생의 항일운동에 임한 후 임청각의 일화와 그의 친인척들의독립운동사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의 명성을 입증하는 거 아닐까?

먼저, 임청각의 운명이다.

만주로 망명해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3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인 이준형에게 임청각을 팔으라 말한다.

이것을 알게 된 고성 이씨 문중 사람들은 매각 소식을 듣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결국 문중 사람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모아 임청각의 매각을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매각을 통한 타인의 소유는 막았지만, 일제에 의한 탄압은 막지 못 했다.

본래 임청각이 99칸의 임청각이었지만, 1942년 중앙선을 놓으면서 앞마당과 일부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임청각은 70칸 정도 작아진 형태가 되었다.

또한 배산임수-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대하고 있는 땅의 형세-인 임청각은 기찻길과 차단막으로 인해 낙동강의 풍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왜이렇게 임청각을 괴롭힌 걸까?

어쩌면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후손들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의지의 기를 꺾기 위함 아닐까?

따라서 자연스럽게 석주 이상룡 선생의 친인척들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우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삼촌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장이 되신 '권세연 의병장'이시다.

또한 당숙은 이상룡 선생의 밀지를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하시고,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신 '담옹 이승화 선생'이시다.

그리고 처남은 백하구려-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의 주인인 '백하 김대락'이다.

그의 동생은 을미의병 당시 신돌석 장군 휘하에 참여했고, 안동 최초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만진 이상동' 선생이시다.

그의 또 다른 동생은 이상룡 선생처럼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시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으신 '척서 이봉희'선생이시다.

그의 아들은 경학사와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신 '동구 이준형'선생이시다.

그의 손자는 대한통의부 위원이며, 1924년 국내진공작전에 따라 평안북도 청성진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경찰을 사살한 '소파 이병화'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아들인데,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신흥회라는 비빌결사단체를 조직하며,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한 '창해 이형국' 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차남인데,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이며,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한 '백광 이운형'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정의부 재무 담당에 이어 정의부 대표를 지내신 '자화 이광민'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남만청년총동맹의 검사위원이며, 만주에서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며 일제에 대항하신 '이광국'선생이시다.

 

이 독립운동가 집안의 화려한 경력을 일본제국주의는 어떻게든 꺾으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속내가 철도로 끊겨진 임청각이 입증하는 것 아닐까?

 

임청각 앞의 철도 차단막 앞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을 느껴보시며,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일가들의 독립운동사를 한번쯤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역사 > 산책으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암 정인홍  (0) 2018.12.12
포은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 / 한주의 단심가  (0) 2018.11.30
송강 정철 생가지  (0) 2018.10.11
남이 장군 집터  (0) 2018.10.10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  (0) 2018.09.09
Posted by 㗢동죽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