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이 태어난 곳은 경복궁의 서쪽인 서촌에서 자하문 터널 방향의 청운초등학교 부근인 것 같다.

따라서 청운초등학교의 담장 근처에 그의 생가지를 표시하는 돌이 이렇게 서있다.

 

송강 정철,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학창 시절 국어책에 주구장창 나온 그의 아름다운 글의 주인공이다.

이러하기에 고산 윤선도와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문학적인 재능으로만 정철을 알면 큰 코가 다칠 것이다.

나는 송강 정철의 문학적인 재능에 정반대적인 정치적 재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서인-조선시대 당파 중 하나,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했는데, 김효원이 서울 동쪽에 살았다고 동인. 심효원이 서쪽에 살았다고 서인이라 했다-이었던 송강 정철.

반대편 동인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동인백정·간철·독철이라고.

그의 글과 그의 별명을 비교해 보라.

얼마나 극과 극인지.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송강 정철을 백정, 간철, 독철로 불리우게 된걸까?

그의 이름이 저렇게 악명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정여립의 난 혹은 기축옥사 때문이다.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의 난은 쉽게 정여립의 역모를 빌미로 동인에 대한 서인의 주도권 장악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정여립의 난 또한 정여립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서 발생되었다는 설과 서인들의 조작이라는 설 등 많은 학설들이 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꾸몄든, 꾸미지 않았든 그것은 논외로 하겠다.

초점은 이로 인해 피해입은 희생자들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의 난에 대한 조사책임자가 송강 정철이었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난으로, 조사책임자 송강 정철로 인해 희생된 동인쪽 사람들을 보자.

 

동암 이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매를 쳐서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이발의 82세 늙은 어머니와 아들은 엄형-엄하게 형벌함-으로 죽었다.

이발의 동생 이길 또한 죽었다.

 

나암 정언신

정여립의 난 이후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은 정여립의 구촌친이라는 이유로 우의정도, 위관도 사퇴했다.

그 뒤 모함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수우당 최영경

여러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최영경을 가상의 인물인 길삼봉으로 모함하여 옥사되었다.

 

곤재 정개청

지난날 정철을 비난했던 정개청은 그에게 모진 매를 맞아 장독-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동인의 대표적인 사람들만 서술해 보았다.

 

이 정여립의 난 혹은 기축옥사로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특히 호남 출신 동인들이 숙청됨으로써,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었다.

어떤 책에 씌여진 어느 선비가 말하길 "호남에 인재가 나려면 400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에 송강 정철의 모습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송강 정철, 그의 작품만 읽어보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집터의 표지석 또한 그의 문학적인 부분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그의 또다른 별명인 동인 백정, 간철, 독철로 불리우게 된 그의 모습을 봐야 진정한 정철을 만나지 않을까?

'역사 > 산책으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 / 한주의 단심가  (0) 2018.11.30
임청각  (0) 2018.10.22
남이 장군 집터  (0) 2018.10.10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  (0) 2018.09.09
추강 김지섭 선생 기념비  (0) 2018.08.28
Posted by 㗢동죽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