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 김지섭 선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의열단의 단원이며, 일본 왕궁의 이중교(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투사이시다.
그렇다면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의열투쟁하신 니주바시 의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으로 인한 일본내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의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터트렸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를 통한 계엄령 선포로 조선인 약 6,000여명을 학살했다.
이러한 관동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배경으로 의열단원인 추강 김지섭 선생은 폭탄 3발을 숨기고 일본에 잠입했다.
원래 목표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총리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 하에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왕궁으로의 폭탄 투척을 변경하였다.
왕궁으로 진입하려는 김지섭 선생을 불심검문하려는 호위경관에게 폭탄 1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이중교(니주바시)에 나머지 2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건이 니주바시 의거이다.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일으킨 니주바시 의거는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행동으로 옮긴 첫 번째 사례이다.
여담이지만 시기가 좀 더 앞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거사 계획 또한 왕과 황태자 그리고 고위대작을 처단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계획 도중 체포되었기에 의열투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왕을 목표로 삼고 실천으로 옮긴 사례는 추강 김지섭 선생이 처음이다.
그 이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도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의열투쟁을 한다.
그러나 추강 김지섭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첫째, 유연성이다.
제국의회의 목표가 상실되자, 바로 일왕에 대한 목표 변경이라는 유연성.
둘째, 패기감이다.
의열투쟁의 목표 대상을 적들의 최고 높은 사람을 삼는 패기감.
셋째, 의연함이다.
그는 체포된 후,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선고하라"라고 말한 의연함 때문이다.
이러한 니주바시 의거의 주인공 기념비는 경상북도 안동시 낙동강가에 있는 영호루 근처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호루에 갔다가 추강 선생의 기념비를 찾게 될 것이다.
반면에, 추강 선생 기념비에 갔다가 영호루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지 못한 투사가 추강 김지섭 선생이다.
그래서 김지섭 선생의 기념비를 찾아가려면 안동 영호루로 가는 것이 쉬운 방법이다.
안동 영호루의 주소는 경북 안동시 강남로 187-5이다.
마지막으로 추강 김지섭 선생의 약력을 정리하겠다.
1884년 경북 안동 출생
1908년 교남교육회 참여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1922년 의열단 가입. 국내로 잠입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1923년 일명 김시현·황옥 사건-영화 '밀정'-에 참여, 탈출 성공
1924년 이중교(니주바시)의거
1928년 복역 중 의문의 죽음.
'역사 > 산책으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청각 (0) | 2018.10.22 |
---|---|
송강 정철 생가지 (0) | 2018.10.11 |
남이 장군 집터 (0) | 2018.10.10 |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 (0) | 2018.09.09 |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 (0) | 2018.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