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으로의 유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9.18 조선혁명선언 = 의열단선언
  2. 2018.09.08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3. 2018.09.04 법흥사지 칠층전탑
  4. 2018.08.26 호우총 /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은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의열단은 뭘까?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의미의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에서 결성되었다.

그래서 그 단체명의 의미처럼 의열단은 급진적인 폭력혁명-그러나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의열투쟁'이라 규정한다-을 지향했다.

그렇다면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육군대장 田中義一(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를 벌인다.

이것이 황포탄의거 혹은 다나카 암살저격의거라 한다.

이 의거에는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다나카 기이치의 암살은 성공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한 영국인 부인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러한 민간인 사망으로 의열단은 비난-어떤 책을 보면 임시정부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을 받게 된다.

 

1922년 12월,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의 부탁을 받게 된다.

그 부탁은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을 작성해-단재는 상해에 있는 의열단 소유의 폭탄제조소를 방문한 후 작성했다고 한다-달라는 것이었다.

그무렵 아나키스트-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자신을 '자유연합주의'라 칭한다-로 변신한 단채 신채호 선생은 약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단재와 약산의 만남은 흥미를 떠나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신의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쳐야만 했던 실천가인 약산 김원봉과 그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치기까지 의지와 신념 그리고 명분을 갖게해야만 했던 문장가인 단재 신채호의 만남인 것이다.

이 만남이 의열단과 더 나아가 의열투쟁을 게으르지 않게, 지치지 않게, 끊임없는 독립운동의 자극제를 탄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을지로 입구역에 있는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의 동상을 보라.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종이는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일 것이다.

그래서 그와 의열단원들은 독립을 향한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이 담긴 선언서를 두 손에 혹은 가슴에 품고 한줌 두려움과 미련 없이 일제를 향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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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명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북한산, 즉 경상도를 근간으로 삼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기에 이 비석의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한강 유역, 이 지역의 의미성은 삼국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열에 대한 측정계와 같다.

예를 들면 4세기 한강 유역 지배자는 근초고왕의 백제였다.

5세기 한강 유역의 지배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였다.

이렇게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북한산에 설치된 진흥왕 순수비이다.

그 다음, 신라 진흥왕은 유명하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사실 진흥왕보다 매력적인 단어는 순수비( 巡狩碑)이다.

순수(巡狩)는 중국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순수를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진시황이었다.

즉, 강한 왕만이 자신이 경영하는 왕토를 돌아다니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왕궁에 갇혀 죽을 때까지 왕궁 밖을 벗어나지 못 하는 유약한 인간들이 많았던가.

따라서 이 순수(巡狩)의 반대는 적에게 쫓겨 도망가는 몽진(蒙塵) 아닐까?

몽진의 대표적인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선조이다.

그리고 가까운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 고려시대의 현종 또한 몽진을 했는데, 전라도 삼례에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도망간 현종에 대한 삼례 주민들의 무례함-왕의 입장에서는 무례했겠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무례한 일이었을까?-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영향-훈요십조 조작설-을 끼쳤다는 가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경상도로 한정된 영토를 한강 유력으로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순수를 기념해서 세운 비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이 북한산 순수비만이 아니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만이 각광받는 비석은 아니다.

이 비석에 연관된 사람이 있으니, 그 분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리고 추사를 금석학자로 인식할 수 있던 계기가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일이었다.

발견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으니 어쩌면 이 비석의 중요성 공헌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 아닐까?

여담이지만,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추사의 고향인 예산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가보면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하지만 그 비는 모조품이다.

따라서 진짜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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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을 구경하고 나오면 커다란 탑이 보인다.

그럼 첫 번째 생각이 든다.

"저건 뭘까?"

호기심에 이끌려 탑쪽으로 걸어가 구경하다 보면 두 번째 생각이 든다.

"국보가 왜 여기에 있지?"

따라서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답해보려 한다.

의문의 탑 명칭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그렇다면 전탑은 무엇인가?

전탑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을 탑이다.

이제 두 번째 의문인 국보 제 16호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이다.

먼저 국보 제 16호-국보의 번호 중에서 앞순위의 문화재라면 문화재로써의 의미가 클 것이다-라는 중요도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이란 사실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국보로써의 이 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탑이 있는 곳이 안동 법흥동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는 이 동네에 법흥사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법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절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나하나 추측하고 알아가다 보면 전탑만 남고 절터는 사라졌고, 이 터를 기반으로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가문이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또한, 다시 안동으로 여행 온다면 법흥사지 칠층전탑보다는 임청각을 구경할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문화재를 발견하고, 보고, 배우는 이 경험으로써의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임청각보다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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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은 제140호 고분으로 불리웠으며, 사적 제 512 호이다.

그리고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 위치해 있다.

호우총은 1946년 발굴되었으며, 그 때 이 묘에서 발굴된 것이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다.

그래서 지금은 묘의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작은 제단 같지만, 호우명 그릇을 출토한 이유로 호우총이라 불리우게 된 이유가 됐다.

호우총의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04이다.

대릉원과는 달리 무료로 호우총과 여러 묘들을 볼 수 있으며, 호우총의 초라함에 실망하셨다면 그 근처의 봉황대를 구경하면 실망을 사라질 것다.

위의 호우명 그릇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릇은 모조품 같다.

아래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 진품이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은 보물 1878호이다.

이 호우명 그릇이 갖는 의의는 청동 그릇 밑의 16자에 있다.

乙卯年國罡(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따라서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영향력이 남쪽 신라까지 미침을 알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 내물왕 당시, 왜의 침입으로 광개토대왕에게 원조를 구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과 연관시켜보면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의 호우총 출토는 충분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원고구려비의 내용 중 新羅 寐錦(신라 매금)이란 내용을 보면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힘의 우열과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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