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

세종 때는 집현전 학사이며 세조때는 단종 복위에 긍정적인 인물.
하지만 그의 묘가 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근처에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포은의 묘 옆에 그의 묘가 있기에 익히 알려지지 않은 이석형 선생의 역사도 알게 되었다.
저헌 이석형 선생의 부인이 묘비에 써있는 대로 연일 정씨이며,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라고 되어있다.
이로써 포은 정몽주의 묘 근처에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는 게 이해가 됐다.
#저헌_이석형_선생의_묘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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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는 고려말 사람으로, 단심가와 선죽교에서의 죽음이 유명하다.

그래서 이러한 유명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우선 공민왕 사후 우왕의 폐위와 공양왕 옹립할 때까진 역성혁명-왕조가 바뀌는 일-의 주인공들-이성계와 정도전 등-과 뜻을 같이 했다.

다만 역성혁명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급진개혁파로 불리우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받아들이는 무리이고, 온건개혁파로 대표되는 포은 정몽주는 받아들이지 않는 무리이다.

결국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와의 갈등에서 나온 것이 '정몽주의 단심가'이고 또 하나는 '이방원의 하여가'이다.

이 시와 답가를 통한 사건이 있는 후, 포은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 죽임을 당한 곳이 곧 개성의 선죽교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내가 진정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단심가'이다.

즉, "단심가를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그렇다면 두 단심가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무엇이 상황과 단심가의 내용이 더 일치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선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이다.

온건개혁파의 대표인 포은 정몽주와 급진걔혁파의 대표인 이성계 그리고 정도전 등이 역성혁명의 허용 유무에 따라 대립을 했다.

급진걔혁파인 이성계는 정몽주가 존재하는 한, 역성혁명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이러한 이성계의 뜻을 아들인 이방원이 눈치를 채고 포은 정몽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리고 넌지시 시를 읊었다.

이것이 이방원의 하여가이다.

이 하여가로 정몽주의 마음을 알아보는 동시에 그를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는 이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읊은 것이다.

단심가로 이방원은 포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로 하여금 그를 죽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제 또다른 단심가를 알아보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를 읽다보면 교과서에서 보고, 낭독했던 익숙하고 익숙한 시가 나온다.

포은 정몽주가 썼다고 우리가 알고있는  단심가이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단심가의 주인공은 고구려 안장왕이 사랑했던 한주이다.

 

 

우선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과 이야기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단심가가 나왔는지 살펴보자.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 시절 백제를 염탕하기 위해 개백현-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백제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은 곳이 곧 한주의 집이었다.

그는 곧 한주에게 반하여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태자임을 고백하게 되었고,귀국 후 대군을 이끌고 와 개벽현을 점령하고 한주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을 약속하며 고구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후 개백현의 태수는 한주를 첩으로 삼기 위해 온갖 구실을 삼았지만, 한주는 연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러한 태수의 한주에 대한 회유와 감언이설 그리고 옥에 가두는 일의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단심가'이다.

쉽게 춘향전을 생각하면서 변사또에게 핍박을 받으며 지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물론 춘향전처럼 고구려 태자 즉 훗날 안장왕은 한주가 죽게 될 무렵 이몽룡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백제땅을 점령하고 그의 연인인 한주 또한 부인으로 맞이한다.

 

하나는 포은 정몽주와 이방원의 이야기, 또 하나는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어떤 단심가가 둘 중의 이야기와 더 알맞은 건지 판단해 보시라.

나는 단심가의 말하는 주체가 여성적인 점과 사랑을 내포하는 내용을 보면 볼수록 혁명적인 사상의 정몽주보다는 한주와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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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고려말 역성혁명을 반대 했기에 온건개혁파에 속한 포은 정몽주.
그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선죽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고향인 영천을 가다 이 곳에 묻힌 건 아닐까?
#포은_정몽주_선생의_묘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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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제86호
국립중앙박물관의 로비에 들어서면 저 탑에 온통 시선이 집중된다.
가까이 다가가 관찰해 보면 탑 전체에 오밀조밀한 조각들의 스토리텔링을 볼 수 있다.
이 오밀조밀한 조각의 메시지에 넋이 나갈 정도이다.
#경천사십층석탑 #국보제86호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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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역 신도비

정역은 그냥 쉽게, 조선 태종 이방원의 사돈, 즉 효령대군의 장인이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와 충녕대군 즉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 조용한 효령대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정역의 신도비보다 ‘정곡’이라는 표지석에 더 관심이 간다.
한마디로 해주 정씨 집성촌이란 의미 아닌가.
집성촌,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집성촌이 궁금해진다.
#정역_신도비 #정곡 #해주정씨 #교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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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세상/痕跡 2018. 11. 19. 21:38


조계사

고요와 침묵을 구하기 위해 찾아 가기에는 한마디로 무리.
다만 사찰의 정문을 지키는 사천왕들이 보편적인 것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사천왕만 구경하다 왔다.
#조계사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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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사 원랑선사 탑비

월광사는 충북 제천에 있었지만 이젠 터만 남았다고 한다.
사찰 또한 유명한 건 아닌 듯 하다.
원랑 선사는 그리 유명한 스님이 아니어서 역사책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비 형식이라고 한다.
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탑비로 인해 보물 360호가 된 걸까?
문화재 앞에서 의문이 생겼다.
#월광사원랑선사탑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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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군산이 근대역사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전, 이 건물은 을씨년 그 자체.
한때는 나이트클럽이었고, 그 이후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잘 모르겠다.
채만식의 탁류에는 나왔지만 조정래의 아리랑엔 나오지 않은 건물.
그래도 근대역사란 이름 하에 등록문화재 제374호가 되어 다행이다.
#구_조선은행_군산지점 #등록문화재374 #군산 #채만식_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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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기념박물관

탄허, 허공을 삼키다.
그렇다면 또 다른 법명은 토허 아닐까?
허공을 뱉어내다, 이것이 완성 아닌가.
이러한 탄허스님의 공적은 많고 많지만 최고의 업적은 불경의 한글화 아닐까?
적어도 이 기념박물관도 한자로 이루어진 그의 작붐보다는 팔만대장경의 한글화에 앞장선 부분이 부각되었음 더 좋았을 것이다.
#탄허기념박물관 #탄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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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이며, 1519년 중종 14년 형조좌랑 이명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임청각이 유명한 것은 단연코 석주 이상룡 선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쉽게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점과,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와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같이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신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약력을 서술해 보겠다.

1858년 철종 9년 안동에서 출생.

1895년 을미사변,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 시도.

의병장 권세연-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숙부-을 지원.

그러나 의병 항쟁의 한계로 인해 유인석, 김동삼 선생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 설립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회장 역임.

1910년 주진수,황만영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듣게 됨.

1911년 양기탁 선생과 협의 후, 서간도 망명.

           경학사 조직, 경학사장에 추대.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 설치.

1912년 부민단 설립, 단장으로 추대

1913년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 발표.

1919년 한족회와 임시군정부 조직,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서로군정서로 개칭.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취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1년 대한통군부 조직.

1922년 대한통의부 수립.

1924년 정의부에 참여.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2년 길림성에서 병으로 돌아가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중 우당 이회영 가문과 왕산 허위 가문 그리고 석주 이상룡 가문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석주 이상룡 선생의 항일운동에 임한 후 임청각의 일화와 그의 친인척들의독립운동사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의 명성을 입증하는 거 아닐까?

먼저, 임청각의 운명이다.

만주로 망명해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3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인 이준형에게 임청각을 팔으라 말한다.

이것을 알게 된 고성 이씨 문중 사람들은 매각 소식을 듣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결국 문중 사람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모아 임청각의 매각을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매각을 통한 타인의 소유는 막았지만, 일제에 의한 탄압은 막지 못 했다.

본래 임청각이 99칸의 임청각이었지만, 1942년 중앙선을 놓으면서 앞마당과 일부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임청각은 70칸 정도 작아진 형태가 되었다.

또한 배산임수-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대하고 있는 땅의 형세-인 임청각은 기찻길과 차단막으로 인해 낙동강의 풍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왜이렇게 임청각을 괴롭힌 걸까?

어쩌면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후손들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의지의 기를 꺾기 위함 아닐까?

따라서 자연스럽게 석주 이상룡 선생의 친인척들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우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삼촌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장이 되신 '권세연 의병장'이시다.

또한 당숙은 이상룡 선생의 밀지를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하시고,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신 '담옹 이승화 선생'이시다.

그리고 처남은 백하구려-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의 주인인 '백하 김대락'이다.

그의 동생은 을미의병 당시 신돌석 장군 휘하에 참여했고, 안동 최초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만진 이상동' 선생이시다.

그의 또 다른 동생은 이상룡 선생처럼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시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으신 '척서 이봉희'선생이시다.

그의 아들은 경학사와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신 '동구 이준형'선생이시다.

그의 손자는 대한통의부 위원이며, 1924년 국내진공작전에 따라 평안북도 청성진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경찰을 사살한 '소파 이병화'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아들인데,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신흥회라는 비빌결사단체를 조직하며,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한 '창해 이형국' 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차남인데,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이며,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한 '백광 이운형'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정의부 재무 담당에 이어 정의부 대표를 지내신 '자화 이광민'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남만청년총동맹의 검사위원이며, 만주에서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며 일제에 대항하신 '이광국'선생이시다.

 

이 독립운동가 집안의 화려한 경력을 일본제국주의는 어떻게든 꺾으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속내가 철도로 끊겨진 임청각이 입증하는 것 아닐까?

 

임청각 앞의 철도 차단막 앞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을 느껴보시며,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일가들의 독립운동사를 한번쯤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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