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란 기억의 반응이며, 기억은 종족·지역사회·집단·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개인에 의해서 축적되고 물려받고 획득되어온 배경이다.

이 배경은 마음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결과이며 그것이 축적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마음은 기억이며, 도전이나 요구를 받으면 언제나 반응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마치 연상작용을 통해서 움직이는 전자두뇌의 반응과 같다.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므로 본질적으로 시간의 산물인 동시에 시간의 창조자이기도 한다.

사실 죽음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다.

죽음은 그대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재미있게 즐기고 있을 때, 귀기울여 듣고 있을 때, 회사에 가고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 여기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가족을 잃어버릴까봐, 친구도 없이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워한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두렵고, 모아둔 경험과 재산이 없어질까봐 두렵다.

우리가 겁나서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집착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이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그때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을, 모든 지식·모든기억·모든 다툼을 버리고 그것들을 다음 날로 가져가지 않으면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나더라도 거기에는 새로 태어남이 있다.

생각이나 기억은 말과 반복을 통해 계속된다.

생각의 끝남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며, 생각의 죽음은 영원한 삶이다.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끝나고 또 끝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계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결코 시간의 범위 안에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은 매순간의 죽음 안에만 있다.

모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끝남이 곧 시작이다.

그런데 두려움이 끝남을 방해한다.

죽음이라는 사실과 마주치면 우린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면 그 이름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느낌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며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죽음은 뭔가 새로운 것이며, 죽음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도전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것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마음은 새로운 사실·새로운 사건·새로운 감각을 만나면 언제가 즉시 거기에 라벨을 붙이고 '이건 다른 것들과 달라.'라고 하거나 '이것도 다른 것들과 같은 거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즉 새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아닌가?

삶과 사랑과 죽음은 함께 붙어 다닌다.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삶은 신선한 상태로 매일매일 살아있음 속에 있다.

그 투명함, 그 순수함을 갖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언제나 나가 있는 그런 마음 상태는 죽어야 한다.

사랑 없이는 덕도 없다.

사랑이 없이는 평화도 없고 관계도 없다.

진리만 홀로 존재하는 차원으로 마음이 끝없이 들어가는 토대가 바로 이 사랑이다.

마음은 완전히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이해한다.

따라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계속되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가 없다.

죽는 것만이 창조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삶이 곧 죽음일 때 거기에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사랑과 창조가 그런 것처럼.

내 자신에 대해서라면 영속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이걸 그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다-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생김새를 나타내는 이름, 이름인 말, 말인 생각, 생각에 의해 편집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 그러한 나라는 연속성이 있다면,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름, 이 몸 즉 유기체의 생김새, 그리고 영혼의 완전한 구조는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견해·믿음·애착·욕심·시기심을 버리는 것이 매일 매순간 죽는 것이다.

매순간 모든 야심에 끝을 낸다면, 그때 그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끝없는  움직임만 있는 심연에 이르게 되며 그러다가 느닷없이 끝에 서게 되는 이 놀라운 상태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죽음이 실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 살아서 움직이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아주 놀라운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 대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을 관찰하고, 제발 내 말로 인해 최면에 걸리지 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실천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다.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표현에 만족하지 말라.

그 표현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면, 삶이 얼마나 많은 도피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어떻게 사로잡혀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사실을 살펴보고 심사숙고하고 탐험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세히 조사하는 게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는 시간도 없고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는 영원하다.

그것은 삶이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사랑이며 거기에는 실현이나 좌절은 없다.

이것들은 사실들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단순히 슬픔 그 자체를 바라보기만 하면 절대 슬프지 않다.

자신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그저 인식하기만 한다면 거기에서는 절대로 슬픔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허망함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고 싶어하는 그 순간, 투쟁과 불안과 짜증나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이 결국에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대가 무언가를 사랑할 때면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본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아이를 바라볼 것이다.

섬세한 얼굴 표정, 동그랗게 뜬 눈, 놀랍도록 순진한 느낌을 관찰한다.

나무 한 그루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전 존재로 그것을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물들은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심함은 어떤 습관을 부인하고 부정할 때 생긴다.

추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추하다는 것을 알 때,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보면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때, 원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으며, 그것을 향한 문을 결코 닫지 않으면서 그렇게 완전하게 존재할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내면적으로 민감해질 때, 그때 그것으로부터 놀라운 힘을 지닌 무심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대가 지금, 오늘,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다음 생에(그런 것이 있다면) 다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중요한 건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씨앗이나 슬픔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것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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