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도(道)는 험난하지 않다.
좋고 싫음을 가리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이나 미움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료해서 숨길 것이 없다.
하지만 털끝만한 구별이라도 하게 되면
하늘과 땅은 한없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픈 마음이 있으면
좋다거나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좋고 싫음의 갈등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가 선택하면 분열하게 된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은 통일체다.
존재는 분열하지 않은 채 깊은 조화 속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일체성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분열(mind)이 숨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그 양쪽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고, 추한 것은 아름다워진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없다.
경계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흐른다.
마음에는 고정된 경계가 있다.
고정성이 마음의 본질이고 유동성이 <삶>의 본질이다.
마음에 항상 강박관념이 깃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늘 고정돼 있고 그 자체에 고정성이 있다.
그리고 <삶>은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체로 부드럽게 양극을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해서는 안 된다.
<삶>을 있는 그대로, 그 전체성(全體性)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을 함께, 사랑과 미움을 함께, 행복과 불행을 함께, 고민과 환희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두 가지와 함께 살아간다면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어디에서 선택이 들어올까?
만약 고민은 환희와 다를 바 없고, 환희는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면-그렇게 된다면 어디에 선택이 있는 것이고,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 선택이 떨어져 나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물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는 동안은
마음의 평안은 헛되이 어지러진다.
도(道)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그러나, 좋다든가 안 된다는가 택한 탓으로
참 모습을 못 볼 뿐이다.
뒤얽히는 바깥 일 속에도
안쪽의 공무(空無) 속에도 살아서는 안 된다.
평온하게 무엇을 구하지도 말고
위대한 일체성 속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그릇된 사물의 인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적을 얻으려고 행동을 억눌러 보아도
바로 그 노력이 도리어 인간을 행동으로 채운다.
어느 쪽이든 한편의 극단이 있는 한
결코 일체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단 하나밖에 없는 이 도(道)에 살지 않는 한
행동하는 일도 정적을 얻으려는 일도
단정하는 일도 부정하는 일도 이루지 못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도>는 광대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남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어야 마땅한 모습이다.
완전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들떠 있다.
오직 한 사람, 그대만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대만이 분열돼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과거는 자연에 속하고 미래는 신에 속한다.
인간은 두 영원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처럼 긴장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을 향하고, 때로는 신을 향해 움직인다.
어떤 때는 이쪽, 어떤 때는 저쪽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동요해 안정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잡아라, 그러면 어느 쪽의 길이라도 상관없다.
장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리잡는 것을 지지한다.
자연의 품에 자리를 잡는다면 인간은 신처럼 된다.
그대는 신이 된다.
붓다는 앞으로 나아가 신이 되는 길을 지지한다.
그렇게 해도 인간은 자리를 잡는다.
뒤로 물러서든가, 아니면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힘차게 나아가든가다.
단, 다리 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것의 하나다.
다시 말해서 뒤로 돌아가든 앞으로 나아가든 인간은 똑같은 종착역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돌아가고 나아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리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인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탁하지 않은 눈으로 어떤 생각도 품지 말고 그대는 그저 바라본다.
그대는 어떤 거부나 받아들임도 없이 오로지 순수하게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눈 뒤에 사고(mind) 따위는 존재하지 않듯이, 마치 자신의 눈이 단순한 거울에 지나지 않듯이, 거울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제 앞에 온 물체를 무엇이든 그저 비출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다.
만약 그대의 눈 뒤에 사고(mind)가 없다면, 그 눈이 그냥 비추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로지 보기만 할 뿐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비난이나 칭찬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더할 나위없이 명료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명료성, 의견도 편견도 지니지 않는 이 눈-그것으로 그대는 광명을 얻는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는 수동적이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력은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수동적이려고 애를 쓸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행동적이 되어라.
몸과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하면 수동성이 찾아온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것은 오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생각토록 하라.
그러면 무념이 찾아온다.
그대가 사고를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것은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한다.
완전한 것만 떨쳐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완전한 것은 스스로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간다.
행동적이 되어라.
행동 그 자체가 수동성이 일어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전면적으로 활동하라, 그러면 전면적으로 수동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 두 극단이 만나고 미묘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 미묘한 균형이 사먀크트바(samyktva)다.
그 미묘한 균형이 정적이다.
그 미묘한 균형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평안, 절정, 최고의 상태다.
왜냐하면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바깥과 안, 능동성과 수동성이 균형을 유지할 때-갑자기 인간은 그 양쪽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 그대는 이미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갑자기 그대는 제3의 세력-방관자, 목격자다.
하지만, 그것은 분투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시도해 보라, 그것도 모든 일에.
그대가 누구에게 미움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 이동하려고 애써 보라.
그대가 누구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한 가운데로 옮기려고 애써 보라.
무엇을 느끼든 그대가 한 가운데로 움직이려 애를 쓴다면 틀림없이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양 극단의 사이에 그 양쪽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사랑도 느끼지 않고 미움도 느끼지 않게 되는 지점이다.
이것이 붓다가 우페크샤, 즉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관심이라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니다.
우페크샤란 그곳에 서면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그런 중간점을 뜻한다.
그곳에서는 이미 「나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미워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누구한테도 동화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떤 초월이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초월이 개화(開花)다.
바로 그것이 달성해야만 하는 성숙, 바로 그곳이 종착역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세상만사의 실재를 부정하면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세상만사의 공허를 주장하면
역시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만큼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다.
말이나 생각을 그만 두는 게 좋다.
그러면 모를 일 무엇 하나 없다.
#신심명 #승찬

보는 것은 직접적이다.
만지는 것은 직접적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간접적이다.
생각하면 놓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는 실재를 알 수 있다.
춤추는 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노래하는 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자는 실재를 계속해서 놓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생각하는 것은 멈추어야 하지만, 무의식이 되어 멈추는 게 아니다.
더욱 의식적으로, 좀 더 빈틈없이 의식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고에 흘러들어가 있는 에너지를 의식 속에 쏟아부어 자기 안에 '지켜보는 자'가 일어서도록.
그러므로 명심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은 영창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고과정을 '지켜보는 자'가 됨으로써 멈춰야 한다는 것을.
그대가 깊이 보고 언어를 꿰뚫는다면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틈이 생긴다.
구름이 갈라지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대는 빈틈없이 의식하고 느끼고 있다-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의식 속으로 끌어올려진다.
불꽃은 더 크고 요란하게 타오른다.
그리고 그대는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좀 더 많은 것을 만지고, 좀 더 많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대의 행위는 어떤 새로운 질(質)을-'신성한 것'의 질을 띤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
그러나 겉모습만 좇으면 바탕을 잃는다.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이 공허한 세계에 나타나는 겉모습의 변화를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지한 탓이다.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의견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무르지 말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모든 보완 관계는 절대의 하나에서 비롯됐다지만
그 하나에도 사로잡혀서는 아니 된다.
이 길 안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에 해입을 것은 없다.
세상사에 방해 받는 일 없으면
그것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사물을 분간하는 힘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전의 마음은 이미 없다.

#신심명 #승찬

그대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작은 세포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었다.
그런 다음 작은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꿈 많은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찢기고 실망으로 가득찬 한 실패자, 한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내면을 본다면 모든 게 변함없이 그대로다.
의식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인간은 놀란다.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
의식에는 나이가 없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열두 살인지 마흔 살인지 예순 살인지 모른다.
나이는 육신이나 껍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나이를 갖지 않는다.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일단 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절대에 중심이 잡히면 그대의 질은 변한다.
그러면 인간은 볼 수 있다.
인간은 거울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거울에 실재가 비친다.
하지만,먼저 자신이 거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눈을 감는 순간, 그대는 엄청난 부자일는지 모르지만, 내면은 한 가난한 거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위대한 대통령이나 수상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죽음은, 그 권력이 단순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권력은 죽음 가까이 다가서면 무기력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하는 것만이 힘이다.
다른 모든 것은 무기력하다.
인간은 한 순간 그것을 믿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 진실을 불러들이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늘 떠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바로 그 죽음이 판단기준이다.
무엇이든 죽음이 무효로 하는 것은 효력을 잃는다.
무엇이든 죽음이 승인하는 것이 인정을 받는다.
무엇이든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무엇이든 죽음보다 강력한 것이 실재다.
실재는 죽지 않는다.
비실재(非實在)는 수만 번 죽음을 맞이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내재하는 광명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허를 모두 초월하는 것이 있다. 
 
갑자기 인간은 겉모습과 공허를 초월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 하나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고 무엇 하나 공허가 아니다.
모든 것이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다.
모든 나무, 모든 강, 모든 바다가 '신성'으로 흘러넘친다.
그때 신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것을 진리라고 불러도 좋고, 또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표현으로 불러도 좋다.
그 실재는 어디에나 있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상념의 대상이 없어지면
생각하는 주체도 사라진다.
마음이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듯.
사물이 대상인 것은 생각하는 주체 탓
마음이 마음인 것은 사물 탓이다.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이해하는 게 좋다.
이 공 속에서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각자와 함께 전 세계를 포함한다.
만약 성기고 촘촘한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으면
편견에도 의견에도 유혹되는 일은 없다.

#신심명 #승찬

일단 꿈꾸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해했다면 대상 세계는 사라진다.
세상은 있어도 그것은 객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생명력을 지닌다.
모든 것이 주체가 된다.
종교인들이, 「모든 게 신이다」하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신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어딘가에 앉아서 제어하거나 조작하거나 공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신이란 비유에 불과하다.
그 비유는,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비슷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주체성이 있고 모든 것은 살아서 고동치고 있다-게다가 그 고동은 자잘한 과정이 아니다-그 고동은 전체의 맥동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양자의 상대성과 공(空)의 통일체인 이 근본 실재를 깨닫는 게 좋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에워싸는 '사물'의 세상 탓이다.
자신이라는 경계가 존재하는 것은 자신 주위에 있는 '사물'의 경계 때문이다.
그 경계가 없어지면 자신이라는 경계도 사라진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의존하고 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바깥 세상의 '사물'은 서로 접합돼 있다.
다리가 놓여 있다.
한쪽 둑이 없어지면 다리는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 그 다리와 더불어 다른 한쪽의 둑도 사라진다.
둑은 한쪽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대성의 의미다.
그래서 그때 거기에 통일체가 있다.
공(空)의 통일체다.
인간은 공, 꽃도 공이다.
그 꽃에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중심이 있을 수 있겠나?
이것은 붓다의 가장 심오한 깨우침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것을 이토록 아름답게 주장해 온 사람들은 불교도들뿐이었다.
불교도는 말한다.
그곳에 아트만(atman)은 없다, 자기는 없다고.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빚어 왔다.
왜냐하면 힌두교들은 그 신앙의 대부분이 아트만과 자기와 초자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한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사고작용(mind)이 전면적으로 침묵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겠나?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소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전체인데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태와 배경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붓다의 공(空), 아나타(anatta : 에고가 없는 상태)다
이 말은 아름답다.
아나타, 무아(無我).
자신은 이제 없다.
그래도 자신은 존재한다.
사실 인간은 전체로써 존재한다.
인간은 개인으로가 아니라, 한정되고 분리되어 존재한다.
뭔가에 둘러싸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전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는, 구별되고 한정된 존재로는 이제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위대한 도(道)에 사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시야가 좁은 자는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수록 그 걸음걸이는 더디다.
그리고 집착은 멈출 곳을 모른다.
깨달음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엉뚱한 길이다.

사물에 대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케 하라.
그러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사물의 자연과 자신의 자연에 따르는 게 좋다.
그러면 가로막히는 일 없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생각이 울타리 속에 있으면 진리가 숨는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둡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잡한 판단작업은 성가심과 피로를 가져다 줄 뿐,
구별하고 차별하는 일에 무슨 득이 있는 걸까?

#신심명 #승찬 

오로지 이 한 길만을 걷고 싶다면
감각과 상념의 세상도 꺼려서는 안 된다.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광명의 징후다.
현명한 자는 목표를 갖지 않고
우둔한 자는 스스로 제 발을 묶는다.
존재하는 것은 유일, 법, 참됨뿐.
구별은 무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날 뿐이다.
분별력으로 큰 마음을 구하는 것이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크다

#신심명 #승찬

그럼 이 위대한 도(道)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대한 도(道)란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차 뭔가 된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데는 어떤 시간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지금까지 늘 그 안에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대 는 그 목적지에 있다.
그대는 그 목적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대는 그곳에서 나와서는 존재하지 못 한다.
그대가 그곳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그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어디로 가든 그대는 그대의 도(道)를 자신 속에 지니고 간다.
그것은 그대의 고유 본성이다.
그것은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 놓거나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대는 이미 그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 '그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미래를 볼 필요가 없다.
오로지 이곳에 있도록 하라.
그러면 그것은 그대의 눈에 뜨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안심도 불안도 망상 탓이다.
광명과 함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
모든 시비는 무지한 해석으로 일어난다.
꿈 같고 허공의 꽃 같은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얻음과 올바름, 그릇됨과 같은 생각들은
결국은 한 순간에 멈춰야만 한다.
한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멈춘다.
상념이 어떤 구별도 하지 않으면
만물은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단 하나의 정수(精髓)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정수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해탈이다.
모든 게 동등하게 보일 때
영원의 자아에 다다른다.
그곳은 비교도 비유도 불가능한
인과((因果)의 굴레가 벗겨진 곳이다.

#신심명 #승찬

오로지 보도록 하라.
그러면 문제는 그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뭔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투영하면 상대는 사랑스럽게 보인다.
미움을 투영하면 상대는 추하게 보인다.
상대는 없다.
그대는 참된 그 사람을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는 사고의 눈을 통해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경전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로 가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고 없이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것 뿐이다.
꽃을 볼 때도 머리가 뭐라고 말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그대는 오로지 그것을 보기만 하라.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지금의 그대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고에는 형상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념에 의해 무형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형의 실체가 보이게 되면 전 세계는 마치 하나의 바다와 같다.
그리고 모든 형태는 그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파도 속에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그 '하나인 것'이.
지금은 모든 것이 '여럿'이다.
그것은 사물이 '여럿'이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 갈라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물이 '여럿'으로 보인다.
마치 거울을 깨뜨린 것과 같다-많은 파편이 있다.
그 깨어진 거울조각마다 영상이 생기고 많은 얼굴이 보이게 된다.
그곳에 서 있는 그대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울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얼굴이 보인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이원성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면
하나 자체도 머물 수 없다.
이런 궁극의 땅에는 
어떤 규칙이나 묘사도 적합치 않다.
도(道)와 조화를 이루면 하나가 된 마음에서
이기심의 모든 노력은 그친다.
의심과 망설임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
단 한 차례의 가격으로 멍에는 벗겨지고
모두 멈춤 없이 흐르고, 다시 기억하는 자도 없다.
모든 것은 텅 빈 채 명료하고
마음의 힘을 쓰는 일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제 사고도 감정도 지식도 상상력도
이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승찬은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그 곳에 뭔가 정지해 있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정지에 이른다.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인간은 달린다, 인간은 걷는다,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은 어디로 향한다는 것일까?
오로지 어디에선가 쉬기 위해서 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달리는 것은 휴식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움직임은 정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정적은 이미 그곳에 있다.
뜀박질해 보라.
자신 속에 있는 무엇인가는 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달리지 못한다.
자신의 의식은 정지한 채 그대로다.
인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무엇인가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은 그 부동(不動)의 중심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감정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 속의 무엇인가는 그것에 얽매임 없이 휩쓸리지 않는 그대로다.
이 연관성이 있는 모든 인생은, 결코 관련을 맺는 일 없는 그 요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자신이 사랑 속에 있을 때나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그것이 미움으로 바뀌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미움이 돼 가는지를.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지켜보도록 하라.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자신이 한 발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대의 생명을 밝히고 있는 불이 순간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그대의 젊음이 어떤 식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지를 지켜 보는 것이다.
반대의 극단을 주시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부한 패턴은 보강되는 게 아니고 그것에 의해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사랑 속에서 미움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 모두를 초월한 정적을 달성하게 된다.
만약 삶과 죽음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와같이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이 실재와 바로 조화하기 위해서는
의심이 일어나면 그냥 '둘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좋다.
이 '불이(不二)' 속에서 무엇 하나 분리되는 것도 없고
또 배제되는 것도 없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광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 진실로 돌아감을 이른다.
이 진리는 시공의 크고 작음을 초월한다.
그곳에서는 한 순간의 생각도 만년의 영원과 다를 바 없다.

#신심명 #승찬

'진여'의 태도라는 것은 운명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나 운명이나 팔자와 같은 어떤 것도 끌어들이지 않는다.
단순하게 사실을 보라, 사태의 '사실성'을 그냥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하면 그것에 문이 있다.
문은 항상 있다.
그래서 인간은 초월한다.
'진여'란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와같은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그리고 일단 어우러지면 인간은 '진여' 속에, 타타타 속에, 이해 속에 어우러진다.
그곳에는 자신이라는 자도 없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없다.
자기도 없고 다른 자도 없다.
'진여' 속에서, 삼라만상 본성의 깊은 이해 속에서 경계는 사라진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육체는 좁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좁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광대한 하늘처럼 한없이 넓다.
이 육체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이 육체는 아주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에너지만 더 담겨도 이 그릇은 넘쳐 버린다.
인간의 섹스란 이 그릇, 이 좁은 육체가 넘친 것이다.
하지만 사하스라라가 열린다면,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천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한장 한장 하염없이 벌어져 결코 끝나는 일은 없다.
전체가 담긴다 해도 여전히 무한한 공간이 남아 있다.
붓다는 우주보다 크다고들 한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물론 그 육체가 우주보다 클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붓다는 연꽃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주보다 크다.
이제 이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백만이라는 우주가 그 속으로 떨어져 재흡수되어 연꽃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하면서도 여전히 성장을 계속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여기도 공(空), 저기도 공(空)
하지만 무한한 우주가 늘 눈 앞에 있다.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음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경계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심이나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이 실재와 아무 연관도 없다.
하나가 모두인 세상을 걷고
식별하는 일 없이 뒤섞여 가라.
이런 깨달음 속에 사는 게
미완성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길이다.
이 '믿음'속에 사는 게 '불이(不二)'로 향하는 길이다.
'불이'야 말로 '믿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다. 그곳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다.

#신심명 #승찬

실재를 보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별은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바다는 그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 역시 그런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대가 죽으면 벌레가 그 육체를 먹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먹이가 된다.
그대는 나이가 들어 죽은 다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음식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로 많은 것을 자신의 식량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들의 먹을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식량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슬이다.
그런데 그대는 삶에 매달리려 한다.
그럼 사과는 어떻게 되는가?
사과 역시 삶에 집착하려 한다.
밀은 어떨까?
밀 역시 밀로만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삶은 끝나는 수밖에 없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승찬은 옳다.
승찬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승찬은,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언어는 정신(mind)의 창조물이다.
시간 역시 정신의 창조물이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면 시간은 사라진다.
생각을 버리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해 간다.
시간은 없다.
시간이 없으면 그곳에 영원이 있다.
시간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있다.
진리는 영원하다.
그리고 인간이 손에 넣은 모든 것은, 그 진리가 극히 짧은 순간에 비친 투영에 불과하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모든 메시지는 마음과 말과 시간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신심명 #승찬 #오쇼_라즈니쉬_강의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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