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그림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한 훈련을 받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미국은 추축국樞軸國의 침략 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 세 나라가 부당한 정복 행위로 국제 평화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추축국이 권력을 쥔 곳이 만주국이든 에티오피아든 폴란드든, 그것은 그들이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사악한 길로 나아갔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공존공영', 또는 적어도 자유무역을 위한 '문호 개방'이라는 국제간 규약을 위반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전쟁의 원인을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된다.
일본은 계층제도(hierarchy)를 수립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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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은 승리의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바탕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이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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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기되고 충분히 계획된 일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일본인은, 모든 사태는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란 것이고 결코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그런 주장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공격당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적을 우리 손안에 끌어들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적이여, 올 테면 오라.
우리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 오히려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기가 왔다.
우리는 이 좋은 기회가 온 것을 기뻐한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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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황의 뜻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양날의 칼이었다.
많은 포로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창 한 자루 외에 아무런 무기가 없더라도 주저 없이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천황의 명령이라면, 즉각 싸움을 멈출 것이다."
"만약 천황이 명령한다면, 일본은 내일이라도 무기를 버릴 것이다."
"만주의 관동군-가장 호전적이고 강경한-조차도 무기를 버릴 것이다."
천황의 말씀만이 일본 국민에게 패전을 인정하게 하고, 재건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가 있다."
이런 말에서 천황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천황에 대한 무조건·무제한적 충성은, 천황 이외의 다른 모든 인물과 집단에는 여러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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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은 보통 4대 1이다.
그런데 일본군이 가장 많이 항복한 홀란디아(Hollandia)에서도 그 비율은 1대 5였다.
이것도 북부 미얀마에서의 1대 120에 비하면 현저한 진보였다.
그러므로 일본인에게 포로가 된 미군은 단지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체면을 떨어뜨린 자가 된다.
그들은 포로가 부상당하거나 말라리아, 이질에 걸려 '완전한 인간'의 부류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폐물' 취급을 했다.
많은 미국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또 그 웃음이 교도관을 얼마나 자극하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포로란 치욕을 입은 자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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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계층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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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서로를 인식해야만 하는 계급의 차이-이런 것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는, 단순한 계급의 차이가 아니다.
성별이나 연령, 서로의 가족관계, 과거의 친분관계 등이 모두 고려사항이다.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처지가 바뀌면 그에 알맞은 존경을 표해야 한다.
가령 민간인이었을 때는 친분이 돈독해 따로 인사를 안 하는 사이였어도, 한 사람이 군복을 입으면 평복을 입은 친구가 경례를 한다.
계층제도를 지켜가려면 수많은 인자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특수한 경우가 생기면, 그 인자 중 어떤 것은 마이너스로 작용해서 힘을 잃기도 하고, 어떤 것은 플러스로 작용해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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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치 형태와 이와 유사한 서양의 사례의 차이는, 형식에 있지 않고 기능적인 점에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 정치 형태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윤리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낡은 복종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각하'들이 '알맞은 위치'에서 직분을 다하면 반드시 그의 특권을 존중해준다.
그것은 해당 정책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국가가 지방 행정의 범위까지 그 권한을 남용할 때에도, 그 지배권은 황송하게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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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바로 국가 신도神道이다.
국가신도國家神道는 미국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국가신도國家神道는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서양의 신앙의 자유 원칙에 조금도 저촉되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에서 성조기에 경례를 요구하는 것이, 조금도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단순한 충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종교가 아니기'때문에 서양의 비난을 받을 염려가 없었으므로, 일본인은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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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이자 최대의 채무인 '천왕의 은恩'을 일컫는 경우, 은恩은 항상 무한한 헌신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천왕에 대한 채무로서, 사람들은 왕은王恩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인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왕이다.
그러나 윗사람이 누구인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몇 세기에 걸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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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에게 뜻밖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일본인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일본인은 이웃 사람이나 예부터 정해진 계층적 관계에서는, 은恩을 받는 번거로움을 알면서도 기쁘게 그 번거로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상대가 단순히 아는 사람이거나, 자신과 대등한 사람인 경우에는 은恩을 받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은恩의 결과에 휩쓸리는 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거리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 제멋대로 참견하면, 그 사람에게 은恩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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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기리의 규칙은 엄밀히 말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다.
그것은 모세의 십계 같은 일련의 도덕규범이 아니다.
義理기리로 강요당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의감을 무시하기도 한다.
일본인은 가끔 "나는 義理기리 때문에 義기를 지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義理기리의 규칙은 이웃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義理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義理기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義理기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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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義理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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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골에서는 가족이 모두 잠들고 처녀가 침상에 든 깊은 밤에 동네 총각이 처녀를 방문하는 풍습이 있다.
처녀는 총각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때 총각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설사 거절을 당해도 다음날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 변장은 처녀에게 누구인지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처럼, 뒤에 치욕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궁지에 빠지지 않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어떠한 계획이건 성공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예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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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여 절망에 자포자기하여 굴복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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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처럼 생각된다.
전통적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은 뜻밖에도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五官의 쾌락을 허용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일본은 세계 유수의 불교 국가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는 이런 점에서 석가 및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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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두 영역은 모두 공공연히 인정된다.
양자의 구별은 미국인의 생활처럼, 한쪽은 사람들에게 공인받은 영역이고 다른 한쪽은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발을 들여놓는 영역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의 '알맞은 위치'를 정해두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나 한량도 마찬가지여서,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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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다투는 선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영혼(니기타마和魂)과 '거친'영혼(아라타마荒魂)이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은 지옥으로, 다른 한쪽의영혼은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영혼은 각각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모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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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영화는 분열식이나 군악대나 함대의 연습이나 거포의 자랑스러운 위용을 기세 좋게 그려내지 않는다.
러일露日전쟁을 다룬 것이든, 중일中日전쟁을 다룬 것이든,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장면은 여전히 단조로운 진흙탕 속의 행군, 비참한 전투의 고통, 승패가 나지 않는 작전이다.
마지막 장면은 승리도 아니고, '반자이萬歲'돌격도 아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 깊이 묻힌 중국 어느 도시에서의 숙영宿營의 정경이다.
또는 세 번에 걸친 전쟁의 생존자로 저마다 장애인, 절름발이, 장님이 된 일본인 부자3대를 비춰준다.
또는 병사가 전사한 후, 후방에 있는 가족이 남편이자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고, 용기를 내어 어떻게든 그 없이도 살아가는 모습을 비춰준다.
박진감 넘치는 영국과 미국의 '캐버케이드(Cavalcade)'식 영화 배경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상이군인의 갱생이라는 테마를 극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고사하고 그들이 싸우는 전쟁의 목적조차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 관중에게는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이 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군국주의자들의 선전도구가 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의 후원자들은 일본 관중이 그것을 보아도 결코 반전사상을 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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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인정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인생이 '충忠의 세계', '효孝의 세계', 의리義理의 세계', '인仁의 세계', 인정人情의 세계', 그밖의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하지 않고, '효를 모른다', '의리를 모른다' 등의 말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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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지상명령이나 황금률에 호소하지 않는다.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일본인은 '효孝를 위해' 행동할 때와, '단순히 의리義理를 위해', 혹은 인仁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 전혀 다른 사람처럼-서양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행동한다.
또한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그 '세계' 속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당연히 행동 기준이 변한다.
주군에 대한 의리는 주군이 부하를 모욕하지 않는 동안에는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지만, 일단 모욕을 받은 뒤에는 모반을 일으켜도 상관이 없다.
1945년 8월까지 충忠은 일본 국민에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과 싸울 것을 요구했다.
천왕이 라디오로 일본의 항복을 고하고 충의 요구 내용이 변경되자, 일본인은 그때까지와는 정반대로 외국인에게 협력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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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인용한 조지 샌섬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악의 문제와 정면에서 부딪히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악의 행위는 그와 같은 우주적 원리를 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각자의 영혼은 원래는 새 칼과 마찬가지로 덕으로 빛난다.
다만 그것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슨다.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갈아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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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든지, 어떤 개인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감정에 방해를 받아 자신의 의무義務 또는 의리義理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약자라고 비난한다.
서양인은 대개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인의 견해로는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의무義務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강인함은 반항이 아니라 복종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의 소설이나 영화의 줄거리는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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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이나 '일본 정신'에 의해 지도상에 그려진 '길(road)'을 따르는 열정을 말한다.
개개의 문맥에서 마코토-성실-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일본 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어떤 측면의 칭찬, 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어떤 행도의 칭찬이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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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인은 치욕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道標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발생할 우연을 예견할 수가 없는 것 등이 치욕(하지)이다.
그들은 수치는 덕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수치를 느끼기 쉬운 사람이야말로 선행의 모든 율법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virtuous man(유덕한 사람)'이나 'man of honor(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로 번역된다.
수치는 일본의 윤리에서 '양심의 결백', '신에게 의義로 여겨지는 것', 죄책감이 서양의 윤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사람은 사후세계에서 벌을 받는 일이 없다.
일본인은-인도 경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승려를 제외하고-이 세상에서 쌓은 공과功過에 따라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은 -충분히 교의를 이해한 뒤에 기독교로 귀의한 사람을 제외하면-사후의 상벌이나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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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심각하게 느끼는 부족 또는 국민이 모두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방침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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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의 밑바탕에 있는 철학이 '죽은 셈치고 산다'는 태도의 밑바탕에도 숨어 있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일체의 자기 감시, 일체의 공포심이나 경계심을 버린다.
그는 죽은 자, 즉 이미 올바른 행동방침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초월한 사람이 된다.
즉은 자는 이제는 恩을 갚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은 모순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력과 주의력은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목적의 실현을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여러 가지 불안의 무거운 짐을 가진 '보는 나'는, 나와 내 목표 사이에 가로막고 서 있지 않다.
'보는 나'와 더불어 지금까지 내 노력에 방해가 되어왔던 긴장과 노력의 의식 및 의기소침에 빠지는 경향 역시 없어졌다.
이제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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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인의 추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상급생이 하급생을 괴롭히는 관습이다.
중학교 상급생은 하급생을 여러 방법으로  괴롭힌다.
그들은 하급생에게 굴욕적인 일을 시킨다.
이런 일을 당한 하급생은 십중팔구 원한을 품는다.
일본의 소년은 이런 일을 결코 재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급생 앞에서 '엎드려 뻗쳐'를 당하거나 야비한 심부름을 당한 하급생은, 자신을 괴롭힌 상대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당장 보복할 수 없는 복수이기에 더욱 복수에 열중한다.
복수는 이름에 대한 의리를 실행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덕행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가족적 연고를 이용하여, 몇 년이 지난 후에 자기를 괴롭힌 상대가 어렵게 잡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도록 술책을 쓰는 경우도 있다.
또한 때로는 유도나 검도 실력을 닦아 졸업 후에 도시의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상대에게 창피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언젠가 갚지 않으면 '무언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일본인의 복수의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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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병이 군대 훈련을 받고 나오면 완전히 변해 '진짜 저돌적인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변화는 그들이 전체주의적 국가 이론을 배웠거나 천황에 대한 忠충이 주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굴욕적인 기합을 당한 경험이다.
일본식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자존심(amour-propre)'에 집착하는 청년은, 그런 사태에 직면하면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변하기 쉽다.
그들은 조롱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은 입장이 바뀌면 더욱 극렬한 고문자가 된다.
근대 일본의 중학교나 군대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이 옛날부터 일본에 내려오는 조소와 모욕의 습관에 기인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학교나 여러 상급 학교, 또는 군대에서 이런 관습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이름에 대한 의리의 법도는,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관습을 미국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주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집단은 뒤이어 다음 피해자의 무리에게 학대를 가한다.
#국화와_칼 #국화와_칼

일본에서는 개인에게 감정을 감추고 욕망을 버리며 가족, 단체 또는 국민의 대표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도록 요구한다.
일본인은 그런 방침이 요구하는 일체의 자기 훈련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대단히 무겁다.
그들은 과도하게 억제해야 하며, 따라서 도저히 개인의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들은 이런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군국주의자에게 이끌려 끊임없이 희생이 쌓이고 쌓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런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들은 독선적인 인간이 되었고, 비교적 관대한 윤리를 가진 사람들을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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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것이다.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할 것이다.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국화와_칼 #루스_베네딕트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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