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가를 우리는 세계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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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아돌프 아이히만과 마리아 셰펄링의 아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인류(humanity)에 대한 범죄 및 나치스 통치 기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에 대한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유죄라고 생각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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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이 질문에 대답했다.
이 대답은 피고인 자신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피고 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 주장을 하게 한 이유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한 주권국가는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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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은 아이히만을 파멸시킨 악덕이었다.
그가 전쟁이 끝날 무렵 휘하의 사람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즉, 그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 '제국의 적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는 무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인가 양심에 걸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나중에 그가 좋아하게 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인 빈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장 요제프 뢰벤헤르츠 박사의 따귀를 때린 점이다.
(당시 그는 그의 요원들 앞에서 사과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계속 그를 근심하게 했다.)
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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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 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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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외부로부터 온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히만의 주장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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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이주자'란 단지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대중들 한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의 민족들 중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반대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실상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냉대' 속에서 12년 동안 그렇게 산 독일인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수는 무의미할 정도였고 심지어 레지스탕스 요원들도 그 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근년에는 '내면적 이주'라는 구호는 (이 말 자체가 애매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한 사람의 영혼 속의 내면적 영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이 이주자처럼 행동하는 방식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종의 조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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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의 명령' 대 '국가적 행위'라는 낡아빠진 구절이 끝없이 오갔을 뿐이었다.

이 구절들은 뉘른베르크 재판 기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토론 전체를 지배했다.
이는 전례가 전혀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전례가 존재하며, 또 그 전례에 속한 기준에 따라 재판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온건한 성격을 지니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러한 견해들에 분명히 도전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안할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 바를 수행한 것 외에도 그는 명령에 따라 (항상 '보호받을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맹목적인 복종, 또는 그가 '시체들의 복종(Kadavergehorsam)이라고 불렀던 미덕과 악덕을 차례로 강조하면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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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자신의 나치 과거에 대해서는 대충 말해버리는 데 진정한 천재성을 발휘한 전후의 독일에서는 종종 좋지 않은(ungut)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마치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적 사랑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데 통탄스럽게도 실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정규 외교적 임무 또는 군사요원, 보안경찰대 지역사령관 등에 덧붙여)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무자비한_강인성

이제 나타난 것처럼, 최종 해결책에 대한 그의 역할은 과도하게 과장되어 왔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허풍 때문이기도 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뉘른베르크와 다른 전후 재판들에선 피고인들이 아이히만을 핑계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재판을 전혀 과장되지 않은 고통의 사실에 기초를 두려 한 검찰은 분별없이 그 과장된 내용을 과장해 댔다.
아니 항소심의 판결문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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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멍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화장을 통해,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불태움으로써, 폭약과 화염방사기와 뼈를 갈아버리는 기계들을 이용한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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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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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수색대가 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가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제 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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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 믿지 않았다.
법정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 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 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낸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말과_사고를_허용하지_않는_악의_평범성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그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예루살렘의_아이히만 #한나_아렌트 #무사유 #현실로부터_멀리_떨어져_있다는_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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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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