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주로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주로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공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최대한의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주로 여자들이 선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매를 가꾸고 맵시 있는 옷으로 치장하여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매력적을 만드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남녀가 모두 사용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예절이나 대화를 유쾌하게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계발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며,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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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배후에 있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가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할 만한-또는 사랑 받을 만한-적당한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할 대상'의 선택과 관련하여 20세기에 일어난 큰 변화를 들 수 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많은 전통적인 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자발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결혼은 쌍방의 가문에 의해서든 혹은 결혼 중매인을 통해서든, 또는 그런 중매자가 없어도 관습에 의해 성립되었다. 


결혼은 사회적 고려의 토대 위에서 결정되었으며, 사랑은 결혼을 한 후에야 발전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구세계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최근 몇 세대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에서도 이런 관습적인 사고방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자유라는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기능'의 중요성보다 '대상'의 중요성을 과장하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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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과 상호 유리한 교환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의 진열장을 바라보고 스릴을 느낀다든지 현금이나 할부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또는 그녀)는 사람까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여자-또는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남자-는 바로 그들이 구하고 있는 상품인 것이다. 


‘매력적'이라는 것은 보통 개성의 시장에서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멋진 상품을 의미한다.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 시대의 유행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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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상품처럼 대하는 것뿐이다. 


가령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갔다고 하자. 


대상은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이어야 하고, 또 동시에 대상자도 나의 공개된, 또는 숨겨진 자산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나를 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흔히 부동산을 구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는 숨겨져 있는 잠재력이 이러한 매매계약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이 만연되어서 물질적 성공이 높게 평가되는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교환방식과 동일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해도 그다지 놀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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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가정으로 이끄는 세 번째 잘못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최초의 경험을,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 

또는 보다 적절히 표현하면 사랑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혼돈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우리 모두가 흔히 그러하듯이, 지금까지 서로 모르고 지내던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가깝게 느낀다든지 서로 일체감을 느낀다면, 이 합일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흥분된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소외되고 고독하게 지내오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기적과 같은 경험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친밀의 기적은 흔히 성적인 매력과 성의 성취에 의해 시작될 때 더욱 촉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그것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두 사람이 점차 서로를 잘 알게 될수록 친밀감은 그 기적적이었던 감정을 점차 잃어가고 마침내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실망과 권태를 느끼게 되어 최초의 흥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알지 못 한다. 


실제로 그들은 이렇게 정신나간 상태-즉 서로에게 '미쳐버린’ 상태-를 그들의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는 얼마나 고독했던가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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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여 고독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 하고 끝내 실패할 때 정신이상이 생긴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심은 분리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철수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세계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나 모든 문화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이 분리 상태를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개체적인 생명을 초월하여 합일 상태를 발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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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감을 해결하지 못 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의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것은 분리감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결과적으로 전보다 더 강한 분리감을 자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 외에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전혀 좁혀주지 못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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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적인 결합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의 능동적인 힘이며, 


그 힘은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파괴시키는 힘이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그에게 고립과 고독감을 극복하게 하며, 


그를 그 자신이게 하며, 


그의 통합성을 보유하게 한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또 둘로 남는다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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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성격의 사람에게 준다는 것의 의미는 이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주는 행동 바로 그것에서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부와, 자신의 역량을 경험한다. 


이렇게 과시된 생명력과 잠재력의 경험은 스스로를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 


그는 그 자신이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며 살아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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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성적인 기능의 최고 절정은 준다는 행동에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성기를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그는 여성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그가 성적인 능력이 있는 한 그것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줄 수 없다면 그는 성불구자이다. 



여성의 경우도 약간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여성도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성은 자신의 여성의 중심의 문을 열며, 받는 행위 속에서 주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주는 행위를 못 하고 오직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 환자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준다는 행동은 애인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능으로 다시 발생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주며, 

또 유아에게 자신의 모유를 주며,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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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의 영역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는 자기 자신을 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신 안에 살아있는 것을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이다. 


그는 타인에게 그의 기쁨을, 그의 흥미를, 그의 이해를, 그의 지식을, 그의 유머를, 그의 슬픔을, 즉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풍족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생명감을 고양시킴으로써 타인의 생명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타인의 삶에 어떤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지 않을 수 없으며, 상대방의 삶에 준 이것은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다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두 사람이 생에 대하여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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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의 경우에만 준다는 것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배우는 점이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서 자극되며,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하여 자신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서로 관계되고 있다면,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은 주로 생산적인 오리엔테이션의 달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사람은 의존성과 나르시시즘적(자기도취적)인 전능(全能), 타인을 착취하고 싶은 욕구 혹은 저장하고 싶은 욕구 등을 극복한다. 


또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며, 자신의 목표 달성에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그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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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랑의 제3 구성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어쩌면 책임은 지배 또는 소유욕으로 쉽게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아니라 그 어원(語源)을 따른다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존경이란 타인이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은 착취의 부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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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이라는 것은 


오직 내가 독립을 성취했을 때만, 


또한 내가 똑바로 서서 부축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을 때만, 


또 어떤 사람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의 기본 위에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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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고 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합이라는 체험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에서의 지식은 그것이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는 완전한 지식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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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책임·존경, 그리고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것들은 성숙한 사람, 즉 그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노력한 것만큼만 기대하는, 또 전지전능한 자아도취적인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하게 생산적인 활동만이 줄 수 있는 내적인 힘에 근거한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태도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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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사랑은 ‘나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고, 


미성숙의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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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특정한 인간과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한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세계에 대한 한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이나 확대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동일한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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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활동이며 정신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이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 스스로 뒤따라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지만 그 기술을 배우는 대신 알맞은 대상을 기다리며, 

그 대상을 발견하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와 비교될 수 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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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의 태도는 여성은 물론 동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본능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본능적 요인이 아무리 크게 작용하더라도 이 모성애의 원인에는 각별히 인간적, 심리학적 요인들이 있다. 


이 요인들 중의 하나는 모성애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갓난아이를 아직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한 그녀의 사랑과 행복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일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어머니의 권력욕 혹은 소유욕에서 발견된다. 


완전히 어머니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어린아이는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어머니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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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사랑에 있어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분리를 허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심, 즉 모든 것을 주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된다.


많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모성애라는 과업에 실패하는 것도 역시 이 단계에서이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라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애정’ 깊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여성,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을 느끼는 여성, 

그녀 자신의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만이 

분리의 과정에서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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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망은 융합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긴장의 제거가 아니다. 


성적 욕망은 고독감의 불안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또한 정복욕이나 정복당하려는 욕구에 의해, 

공허함에 의해, 

해치거나 파괴하려는 욕구에 의해 자극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랑에 의해서도 자극될 수 있다. 


성적 욕망은, 사랑은 하나뿐이라는 열정적인 감정과도 쉽게 융합되며, 또 그것에 의해 자극받는 것으로 보인다. 


성적 욕망은 사랑의 관념과 결합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서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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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적 결합의 욕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는 탐욕을 동반하지 않으며,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나 정복당하려는 욕망 또한 없다. 


오직 부드러운 애정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육체적 결합의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신제적(酒神祭的)인 일시적인 의미 이상으로 결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는 결합의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사랑 없는 결합은 이방인들을 이전과 같이 남남으로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 그것은 그들을 서로 부끄럽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남남임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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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호,존경,책임,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뿌리박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향한 능동적인 갈망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힘을 실현하고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 포함된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질의 구현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지향되고 있다.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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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역시 그 자신을 사랑한다. 


그가 오직 타인들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명확히 배제하고 있는 이기심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기적인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원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 의해서만 기쁨을 느낀다. 


외부세계는 그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점에서만 관찰된다. 


즉 그는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들의 존엄과 통합성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오직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유용성에 따라 판단한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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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나 라디오 청취, 흡연, 혹은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능력은 바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만약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 혹은 그녀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홀로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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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객관적이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겸손의 태도를 몸에 지니고, 또 그가 어린아이로서 갖는 전지전능의 꿈속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적인 상대적 부재에 의존하며, 또 겸손과 객관성, 그리고 이성의 발전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몰두되어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낯선 사람에게 객관적일 수 없다면 내 가족에게도 진실하게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 역(逆)도 성립한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민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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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용기의 실천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언제 어디서 신념을 잃게 되는가에 주의하며, 


이 신념의 상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하게 행동하고 또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신념의 배반이 사람을 얼마나 약화시키며, 

또 약화될수록 새로운 배반이 더욱 많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의식적으로는 사랑받지 못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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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라는 희망을 갖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념의 행동이다. 


신념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없다. 


신념의 실천에 관해 더이상 말할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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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경영 관료들에 의해,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즉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그들 스스로의 목적으로서 더 많이 소비하는 데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표에 예속되며, 수단은 목적으로 되어버렸다. 


즉 인간은 자신의 특수한 인간적 자질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 전혀 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잘 먹고 잘 입는 기계적인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최고의 자리에 놓여져야 한다. 


경제적 기계는 인간을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인간이 기계를 돕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갖기 보다는 오히려 경험을 공유하고, 일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인, 사랑하는 본성이 인간의 사회적 실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것과 일체가 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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