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의 모든 남녀의 사랑은 아무리 별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남녀간의 사랑은 예외 없이 이 본능이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뿐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소설이나 희곡 작품에도 남녀간의 사랑은 자기 보존의 본능이 성욕 속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욕은 모든 행위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성욕은 젊은 시기에 가장 활발하며 정력과 생각의 대부분을 강제로 동원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 힘은 모든 노력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도 한다. 


성욕은 자기가 하는 일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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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욕은 왜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가? 


그 해답은 너무 간단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꽃을 찾기 때문이다. 


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사랑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장 엄숙한 것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 최대의 이슈이다. 


그 이유는 사랑을 통해 자신들의 후계 세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가 가진 종족 보존 본능의 행위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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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신의 연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찬미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 해도 그 최종 목적은 오직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사명감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정신적 사랑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육체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과, 아무리 둘이 사랑을 확신하고 있어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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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랑에서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이 없다면 어느 남녀가 그토록 서로 만나려고 애쓰겠는가? 


남녀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멋진 옷을 차려입고, 수없이 거울을 보는 그 처절한 노력이 성 충동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하겠는가? 


인간 개체가 이제 이 에로스적 환상의 묘약에 속아서 그것을 행복과 만족으로 여기고 열심히 이기적인 집착에 매달리는 동안, 신이 혹은 자연이 이루려는 인류 종족 유지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만 사실상 인간은 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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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에게 성욕이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과 만족에만 있다면 왜 인간은 상대방 이성을 구하는데 그렇게 까다롭겠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키가 커야 하고 성격은 어떻고 용모는 어떻고 건강과 가문과 재산을 따지는가? 


성적 욕구가 쾌락에 그친다면 상대가 아무 여자나 아무 남자라도 그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들은 어떤가? 


그들도 성적 만족을 위해 그렇게 까다롭게 짝을 고르는가? 


우리가 동물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내면에 이성 선택에 어떤 기준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만큼 짝을 고르는 데 그토록 진지한 선택과 노력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없이 닥치는 위험과 재난에서도 불구가 되지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성적 판타지라는 묘약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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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인간을 만든 신의 뿌리 속에 있으므로 개인의 고통이란 이 지상에 인류의 존속을 원하는 신의 의지보다 중요하지 않다. 


옛 선인들도 이 같은 진리를 이미 알고 인간을 지배하는 신을 잔인하고 사나운 폭군처럼 그렸다. 


이제 인간은 신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상적인 여인 아리아드네를 손에 넣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욕정을 만족시킨 다음 곧 그녀를 버린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일 페트라르카가 사랑에 만족했던들 그는 마치 둥지에 알을 깐 새가 울지 않는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내 글을 읽고 현재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실망하거나 반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 사랑을 하는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되면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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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또 다른 어떤 불행한 사람이 똑같은 꽃을 보고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은 꽃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무관심한 사람은 그 꽃을 그저 무미건조학 바라볼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라는 외적 조건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의 눈으로 꽃을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며 행복이나 불행 역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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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자기를 때리면 금세 적의를 품는다. 


사람도 똑같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멸시를 받으면 불쾌해지고 적의를 품는다. 


이렇게 인간의 명예욕은 항상 제3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칭찬이나 찬사를 받거나 모욕과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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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에서 떠나 현재의 물질적·정신적 가치의 10분의 1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예을 들면 자기 능력에 버거운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남의 눈 때문이며, 지나치게 큰 집에서 사는 것도 남들이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려고 힘들게 사는 것이다. 


자기 수입에 비해 너무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차를 타면서 매달 할부금에 시달리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기 능력에 과분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처분한다면 훨씬 만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불행은 대부분 남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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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고뇌와 번민,불안과 초조의 80~90%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다. 


또한 우리들의 질투나 증오심도 대체로 같은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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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은 주로 안정된 기분과 흐뭇한 만족감을 뜻한다. 


지금의 기분이나 상태가 좀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가 행복이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순간 안정된 기분은 흐트러지고 불만감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 본위의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 허영심을 줄이면 현재의 불행은 50분의 1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 허영심을 없애는 것은 우리들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뽑아버리는 셈이지만 그것은 선천적인 고질병이어서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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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 가지 유전병은 명예욕과 허영심과 자부심이다. 


그 중 허영심과 자부심은 차이가 있다. 


자부심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에 대해 그런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부심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은 말이 적지만 허영심은 말이 많다. 


자부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허영심은 남이 자기를 존중케 하기 위해 많은 설득과 위장이 필요하고 때로는 위압도 필요하게 된다. 


참된 자부심은 자신의 우수한 가치에 대한 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만 허영심은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과대 평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결국은 밑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입이 가벼운 사람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은 말이 적은 사람이 말이 많은 사람보다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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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잃은 재물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한 번 잃은 명예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명예란 개인이 지닌 뛰어난 특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성품, 즉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품을 통해서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명예는 소극적이고, 명성은 적극적이다. 


명예는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명성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특질이나 재질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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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생존을 포기하려면,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커다란 고뇌에 의해 절망적인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치며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절망의 절벽에 섰을 때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제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높은 영혼의 정신적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만이 우리가 말하는 해탈,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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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철학을 연구하고 신앙을 가지려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고 고통이 없다면 아무도 이 세상이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불멸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만일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입증된다면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곧 식어버릴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영원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도 신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유물론이나 회의적인 세계관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화를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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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국가 발전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정치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의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통치자가 전제 정치를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명하고 청렴한 통치자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려있다. 


더럽고 추한 정치 지도자가 다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인물을 골라 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탁월한 통치자를 배출하려면 성품이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의 결합보다 더 실질적인 해결책은 없다. 


이 제안이 나의 유토피아,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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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질병과 재난과 전쟁의 재앙이나 슬픔과 고통이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평화나 행복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불과하다. 


이제 곧 고통과의 투쟁과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날 때까지는 끝없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고통과의 끝없는 전쟁의 계속이며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극히 순식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통과 맞설 무기를 든 채 끝내는 죽어간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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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애의 초반이나 전반부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에 대한 큰 갈망과 희망과 포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사랑이나 행복이나 야망이 한낱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의 후반부에서도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 했다면 그는 여전히 생의 전반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살기는 바라지도 않아.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이미 생의 후반부에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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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육체의 생리적인 현상은 물리학적으로는 유예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들의 정신 활동은 밤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물리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육체나 정신이나 죽음에게 승리를 안겨줄 뿐이다. 


삶의 주인은 결국 죽음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우리를 삼켜버리기 전에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한 순간이다. 


우리는 늘 삶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의지와 욕구를 불어넣고 투지를 불태우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비누 방울을 갖고 노는 것과 같다. 


비누 방울이 끝내는 터질 줄 뻔히 알면서도 숨을 불어넣어 크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애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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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내일은 좀더 나아지겠지, 아니면 내년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겠지’ 하는 기대 속에 살다가 별 소득 없이 세월을 다 보낸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 후회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생존 자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인간은 늘 희망에 속아서 죽음과 씨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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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미궁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울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죽음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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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 때 성욕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충동과 격정, 무서운 광기 등 저 악마적 사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물론 청년기에는 그런 폭풍 같은 긴장의 시간들이며 우울함이나 비애가 깃들어 있어야 하고 노년기에는 평온하고 쾌활한 기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청년기에는 악마의 지배 밑에서 강제 노동을 감수해야 하므로 자유로운 시간이 쉽게 허락되지 않지만, 성욕이 소멸된 후에는 생명의 핵이 소진되고 인간은 껍질만 남은 인형처럼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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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의 우파니샤드 경전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수명이 100세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이전에 병으로 죽게 된다. 


따라서 나이 90이 되어 아무 질병도 없이 졸도나 경련도 없이 숨도 헐떡이지 않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잠자는 듯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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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를 느끼지만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위대성을 더 뚜렷이 느끼게 된다. 


따라서 뛰어난 사람들은 고독해지거나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자기를 깨닫게 된다. 


또한 정신적 고독과 함께 육체적인 고독을 동시에 갖추었을 때 비로소 행복도 충만해진다. 


정신적인 고독만 있고, 육체적인 고독이 없을 경우에는 늘 자기와는 동떨어진 어중이떠중이들과 만나 자유와 마음의 안정을 빼앗기고 그 대가는 전혀 얻지 못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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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 한 것을 보면 ‘저것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갖지 못 한 데서 오는 괴로움’, 즉 갖고 싶은 소유욕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라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물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해 보라는 뜻이다. 


남의 좋은 집을 보고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런 집도 없다면 어디서 살았을까.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상실을 가정해 보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까 본 멋진 집보다 내가 사는 초라한 집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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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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