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 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면 그뿐이다.
그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 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프라즈나 파라미타,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지혜, 저 피안(彼岸)의 경지로부터 온 지혜다.
이 지혜는 모든 종류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을 막론하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것에도 동일시되지 않을 때 이 지혜가 찾아온다.
각성의 불꽃이 연기조차 없이 순수하게 타오를 때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은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심경(The Hear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핵심, 종교의 심장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것을 잊지 말라.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 하라.
그 전에 멈추면 안 된다.
만일 '너는 이것이다. 너는 저것이다.' 하는 대답이 나온다면 특정한 센터(center)가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개의 센터를 통과하고 그들이 내놓은 모든 대답이 지워진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질문 자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현존(現存)한다.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얻은 모든 대답이 터무니없다.
그리고 결국에는 물음을 던지는 일까지 터무니없게 된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 또한 사라진다.
질문과 대답은 공존(共存)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과 대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 쪽 면이 사라지면 다른 쪽 면도 존재할 수 없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렇게 물음과 답이 사라질 때 그대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초월의 차원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반야(般若)'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이다.
이 반야화(般若花)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면의 철저한 침묵 안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현현(顯現)되도록 허용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 반야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이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적당한 토양이 필요할 뿐이다.
반야는 항상 독창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며,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대의 것'이라는 이 말은 거기에 어떤 에고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는 그대의 자성(自性, self-nature)에서 솟아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저 너머에 속한' '저 너머로부터 온'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이라는 뜻이다.
바라밀다의 차원에서 그대는 시간이 사라진 상태로 들어간다.
그대는 공간이 사라진 내면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시간은 그대의 외부에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에는 시간이 사라지는 교차점이 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진리··· 지혜의 완성이 진리이다.
진리는 고귀하고 아름답다.
성스럽고 선한다.
왜 그것을 성스럽다고 하는가?
모든 붓다들이 그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다를 탄생시키는 자궁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디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붓다는 인간이 다섯 개의 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텅 빈 다섯 개의 '스칸다(skandha)'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에고(ego)'라고 불리는 부산물이 생성된다.
이것은 게속해서 째깍거리는 시계와 같다.
분명히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시계를 뜯고 모든 부품을 분해해서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 보라.
어디에 그 소리가 있는가?
아무데서도 찾지 못할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부산물이다.
그 소리는 부품들의 결합에 불과했다.
각 부품이 함께 작동하면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나'라고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섯 가지 요소와 함께 작용하면서 '나'라고 불리는 째깍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나'는 텅 비어 있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거기서 어떤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초연함(Non-grabbing)이 진정한 삶을 사는 방식이다.
집착과 소유가 없어야 한다.
만사가 저절로 일어나게 하라.
삶이 저절로 일어나는 해프닝(happening)이 되게 하라.
그러면 거기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대한 바가 없으므로 실망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다.
성공과 실패라는 게임이 포기되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밤에 달이 자장가를 부르면 잠잔다.
배고프면 먹는다.
이것이 선사(禪師)들이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잔다. 그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나태함(inaction)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하러 나가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돈벌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 사는 착취자가 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행위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배고플 때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행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이다. 
 
공(空)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공(空)과 다름이 없나니,
무릇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공(空)이며,
공(空)한 것은 모두가 형상이니라.
감각, 지각, 충동, 인식 작용도
이와 같느니라.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形象)이다.  
 
남성은 여성이며, 여성은 남성이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삶이다.
사리푸트라여, 서로 상반되는 것들은 상반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깊숙히 관통하며,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이 근원적인 통찰을 보여 주기 위해 붓다는 말한다.-형상은 무형(無形)이며, 무형은 형상이다. 현현(顯現)되지 않은 것은 현현되며, 현현된 것은 다시 현현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사리푸트라여, 그들은 하나이다.
이원적 대립은 표피적인 차원일 뿐이다.
깊은 속에서는 그 모두가 하나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만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만물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 자연 상태 그대로를 따른다. 만물은 오고가는 법이다."
이 수용성 안에서, 이 타트하타(tathata) 안에서, 이 여여(如如)함 속에서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그대는 근심으로부터 해방된다.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
멸(滅)하는 것도 없고, 변(變)하는 것도 없고, 생성하는 것도 없다.
만물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하라.
이런 흐름에 참가하라.
그저 존재하라.
이 존재 안에 침묵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이 존재가 자유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리푸트라여, 여기 내가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이 차원에서는 윤회(輪廻)와 열반(涅槃)이 하나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구별이 없다.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의 차별이 없다.
모든 차별은 사념이 지어낸 것이니, 내가 존재하는 이 차원에는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념이 사라지면 차별 또한 사라진다."
죄인도 사념에서 나왔고, 성자도 사념에서 나왔다.
좋고 나쁨도 사념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념이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낸다.
붓다는 지식이 사라질 때 사념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때 이원성(二元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사념을 버려라.
왜곡 작용을 일삼는 이 매체를 내던져라. 
그리고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라.
마음속에 어떠한 관념도 없이, 마땅히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관념 없이 직접 보라.
순진무구한 눈으로 보라.
지식을 걷어치우고 보라.
그러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이렇게 근심걱정이 사라질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붓다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념이라는 삐뚤어진 매개체를 통해 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완벽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색안경을 덮어쓰고 있다.
이 색안경이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색칠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색안경을 벗어 던져라!
이것이 '마음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이다.
마음이라는 색안경을 버려라.
그러면 거기에 침묵이 있다.
이 침묵 안에서 그대는 신성하다.
그대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신성한 존재였다.
다만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空) 안에는
형상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충동도 없고, 의식도 없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다.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을 비롯하여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다.
무지를 비롯하여 무지의 소멸도 없다.
쇠약과 죽음도 없으며,
이 쇠약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으며,
고통의 멈춤도 없고, 고통을 없애는 길도 없다.
아무 인식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무(無)는 피안(彼岸)의 향기다.
무(無)는 초월의 세계를 향해 열린 가슴이며, 일천 장의 연꽃잎이 만개하는 것이다.
무(無)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이 향기로 가득 찼을 때, 그의 내면이 이 절대적인 무(無)에 도달했을 때, 이 무(無)가 그를 완전히 채웠을 때, 그리하여 그가 구름 한 점 없이 순수한 하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해진다.
이 무(無)는 붓다가 니르바나(涅槃)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 무(無)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無)는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무(無)는 충만하다.
가득차서 흘러 넘친다.
무(無)를 부정적인 상태,단순한 부재(不在) 상태로 생각하지 말라.
무(nothingness)는 물질이 아닌 것(no-thingness)을 의미한다.
물질이 사라지고 궁극적인 실체만 남았다.
형상은 사리지고 무형(無形)만 남았다.
한정된 것들은 사라지고 무한한 것만 남았다.
그러므로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無)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空)안에는
형상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느낄 자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에고가 없을 때는 느낌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각도 없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대는 붓다가 말한 '네 개의 거룩한 진리(four noble truths, 四聖諦)'에 대해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통(苦)이다.
모든 인간이 고통을 받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둑카(dukha), 고통, 아픔, 불행, 번뇌 속에 있다.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고통의 원인(集) 탄하(tanha),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존재한다.
이것이 첫 번째 거룩한 진리, '아리야 사티야(arya satya)'이다.
그리고 고통에는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은 욕망에 있다는 것이 두 번째 거룩한 진리이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세 번째 거룩한 진리는, 이 욕망이 멈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滅).
니로드하(nirodha), 욕망은 멈춰질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욕망이 멈추면 고통은 사라진다.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욕망을 멈추게 함으로써 고통마저 없애는 여덟 개의 길(팔정도, 八正道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보디사트바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득(無得) 때문이니라.
사념의 장막이 없으므로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顚倒)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槃)에 이르니라. 
 
삼세(三世)에
붓다로서 출현하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완성에 귀의하였기에
최상의 옳고 완전한 깨달음을
온전히 깨우치니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제 나는 그대에게 말할 수 있다.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의지해야 할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각성과 주의 깊음(attentiveness)이 그것이다.
그대가 의지할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내면의 근원, 내면의 실존이 그것이다.
그 밖의 모든 의지처는 버려야 한다.
명상의 완성 외에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말라.
세속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일체를 놓아 버려야 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공(空)도 자유롭게 놔 두어라.
찬성이나 반대 어느 쪽에도 구애받지 말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라.
어디에서도 안식처나 의지할 곳을 찾지 말라.
이것이 진정한 출가(renunciation)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顚倒)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槃)에 이르니라.  
 
붓다는 열반에 대해 이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무(無)의 상태로 들어가라. 그러면 열반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마지막 단계에 열반은 저절로 찾아온다.
그러니 열반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그대는 열반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만 무(無)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이 무(無)가 자라기 시작하여 점점 더 광대해지고, 어느 날엔가 그대의 존재 전체를 덮어 버린다.
그때 열반이 있다.
그대는 우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위대한 진언,
심원한 지혜의 진언,
비길 데 없는 최고의 진언으로 알아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 주나니,
진리 안에서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는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이 진언은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바하.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만트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이다.
가령, 만트라는 에고를 버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데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 귀신이다.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빼앗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빼앗아야 한다.
그대의 불행, 야망, 질투, 두려움, 탐욕, 증오, 집착, 이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귀신들이다.
만트라는 이 귀신들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고안된 속임수이다.
일단 귀신들을 버리고 나면 만트라 또한 버려야 한다.
귀신들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더 이상 만트라를 갖고 다닐 필요는 없다.
그때 그대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귀신도 허구였고 만트라도 허구였다.
그러나 도움이 되기는 했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만트라는 이처럼 되어 있다. 
 
갔다, 갔다, 저 너머로 갔도다, 완전히 넘어갔도다.
오, 위대한 깨달음이여, 모두 기뻐할지어다. 
 
붓다는 '갔다(gone)'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광물권, 생물권, 정신권, 그리스도권이라는 네 단계에 대해 '갔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갔다'는 물질로부터 떠났다, 육체로부터 떠났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떠났다, 만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떠났다.
붓다는 두 번째로 '갔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삶으로부터, 이 삶고 죽음의 수레바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저 너머로 갔도다'라는 말에서 그는 세 번째로 '갔다'는 말을 사용한다.
마음, 사념, 생각, 자아, 에고를 넘어갔다.
'완전히 넘어갔도다'는 말에서 네 번째 '갔다'가 나온다.
이제 저 너머에 있는 것, 그리스도권마저 넘어갔다.
창조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갔다.
삶의 원(圓)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이다.
또한 이것은 알파(alpha)이기도 하다.
그대는 여러 책이나 사원에서 뱀이 제 입에 꼬리를 물고 있는 상징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상징이다.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이 경전은 수세기 동안 중국, 한국, 태국, 일본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단순히 독송(讀誦)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를 계속 독송한다.
그러나 이런 독송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이 만트라가 단순히 반복적인 독송에 끝나서는 안 된다.
이 만트라는 깊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이 만트라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이름과 형상으 넘어서 계속 가라.
모든 아이덴티티(identity)와 한계를 넘어서 계속 가라.
더욱 더 거대하고 광활한 존재가 되라.
저 하늘조차 그대를 제한하지 못한다.
가라, 끝없이 가라···.
#반야심경 #오쇼_라즈니쉬_강의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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