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재산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외적인 재산, 마음의 재산, 육체의 재산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 가지라는 숫자만을 그대로 이어받아 덧없는 인간의 운세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 세 가지 근본 규정에 귀착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인간의 모습,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품, 인격, 인물, 따라서 이 속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적 성격, 지성 및 그것의 완성이 포함된다. 


2.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 즉 모든 의미에서의 소유물 


3.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타인이 갖게 되는 인상에 비춰진 나의 모습, 즉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품게 하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타인들의 생각으로, 그것은 명예와 지위, 명성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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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나 부의 차별이 각자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하도록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이 역할에 비례해서 행복이나 즐거움의 내면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경우에도 한 껍질 벗기고 나면 모두가 똑같이 가엾이 여겨야 할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괴로움과 고뇌를 가진 어리석은 자이다.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 각각 다르지만 본연의 모습, 즉 본질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모두가 똑같이 어리석은 자이다. 


잠재되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신분과 부, 즉 역할에 따른 차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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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온갖 재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마음의 명랑함이다. 


왜냐하면 이 장점은 다른 그 무엇을 기다릴 것까지도 없이 이 장점 자체에 의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명랑하게 지낼 수 있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란, 다름 아닌 그가 명랑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어떠한 재산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점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성질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젊고, 미남이며, 부자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 남자가 행복한지를 판단하려면, 그 외에도 그가 명랑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반대로 이 사람이 명랑한 사람이라면, 젊은지 나이를 먹었는지, 몸이 곧게 펴져 있는지 꼽추인지, 가난한지 부자인지 등과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남자는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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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이 명랑한 기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명랑한 기분이 건강상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는 같은 외부적 사정 내지 내부적 일이 건강하고 원기왕성한 날에 주는 인상과 병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차분하지 못한 날에 일으키는 인상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객관적·현실적 모습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사물의 모습, 우리들의 견해에 비춰진 사물의 모습이 우리들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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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2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적수의 어느 한쪽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또 다른 한쪽 적수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생활은 현실적으로는,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두 적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그것은 양자가 이중의 상반관계, 외면적, 즉 객관적인 상반관계와 내면적, 즉 주관적인 상반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결과이다. 


외면적으로는 곤고와 결핍이 고통을 만들고, 이에 반해서 안전과 여유가 무료함을 만든다. 


따라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곤고, 즉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며 이와는 반대로 부귀한 사회는 무료함을 적으로 끊임없는, 때로는 절망적이기까지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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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통과 무료함의 내면적, 즉 주관적인 대립은 양자에 대한 감수성이 정신적 능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규정되며, 개개인의 경우에는 한편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편에 대한 감수성과 반비례한다는 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정신의 우둔함은 언제나 감각의 우둔함 및 자극 감성의 부족을 동반한다.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종류, 모든 정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도 둔감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정신의 우둔함 때문에 내면의 공허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내면의 공허이다. 


외부의 어떠한 일, 제 아무리 조그만 일에라도 끊임없이 활발하게 관심을 보이는 일에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그러한 내면의 공허이다. 


이것이야말로 무료함의 근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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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허가 끊임없이 외부적인 자극을 절실하게 요구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정신과 심정(心情)을 활동하게 하려고 한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이 선택하는 오락의 저급함, 그들의 사교와 대화의 질,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구경꾼들이 가장 큰 증거이다. 


주로 이 내면의 공허에서 발생하는 것이 온갖 종류의 사교와 오락, 여흥, 사치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낭비를 하며, 곧 빈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빈곤을 가장 안전하게 방지하는 길은 내면의 부, 정신의 부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부는, 그것이 우수함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료함이 만연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를 줄 모르는 사상의 활발한 움직임, 내면 세계, 외면 세계의 제 각기 다른 여러 현상에 접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는 사상의 유동,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상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충동과 같은 것들 때문에, 긴장이 이완된 몇 차례의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제외하면 뛰어난 두뇌는 전혀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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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도록, 상처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간의 여유와 안정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하고 은근한, 그리고 유혹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따라서 이른바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된 뒤부터는 은둔·한거를 즐기고 특히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차라리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크면 클수록 필요로 하는 외부의 것은 그만큼 적어지게 되며 자신 이외의 인간에는 그만큼 무게를 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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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가장 좋은 일, 가장 중요한 일을 해주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이 가장 좋고 중요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향락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얻을 수 있을수록 그만큼 행복해진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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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각각 세 가지 근본 능력 중 어느 것이 내면의 주류를 이루는가에 따라서 향락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재생력에 대한 향락이다. 


음식,소화,휴식,수면에 대한 향락이다. 


심지어는 어떤 나라의 국민 전체가 이런 종류의 향락을 이른바 국민적 쾌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국제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두 번째는 자극감성에 대한 향락이다. 


유력(遊歷),도약,격투,무용,격검(擊劍),승마 그 외의 모든 운동경기, 그리고 사냥, 심지어는 투쟁과 전쟁 등에 대한 향락이다. 


세 번째는 정신적 감수성에 대한 향락이다. 


고찰,사유,감상,시작,회화조각,음악,학습,독서,명상,발명,철학적 사색 등에 대한 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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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행복론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망을 세 부류로 나눴는데 이것은 참으로 정확하고 뛰어난 분류이다. 


첫 번째, 자연스럽고 없어서는 안 될 욕망. 


이것은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으로 이것에 속한 것은 식(食)과 의(衣)뿐이다. 


이것을 충족시키기란 매우 쉽다. 


두 번째,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 


이것은 성적 만족에 대한 욕망이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보고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설을 조금 정리하고 퇴고를 해서 기술하고 있음을 사전에 밝혀둔다.) 


두 번째 욕망은 첫 번째 욕망보다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세 번째,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이것은 사치, 탐닉, 영예, 영화에 대한 욕망이다. 


끝이 없으며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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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날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일이 실제로 행해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가장 중시하고,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며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보다도 오히려 타인의 생각을 문제삼고 따라서 원래의 자연스러운 순서를 뒤집어서 타인의 생각을 자기 현실생활의 한 부분이라 보고 자신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단순한 관념적인 부분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 때문에 파생적·제2차적인 것을 주요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본질 그 자체보다도 타인의 두뇌에 비친 자신의 본질의 영상에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처럼 직접적인 것으로서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예전부터 허영이라고 불려왔는데 ‘허영'이란 이러한 노력의 덧없음, 내용의 공허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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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게 검토해 보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온 배려나 걱정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들은 타인의 생각에 대한 배려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병적으로까지 민감한 까닭은 그렇게도 자주 상처를 받는 우리들의 자존심이라는 것의 기초에, 우리들의 모든 허영과 허세의 기초에, 모든 겉치레와 과장의 기초에 타인의 생각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배려, 이 편집이 없다면 사치라는 것은 지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자부심, 체면, 얼굴의 표정 등은 그 종류·방면의 여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배려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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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의 두뇌에 있는 대부분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잘못되고 불합리하고 도리에 어긋난 엉터리 같은 것인지, 따라서 이러한 의견 자체는 뒤돌아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미치는 현실적인 영향이 얼마나 적은 것인지, 또한 일반적으로 타인의 의견은 대부분이 매우 유해하며 타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귀담아 듣거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음색, 어떤말투로 하는가를 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열이면 열 모두가 화병에 걸려버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명예라는 것도 결국은 간접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직접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그 외의 여러 가지 이러한 종류의 사실들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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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과 자긍심의 구별은, 

자긍심은 어떠한 점에서 자신이 압도적인 가치를 가진 것에 대해서 이미 부동의 것이 되었다는 확신임에 반해서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타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소망이며,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마음속에 확신을 불러일으키면 그 결과 자기 스스로도 타인의 확신을 자신의 확신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기대가 수반된다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긍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부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평가인데 반해서 

허영심은 이러한 평가를 외부에서, 간접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영심은 사람을 능변가로 만들며 

자긍심은 과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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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저 자긍심을 펼쳐보여 자긍심을 가장하는 정도의 것인데 모든 억지로 짜 맞춘 역할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역할로부터는 곧 전락해 버리게 된다. 


자신이 매우 뛰어난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확신하고 이 확신이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것이어야만 참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잘못된 확신일 경우도 있을 것이며, 혹은 단순히 외면적·인습적인 장점에 바탕을 둔 확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이 현실적으로 진지한 확신으로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것은 자긍심의 자긍심다움에 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자긍심은 일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에 따라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긍심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그래봐야 그것은 최대의 장애물이라는 의미이지만, 바로 허영심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시인에 처음부터 완전히 안주하는 것이 자긍심이라는 것의 전제조건임에 반해서 허영심은 무엇보다 먼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호평을 얻도록 하며, 그런 다음 호평에 바탕을 두고 자신에 대한 시인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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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더 어렵고 귀찮은 것은 명예에 대한 논의이다. 


가장 먼저 명예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의를 내릴 생각으로 “명예란 외면적인 양심이며, 양심이란 내면적 명예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명료하고 근본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멋진 설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명예란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들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생각, 주관적으로 보면 이 생각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움이다."라고 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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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타인의 관계는 

주로 첫 번째로는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사법권의 관계, 

두 번째로는 책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간이 담당하는 일, 

마지막으로는 성적 관계이다. 


이 세 종류의 관계에 대응하는 것은 시민적 명예와 직무상의 명예와 성생활상의 명예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각각 또 다시 몇 개의 종류로 나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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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명예라는 명칭은 시민계급으로부터 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적용 범위는 모든 계급에 무차별적으로 미치고 있다. 


최고의 신분·계급도 예외는 아니다. 


그 누구도 시민적 명예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시민적 명예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모두들 이 중대한 것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을 배반하는 자는 무엇을 하든, 그 누구이든 성실과 신용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들의 상실에 수반되는 씁씁한 결과는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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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상의 명예란, 

어떤 직무를 관장하는 사람이 그것에 필요한 모든 성질을 실제로 갖추고 있다. 


실제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무상의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인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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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상의 명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살펴보아 거기서 볼 수 있는 원칙을 근원까지 환원시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동시에 명예라는 것이 결국은 공리적인 배려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도 있게 된다. 


성생활상의 명예는 성격상 여성의 명예와 남성의 명예로 나뉘어지며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말할 필요도 없는 동업자 기질을 가지고 있다. 


단결적 정신이다. 


여성의 생활에 있어서는 성적 관계가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명예 중에서는 여성의 명예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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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은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명성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따른다.'는 말은 오솔라우스가 자신의 저서 『명성에 대해서』에서 역설한 내용인데 이말의 정당함도 앞서 설명한 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동시대인들의 취향에 영합하며, 명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이것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은 얻기는 힘들지만 유지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명성은 명예와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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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가장 행복한 운세를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격렬한 고통을 모르고 평생을 보낸 사람이지, 최고로 격렬한 기쁨이나 커다란 향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기쁨이나 향락으로 일생의 행복을 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잣대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향락은 어디까지나 소극적·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향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은 질투하는 마음이 품는 미망이며 질투하는 마음이 이 미망을 품는 것은 질투하는 마음이 받는 당연한 천벌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고통은 적극적·긍정적으로 느껴지며 따라서 고통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행복을 재는 잣대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에 있으며 거기에 무료함이 없다면 대체적으로 지상의 행복을 달성한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가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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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한 철학적 가르침을 받아들여 인간의 모든 존재가 오히려 없는 것이 나은 것으로 이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최선의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에도, 어떤 사태에도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정열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하며 울지도 않게 된다. 


플라톤의 ‘게다가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중에 혈안이 되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고 한 말에도 철저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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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그네의 눈에는 모든 풍물이 멀리서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점점 다가감에 따라서 변화를 하게 되는 것인데 결국 인생도 그런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 인간의 소망이 바로 그렇다. 


처음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그것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곧잘 있는 법이다. 


또한 찾고 있던 것을 처음 더듬어가기 시작한 길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혀 다른 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향락이나 행복, 기쁨을 원했는데 그 대신에 계발이나 통찰, 인식, 즉 겉만 번지르르하고 덧없는 재물 대신에 언제나 진실된 재산이 주어지는 경우도 흔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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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희망에 의지하여 미래만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앞을 바라보며, 미래에 속한 일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둘러 이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맛보려 들지도 않고 지나쳐 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머리에 묶여 있는 봉에 매달려서 끊임없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지금 당장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여물에 끌려서 걸음을 재촉하는 이탈리아의 당나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당면한 일에만 국한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면서 일생을 비웃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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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대한 계획과 배려에만 모든 마음을 기울이거나, 과거에 대한 동경에 빠지지 말고 현재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 
이에 반해서 미래는 대부분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전개된다는 사실, 
심지어 과거조차도 우리들의 상상과는 달랐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미래와 과거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겉모습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육안에는 대상을 작게 보이게 하는 간격이 있지만 심안(心眼)은 대상을 크게 보이게 하는 법이다.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은 현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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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품었던 희망에 대한 좌절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씁쓸한 표정으로 이 한때를 숨막히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일에 화를 내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처럼 좋은 현재의 한때를 뒷전으로 밀쳐내거나, 경솔하게도 이것을 망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걱정을 하는 일은 물론, 회한에 잠기는 일에도 일정한 시간만을 할애하는 편이 좋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미 일어난 일은, ‘제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제는 지나버린 일로 치부하자. 

제 아무리 괴로워도 잠겨드는 마음을 진정시키자.'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일은 '그것은 신의 뜻에 달린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에 반해서 현재는 '하루 하루를 일생이라고 생각하라.’ 

(세네카)는 말에 따라서 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시간을 가능한 한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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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라는 것은 모두, 가장 먼저 필연적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순응하고 억제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교계는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운치가 없어지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홀로 있을 때뿐이다. 


따라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있을 때만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사교에 있어서 강제라는 것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교는 희생을 요구하는데 자신의 개성이 강하면 그만큼 희생이 커진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가치에 정확하게 비례하여 고독을 피하거나, 고독에 견디거나, 고독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독에 빠졌을 때 비참한 인간은 그 비참함을, 위대한 인간은 그 위대함을, 즉 각자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천성의 등급을 나타내는 표에서 우위에 서게 될수록 그만큼 고독해진다. 


그것도 본질적으로 불가피한 고독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 정신의 고독에 따라서 신체적으로도 고독하다면(처자가 없는 것) 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신체적으로 고독하지 않다면 자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리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몰려들어 방해를 하고, 적대시하기까지 하면서 그 사람의 자아를 앗아가 버리지만 이를 보상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건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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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간은 누구나 가장 완전하게 융화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상대할 때일 뿐이다. 


친구와도, 연인과도 완전히 융화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의 차이 때문에 반드시 다소나마 부조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근본적인 참된 평화와 기분의 완전한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 지상의 재산은 고독 속에서만 추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을 통해서만 지속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있을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인간의 자아가 뛰어나고 풍요로운 자아라면 틀림없이 가난한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를 향수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보면 우정이나 사랑, 부부관계 등이 사람과 사람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켜주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완전히 정직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으로 그 외에는 기껏해야 자신의 자식들 정도일 것이다. 
객관적, 또는 주관적인 조건 덕분에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그 만큼 사정은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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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심함과 관용을 크게 발휘하기 바란다. 


세심함에 의해서 손해·손실을 면할 수 있으며, 관용에 의해서 분쟁을 면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상 그 어떠한 개성도, 제 아무리 열악하고 가엾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개성이라 할지라도, 배격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다. 


누가 뭐래도 개성은 자연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성은 영원한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출발, 현재 있는 모습 외의 모습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불변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 심한 개성이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이런 별종도 있는 법이군.’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를 침해하여 생사를 건 싸움에 도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의 참된 개성, 즉 그 도덕적 성격·인식능력·기질·인상 등과 같은 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그 사람의 본질적인 성격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부인한다면 상대는 우리들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싸움을 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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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물을 자신 이상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구나 타인을 봐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모습밖에는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자기 자신의 지식의 힘에 따라서 타인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의 힘이 가장 열등한 부류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타인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정신적 재능도, 비록 그것이 제 아무리 위대한 재능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작용해올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더라도 자신은 그 사람 개성의 가장 저급한 면,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약점, 기질과 성격의 결함밖에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러한 약점과 결함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고 비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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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에 있어서의 우월함은 무엇보다도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 그것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낸다고 하는 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상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러한 상대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게 해주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다. 


그렇게 하면 우정은 더욱 굳건해진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가끔 보여줘도 아무런 지장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는 그러는 만큼 더 그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타인을 중히 여기지 않는자는 타인들로부터 중히 여김을 받는다.’ 라는 적절한 이탈리아 속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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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면 믿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라. 


그렇게 하면 상대는 대담하게도 더욱 거짓말을 하게 되어 결국에는 들통이 나게 되는 법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대가 숨기고 싶어하는 진상의 일부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점은 믿을 수 없다는 모습을 보여 상대가 나의 반박에 열을 올리며 진상의 전부를 마치 후속부대처럼 차례 차례로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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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작용과 사물의 덧없음을 언제나 잊지 말고, 

현재의 일을 보고는 곧 그 반대를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행복에 있어서는 불행을, 

우정에 있어서는 적의를, 

맑은 날에는 흐린 날을, 

사랑에 있어서는 미움을, 

신뢰를 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는 배신을 당해 후회하는 장면을 각각 선명하게 그려보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에도 각각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깊은 사려를 잃지 않고, 쉽게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참된 처세술의 끊임없는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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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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