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의 집터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근처에 있다.

쉽게 혜화역 근처를 지나가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이 장군은 누구일까?

우리가 남이 장군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그의 가묘가 있는 남이섬 때문이다.

하지만 남이 장군의 가묘가 있음으로인해 이름 지어진 남이섬이지만, 그의 가묘가 있다는 사실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남이섬은 강변가요제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들과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나온 배경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 더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국어책에 나왔던 '북정가(北征歌)'  때문일 것이다.

더해서 남이가 권남의 딸을 구해준 일화와 그로인해 사위가 된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사실이 남이 장군을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요인이 되곤 한다.

 

이제 남이 장군의 약력을 정리해 보겠다.

1441년 출생

1459년 (17세) 무과 급제

1467년 (27세) 이시애의 난 토벌

1468년 병조판서 발탁, 역모로 능지처참

남이 장군의 약력을 보면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頤가 말한 인생의 세 가지 큰 불행人生三不幸이 생각난다.

정이의 불행에 대한 관점으로 남이 장군을 보면 무척 흥미로워진다.

 

그렇다면 정이가 말한 인생의 세 가지 큰 불행은 뭘까?

첫째, 소년등과少年登科 - 어린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는 것.

둘째,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 - 권세 좋은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

셋째,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 - 뛰어난 재주와 문장력을 가지는 것.

 

이제 정이의 세 가지 큰 불행의 관점으로 남이 장군을 보자.

첫째, 남이는 1459년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둘째, 남이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자이자 계유정난의 공신 권남의 사위이다.

셋째,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했고, 북정가를 지었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가 말한 것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왜 커다란 불행으로 봤을까?

그것은 아마도 교만함과 자만심으로 인해서일 것이다.

또한 저렇게 화려한 이력으로 타인들에게 시기 그리고 질투를 얼마나 받았을까?

 

결론적으로 송나라 정이의 말처럼 남이 장군은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

능지처참 당했다.

 

하지만 그의 집터에서 남이의 삶이 불행한지, 행복했는지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 했다.

인생 초반을 보통 사람들이 누리지 못 할 정도의 성공으로 행복을 맛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비참하게 죽었다고 불행한 삶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한 마디로 인생의 달콤함과 쓴 맛을 최고치로 맛 본 사람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의 행·불행에 대해 칼 자르듯 평가를 할 수 없었다.

남이 장군의 집터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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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도감 터

세상/痕跡 2018. 10. 7. 16:45


화기도감 터
화기도감은 총•포를 만든 관청.
정독 도서관 정문에 사육신 성삼문이 살던 터와 같이 있다.
그렇다면 성삼문의 집이 사라진 후 이곳에 화기도감이 세워진 듯 하다.
#화기도감_터 #정독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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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 살던 곳

정독 도서관 정문에서 찾은 성삼문의 흔적.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한 분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곳에서 살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구나, 충신이여!
#성삼문_선생_살던_곳 #정독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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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우리나라 가톨릭의 구심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성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 어느 하나 꿀리지 않는 업적 속에서 고결함을 보았다.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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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집터

세상/痕跡 2018. 9. 28. 19:41


정도전 집터

종로구청 앞에서 삼봉 정도전의 집터를 찾았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그리고 기초를 만든 그의 업적을 집터에서 회상해 본다.
#정도전_집터 #종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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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 터

세상/痕跡 2018. 9. 27. 23:31


감고당 터

감고당은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한 마디로 쫓겨나서 거처한 곳이지만, 경복궁과 가까운 곳이어서 조금 놀랐다.
또 , 그 장소에 여학교가 서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이 땅 그리고 인현왕후의 정기를 받아 많은 인재가 나왔음 한다.
#감고당_터 #인현왕후 #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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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지초당

세상/痕跡 2018. 9. 21. 00:20


과지초당
추사 김정희는 이 곳에서 늙은 몸 이끌고 봉은사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봉은사 판전에서 마지막 혼을 다 짜내고 여기서 죽은 듯 하다.
해남 대흥사에서의 추사와 이곳 과지초당에서의 추사를 생각하며 조심히 겸손을 생각해 본다.
#추사_김정희 #과지초당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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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박물관
이 곳 추사 박물관에 들러 유심히 둘러보면 조금씩 알게 된다.
간송미술관에 가야만 진짜 추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아니면 봉은사 판전의 현판이라도...
#추사박물관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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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제 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점령한 기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도 이 비가 있다.
하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이 곳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이 진품이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국보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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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명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북한산, 즉 경상도를 근간으로 삼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기에 이 비석의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한강 유역, 이 지역의 의미성은 삼국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열에 대한 측정계와 같다.

예를 들면 4세기 한강 유역 지배자는 근초고왕의 백제였다.

5세기 한강 유역의 지배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였다.

이렇게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북한산에 설치된 진흥왕 순수비이다.

그 다음, 신라 진흥왕은 유명하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사실 진흥왕보다 매력적인 단어는 순수비( 巡狩碑)이다.

순수(巡狩)는 중국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순수를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진시황이었다.

즉, 강한 왕만이 자신이 경영하는 왕토를 돌아다니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왕궁에 갇혀 죽을 때까지 왕궁 밖을 벗어나지 못 하는 유약한 인간들이 많았던가.

따라서 이 순수(巡狩)의 반대는 적에게 쫓겨 도망가는 몽진(蒙塵) 아닐까?

몽진의 대표적인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선조이다.

그리고 가까운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 고려시대의 현종 또한 몽진을 했는데, 전라도 삼례에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도망간 현종에 대한 삼례 주민들의 무례함-왕의 입장에서는 무례했겠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무례한 일이었을까?-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영향-훈요십조 조작설-을 끼쳤다는 가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경상도로 한정된 영토를 한강 유력으로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순수를 기념해서 세운 비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이 북한산 순수비만이 아니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만이 각광받는 비석은 아니다.

이 비석에 연관된 사람이 있으니, 그 분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리고 추사를 금석학자로 인식할 수 있던 계기가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일이었다.

발견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으니 어쩌면 이 비석의 중요성 공헌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 아닐까?

여담이지만,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추사의 고향인 예산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가보면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하지만 그 비는 모조품이다.

따라서 진짜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것이 좋다. 

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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