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 정인홍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출신 선비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꼬장꼬장 그 자체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도 꼬장꼬장한 그의 모습이 잘 그려졌다.
인조반정으로 평가절하된 인물.
단재 신채호 선생이 큰 관심을 갖던 인물.
내암 정인홍 선생의 역사가 궁금하기만 하다.
#내암_정인홍 #박시백의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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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는 고려말 사람으로, 단심가와 선죽교에서의 죽음이 유명하다.

그래서 이러한 유명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우선 공민왕 사후 우왕의 폐위와 공양왕 옹립할 때까진 역성혁명-왕조가 바뀌는 일-의 주인공들-이성계와 정도전 등-과 뜻을 같이 했다.

다만 역성혁명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급진개혁파로 불리우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받아들이는 무리이고, 온건개혁파로 대표되는 포은 정몽주는 받아들이지 않는 무리이다.

결국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와의 갈등에서 나온 것이 '정몽주의 단심가'이고 또 하나는 '이방원의 하여가'이다.

이 시와 답가를 통한 사건이 있는 후, 포은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 죽임을 당한 곳이 곧 개성의 선죽교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내가 진정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단심가'이다.

즉, "단심가를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그렇다면 두 단심가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무엇이 상황과 단심가의 내용이 더 일치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선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이다.

온건개혁파의 대표인 포은 정몽주와 급진걔혁파의 대표인 이성계 그리고 정도전 등이 역성혁명의 허용 유무에 따라 대립을 했다.

급진걔혁파인 이성계는 정몽주가 존재하는 한, 역성혁명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이러한 이성계의 뜻을 아들인 이방원이 눈치를 채고 포은 정몽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리고 넌지시 시를 읊었다.

이것이 이방원의 하여가이다.

이 하여가로 정몽주의 마음을 알아보는 동시에 그를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는 이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읊은 것이다.

단심가로 이방원은 포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로 하여금 그를 죽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제 또다른 단심가를 알아보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를 읽다보면 교과서에서 보고, 낭독했던 익숙하고 익숙한 시가 나온다.

포은 정몽주가 썼다고 우리가 알고있는  단심가이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단심가의 주인공은 고구려 안장왕이 사랑했던 한주이다.

 

 

우선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과 이야기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단심가가 나왔는지 살펴보자.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 시절 백제를 염탕하기 위해 개백현-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백제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은 곳이 곧 한주의 집이었다.

그는 곧 한주에게 반하여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태자임을 고백하게 되었고,귀국 후 대군을 이끌고 와 개벽현을 점령하고 한주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을 약속하며 고구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후 개백현의 태수는 한주를 첩으로 삼기 위해 온갖 구실을 삼았지만, 한주는 연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러한 태수의 한주에 대한 회유와 감언이설 그리고 옥에 가두는 일의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단심가'이다.

쉽게 춘향전을 생각하면서 변사또에게 핍박을 받으며 지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물론 춘향전처럼 고구려 태자 즉 훗날 안장왕은 한주가 죽게 될 무렵 이몽룡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백제땅을 점령하고 그의 연인인 한주 또한 부인으로 맞이한다.

 

하나는 포은 정몽주와 이방원의 이야기, 또 하나는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어떤 단심가가 둘 중의 이야기와 더 알맞은 건지 판단해 보시라.

나는 단심가의 말하는 주체가 여성적인 점과 사랑을 내포하는 내용을 보면 볼수록 혁명적인 사상의 정몽주보다는 한주와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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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이며, 1519년 중종 14년 형조좌랑 이명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임청각이 유명한 것은 단연코 석주 이상룡 선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쉽게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점과,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와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같이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신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서 약력을 서술해 보겠다.

1858년 철종 9년 안동에서 출생.

1895년 을미사변,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 시도.

의병장 권세연-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숙부-을 지원.

그러나 의병 항쟁의 한계로 인해 유인석, 김동삼 선생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 설립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회장 역임.

1910년 주진수,황만영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듣게 됨.

1911년 양기탁 선생과 협의 후, 서간도 망명.

           경학사 조직, 경학사장에 추대.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 설치.

1912년 부민단 설립, 단장으로 추대

1913년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 발표.

1919년 한족회와 임시군정부 조직,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서로군정서로 개칭.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취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1년 대한통군부 조직.

1922년 대한통의부 수립.

1924년 정의부에 참여.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2년 길림성에서 병으로 돌아가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중 우당 이회영 가문과 왕산 허위 가문 그리고 석주 이상룡 가문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석주 이상룡 선생의 항일운동에 임한 후 임청각의 일화와 그의 친인척들의독립운동사가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의 명성을 입증하는 거 아닐까?

먼저, 임청각의 운명이다.

만주로 망명해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3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인 이준형에게 임청각을 팔으라 말한다.

이것을 알게 된 고성 이씨 문중 사람들은 매각 소식을 듣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결국 문중 사람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모아 임청각의 매각을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매각을 통한 타인의 소유는 막았지만, 일제에 의한 탄압은 막지 못 했다.

본래 임청각이 99칸의 임청각이었지만, 1942년 중앙선을 놓으면서 앞마당과 일부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임청각은 70칸 정도 작아진 형태가 되었다.

또한 배산임수-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대하고 있는 땅의 형세-인 임청각은 기찻길과 차단막으로 인해 낙동강의 풍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왜이렇게 임청각을 괴롭힌 걸까?

어쩌면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후손들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의지의 기를 꺾기 위함 아닐까?

따라서 자연스럽게 석주 이상룡 선생의 친인척들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우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삼촌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장이 되신 '권세연 의병장'이시다.

또한 당숙은 이상룡 선생의 밀지를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하시고,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신 '담옹 이승화 선생'이시다.

그리고 처남은 백하구려-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의 주인인 '백하 김대락'이다.

그의 동생은 을미의병 당시 신돌석 장군 휘하에 참여했고, 안동 최초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만진 이상동' 선생이시다.

그의 또 다른 동생은 이상룡 선생처럼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시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으신 '척서 이봉희'선생이시다.

그의 아들은 경학사와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신 '동구 이준형'선생이시다.

그의 손자는 대한통의부 위원이며, 1924년 국내진공작전에 따라 평안북도 청성진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경찰을 사살한 '소파 이병화'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아들인데,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신흥회라는 비빌결사단체를 조직하며,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한 '창해 이형국' 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만진 이상동 선생의 차남인데,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이며,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한 '백광 이운형'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정의부 재무 담당에 이어 정의부 대표를 지내신 '자화 이광민'선생이시다.

그의 조카는 척서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데, 남만청년총동맹의 검사위원이며, 만주에서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며 일제에 대항하신 '이광국'선생이시다.

 

이 독립운동가 집안의 화려한 경력을 일본제국주의는 어떻게든 꺾으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속내가 철도로 끊겨진 임청각이 입증하는 것 아닐까?

 

임청각 앞의 철도 차단막 앞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을 느껴보시며,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일가들의 독립운동사를 한번쯤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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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이 태어난 곳은 경복궁의 서쪽인 서촌에서 자하문 터널 방향의 청운초등학교 부근인 것 같다.

따라서 청운초등학교의 담장 근처에 그의 생가지를 표시하는 돌이 이렇게 서있다.

 

송강 정철,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학창 시절 국어책에 주구장창 나온 그의 아름다운 글의 주인공이다.

이러하기에 고산 윤선도와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문학적인 재능으로만 정철을 알면 큰 코가 다칠 것이다.

나는 송강 정철의 문학적인 재능에 정반대적인 정치적 재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서인-조선시대 당파 중 하나,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했는데, 김효원이 서울 동쪽에 살았다고 동인. 심효원이 서쪽에 살았다고 서인이라 했다-이었던 송강 정철.

반대편 동인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동인백정·간철·독철이라고.

그의 글과 그의 별명을 비교해 보라.

얼마나 극과 극인지.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송강 정철을 백정, 간철, 독철로 불리우게 된걸까?

그의 이름이 저렇게 악명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정여립의 난 혹은 기축옥사 때문이다.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의 난은 쉽게 정여립의 역모를 빌미로 동인에 대한 서인의 주도권 장악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정여립의 난 또한 정여립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서 발생되었다는 설과 서인들의 조작이라는 설 등 많은 학설들이 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꾸몄든, 꾸미지 않았든 그것은 논외로 하겠다.

초점은 이로 인해 피해입은 희생자들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의 난에 대한 조사책임자가 송강 정철이었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난으로, 조사책임자 송강 정철로 인해 희생된 동인쪽 사람들을 보자.

 

동암 이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매를 쳐서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이발의 82세 늙은 어머니와 아들은 엄형-엄하게 형벌함-으로 죽었다.

이발의 동생 이길 또한 죽었다.

 

나암 정언신

정여립의 난 이후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은 정여립의 구촌친이라는 이유로 우의정도, 위관도 사퇴했다.

그 뒤 모함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수우당 최영경

여러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최영경을 가상의 인물인 길삼봉으로 모함하여 옥사되었다.

 

곤재 정개청

지난날 정철을 비난했던 정개청은 그에게 모진 매를 맞아 장독-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동인의 대표적인 사람들만 서술해 보았다.

 

이 정여립의 난 혹은 기축옥사로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특히 호남 출신 동인들이 숙청됨으로써,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었다.

어떤 책에 씌여진 어느 선비가 말하길 "호남에 인재가 나려면 400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에 송강 정철의 모습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송강 정철, 그의 작품만 읽어보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집터의 표지석 또한 그의 문학적인 부분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그의 또다른 별명인 동인 백정, 간철, 독철로 불리우게 된 그의 모습을 봐야 진정한 정철을 만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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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의 집터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근처에 있다.

쉽게 혜화역 근처를 지나가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이 장군은 누구일까?

우리가 남이 장군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그의 가묘가 있는 남이섬 때문이다.

하지만 남이 장군의 가묘가 있음으로인해 이름 지어진 남이섬이지만, 그의 가묘가 있다는 사실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남이섬은 강변가요제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들과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나온 배경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 더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국어책에 나왔던 '북정가(北征歌)'  때문일 것이다.

더해서 남이가 권남의 딸을 구해준 일화와 그로인해 사위가 된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사실이 남이 장군을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요인이 되곤 한다.

 

이제 남이 장군의 약력을 정리해 보겠다.

1441년 출생

1459년 (17세) 무과 급제

1467년 (27세) 이시애의 난 토벌

1468년 병조판서 발탁, 역모로 능지처참

남이 장군의 약력을 보면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頤가 말한 인생의 세 가지 큰 불행人生三不幸이 생각난다.

정이의 불행에 대한 관점으로 남이 장군을 보면 무척 흥미로워진다.

 

그렇다면 정이가 말한 인생의 세 가지 큰 불행은 뭘까?

첫째, 소년등과少年登科 - 어린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는 것.

둘째,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 - 권세 좋은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

셋째,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 - 뛰어난 재주와 문장력을 가지는 것.

 

이제 정이의 세 가지 큰 불행의 관점으로 남이 장군을 보자.

첫째, 남이는 1459년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둘째, 남이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자이자 계유정난의 공신 권남의 사위이다.

셋째,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했고, 북정가를 지었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가 말한 것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왜 커다란 불행으로 봤을까?

그것은 아마도 교만함과 자만심으로 인해서일 것이다.

또한 저렇게 화려한 이력으로 타인들에게 시기 그리고 질투를 얼마나 받았을까?

 

결론적으로 송나라 정이의 말처럼 남이 장군은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

능지처참 당했다.

 

하지만 그의 집터에서 남이의 삶이 불행한지, 행복했는지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 했다.

인생 초반을 보통 사람들이 누리지 못 할 정도의 성공으로 행복을 맛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비참하게 죽었다고 불행한 삶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한 마디로 인생의 달콤함과 쓴 맛을 최고치로 맛 본 사람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의 행·불행에 대해 칼 자르듯 평가를 할 수 없었다.

남이 장군의 집터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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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은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의열단은 뭘까?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의미의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에서 결성되었다.

그래서 그 단체명의 의미처럼 의열단은 급진적인 폭력혁명-그러나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의열투쟁'이라 규정한다-을 지향했다.

그렇다면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육군대장 田中義一(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를 벌인다.

이것이 황포탄의거 혹은 다나카 암살저격의거라 한다.

이 의거에는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다나카 기이치의 암살은 성공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한 영국인 부인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러한 민간인 사망으로 의열단은 비난-어떤 책을 보면 임시정부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을 받게 된다.

 

1922년 12월,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의 부탁을 받게 된다.

그 부탁은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을 작성해-단재는 상해에 있는 의열단 소유의 폭탄제조소를 방문한 후 작성했다고 한다-달라는 것이었다.

그무렵 아나키스트-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자신을 '자유연합주의'라 칭한다-로 변신한 단채 신채호 선생은 약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단재와 약산의 만남은 흥미를 떠나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신의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쳐야만 했던 실천가인 약산 김원봉과 그 목숨을 의열투쟁에 바치기까지 의지와 신념 그리고 명분을 갖게해야만 했던 문장가인 단재 신채호의 만남인 것이다.

이 만남이 의열단과 더 나아가 의열투쟁을 게으르지 않게, 지치지 않게, 끊임없는 독립운동의 자극제를 탄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을지로 입구역에 있는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의 동상을 보라.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종이는 조선혁명선언 즉, 의열단선언일 것이다.

그래서 그와 의열단원들은 독립을 향한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이 담긴 선언서를 두 손에 혹은 가슴에 품고 한줌 두려움과 미련 없이 일제를 향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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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庵) 조광조, 조광조는 한 마디로 기묘사화의 희생자라고 보면 된다.

또한 꿀물을 발라 벌레들이 갉아먹게 해서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조금 더 안다면 급진적 개혁주의자 정도.

그렇다면 기묘사화란 무엇인가?

기묘는 60간지 중 하나이며 기묘년, 즉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이다.

또 그렇다면 사화란 무엇인가?

준말로 사림의 화(禍)이며, 설명하자면 사림파들이 훈구파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이다.

그럼 또 다시 궁금해진다.

훈구파는 무엇이며, 사림파는 무엇인가?

훈구파는 조선시대 계유정난-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뺏은 사건-에서 공을 세워 실권을 잡은 사람들을 말한다.

원래 명칭은 훈구공신(勳舊功臣)이라 한다. 

그리고 사림파는 조선 건국-역성혁명-을 반대하며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성종 때부터 중앙 무대에 진출한 정치집단이다.

이렇게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인 사화는 4개의 사화가 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다.

하지만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게 되는 사건은 '기묘사화'이다.

정암 조광조는 그냥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은 걸로 알면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개혁성 아닐까?

첫째, 도교 행사를 치르는 '소격서 폐지'이다.

둘째, 숨은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 실시를 주장했다.

셋째, 훈구파 공신들의 '공훈 삭제'를 했다.

넷째, 향약 운동의 시초인 '여씨 향약' 실시하도록 했다.

다섯째, 모든 사람이 의견을 펼 수 있는 '언로'를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개혁도 기득권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래서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정암 조광조의 묘는 용인시 수지구에서 수원 가는 방향의 국도 옆 산에 있다.

그의 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없다면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그래도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기득권에 대항하다 쓰러진 개혁가의 묘를 봤으면 해서 올린다.

주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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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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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명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북한산, 즉 경상도를 근간으로 삼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기에 이 비석의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한강 유역, 이 지역의 의미성은 삼국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열에 대한 측정계와 같다.

예를 들면 4세기 한강 유역 지배자는 근초고왕의 백제였다.

5세기 한강 유역의 지배자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였다.

이렇게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북한산에 설치된 진흥왕 순수비이다.

그 다음, 신라 진흥왕은 유명하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사실 진흥왕보다 매력적인 단어는 순수비( 巡狩碑)이다.

순수(巡狩)는 중국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순수를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진시황이었다.

즉, 강한 왕만이 자신이 경영하는 왕토를 돌아다니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왕궁에 갇혀 죽을 때까지 왕궁 밖을 벗어나지 못 하는 유약한 인간들이 많았던가.

따라서 이 순수(巡狩)의 반대는 적에게 쫓겨 도망가는 몽진(蒙塵) 아닐까?

몽진의 대표적인 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선조이다.

그리고 가까운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 고려시대의 현종 또한 몽진을 했는데, 전라도 삼례에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도망간 현종에 대한 삼례 주민들의 무례함-왕의 입장에서는 무례했겠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무례한 일이었을까?-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영향-훈요십조 조작설-을 끼쳤다는 가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경상도로 한정된 영토를 한강 유력으로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순수를 기념해서 세운 비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이 북한산 순수비만이 아니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만이 각광받는 비석은 아니다.

이 비석에 연관된 사람이 있으니, 그 분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리고 추사를 금석학자로 인식할 수 있던 계기가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일이었다.

발견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으니 어쩌면 이 비석의 중요성 공헌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 아닐까?

여담이지만,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추사의 고향인 예산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가보면 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하지만 그 비는 모조품이다.

따라서 진짜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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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을 구경하고 나오면 커다란 탑이 보인다.

그럼 첫 번째 생각이 든다.

"저건 뭘까?"

호기심에 이끌려 탑쪽으로 걸어가 구경하다 보면 두 번째 생각이 든다.

"국보가 왜 여기에 있지?"

따라서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답해보려 한다.

의문의 탑 명칭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그렇다면 전탑은 무엇인가?

전탑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을 탑이다.

이제 두 번째 의문인 국보 제 16호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이다.

먼저 국보 제 16호-국보의 번호 중에서 앞순위의 문화재라면 문화재로써의 의미가 클 것이다-라는 중요도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이란 사실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국보로써의 이 탑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탑이 있는 곳이 안동 법흥동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는 이 동네에 법흥사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법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절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나하나 추측하고 알아가다 보면 전탑만 남고 절터는 사라졌고, 이 터를 기반으로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가문이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또한, 다시 안동으로 여행 온다면 법흥사지 칠층전탑보다는 임청각을 구경할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문화재를 발견하고, 보고, 배우는 이 경험으로써의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임청각보다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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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김지섭 선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의열단의 단원이며, 일본 왕궁의 이중교(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투사이시다.

그렇다면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의열투쟁하신 니주바시 의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으로 인한 일본내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의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터트렸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를 통한 계엄령 선포로 조선인 약 6,000여명을 학살했다.

이러한 관동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배경으로 의열단원인 추강 김지섭 선생은 폭탄 3발을 숨기고 일본에 잠입했다.

원래 목표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총리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 하에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왕궁으로의 폭탄 투척을 변경하였다.

왕궁으로 진입하려는 김지섭 선생을 불심검문하려는 호위경관에게 폭탄 1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이중교(니주바시)에 나머지 2발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건이 니주바시 의거이다.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일으킨 니주바시 의거는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행동으로 옮긴 첫 번째 사례이다.

여담이지만 시기가 좀 더 앞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거사 계획 또한 왕과 황태자 그리고 고위대작을 처단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계획 도중 체포되었기에 의열투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왕을 목표로 삼고 실천으로 옮긴 사례는 추강 김지섭 선생이 처음이다.

그 이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도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고 의열투쟁을 한다.

그러나 추강 김지섭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첫째, 유연성이다. 

제국의회의 목표가 상실되자, 바로 일왕에 대한 목표 변경이라는 유연성.

둘째, 패기감이다.

의열투쟁의 목표 대상을 적들의 최고 높은 사람을 삼는 패기감.

셋째, 의연함이다.

그는 체포된 후,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선고하라"라고 말한 의연함 때문이다.

 

 

 

이러한 니주바시 의거의 주인공 기념비는 경상북도 안동시 낙동강가에 있는 영호루 근처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호루에 갔다가 추강 선생의 기념비를 찾게 될 것이다.

반면에, 추강 선생 기념비에 갔다가 영호루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지 못한 투사가 추강 김지섭 선생이다.

그래서 김지섭 선생의 기념비를 찾아가려면 안동 영호루로 가는 것이 쉬운 방법이다.

안동 영호루의 주소는 경북 안동시 강남로 187-5이다.

마지막으로 추강 김지섭 선생의 약력을 정리하겠다.

1884년 경북 안동 출생

1908년 교남교육회 참여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1922년 의열단 가입. 국내로 잠입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1923년 일명 김시현·황옥 사건-영화 '밀정'-에 참여, 탈출 성공

1924년 이중교(니주바시)의거

1928년 복역 중 의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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