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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8.26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
  2. 2018.08.26 호우총 /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

백민(白民) 황상규는 누구일까?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첫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다.

둘째, 을강 전홍표 선생과 더불어 약산 김원봉 그리고 석정 윤세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셋째, 초기 의열단 결성 시, 의열단원들에게 많은 지도를 하였다고 하지만, 어느 책에

        의하면 백민 황상규가 의열단 초기의 의백 역할-의열단 결성 시,

        의백인  약산 김원봉은 약관의 나이였다. 따라서 연세가 있는 분의 지도자가

        필요했다는 설-을 했다고 한다.

결론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의열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의열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분이다.

그러나 백민 황상규를 많은 분들이 잘 몰라해서 그의 약력을 정리해 본다.

189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1908년 상동고명학교, 마산창신학교 설립 

           밀양동화학원 인수

           <동국사감>이라는 국사책 저술.

1913년 대한광복단 참여

1918년 중국 길림으로 망명

          북로군정서에서 재정 담당에 임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

1919년 의열단 창설

1920년 의열단 1차 암살·파괴계획 즉 밀양폭탄의거로 검거

1921년 징역 7년 선고와 복역

1926년 출소

1927년 신간회 참여

1931년 사망

백야 김좌진이 계시던 북로군정서에서 있었으며, 약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에

   있었으며, 좌우합작의 신간회에 있었던 백민 황상규 선생의 업적을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가리는 듯 했고, 여기저기 누군가의 논밭들이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직이 물어봤다.

"백민 황상규 선생이 없었다면 의열단이 있었을까?"

화려한 독립운동의 이력을 가진 선생을 무엇이 이렇게도 무명의 혁명가로 만든 것일까?

 

만약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 혹은 의열단에 열광하시는 분들이 밀양에 오신다면

  여기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도 와주셨으면 좋겠다.

 

백민 황상규 선생의 묘는 밀양시청 좌측으로 들어가는  지동마을에 있다.

지동마을의 작은 길을 걸어가다 그 마을 주민에게 선생의 묘를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의 묘로 가는 표지판으로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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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㗢동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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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은 제140호 고분으로 불리웠으며, 사적 제 512 호이다.

그리고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 위치해 있다.

호우총은 1946년 발굴되었으며, 그 때 이 묘에서 발굴된 것이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다.

그래서 지금은 묘의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작은 제단 같지만, 호우명 그릇을 출토한 이유로 호우총이라 불리우게 된 이유가 됐다.

호우총의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04이다.

대릉원과는 달리 무료로 호우총과 여러 묘들을 볼 수 있으며, 호우총의 초라함에 실망하셨다면 그 근처의 봉황대를 구경하면 실망을 사라질 것다.

위의 호우명 그릇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릇은 모조품 같다.

아래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이 진품이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은 보물 1878호이다.

이 호우명 그릇이 갖는 의의는 청동 그릇 밑의 16자에 있다.

乙卯年國罡(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따라서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영향력이 남쪽 신라까지 미침을 알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 내물왕 당시, 왜의 침입으로 광개토대왕에게 원조를 구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과 연관시켜보면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의 호우총 출토는 충분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원고구려비의 내용 중 新羅 寐錦(신라 매금)이란 내용을 보면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힘의 우열과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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